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와노동 연구소

가짜뉴스, 선동, 검열, 그리고 오도된 가짜 세상 (part1)

가짜뉴스, 선동, 검열, 그리고 오도된 세상 (part1)

- 과연 진실은 행군하는가?

2024년 2월 22일 / 이슈 리포트
글 권영숙 민주주의와노동연구소 소장

가짜뉴스(fake news), 대중형성(mass formation), 선동(propaganda), 검열(censorship)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

1942년 12월의 베를린은 평화롭고 풍요로왔다. 나치 제국군은 서유럽과 러시아를 휩쓸고 있었으며, 위대한 독일제국의 영광은 철학자 헤겔의 계시와 작곡가 바그너의 축복 속에서 영원할 것처럼 보였다. 극장에서는 ‘merry christmas from Stalingrad’라는 짧은 문화영화가 상영되었다. 그 필름 속에서 스탈린그라드를 포위하고 있는 독일 제6군의 병사들은 허리까지 차는 눈 속에서 옷을 벗고 눈 속을 헤엄치며 서로 장난치고 있었다. 나름 괜찮은 시절이었다.

현실은 좀 달랐다. 1942년 11월 소련군은 독일군의 스탈린그라드 북쪽 포위망을 돌파하면서 대대적인 반격에 나섰다. 12월 초에 독일군의 진형은 완전히 무너졌으며, 포위공격은 커녕 역으로 포위당해 처절한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소련군의 역포위로 후방 보급망이 완전히 끊겨서 굶주림과 추위 속에서 죽어가고 있었다.

1943년 1월 말 제6군 사령관인 파울루스 원수가 항복했을 때, 소련군은 오물이 허리까지 쌓인 그의 임시 지하 지휘소를 보고 기겁을 했다. “이런 데서 어떻게 사람이 살 수 있느냐”고 놀랐다는 기록이 있다. ‘다큐멘터리’ 영화 속에서 독일군들은 눈 속에서 헤엄치며 놀고 있었지만, 현실에서 이들은 문자 그대로 똥물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1943년 1월 스탈린그라드, 소련군에게 포로로 잡힌 독일 병사. 출처 : Daily Mail.

독일 정예 6군의 약 28만 병력 가운데 18만명이 거기에서 죽었다. 10만 여명이 포로로 잡혔으며 이들은 ‘죽음의 행진’이라 불리는 포로 이송과 시베리아 유형을 겪었다. 종전 뒤 최종적으로 독일로 살아 귀환한 병사들의 숫자는 고작 5천여명에 불과했다. 하지만 히틀러는 스탈린그라드의 패전을 숨겼다. 당연했다. 독일이 ‘인간 이하'(sub-human)인 소련군에 패배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독일의 파울루스가 항복하던 바로 그 무렵, 독일 뮌헨에서는 죠피 숄과 한스 숄 남매 등으로 구성된 ‘백장미단’이라는 소규모 학생운동 조직이 활동을 개시했다. 이들은 독일이 잘못된 행동을 하고 있다는 유인물을 교내에 배포했다. 고작 한 달도 못된 2월 18일 이들은 비밀경찰 게쉬타포에 체포당했으며, 그 나흘 뒤인 2월 22일 처형당했다. 이들이 배포한 유인물 가운데 하나는 독일군이 스탈린그라드에서 비참하게 배패했다는 내용이었다. 이들은 진실을 말했다는 죄목으로 사형당했다. 진실은 이렇게 위험한 것이다.

이 이야기는 훗날 이들의 큰 언니인 잉거 숄이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원제는 Die Weiße Rose)이라는 제목의 책으로 집필 출간하면서 널리 전세계에 알려졌다.


잉거 숄의 저서 <백장미> 표지 (한국어 제목: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

남한에서 이 책은 80년대에 소개되었다. 당시 ‘학생운동권’의 기본 학습교재 중의 하나였다. 그것도 1학년들이 읽어야할 필독서였다. 당시 이 책이 각 개인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졌는지는 단정할 수 없다. 그러나 최소한의 공통분모는 존재했다. 그것은 ‘진실을 말하기’였다. 특히 80년대 초반의 학생 운동은 광주 학살의 진상을 ‘알리는’데 집중하고 있었고, 그것을 말했다는 이유만으로 감옥에 가거나 고문당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백장미단의 1943년과 1980년대 초반의 남한 학생운동권은 심정적으로는 아주 가까웠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중대한 한 가지 차이가 있었다. 백장미단은 비록 유인물 배포라는 아주 초보적인 투쟁 수단밖에 갖고 있지 못하기는 했지만, 그들이 폭로한 ‘진실’이 세상을 바꿀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았다. 그들은 “우리는 당신들을(나치) 평화롭게 놓아두지 않을 것이다”라고 썼다. 백장미단은 무력투쟁만이 나치를 제거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런 점에서 아마도, 남한 학생운동권들보다는 훨씬 덜 나이브했다고 말할 수도 있다. 물론 한국의 학생운동권도 이런 책을 읽으면서 이후 ‘변혁운동’세력의 일부가 된 아주 소수의 세력도 형성하긴 했지만.

진실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믿음은 아주 오래된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아주 최근의 산물이기도 하다. 이 믿음은 역사란 ‘심판의 역사’라는 19세기 중반의 유럽 낭만주의 역사관이 투영된 근대적 발명품이며, 19세기 말 프랑스에서의 유명한 ‘드레이퓌스 사건'(프랑스 포병의 신기술을 독일군에게 넘겼다는 죄목으로 무고한 유태인 장교 드레이퓌스가 유죄 판결을 받은 사건)이 발생했던 당시 법원의 유죄 판결에 맞서 ‘진실은 행군하고 있다”고 말한 소설가 에밀 졸라의 비장한 발언에서 그 정점을 달린다.
그런데 과연 진실은 행군하고 있는가?

행군인가 후진인가

‘진실은 행군하고 있다’는 말은, 또는 ‘역사는 심판의 역사’라는 주장은 자동적으로 다음 두 가지를 전제로 한다. 첫째는 진실은 ‘인간의 (단기적) 행동 그 외부’에 있는 ‘어떤 것’이라는 믿음이다. 즉 인간이 변경시킬 수 없는 ‘어떤 것’이다. 두번째는 ‘인간들이 만일 그 진실을 알게 된다면 그 진실에 부합하는 행동을 할 것’이라는 믿음이다.

이 두 가지 믿음은 19세기의 물리학적 세계관 및 인식론, 그리고 인간주의(또는 인간학주의)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또한 이같은 믿음은 당대의 사상가들 사이에서 의식하든 못하든 간에 거의 공통적으로 자리잡고 있던 기본적 세계관이었다.

그리고 이 세계관은 20세기 중반까지도 막강한 영향을 미쳤다. 1970년대 이후 서구를 풍미했던 new left(신좌파)나 비판이론(critical theroy;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기본 인식틀은 ‘인식의 해방’, 그리고 ‘의사소통행위’에 기초를 두고 있었다. 이들은 정치적 억압으로 인한 왜곡된 앎이 인간적 해방을 가로막고 있으며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억압을 제거하기만 하면 될 것이라고 믿었다. 이같은 사고는 한국 대학 건물에 새겨져 흔히 볼 수 있는 라틴어 문구 “진리가 그대를 자유케하리라”로 요약될 수 있다. 과연!

물론 ‘인식의 해방’을 위해서는 억압의 제거가 필요하다. 그러나 정치적 억압을 제거한다고 해서, 해방이 오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훗날 푸코가 말했듯이 억압과 저항은 서로를 감싸고 도는 동시에 하나의 쌍이며, 그보다 훨씬 이전 19세기 중반에 맑스란 이가 또 정확히 말했듯이, “정치적 해방이 계급적 예속을 해결하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맑스는 아주 일찌감치 정치적 해방(민주주의)을 혁명의 의제에서 지워버렸다. 이미 1851년의 저작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에서 그는 “지배 계급의 이데올로기가 주류 이데올로기”이며, 각 계급은 “자기 계급의 해방을 전체의 해방이라고 주장한다”고 비판했다.

만일 에밀 졸라의 “진실의 행군”이라는 명제를 맑스가 보았다면, 아마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각 체제에는 그 체제를 유지하는데 복무하는 지배적인 고유한 진실이 존재하며 이 진실이 폐기되고 새로운 진실로 대체되는 순간은 이 체제를 대체하는 새로운 체제가 도래할 때이며, 따라서 진실은 행군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세계로), 도약한다(leap). 그러니 바로 ‘여기가 로두스다, 뛰어라!'” 라고. 

이 차이는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지난 10 여년 간에 부상한 ‘가짜 뉴스'(fake news)의 문제는 단지 ‘기술적'(technical) 정보 소통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그 사회구성체 내에서 지배적인 사고의 양식 또는 이데올로기의 문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뉴스는 이런 저런 이유로(또는 이런 저런 근거로) 사실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실은 가짜 뉴스를 준별할 수도 없으며, 더구나 그 뉴스가 만들어내는 ‘효과’를 제어할 수도 없다.

실은, 만약 단지 가짜 뉴스(fake news)가 ‘억압'(혹은 통제)의 수단이자 그 표현이라면, 그것을 해결하기는 생각보다 어렵지 않다. 물론 여전히 위험하고 힘들다. 그러나 역사는 매우 강고한, 통제된 가짜 뉴스들이 어떻게 순식간에 무너지는가를 보여주는 풍부한 예시들로 가득차 있다.

north stream 파이프라인 폭파 직후 루퍼트 머독 소유의 방송사 SkyNews의 화면 캡쳐. Skynews는 “문서에 따르면 러시아의 유령선(ghost ship)이 폭파 현장 인근에 머물렀다”고 설명했다.

베트남전 마이 라이 학살 vs.  North Stream 폭파 사건

지난 2022년 9월 러시아와 독일 사이를 잇는 천연가스 파이프라인인 North Stream I, II를 폭파시킨 것이 미국의 소행이라는 추적 보도를 한 세이무어 허시를 보자. 그의 출세작이자 대표작 기사는 1968년 3월 미군의 베트남 양민 학살 사건 “My Lai”를 추적 보도한 것이었다. 그가 이 사건을 보도한 것은 사건이 일어난지 1년 7개월 뒤인 1969년 10월이었다. 그리고 그가 이 사건을 안 최초의 기자도 아니었다. 사건 직후에 이미 여러 미국 종군 기자들이 이 사건을 단편적으로라도 알고 있었으며, 그러나 보도하기를 거부하거나 추가 취재를 하지 않았다. 뉴욕타임즈, 워싱턴포스트도 이 사건을 알고 있었고, 당시 월남전 사진 취재로 유명했던 잡지 <Life>지도 알고 있었다. 단지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마이 라이 학살 사건은 이라크전 당시 미군 사령관인 콜린 파웰이 말한 것으로 유명해진 ‘부대적 피해'(collateral damage)와는 유례가 다른 것이었다. 당시 마이 라이에 진군한 미군은 전투조차 하지 않았다. 그 전날 마을 인근에서 베트콩의 습격으로 몇몇 사상자가 났을 뿐이었다. 그저 마을에 들이닥친 미군은 닥치는대로 민간인을 학살했으며, 공식 조사로는 약 280여명, 추후 언론 보도에 따르면 최대 500여명을 죽였다. 죽인 방법도 매우 다양했다. 미군들은 단지 ‘학살’했을 뿐만 아니라, 집단강간했고 어린아이의 목을 잘라(참수) 옆구리에 차고 다녔다.

이슬람 테러리스트 조직인 IS의 ‘참수’가 전세계적인 공분을 샀다고 주장하고 싶은 사람들은 그 당시 동일한 행동을 했던 미국에서 어떤 반응이 났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허시의 보도를 필두로 수많은 언론들이 이 사건을 다루기 시작했다. 그러나 허시가 일일이 당시 사건에 관여했던 병사들을 인터뷰하고 다녔던 것만큼 다른 언론들은 상세하게 다루지는 않았다. 어쨌든 이들 연루 군인들은 군사재판에 넘겨졌고 유죄 판결을 받았다(그러나 사면되었다. 실제 옥살이 기간은 고작 1년 남짓이다).

흥미로운 것은 당시 미국 대중의 반응이었다. 한편에서는 이 사건을 계기로 반전운동이 들끓었지만, 동시에 다른 한편에서는 전쟁터의 현실을 무시하는 처사라는 옹호론이 터져나왔다. 뉴욕타임즈는 이 사건을 보도하는 것은 ‘이적행위’라는 컬럼을 싣기도 했다. 분명히 반전론자들보다는 옹호론자들의 목소리가 더 크고, 다수였다. 오죽했으면 당시 닉슨 미국 대통령이 “빌어먹을 미국 놈들은 이 일에 신경도 안쓴다”고 투덜거릴 정도였다. 그의 유명한 말 ‘침묵하는 다수'(silent majority)는 여기에서 나온 것이기도 하다.

당시 어느 정도로 학살 미군에 대한 옹호론이 극성이었는가 하면, 전국적인 구명 모금운동이 벌어졌고, 남부의 한 주지사는 이 사건을 보도한 언론인들과 이들을 기소키로 한 법원을 비난하며 ‘재향군인 주간’을 정해 워싱턴으로 행진하자고 호소했다. 이 주지사의 이름이, 훗날 노벨 평화상을 받은 지미 카터(당시 죠지아주 주지사)다.

마이 라이 사건의 진실은 대부분 알려졌다. 그러나 그 진실이 “행군”하지는 않았으며, 그 누구도 자유롭게 하지도 못했다. 당시 이 사건 직후 취재했던 NBC 기자는 “미국 언론이 자기 검열했다”고 훗날 고백했다. 허시의 기사조차도 자칫 묻힐뻔 했다. 그는 자신의 취재 기사를 여러 언론사에 보냈지만(당시 그는 독립 저널리스트였다), 모두 거절당했다. 요행히 자신의 친구가 사장으로 있던 군소 통신사에서 이 기사를 받아주었고 그래서 빛을 보게 되었다.

이 사건은 그 뒤 무려 60여년 뒤 벌어진 최근의 사건인 North Stream 폭파 사건과 겹친다. 허시는 이 파이프라인의 폭파가 미국 소행임을 폭로하는 기사 후속편에서, “미국 정보업계에서 이 사실을 아는 관계자들은 넘쳐나며 정보를 얻기도 어렵지 않다. 그런데 왜 아무도 이를 쓰지 않았는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실은 진실은 ”행군“하기는 커녕 오히려 퇴각했다.

왜냐하면 그래도 1969년도에는 허시는 자신의 기사를 받아줄 친구 통신사라도 있었다. 하지만 허시의 North Stream 폭파 기사는 언론에 실리지 못했다. 결국 그는 자신의 substack(일종의 블로그)에 이 기사를 실었다. 아무도 받아주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허시가 마이 라이 사건을 특종 보도했을 때는 32살이었다. 그리고 North Stream 기사를 썼을 때는 86살이 되었다. 지난 54년 사이에 역사는 후진한 것일까?

그리고 심지어는 60년대와는 달리, 미국의 (제도권에 속한) 언론인들은 ‘자기 검열’했다고 말하지 않는다. 아무도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지난 50년 사이 언론인들은 바보가 되었거나, 혹은 아예 양심이라고는 사라졌거나, 또는 언론인으로서의 직업 윤리는 엿 바꿔 먹었거나, 아니면 그저 오늘의 노임에 만족하며 아무 생각없이 시키는대로 받아쓰는 충실한 사도가 된 것일까?(물론, CIA의 언론공작 명칭이 ‘앵무새 작전’ – ‘operation mocking bird’인 것이 우연은 아니다).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정보가 생산되고 소통되며 소비되고 이 과정에서 주체를 출현시키는 양식, 즉 정보생산/유통 체제가 변했으며, 그 안에서 ‘언론’이 갖는 위치가 달라진 것뿐이다.

정보 생산/유통 체제의 진화 혹은 퇴행

과거에는 언론(제도권 언론, 혹은 요즘 서구권에서 표현하는 legacy media)이 모든 공식적인 담론을 사실상 지배했다. 따라서 제도권 언론을 포섭하거나 억압하거나 회유하면, 그것으로 공식적인 담론의 생산/유통을 지배할 수 있었다(또는 그렇게 믿었다). 그러나 이같은 통제는 수많은 개별적인 정보 생산 방식이 생긴 지금에서도, 그리고 사실은 그 시절에서조차 가능하지 않았다. 주류 제도권 언론을 장악하는 것만으로는 매우 제한적으로만 뉴스 효과를 발휘한다(80년대 땡전 뉴스를 생각해 보라).

이제 기술적 발전(인터넷 및 개인 정보 소통 방식의 출현)과 더불어 ‘지배적’ 이데올로기는 새로운 담론 생산 방식을 구축했다. 그것이 반드시 지배층의 ‘grand plan’에 의거한 의식적이고 의도적인 노력의 결과인 것은 아니다. 수많은 시행착오와 경쟁(누가 더 효과적으로 거짓말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한 콘테스트)을 거쳐 하나의 정보 생산/유통 체제가 완성되었고, 그리고 바로 그 완성의 지점에서 위기를 맞았고 새로운 양식으로 진화(실은 이 진화는 오히려 이전의 억압적 정보 생산 양식으로의 회귀이기 때문에 퇴화이기도 하다)하려 하고 있다.

* part 2에서는 ‘flying washing machine'(우크라이나 전쟁) 사례 분석을 통해 프로파갠더와 가짜 뉴스가 어떻게 생성되고 분포되며 어떤 정치적 효과를 갖는지를 이데올로기 비판의 관점에서 분석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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