마침내 마르크스주의의 위기가!
- 마르크스주의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미래
2026년 5월 20일 / 연구자의 시선
글 권영숙 (민주주의와노동연구소 소장)
혁명 마르크스주의 수정주의 제국주의 자본주의 민중 노동해방
1.150년 전의 ‘마침내’
마르크스주의의 위기가 언제 처음 시작되었는지는 불분명하다. 제1차 인터내셔널이 자진 해산했을 때일 수도 있고, 그람시가 말한 “자본에 반하는 혁명”이 일어난 때(1917년)일 수도 있으며, 1991년 소련이 해체되었던 순간일 수도 있으며, 어쩌면 마르크스 스스로가 “나는 마르크시스트가 아니다”라고 말했던 아주 오래전 시점일 수도 있다.
시작은 불분명하지만, 그러나 가장 최근의 위기를 확정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언제가 가장 최근의 마르크스주의의 위기였는가? 그것은 지금 바로 당장, 지금 이 순간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이며 당신이 이 글을 읽고 있을 미래의 바로 그 순간이다.
마르크스주의의 위기는 다중적이다. 그 의미가 여러 층위에 걸쳐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첫번째로는 그것은 이념으로서의 마르크스주의의 적실성, 설득력에 대한 의문을 뜻하지만, 동시에 마르크스주의가 대표한다고 주장하는 노동자계급의 ‘혁명성’에 대한 의문이기도 하다. 즉 자본주의의 고도화에도 불구하고 왜 혁명이 발생하지 않았는가, 아니 오히려 1917년의 사회주의 혁명은 사멸했는가, 그 이유는 단지 노동자계급의 무능력인가, 아니면 근본적으로 마르크스와 마르크스주의의 ‘역사적 예측’이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인가? 혹은, 마르크시스트들, 말하자면 마르크스의 혁명적 이념을 계승한다는 사람들이 마르크스의 이론과 현재의 세계를 잘못 해석하거나 실천하고 있는 것인가?
여기에서 마르크스주의 이론과 운동, 현실 사이에 긴장 관계는 바로 이를 지칭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역사는 아주 오래된 것이다. 기록상으로, 이미 마르크스 생전에 그가 ‘나는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다’라고 말했던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마르크스가 “나는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다”라고 말했을 때, 그는 무엇에 ‘긁’혔던가? 당시 마르크스를 한숨짓게 만든 인물은 19세기 후반 프랑스의 공산주의자인 Jules Guesde였다. 그는 프랑스 노동당 창립 멤버이며, 심지어는 마르크스의 사위와 함께 행동하기도 했다. 그는 집산주의(collectivism)(개인의 이익이나 사고보다는 사회 전체의 결속과 이익을 우선하는 교리)의 주창자였으며 개량주의자들에 대항하여 노동자 투쟁을 우위에 둔 인물이었다. 한국의 요즘 정세에 빗대자면 전투적 조합주의, 노동자 중심주의의 원조쯤에 해당한다.
1870년대 후반, 마르크스는 Jules Guesde가 마르크스 자신의 이름으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게 되자 “한 가지는 확실하다. 나는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다“라고 선언했다고 전해진다. 마르크스는 Guesde가 사회주의 정치에서 개혁의 역할을 경시하고, 마르크스의 사상을 대중을 사로잡을 몇 가지 혁명적 구호로 축소시킨 것에 분개했다. 이후 10여 년 동안 엥겔스는 마르크스의 진정한 의미를 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여러 차례 편지를 써서 이 거부 의사를 역이용했다
.(E. Baring, ‘Writing the Intellectual History of a “Worldview”: The Case of Marxism Review products’)
마르크스의 분개는 자신의 견해를 속류화한, 흔히 말하는 vulgar marxism(천박한 마르크스주의)를 겨냥한 것이었다. 물론 엥겔스는 이렇게 말할 ’권리‘가 있었다. 적어도 당대에는 그 누구도 엥겔스만큼 마르크스를 잘 안다고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즉, 엥겔스의 말은 그 화자가 엥겔스였기 때문에 그 자체로 권위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엥겔스에게 그런 권위가 주어지지 않는다. 이미 1차 대전을 전후하여 엥겔스의 제자들인 베른슈타인, 카우츠키 등의 ’수정주의자‘들과 러시아 혁명을 성공시킨 볼셰비키 사이에 넘을 수 없는 간극이 발생하면서, 더구나 마르크스주의의 ’정통‘이 레닌에게 이어진 것으로 평가되면서 엥겔스가 누렸던 호사는 사라져버렸다. 문제는 엥겔스의 권위만이 아니라, 엥겔스의 ’문제의식’도 함께 사라져버렸다는 점이다.
분명히 1917년 러시아 혁명의 관점에서는 레닌이 옳다. 즉 수정주의는 ‘마르크스주의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로자 룩셈부르크도 정확히 지적했듯이 ‘혁명의 고유한 특성’ 때문이지, 이론 그 자체의 문제는 이차적인 것이었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혁명은 모든 차이를 다 한꺼번에 무화시키는 용광로 같은 것이라고 보았다. 혁명의 순간에는 마르크스주의자, 생디칼리스트, 무정부주의자, 사민주의자 모두가 갑자기 하나의 견해를 가진 동일체가 되어버린다. 이들이 다시 갈라지는 것은 혁명 이후의 상황이다. 문제는 혁명이 어떻게, 어떤 순간에 찾아오는가?이다. 그리고 여기서 ‘마르크스주의의 위기’가 다시 발생한다.
그람시는 1917년 러시아 혁명 발발 직후에 “(러시아)혁명은 칼 마르크스의 자본론에 반하는 혁명이다, 러시아에서는 마르크스의 자본(론)은 프롤레타리아가 아니라 부르조아의 교본이었다”(revolution against Karl Marx’s Capital…Capital was more the book of the bourgeoisie than of proletariat“)라고 썼다. 그람시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러시아는 마르크스가 자본론에서 말했던 것과는 달리, 자본주의가 충분히 발전하지 않았는데도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가능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람시는 아주 노골적으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볼셰비키는 칼 마르크스를 기각했다. 그리고 그들의 명백한 행동과 정복은 역사적 유물론의 교리가 전에 생각했던 것만큼 강고하지는 않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물론 그람시는 마르크스의 ‘전부’를 폐기한 것은 아니다. 그는 볼셰비키가 마르크스의 생명력 넘치는 그리고 임박한 사상은 수용했다고 말한다. 볼셰비키가 기각한 것은 ‘교리화’된 마르크스주의다. 여기서 그람시는 엥겔스를 불러온다; ”이 사람들(볼셰비키)은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다“.
그람시가 여기서 말한 ‘마르크스주의자’는 엥겔스가 옹호했던 수정주의 경향의 사람들과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강단 마르크스주의자들’이었다. 엥겔스가 인용한 ”나는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다“는 수정주의를 옹호하려던 시도였던데 반해, 그람시의 ”나는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다“는 엥겔스가 옹호했던 바로 그 수정주의를 겨냥하고 있었다.
물론 여기에는 다른 함의가 숨어있었다. 그람시는 이론적, 교조적 마르크스주의가 옳으냐 그르냐의 문제가 아니라, ‘교조적’이라는 것 자체를 문제시했다. 왜냐하면, 볼셰비키 혁명의 이념에서는 사적 유물론의 법칙보다는 그것을 수행하는 자들의 결의, 행동, 지침이 더 ‘혁명적’이었기 때문이다. 혁명은 원전보다 더 위대하다. 여기서 마르크스주의는 마르크스-레닌주의로 전화했다.

2. 현실, 그리고 현실
그람시의 볼셰비키에 대한 태도는 단지, 수정주의 비판/혁명 옹호의 관점에서만 해석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보다 일반화시켜서 말한다면, 그람시는 새롭게 발생한 현실(혁명)을 기존의 마르크스주의 이론으로(또는 기존의 마르크스주의 이론이라고 간주된 견해들로) 해석할 수 없으며, 따라서 이 현실을 따라서 이론은 변화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렇게 해서, 새로운 정통이 탄생한다.
이제는 마르크스의 자본론에 따르면 자본주의가 고도로 발전한 국가에서 나타날 것이라고 예측했던 독일 사회민주당(카우츠키) 노선이 수정주의이며, 볼셰비키가 혁명적인 동시에, ‘정통’이 된다. 따라서 엥겔스-카우츠키가 장악하고 있었던 마르크스주의의 과학성은 이제는 비과학적인 것(부르조아의 이데올로기)이 되며, 레닌이 ‘과학’의 지위를 이어받는다.
이같은 역사가 분명히 보여주는 것은 마르크스주의의 해석의 권한은, 즉 자본론에서 무엇이 과학적인가를 결정할 수 있는 것은 당대에 인식된 정치적 현실이었다는 점이다. 그람시의 견해는 불편하기는 하지만(그리고 당대의 혁명적 열광에 도취되어 지나치게 단순화되어 있기는 하지만), 마르크스의 자본론과 마르크스주의의 혁명론 사이의 일정한 긴장관계를 보여준다.
자본론은 (자본주의)현실을 분석하고 예측한다. 마르크스주의 혁명론은 (자본론의) 이론과 현실(혁명)을 매개한다. 그러나 만일, 이 현실이 도래하지 않는다면, 역사적으로 다음과 같은 두가지 현상이 발생했다;
하나는 혁명의 부재를 프롤레타리아 의식의 미형성으로 파악하고 주체를 구성(또는 재구성)하려는 이론적 시도이다. 그러나 이처럼 주체 ‘구성’의 문제가 되면 칸트적 구성주의(그리고 그 발전으로서의 해체주의)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 1960년대 이후의 포스트주의의 대부분의 이슈는 이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다른 하나는 현실을 인정하다 못해, 아예 이론을 기각하는 것이다. 이는 마르크스주의의 ‘전복적’ 성격은 유지한 채(혁명적 성격이 아니다), 자본론의 분석은 밀어놓거나, 최선의 경우에도 부차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이는 이른바 progressivism(진보주의), 또는 자유주의적 좌파의 경향성으로 발전하며, 68년 5월 혁명 이후의 서구의 ‘마르크스주의’는 (그것을 마르크스주의라고 부른다면) 이 경향성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다른 말로 해서, 현실이 기준이 되자, 현실은 이론을 기각하기 시작했다. 즉 이론에서 예측한 미래가 도달하지 않자 이론에 대한 부정이 고개를 들기 시작한 것이다. 따라서 마르크스주의의 이론과 운동은 ‘과학적 결정론’에서 ‘결의주의적 주체이론’이라는 양극단을 진자운동한다. 이것이 1917년 혁명의 열광이 끝난 뒤 벌어진 서구 마르크스주의 역사이기도 했다.
이같은 이론과 현실의 긴장관계는 식민지나 제3세계에서는 더욱 강력하게 나타난다. 1917년 직후의 ‘혁명적 분위기’는 당시 식민지 조선에서도 전혀 예외는 아니었다. 조선에 사회주의 문학 이념을 처음 도입한 팔봉 김기진은 1924년 <白手의 탄식>이라는 시에서 이렇게 외친다 : ”Cafe Chair Revolutionist, 너희들의 손이 너무도 희구나“.
김기진은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KAPF)를 결성한 주동자다. 그리고 그의 운명은 서구에서 러시아 혁명의 열기가 봉쇄된 1930년대 이후에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운명만큼이나 굴곡이 있었다. 그는 임화, 김남천 등과 함께 1932년 소련 작가동맹에서 채택된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새로운 창작 방법론으로 도입한다. 그 이전에는 ‘변증법적 유물론 창작방법론’이 공식적인 KAPF의 교리였다. 그러나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변증법적 유물론 창작방법론이 ‘이념 과잉’이라고 비판하며 대중의 삶과 구체적 현실을 사실주의적으로 묘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는 아주 역설적인 결과를 낳았다. 일제의 탄압과 더불어, KAPF 내부가 붕괴하기 시작한다. 왜냐하면, ‘구체적인 현실’을 그리려고 하자, 거기에 해당하는 사회주의적 내용이 즉 자본주의를 분쇄할 사회주의적 투쟁이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1930년대 조선의 ‘사회주의 문예이론가’들은 현실을 찾아서 이념을 포기, 즉 사회주의를 포기한다. 이것이 1934년 KAPF 자진 해산으로 이어지는 전향선언의 배경이었다. 그들은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이념을 자신들의 전향의 근거로 삼았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김기진은 ”얻은 것은 이념, 잃은 것은 예술“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고 친일로 전향한다(친일인명사전에 오를만큼 적극적 친일파였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현실’이었기 때문이다. 김기진은 해방 후에는 반공으로 진화하며 이승만 정권, 박정희 정권, 전두환 정권에 이르기까지 반공으로 영화를 누렸다.
사실 김기진의 ‘전향’은 유별나거나, 이례적인 것이 아니다. 전향은 흔했으며, 지금 흔하고, 앞으로도 흔할 것이다. 왜냐하면, ‘현실’이 전향의 근거이기 때문이다. 예측되었으나 오지 않는 현실에 대한 실망은 이론에 대한 좌절로 나타나며 현실에 대한 무조건적인 승인으로 나타난다. 김기진은 카페 체어 레볼류셔니스트라는 이론의 과잉에서 ‘잃은 것은 예술’이라는 현실의 과잉으로 급격하게 이동한 것이다. 어느 극단이든 간에, 그가 벗어나지 못한 곳은 ‘카페 체어’이기는 했다.
현실은, 김기진의 역사적 사례가 보여주듯이, 오묘하다. 또는 그람시의 ‘자본론에 반하는 혁명’이 보여주듯이, 역설적이다. 자본론에 따르면, 러시아에서 혁명은 아직 오지 말았어야 한다. 그런데 혁명이 왔다. 이 혁명은 자본론에 의해, 즉 당시로서는 ‘정통적인’ 마르크스주의에 의해 예측되거나, 설명되지 않는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1917년의 제정 러시아도 이미 충분히 고도로 발전한 자본주의라고 주장하거나 또는 그람시처럼 ”사적유물론은 그다지 강고하지 않을 수도”라고 주장하거나, 혹은 룩셈부르크처럼 “혁명은 모든 것을 분쇄한다“고 설명해야 한다. 그 뒤의 비서구권에서의 사회주의 운동들-모택동의 (농민)혁명론, 아프리카 중남미에서의 종속이론 등은 그람시에서 해결책을 구하거나 혹은 마르크스의 예전에는 그다지 중시되지 않았던 주장들을 끌어들였다.
3. 서구 마르크시즘 (Western Marxism)
넓게 보아서, 비서구권에서의 ‘혁명’의 문제가 ”아직 오지 않아야할 것, 혹은 아직 올 수 없는 것이 왔다“는데 있다면 서구에서의 혁명과 마르크스주의의 문제는 ”와야할 것, 오고야말 것“이 오지 않았다는데 있었다.
서구(서유럽과 미국)의 사회주의자들은 1차 대전 때는 ‘국가’에 복속했으며 대공황기에는 체제에 굴복했다. 2차 대전 이후 소련이 점령하여 사회주의화한 동유럽을 제외하고는 사회주의 운동, 또는 노동계급 투쟁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혁명으로 이어지지도 않았고 혁명으로 이어질만큼 처절하지도 않았다.
‘정통’들은 소련의 스탈린주의에 안주하고 있었지만 소련에서의 스탈린 격하운동과 제3세계에서의 서구에 대한 ‘저항’에 대해 무력하게 대응한 이후에는 서구의 마르크스주의는 혁명적 성격을 점점 상실해갔다. 이에 따라 이른바 서구 마르크스주의(western marxism)은 크게 두 가지 경향으로 발전했는데 하나는 이른바 ‘프랑크푸르트학파’(비판이론)이고 다른 하나는 구조주의적 마르크스주의(structural marxism)이었다.
비판이론은 마르크스의 초기 이론(1930년대 들어 발견된 초기 문헌들 및 원고들)에 주목하여 ‘소외론’과 이데올로기 비판을 중심 과제로 삼았다. 물론 스위지, 돕, 바란처럼 독점화 경향을 제기한 중요한 공헌도 있지만, 구체적인 ‘혁명적’ 실천에 있어서는 이데올로기 비판이 중심에 있었다. 문제는 이같은 이데올로기 비판은 근본적으로 비계급적이라는데 있었다. 자본주의의 상부구조, 그리고 노동 및 교환과정에서의 인간 사이의 관계가 상품을 매개로 한 물질적 관계로 표상되는 것, 그리고 이를 해명하고 이를 넘어서는 것은 마치 계급적 투쟁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 계급투쟁에서는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이데올로기는 노동계급에게 특유하게 부과되는 어떤 이념이 아니다. 이데올로기는 자본주의 하에서 모두에게 지배적인 사고이며, 소외는 노동자에게만 발생하는 어떤 특수한 인식론적 부정합이 아니다. 그것을 사회 전체에 만연한 보편적 현상이다. 자본가들에게도 소외는 발생하며, 자본가들도 자신들의 이데올로기에 현혹된다. 이데올로기 비판은 자본주의 사회를 인식하기 위한 중요한 출발점이기는 하지만, 그 자체가 혁명적인 것은 아니며, (사적 유물론에 따르면)노동계급에게 특수하게 부과된 역사적 사명도 아니다. 단지 비판을 통해 ‘진리’를 찾는 경로의 하나일 뿐이다. 그리고 노동계급은 ‘진리를 찾는’ 것이 목적인 집단이 아니다.
마르크스는 노동계급이 자신의 이해에 따를 때, 자본주의를 폐기함으로써 모든 계급을 소멸시키고 그럼으로써 보편적 계급이 된다고 말했다. 즉 노동계급은 사회 전체의 이해를 대변하지 않는다. 그래서도 안된다. 노동계급은 다른 계급들을 포괄하는 사회 전체의 생존과 번영을 책임지는 ‘보편적 존재’가 아니다. 노동계급은 혁명을 통해 진리가 되는 것이지, 진리이기 때문에 혁명을 하지는 않는다. 마르크스는 그런 종류의 도덕적 담론은 모두 배제했다.
더구나 후기 프랑크푸르트학파(하버마스)는 이데올로기론을 소통이론으로 대체해버렸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인간에게 이성이 모자라서, 혹은 덜 비판적이라서 자본주의의 모순이 발생하고 소외가 발생하며 이데올로기가 형성되고 지배적인 것이 되지는 않는다. 비판이론은 계급적 문제를 사회의 보편적 문제로 옮겨놓는다. 진리가 이렇다고? 그래서 어쩔건데(so what)?
비판이론에 대한 뼈아픈 비판은 1906년에는 ‘독일 노동자들의 지적 빈곤‘을 한탄하다가도(무식한 독일 노동자!), 1917년에는 ’혁명은 모든 차이를 무화시킨다“고 말한 로자 룩셈부르크의 지적처럼, 인간의 이성으로부터 독립적인 ‘혁명’으로부터 온다. 또는 미국의 조지 부시 주니어 대통령 보좌관이었던 칼 로브의 ”우리는 이제 제국이다, 그리고 우리가 행동할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의 현실을 창조한다. 너희는 열심히 연구해라. 그 연구가 끝날 때 쯤이면 우리는 다른 현실을 창조할 것이다“는 언명에서 온다. 로브의 말보다 더 날카롭게 비판이론을 비판하는 언명은 없을 것이다.
비판이론은 끝없이 현실의 뒷북을 치며, 끝없이 사적 유물론을 폐기하고 남은 잔해를 맴돈다(하버마스는 칼 포퍼와의 독일 실증주의 논쟁으로 알려진 ‘과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논쟁에서 사실상 완패한 뒤 사적유물론을 언급하지 않는다). 김기진의 시에서 빌리자면, ”Cafe Chair Revolutionist 카페 의자의 혁명가들, 그 손이 너무 희다“. 이것이 바로 비판이론을 기초로 한 혁명운동이 존재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한편 독일과 달리 프랑스는 고전스러운 스탈린주의적 프랑스 공산당을 비판하는 ‘인간주의적’ 사회주의가 유행했다. 서구에서 실존주의가 고개를 숙이고 68년 5월 혁명(이 혁명의 진짜 성격은 다른 의미의 반자본론 혁명, 즉 반계급적인 반동혁명이다)에서 공산당이 무력해지면서 구조주의로 선회했다. 그리고 1977년 루이 알뛰세의 ”마침내 마르크스주의의 위기가“라는 글에서 정점을 이룬다. 알뛰세는 기존의 마르크스주의 이론이 현실을 제대로 분석하지 못한다면서 ‘과학적’ 분석을 위해 마르크스주의를 갱신할 것을 주문했다.
구조주의는 기본적으로 모든 것을 텍스트로 이해한다. 이 세계는 언어화한 현실이다. 그것을 통해서만 우리는 세계를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이는 아예 구조주의의 출발점에서부터 각인된 것이기도 하다. 구조주의의 시작은 1920년대 말 소련의 민속학자인 블라디미르 프로프의 민담 연구에서 출발했다. 그는 수만개의 민담을 분류하는 과정에서 여러 민담을 관통하는 일관된 ‘구조’를 발견했다. 그의 연구는 후에 츠베탕 토도로프로 이어져 구조주의로 나아간다. 이 텍스트는 구조화된 언어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한다. 모든 것은 언어적 현실이다. 그 특성은 구조주의와 포스트 구조주의 모두에게서 유지되었다. 그리고 언어화한 현실은 언어를 뛰어넘는 현실을 대체하지 못한다. 알뛰세-발리바르로 이어지는 여러 성과들에도 불구하고, 구조주의적 마르크스주의는 마르크스적 구조주의의 한계를 과연 뛰어넘었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서구 마르크스주의를 비서구(non-West)의 눈으로 본다면, 다음과 같은 질문은 당연한 것이다; 서구 마르크스주의는 과연 무엇을 했는가? 서구 마르크스주의는 혁명적인가? 왜 혁명적이 되지 못했는가? 식민지에서의 초과이윤으로 서구의 노동자들에게 보상해주어 내부의 계급투쟁을 완화했기 때문인가? 그렇다면 서구의 노동계급은 제국주의의 수동적 동조자인가? 보다 근본적으로 식민지에서의 초과 착취 없이 자본주의 발전이 가능한가?(최근에는 아예 원시적 축적이 식민지 착취 덕분이라는 주장도 나온다).
서구에서도 ‘반성’은 있다. 낸시 프레이져의 최근 저작은 아예 자본주의 생산과정에서의 착취(exploitation)와 식민지 수탈(expropriation)을 구분하지 못한다. 이 이론은 매우 반성적이지만, 마르크스는 “그건 내가 아냐”라고 말했을 것이다.
지금서구 마르크스주의가 찬밥 신세인 것은 최근 반제 투쟁이 격화되는 흐름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그리고 아마도 19세기와는 달리, 개발도상국의 혁명가, 노동계급들은 서구에서의 ’혁명‘을 믿지 않는다. 또는 기대하지 않는다.
4. 자본가들과 자본주의의 위기
그렇다면 문제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 서구 마르크스주의의 ’무력함‘은 알았다. 지도 이념에 결함이 있는 것도 알겠다. 근데 그건 그렇고 왜 서구의 노동계급은 혁명적이지 않았는가? 서구에서 투쟁이 없었다는 뜻이 아니다. 안스러울 만큼, 서구의 노동계급도 투쟁했으며 영웅적으로 산화했다. 그러나 동시에, 단 한번도 그같은 투쟁이 자본주의를 해소할만큼 충분하지도 지속적이지도 못했다. 지난 100년간은 안됐다. 그러면 앞으로는 가능한가?
이 문제는 혁명가, 마르크스주의자, 또는 노동계급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자본가들도 그리고 자본의 이론가들도 자본주의의 모순을 잘 알고 있으며, 자본론을 읽는다. 1911년 케인즈는 “자본가로부터 자본주의를 구해야 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가 언급했던, 자본가가 자본주의를 망칠뻔한 사건은 1907년 미국에서의 ’부자들의 공황‘(panic of 1907)이었다. 1907년 미국 월가의 금융가들은 두 패로 나뉘어 돈 싸움을 벌인다. 그 결과 투전판에서 패배한 금융가들은 물론이고, 아무 상관이 없는 은행과 기업들까지도 연쇄 파산에 이르렀다. 이 때 미국 은행의 40%가 파산했다. 이들의 파산을 막을 수 있는 것은 투전판에서 승리한, 그래서 현금이 있던 JP Morgan뿐이었다. 절정기에 JP Morgan은 직간접적으로 미국 은행의 60%를 장악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정말로 이 사건으로 인해 미국의 자본주의가 망할뻔 했다. 당시 상원 청문회에서 JP Morgan은 왜 다른 은행들에게는 지원을 해주지 않았냐는 질문에 “내 맘”이라고 대답했다. 그래서 국가가 나섰다. 연방정부는 이같은 사건으로 인한 연쇄 파산을 막기 위해 중앙은행을 창설한다. 그것이 바로 연방지불준비은행(FED, 미국중앙은행)이다.
케인즈는 이 사건을 통해서 자본가들 사이의 경쟁(금융 경쟁이든 산업경쟁이든)이 자본주의를 말아먹을 만큼 강력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는 자본가들을, 자본가들의 탐욕을 규제하자고 했다. 그것만이 자본주의를 살리는 길이었다. 그런데 연준 설립에는 함정이 있었다. 연준은 규제하지만, 동시에 ’최후의 보루‘이기도 했다. 그래서 이 최후의 보루를 믿고 ’격동의 20년대‘에 금융가들은 다시 한판 벌였으며, 그 결과가 1929년의 월가 대폭락이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들어선 루즈벨트정권은 자본가들을 아예 박살내버리기로 했다. 그래서 최대한 긴축정책을 취했다. 이것이 대공황이었으며, 미국의 긴축은 유럽의 은행들의 자금유출과 파산으로 이어졌고, 유럽은 쑥대밭이 되었다. 이것이 파시즘의 탄생 배경이었다.
루즈벨트의 ’뉴딜‘은 자본주의를 살리기 위해 노동계급을 포섭한 정치적 동맹이었지만, 이것이 대공황을 해결한 것은 아니다. 미국의 대공황 탈출은 전쟁을 통해서, 전쟁을 빌미로 한 무지막지한 화폐공급을 통해서 가능했다. 이 시기에는 아무도 백만장자가 된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적어도 개별 자본가가 아니라, 총자본으로서의 국가는 명백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외부의 경쟁자들(유럽과 일본의 자본주의)을 청산하고 사회주의(소련)를 약화시키며, 내부의 계급투쟁을 완화/저지시키는 데 있어서 내부 동맹과 외부전쟁(그것도 경쟁자들끼리 싸우면 더 좋다)이 가장 효과적이라는 사실을.
그러나 전후에는 미국도 복지국가 체제에 돌입할 수밖에 없었으며 60년대를 거치자, 단지 외부의 경쟁자들이 다시 살아났을 뿐만 아니라, 내부에서 노동계급이 ’자산‘을 축적하기 시작했다. 즉 자본주의의 발전의 결과로 미국의 노동자들은 먹고 살만해졌다.
이 시기에 미국의 자본가들이 가장 걱정한 것은 소련식의 사회주의가 아니었다. 반대로 노동자들이 평화롭게 자산을 늘려, 자본가가 되는 것, 말하자면 유고슬라비아 연방식의 노동자 자주주의였다. 즉 자본가들에 비해 노동자들의 자산이 상대적으로 너무 많아지고 있다는 것이 자본가들의 문제였다.
그래서 미국 자본가들은 1913년 연준 창립 이래의 ’자본가의 손에서 자본주의를 구해내는‘ 정책에서 180도 전환해, ’자본주의를 구하기 위해 자본가를 구해내는‘ 정책을 구사하는데 나섰다. 왜냐하면, 노동자들이 너무 많은 부를 축적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기존의 노동자들이 축적한 자산의 가치를 낮추는 인플레이션 정책과 자본가를 위한 자본시장 육성, 이윤율을 높이기 위한 국제노동분업의 확대/강화(이른바 세계화)가 필수적이었다. 이렇게해서 1970년대 중반부터는 ’백만장자‘들이 양산된다. 즉 이들의 정책은 처음부터 이념적인 것이었으며(토빈이 그 선구자였다), 의도적으로 선택된 것이었다. 즉 오늘날의 ’양극화‘ 또는 ’자산 불평등‘의 기원은 미국 자본가들의 선택이었다.
가장 극적인 예가 저축률이다. 1975년 17%로 최고치를 기록했던 미국의 민간 저축률은 그 뒤 정확히 40년 동안 하락하여 2005년에는 2%까지 내려간다. 왜 2007년 금융 위기와 불황이 발생했는가는 여기서 답을 찾을 수 있다. 미국의 ’소비자‘들은 즉 미국의 대중들은 더 이상 쓸 돈이 없었던 것이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역사적 사실이고 거의 대부분이 무시하는 사실이다. 꼭 기억해두길 바란다).
그러면 이처럼 미국의 저축률이 하락하는 동안에 미국인들은 어떻게 생계를 이어나갔는가? 그들은 부채로 살았다. 과거에는 쓰고 남은 잉여(저축)이 있었지만, 이제는 빚만 있다. 이는 자본가에게는 가장 효율적인 체제다. 빚으로 살 수 있다면, 임금은 적게 줘도 된다. 그렇게 해서 빚이 보편적이 되는 사회가 도래한 것이다.
물론 현재 이 ’부채의 시대‘는 수명이 다했다. 미국의 자본가들과 정치인들도 잘 알고 있으며, 다만 수명연장을 위해 필사적으로 몸부림치고 있을 뿐이다. 한편으로는 중앙은행의 양적완화를 통해 부채를 더 늘리는 것을 가능케해주고, 다른 한편으로는 국가가 무한대로 부채를 늘려 실물경제에 화폐를 공급해준다. 국채금리가 안정되고 달러화 가치가 보존되는 한에서만 이같은 프로젝트는 가능하며, 이는 다른 국가들의 협조(라고 쓰고 일방적인 손해라고 읽는다)가 있어야지만 가능하다. 미국은 달러와 국채 가치가 무너지는 것을 막기 위해 양손에 폭탄을 들고 전세계를 협박 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수명은 길지 못할 것이다.
문제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 서구의 국가 엘리트들은 지난 100년의 절반은 ’자본주의를 구하기 위해 자본가를 억압했고‘, 그 다음 절반은 ’자본가를 구하기 위해 자본주의를 규제‘했다. 자, 그러면 그 사이에 노동계급은 무엇을 했어야 하는가? 또는 왜 ’무엇‘을 하지 못(안)했는가?
5. 한국의 마르크스주의– 민중, 계급, 시민
자본가들이 자본주의와 자본가들을 살리기 위해 분투하는 와중에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예측되었지만 오지 않은 노동계급의 혁명에 좌절하고 있었다. 그 반응은 두 가지로 나타났다. 하나는 노동계급에 대한 기각, 다른 하나는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기각. 그러나 동시에 여전히 이 체제에서는 살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발언이 나온다.
“코드화되지 않은 주변인들이 혁명성을 갖고 있다. 노동자들은 코드화, 권력화돼 있어 혁명할 수 없다. 비정규직, 실업자가 혁명할 가능성을 갖고 있다.”(박영률, ’마르크스주의 이후 마르크스(7강): 맑스주의가 실패해서 제기된 탈현대적 문제‘, <한국인권신문> 2015년 11월)
여기서 ’코드화‘는 들뢰즈의 이론을 말한다. 들뢰즈가 옳은지 여부는 둘째치고 그 다음 명제, “노동자들은 혁명할 수 없다”는 주장은 예측되었지만 오지 않은 미래에 대한 실망을 적극적으로 표명한다. 그래서 이론을 수정한다. 그 수정의 결과가 비정규직, 실업자 혁명이다.
이같은 태도는 실은 지난 100년에 걸쳐 광범위하게 존재했다. 러시아 혁명 이후에도 선진자본주의에서 혁명이 발생하지 않자,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점점 더 열악한 자본주의, 혹은 주변부를 타겟으로 삼았다. 그게 러시아혁명의 근거이기도 했다. 즉 ’자본에 반하는 혁명‘이라는 그람시의 명제는 이제는 “노동자들의 혁명성 부정과 비정규직/실업자 혁명으로 나아간다. 100년의 역사를 두고, 동서양이 다르고, 사회적 경제적 조건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문제틀은 달라지지 않았다. 물론 한국에도 마르크스주의의 역사, 또는 그 역사적 변천은 존재한다.
비서구이면서도, 거의 유일하게 선진자본주의 대열에 동참할 정도로 고도화되었으면서도, 동시에 6.25의 결과로 1950년대 이후에는 사실상 마르크스주의가 존재하지 않았던 나라인 한국에서 소수의 지식인 중심의 사회주의 운동을 제외한다면, 본격적으로 혁명적 사회주의가 논의되었던 것은 기껏 1980년대 들어서였다(1960년 4.19 이후 1961년 5.16까지의 짧은 시기를 제외한다면). 한국에서는 80년대 후반까지는 마르크스주의건 사회주의건 그 이름으로는 공식적인 언어를 가질 수 없었다. 여전한 공안 탄압 때문이었다.
그래서 다른 방식으로 명명되었다. 그리고 가장 대표적인 두 개의 개념이 바로 ’노동해방‘과 ’민중‘이었다. 이 두 개념을 통해 한국에서의 ’마르크스주의‘를 살펴보자.(이하의 논의는, 2026 경상대 사회과학연구단 국제학술심포지엄 “한국 마르크스주의: 한국 마르크스주의의 기여와 평가”에서 장대업의 “이론의 노동: 한국 마르크스주의의 궤적과 자본주의 발전에서 노동비판”에 대하한 필자의 토론문 요지 일부이다)
1980년대 중반에 탄생한 ‘민중’이라는 개념은 절충의 산물이었다. 이 절충의 원인으로는 여러 가지를 들 수 있다; 한국에서 이른바 ‘변혁’ 운동의 이념, 이론이 그다지 정치하지도 심오하지도 못했으며 따라서 현실에 대한 설명력도 강하지 못했고, 대중을 장악하고 조직할 정도의 권위와 물질적(조직적) 기반도 없었으며, 그렇다고 이 개념을 하나의 정형화된 또는 구조화된 정교한 이론(프로그램)으로 진전시켜나갈 운동세력도 이를 주장할 급진적 지식인 집단도 매우 미약하게만 존재했다.
이보다 더 큰 이유는, 당시의 정세적 조건이 민주화의 완성, 이른바 ‘민주대연합’이라는 틀을 유지하는 것이 가장 큰 과제인 것으로, 또는 이같은 느슨한 포괄적 개념이야말로 숫적으로 가장 많은 인구를 포섭할 수 있다는 막연한 느낌으로 민중이 그나마 당시의 운동권 대부분을 포괄할 수 있는 (또는 민주대연합에서 이탈하지 않도록 만들 수 있는) 이론적 틀을 제공한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즉 민중이라는 개념은 그 개념의 적실성 여부, 또는 그 개념이 계급동맹인가 아니면 미분화된 보다 원초적인 어떤 것인가를 논하게 되는 대상이라기보다는 그 자체가 갖는 당시의 정세적 효과가 상대적으로 가장 유효했다는 점에서 탄생했고 유지되었으며 널리 쓰인 ‘용어’가 되었다. 따라서 이 개념은 민주화 운동과정에서는 ‘급진적’이고 ‘변혁적’이며, 또는 마르크스주의적으로 해석될 수 있었지만, 그러나 민주화 운동이 민주주의라는 제도 안으로 포섭된 이후에는 그 정치적 적실성을 상실해 버렸다(민중은 실은 ‘인민대중-people’을 줄인 말이었다. 그러나 80년대에는 인민이라는 단어 자체가 공안 단속에 걸렸기 때문에 피해간 것이다. 그리고 이 인민이라는 단어에 부착된 역사성은 서구와 한국에서 동일하지는 않다. 어쨌든 이 단어는 ‘중립적’으로 즉 정치적으로 비계급적인 것으로 얼마든지 해석될 수 있었다).
그러나 이같은 정세적인 효과라는 한계와 개념 자체가 갖는 모호함에도 불구학고 쉽게 보이지 않는, 그리고 지금까지도 여전히 가장 덜 평가되는 한 가지 ‘잠재적 효과’가 숨어있었다. 그것은 민중이라는 개념은 잠재적으로 ‘시민’(시민사회)라는 개념에 대한, 그리고 그 정치적 효과에 대한 경쟁적 관계를 이루고 있었다는 점이다. 동시에 이것이 왜 민중이라는 개념이 90년대 중반 이후 쇠퇴했는지도 말해준다. 즉, 시민이 민중을 대체했던 것이다. 말하자면 이른적 관점에서 민중은 시민에게 패퇴했다.
그러나 이는 단지 이론적 무능이나 한계 때문은 아니다. 시민의 승리는 민주화의 완성, 즉 부르조아 자유민주주의 공고화(consolidation)의 결과였으며 동시에 ‘민중’이 포섭하고 있었던 미분화된 계급 개념을 완전히 폐기하는 이론적 기반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역설적으로 민중을 폐기하고 시민으로 대치하는데 있어서 이른바 좌파 이론가들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한국에서 그람시를 소개하며 ‘시민사회론’을 도입한 것은 비판사회학회(김진균)의 제자들이었으며, 이들은 ‘사회주의적 투쟁의 근거’를 형성하기 위해 그람시를 도입했지만, 실제로 ‘도입’된 것은 혁명없는 그람시였다.
결국 민중이라는 개념이 작동한 것은 시기적으로는 10여년 남짓한 그리 길지 않은 기간이었다. 그러나 이 개념의 역사는 두가지 중요한 역사적 사실을 보여준다. 하나는, 이 개념은 당대의 정치적 과정에서 나타난 타협적 산물이었으며 그 정치적 과정이 완성된 이후에는 더 이상 진화 발전하지 못하고 소멸/대체되었다는 점이며, 다른 하나는 이론과 현실 사이의 관계라는 관점에서 적어도 사회학적, 정치학적 측면에서는 한국의 ‘민주화 운동’은 마르크스주의적인 언어와 외관은 부분적으로 지니고 있었지만 그러나 그 마르크스 이론은 고도화되어 있지도 않았으며 이른바 민중운동 내에서 지배적이지도 않았고 더 이상 발전하지도 않았다는 점이다.
이는 ‘노동해방’의 상반된 두 측면(노동의 신성화와 노동비판의 양립)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흔히 80년대 중반 이후의 노동운동의 성과가 ‘노동해방’이라는 슬로건으로 귀착된 것으로 인식하지만, 그러나 노동해방은 당시 일반적인, 그리고 동의된 이념은 아니었다. 심지어는 이를 채택한 노동운동 단체(공식적으로는 전노협이 최초인 것으로 알고 있다)의 주요 인물들조차도 그 의미를 명확히 분리해내지 않은 채 막연하게 사용하고 있었다(당시 단병호 위원장의 직접 구술).
실은 노동해방은 전노협 출범과 함께 갑자기 튀어나온 단어에 해당한다. ‘심정적으로는’ 많은 노동운동가나 일반 노동자들조차도 동의할 수 있었지만(당시의 노동운동의 분위기가 크게 작용했다), 그러나 이들이 이를 개념적으로 설명했다거나 이해했다고, 또는 이를 위해 투쟁했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전노협과 거리를 두고 있던 업종노조나 대기업노조연대회의에서는 이 구호에 아예 동의하지 않았다. 전노협은 앞서 단체들보다 전투적이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이들이 ‘마르크스주의적인’ 계급의식에 기초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즉 노동해방은 투쟁적인 개념이었지만, 과연 마르크스주의 개념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쉽게 답하기 힘들다.
그러나 노동해방이라는 슬로건 역시, 민중이란 호칭만큼이나 빠르게 전면에서 퇴장했다. 노동을 절대적으로 신성화하건, 노동을 자본(의 억압)으로부터 해방하건 간에, 민주화 이행 이후 민주주의 사회에서 노동의 비신성성과 노동 억압은 전혀 개선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심지어는 1997년 외환 위기나 2008년 금융 위기와 같은 ‘노동 위기’적인 에피소드들에도 불구하고 ‘노동해방’은 더 이상 전략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앞자리에 설 슬로건이 되지 못한다.
서구 마르크스주의(소련을 포함해서)는 이를 ‘탄압의 결과’, 또는 ‘현실 계급의식’과 ‘귀속계급의식’(루카치)의 괴리로 설명한다. 그러나 지난 100년 간의 역사를 보면 서구 역시 계급적 ‘귀속 의식’이 노동계급을 장악한 적은 없었다. 서구의 노동계급은 장기적인 과정을 거쳐 자본주의 발전에 복속했으며, 더 나아가 제국주의적 착취를 동조/묵인했으며 심지어는 제국주의 전쟁에 기꺼이 동참했다.
6. 지나간 미래와 오지 않은 미래 사이에서
그렇다면 1980년대의 민중운동은 과연 마르크스주의에 기초한 것인가? 그들이 사회주의적 구호를 외쳤다거나, 또는 사회주의적 변혁운동을 지향했다고 해서 마르크스주의에 기초했다고, 혹은 마르크스주의적이라고 곧장 한 묶음으로 말할 수는 없다(김정은도 2015년까지는 북한이 마르크스주의에 기초하고 있다고 말했다). 더구나 한국은 6.25 이후에는 사실상 마르크스주의가 단절되어버렸다(죽였거나 월북했거나 숨기고 살았다).
물론 지적으로 이론화된 세련된 마르크스주의가 없었다고 해서 혁명적 실천이 없었던 것은 아니며, 노동계급의 자생적이건, 계급의식에 기초한 것이건, 이론에 기초한 것이건 간에 이들의 저항은 정세를 낳으며, 정세 효과를 낳는다. 그리고 그 정세효과는 다시 이론에, 그리고 이론의 해석에 영향을 미친다.
이러한(마르크스 원본 비평) 연구를 수행함에 있어, 우리는 당시 많은 지식인들이 그러한 차이점을 규정했던 위계질서를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 지식인과 대중 사이의 거리(그리고 지식인들 사이의 거리, 그리고 대중 내부의 거리)는 이상과 현실 사이의 거리, 혹은 순수한 원본과 불완전한 복제품 사이의 거리가 아니다. 또한 후자가 전자에 점차 부합하도록 이끄는 목적론에 의존하는 것도 아니다. 일반 대중은 다른 곳에서 발전된 사상을 수동적으로 수용하는 존재가 아니었으며, 그들이 세계관을 받아들이고 변형시키는 방식은 그 세계관이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지식인들 간의 논쟁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엥겔스는 이를 일찍이 인식했다. 마르크스주의는 어떤 지식인의 전유물도 아니었으며, 심지어 칼 마르크스라는 이름의 인물만의 전유물도 아니었다.
(Edward Baring, Writing the Intellectual history of a ‘worldview’; the case of Marxism)
즉 마르크스의 이론도 역사적 변화에 따라 변화하며 혹은 ‘진화하거나 혹은 퇴화한다’. 그것은 마르크스와 그를 둘러싼, 그리고 그가 남긴 역사와의 대화이며 상호간섭이다. 문제는 이 ‘상호간섭’이 downward spiral (하향 나선형), 즉 서로를 약화시키는 나선형 하향 악순환을 겪고 있었다는 점이다.
한국에서는 1990년 대 초반 소련 붕괴와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진입 시기에 서구의 온갖 종류의 포스트주의가 소개되면서 기존의 ‘경직된’ 마르크스주의에서 ‘세련된, 철학적인, 그리고 지적인’ 서구 마르크스주의로 전환되었다(특히 푸코). 이는 21세기에 접어들면서는 정체성 정치(identity politics)로 나아갔으며, 그 와중에 계급은 분해되고 해체되며 실종된다. 여전히 계급을 말하는 사람은 ‘낡은 계급 중심주의, 계급 헤게머니’라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즉 민중을 패퇴시킨 시민은 이제 ‘자아’(identity)로 개별화되었으며, 그나마의 시민 ‘공동체’ 의식마저도 소실된다.
이 과정과 노동계급의 투쟁, 또는 저항의 약화 과정은 서로 비례적으로 대응한다. 단지 (마르크스주의)이론이 쇠락한 것이 아니라, 노동계급의 투쟁도 함께 약화되어갔다. 이는 한국의 노동계급이 더 이기적이거나 혹은 덜 도덕적이어서가 아니라, 그들이 발 딛고 있는 물적 토대가 변화했기 때문이며, 노동계급의 ‘계급의식’이 그 물적 토대를 뛰어넘지 못한 것뿐이다.
그리고 이 모든 국면에 있어서 구 마르크스주의자와 새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선진적’인, ‘진보적인’(왜냐하면 한국보다 더 ‘발전된’ 세계에서 온 것이기 때문에) 이론으로 이 세계를 정당화시키는 공로를 세우고 있다. 그리고 과거의 마르크스주의자는 이제는 ‘좌파’라는 뭉뚱그린 용어로 표현된다. 80년대 ‘민중’의 미니어쳐가 2020년대의 ‘좌파’이며, 여전히 지난 40여년처럼 역사의 수레바퀴 위에서 졸고 있다면, 아마도 동일한 운명을 겪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다시 새겨봐야 할 것은 로자 룩셈부르크의 말, “혁명은 오기 전에는 불가능한 것(비현실적인 것) 처럼 보이지만, 오고 난 다음에는 불가피한 것(과학) 처럼 보인다.“이다. 혁명은 돌이켜 보면, 불가피한 것, 즉 과학적 산물이다. 그러나 미래의 것으로 본다면, 예측된 미래(과학)이기도 하고 동시에 ‘행동으로 쟁취해야 하는 것’(운동)이기도 하다. 즉 ‘과학으로서의 마르크스주의’는 당신이 그것을 실천해야만이 비로소 과학적인 것이 된다.
<자본론>은 하늘에 떠 있는 성경이 아니며, 공산주의는 오지 않을 유토피아도 아니다. 그래서, ”여기가 로도스다. 여기서 뛰어보라“.
* 관련하여 ”Review and Preview“의 편집자 글과 프레드릭 제임슨의 글을 읽어보길 바란다.필자가 전문 번역 소개한 글은 2024년 작고한 프레드릭 제임슨이 지난 1996년 썼던 글이다. <Monthly Review>가 제임슨 사망후 그를 추모하며 이 글을 다시 게재했다. 그리고 2026년 5월 민주주의와노동연구소는 이 글을 전문 번역하여 올린다.
이 글을 소개하는 이유는 세계화가 본격화되던 지난 30여년 전의 세계와 그에 대한 ‘포스트’ 마르크시즘의 대응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 30년 사이에 무엇이 달라졌으며, 지금은 어떻게 문제의식을 설정해야 하는지 고민할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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