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와노동 연구소

’System Change’는 체제전환이 아니다!

’System Change'는 체제전환이 아니다!

자본주의의 구원은 어디에서 오는가: 공동의 적 만들기(making common enemy)

2024년 5월 23일 / Review & Preview
글: 권영숙 (민주주의와노동연구소 소장)

system(체계), system change(체계 변화), 체제전환(regime transformation), 이데올로기, 기후위기, 자본주의 체제, 비판이론, denialism(부정주의)

리뷰: A Climate Agenda for System Change: From Theory to Social Transformation,

by Diana Stuart, Brian Petersen, Ryan Gunderson (mayfly, 2023)

*리뷰의 변: 최근 국내에는 기존의 체제전환론과 다른 ‘체제전환’론이 크게 일어나고 있고, 우파부터 좌파 일부까지 이 개념을 공용하며 이 개념 자체가 시대적 유행어가 되어가고 있다. 하지만 당혹스러운 점은 여기서 체제나 체제전환은 지금껏 사회과학에서 사용하고 한국어로 주로 번역되어온 regime(체제)이 아니며, 체제전환도 regime transformation(transition)이 아니라 system change라는 점이다. 이에 따라 번역의 혼용으로 인한 개념의 혼란이 커지고 있다. 검토하려는 이 저서는 제목에서 시사하듯이 system change라는 용어를 사용하면서 이를 기후 어젠더와 연결하여 기술하고 있다. 한국에서 또 다른 체제전환(system change)론이 이 저서의 문제의식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국내에서 80년대 이행이후 대두된 체제전환론과 또다른 ‘체제전환’론의 개념과 성격에 궁금증과 의구심이 이는 가운데, 이 저서의 내용에 대한 검토와 비판적인 리뷰를 올리기로 한다. 이 글은 필자가 민주주의와노동연구소의 창립1주년 심포지엄 “체제전환과 이중전환: 87년 체제를 넘는 비판적 이론(과 실천) 모색“에서 발표한 ”이행이후 이중전환(double transformation)과 체제전환“의 마지막 보론이기도 하다.


저자들은 기후 변화가 인류에게 닥친, 동시에 현재의 시스템을 지속 불가능하게 만드는 최대 위협이라고 간주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비개혁주의적 개혁’(non-reformist reform)을 제안한다. 이들은 기후 변화를 부정하거나 혹은 지엽적인 해결책만을 제시하는 견해들을 부정주의(denialism)라고 규정한 후,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비판이론의 관점에서 비판하면서 근본적인 사회체계 변화 없이는 기후 변화를 문제를 풀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견해는 근본적인 한계와 오류를 가지고 있다.

1. 녹색 ‘좌파’의 동행
– system 개념의 한계 

이른바 좌파/진보 진영에서 기후 위기론을 제시하고 방향을 모색하는 Social Agenda for System Change의 저자들은 ‘시스템’(system)을 정치적, 사회적 의미가 있는 체제(regime)와 구별하려는 생각은 없는 것으로 보인다. 애초에 문제의식에서 체제(regime)에 대한 연계성은 논외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한국에서 이들이 쓴 책의 제목에도 포함된 ‘System Change’를 ‘체제전환’이라고 번역하면서 혼란은 심해지고 있다. 그러므로 이 system과 system change를 원어 그대로의 의미와 사회과학에서 확립되고 통용되는 이론과 개념의 선상에서 비판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
 
저자들이 사용하는 시스템이라는 용어의 난점은 전통적으로 그것이 비역사적이며 기술적(technological), 중립적(neutral) 의미를 지닌다는 점에 있다. 이에 반해 사회과학에서 주로 ‘체제’로 번역되는 레짐 regime은 자본주의, 봉건제, 노예제와 같은 거시적 장기적 사회구성체를 가리키거나, 혹은 좁은 의미에서라도 특정한 역사적 사회적 체제를 지칭한다. 물론 시스템과 레짐 (regime)은 서로 교환 가능하게 쓰일 수 있다(inter-changeable). 그러나 양자가 교환 가능하기 위해서는 시스템 앞에 ‘한정 서술어’(adjectives)가 붙어야 한다. 그러나 앞에 특정하는 서술어 없는 시스템은 막연한 ‘기술적’ 의미만을 가질 뿐이다.

예컨대 한국 사회체계(social system)는 과연 성립 가능한가? 한국이 사회체계를 정의할 수 있는가라는 말이다. 체계, 혹은 계(界)는 한국을 넘어서는 차원이다. 체계의 정의가 있고서야 그 체계 안의 한국적인 성격, 국가적 이질성과 다양성이 존재할 수 있다. 하지만 체계의 정의는 여기서 다시 한국이라는 한정 수식어에 의해서만 유의미해진다. 이런 동어반복 혹은 악순환적인 순환. 이런 점에서 system이라는 용어는 사회과학적으로 특정하기 힘들다.

다른 한편으로 사회학 이론으로 탈코트 파슨스의 사회체계론이 있다. 그 체계론은 냉전체제 하 미국 사회라는 역사적인 맥락과 조건 속에서 분명히 제시되고 파슨스 스스로도 밝힌 적이 있지만, 그는 이를 이론화하면서 몰역사적인 체계 개념으로 정의하고 개념화하였다. 니콜라스 루만의 사회체계 개념이나 ‘사회의 사회’로서 체계 개념은 또 어떠한가. 결국 두 사회학 이론가들에서 보듯이, system(체계) 개념이 가진 기본적인 한계는 체계는 체계를 통해서만 자기 정의가 유지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중립적으로 변화해야 하고 중립적으로 적용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저자들은 system을 어떻게 정의하고 있는가를 보자. “시스템은 하나의 사회구성체를 유지 작동시키는 일련의 메커니즘과 그 구조”라는 의미에서 사용한다. 따라서 문자 그대로 ‘계’(界) 라는 중립적 의미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이는 이들이 자본주의를 끊임없이 소환하고 언급하지만 이를 시스템으로 다루면서 생기는 문제이기도 하다. 물론 자본주의를 시스템이라고 말할 수 있다. 자본주의 시스템. 그러나 문제는 시스템은 자본주의로 등식화되지 않는다.

이리하여 ‘체제전환(system change)’이라는 말은 자본주의= 체제로 이해하더라도 공허해진다. 자본주의 체제의 전환에 관한 문제로 들어간다면 왜 굳이 ‘change’인가, 이 모호한 단어는 또 무엇인가. 체계의 변화(혹은 ‘변동’이라고 번역하여도)를 왜 체제전환(regime transformation)과 혼동하게 만드는가. 아니면 스스로 혼동하는가. 사실 시스템 이론에서는 자본주의를 그리고 자본주의의 체제전환을 이입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이런 점 때문에 역사적 사회과학을 주장한 임마누엘 월러스타인은 “원래 사회체계란 자기완결성과 내적 분업을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현대사회에서 엄격한 의미의 사회체계는 ‘세계체계 world-system뿐이라고 주장했다. 월러스타인 스스로 제시한 ‘자본주의 세계체계론’이 바로 그것이다. 그에 따르면 체계는 전체로서의 세계체계이며, 자본주의야말로 태생부터 세계적, 전지구적, 포괄적 세계체계로서 시작하였던 체계이다. 하지만 월러스타인의 이론 자체가 체계가 가진 성격과 문제점을 그대로 드러낸다. 이로 인해 월러스타인의 자본주의 세계체계론은 자기 완결적인, 폐쇄적인, 그래서 ‘변동’을 설명할 수 없는 이론이라는 비판을 많이 듣게 된다.)

2. 비판이론이라는 이론적 수단 (toolkit) 

저자들은 ‘비판이론’(critical theory)의 관점에서 기후 변화와 사회 변화를 분석하고 모색하고 있다. 이들이 이론적 전범으로 삼는 학자들이 허버트 마르쿠제(Herbert Marcuse)와 앙드레 고르(Andre Gorz)다. 이들의 이론에 기대어 저자들은 기존의 기후 변화에 대한 반대 담론, 또는 부분적 해결책만을 제시하는 담론들을 ‘부정주의’(denialism) 이데올로기라고 비판한다. 이들의 논지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이 부분이다.

저자들이 인용하고 있듯이 비판이론은 이데올로기를 ‘현실 세계의 모순을 은폐하고 재생산해내는 일련의 관념과 실천들’로 규정하며, 이같은 이데올로기 때문에 올바로 문제를 인식하지도 못하고 올바른 해결책을 제시하지도 못한다고 주장한다. 비판이론이 현실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게 만드는 기제로 지적했던 ‘억압’(suppression)은 21세기의 기후론자들인 저자들에게서는 ‘부정’(denial)으로 표현된다.

그런데 이러한 이론의 뿌리는 루카치의 ‘귀속의식’(ascribed consciousness – 계급으로서의 존재 위치에서 당연히 가져야 할 의식)과 ‘허위의식’(false consciousness – 계급의 존재 위치에도 불구하고 가지는 현실 의식)의 구분에서 이미 나타난 것이다. 루카치는 노동계급이 왜 현실에서 ‘혁명적’으로 행동하지 않는가, 또는 더 구체적으로는 이른바 민주주의 하의 투표에서 노동계급이 왜 혁명적 대의를 가진 정당들에 투표하지 않는가(20세기 초 네덜란드와 일부 독일 지역에서는 노동자의 비율이 전체 인구의 50%를 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른바 투표를 통한 사회주의는 실현되지 않았다. 이 문제는 20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정치학자들에게는 매우 흥미로운 주제였다)에 대한 대답으로 ‘이데올로기’를 제시했고 이 견해는 이후 비판이론에 강력한 영향을 미쳤다.

루카치 식으로 표현한다면, ‘허위의식’으로 말미암아 기후위기에 대해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아예 기후위기 자체를 부정하거나 혹은 이를 개인의 행위나 기술적 돌파로 해결될 수 있다고 믿는 일련의 관념과 실천들이 이른바 ‘denialism(부정주의)’에 해당할 것이다.

그러나 비판이론의 이데올로기론(비판론)은 두 가지 결정적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하나는 계몽주의적 기획하에 서 있었다는 것으로, 비판이론가들은 이같은 이데올로기의 허구성을 폭로하면 그것으로 노동계급이 ‘각성’할 것으로 기대했다는 점이다. 즉 언어(담론)가 현실을 바꿀 수 있다고 믿었다(이것이 하버마스의 소통이론의 기본 전제다). 두 번째는 이데올로기의 물질성을 지적하면서도 여전히 ‘유적 인간’의 관점에서 사고했다는 점이다. 즉 이데올로기의 인식과 그 타파를 인간 이성의 보편성 실현이라고 보았다 (그런 점에서는 칸트 우파, 즉 헤겔의 관념론적 전통하에 있었다).

하지만 마르크스에게 있어서 이데올로기란, 그 이데올로기를 지탱해주는 ‘현실’에 의해 존재하는 것(따라서 물질적인 것)이었다. 예컨대 마르크스는 19세기 초 영국 노동법의 형성과정을 묘사하면서 이를 ‘도덕적, 윤리적’ 관점에서가 아니라(그에 기초한 분노로 점철되어 있기는 하지만), 대자본과 중소자본 사이 경쟁의 관점에서 노동법(공장법)의 성립을 분석한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영국 노동자 계급의 비참한 상태에 대한 도덕적 관념들, 그리고 이 도덕이 최종적으로 승리하게 되는 것은 ‘도덕적 우위’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이 도덕의 실현이 대기업이 중소기업에 대한 경쟁에서 더 우위에 서게 되는 물적인 현실이 존재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자본주의의 속성상 자본의 자기 증식이 기계적으로 진행되는 자본주의하에서는 대자본이 옳으며, 더 선진적이고 더 선구적이다. 말하자면, 이때는 대자본이 ‘진보’다. 마르크스가 이데올로기가 물질적이라고 말했던 것은 바로 이같은 이유에서였다.

따라서 그는 도덕적이고 이성적인 언어들이 현실을 바꿀 것이라고는 추호도 믿지 않았다. 오히려 현실의 물질적 조건들이 그 언어(담론)들을 이성적이고 도덕적인 것으로 만든다. 이것이 지배자의 이데올로기가 그 사회의 주류 이데올로기가 되는 이유다. 그러므로 마르크스는 비판이 현실을 바꿀 수 있다고 보지 않았다. 마르크스가 ‘비판의 무기’가 ‘무기에 의한 비판’으로 전화한다고 말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그런 점에서 비판이론의 이데올로기론은 근본적인 결함이 있으며, 이에 기초한 저자들의 분석도 근본적인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예컨대 19세기 노동법의 입법 논쟁 사례에서 보이듯이, 자본의 자기 증식의 결과들은 ‘인간의 보편적 이성’의 실현의 관점에서 설명될 수 없다. 차라리 헤겔이 말했듯이, “현실적인 것은 이성적이며, 더 이상 현실적이지 않으면 그것은 비이성적인 것이 된다”. 즉 역사의 진행에서 관철되는 이성은 인간의 유적 이성의 실현이 아니라, 현실이 변화한 결과이며, 이 현실은 자본주의하에서는 ‘더 높은 생산성, 더 고도화된 생산관계’를 지향하기 때문에 더 이성적인 것이 될 뿐이었다. 자본 그 자체는 자신의 고유한 논리(자본의 재생산 법칙), 즉 자본의 이성을 가지며 그것을 ‘인간’의 보편적 이성의 실현이라고 설명하는 것은 마르크스가 말했듯이 ‘전도’된 것이다.

3. 기후위기, 부정주의, 계(system)의 문제 

역설적으로 여기서 저자들은 자신들도 의식하지 못하는, 자신들의 고유한 이데올로기를 드러낸다. 이들은 ‘기후 위기론’을 정당화하기 위해 현재 체제의 위기 인식론을 ‘부정주의’로 비판하지만, 동시에 이 기후 위기론은 ‘보편적’인, ‘사회 전체의 문제’로 제시된다 (특히 고르의 최종 결론, Ecology as Politics, 1979).

그리고 이들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이데올로기적 비판과 사회 전체의 변화(비개혁주의적 개혁)가 필요하다”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논의에서 ‘계급’과 ‘혁명’은 사라진다; 기후 문제는 ‘모두’의 문제다. 따라서 지구 공동체의 시민으로서 인류 모두가 책임을 갖고 있으며, 이 ‘사회체계’를 바꾸어야 한다. 하지만 이것은 ‘자본’을, 나아가 자본주의를 소멸시키는 변화는 아니다. 자본은 자본주의를 변화시키기 위해서 스스로 변화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노동도 시스템의 변화를 위해 스스로 변화해야 한다. 즉 자본(자본가)은 양보해야 하며, ‘탈성장’(degrowth) 하에서는 거의 자동적으로 노동자도 양보해야 한다. 인류 앞에 닥친 전대미문의, 인간이 만들어낸 위기(기후위기)라는 공동의 적을 앞두고, 모두 (인류)는 변화해야 하며, 그 방식은 ’비개혁적 개혁‘이 되어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비개혁적 개혁’이란, 혁명적인(저자들 표현에 따르면 “급진적인, 근본적인”) 개혁이다. 그러나 노동계급의 관점에서 말한다면, 왜 그렇게 힘들게 혁명적 방법을 동원하는데 굳이 시스템의 개혁에서 그쳐야 하는지 의문이다. 그 정도의 노고라면 혁명적 혁명을 하면 된다. 그리고 system의 change가 아니라 새로운 system으로의 전환을 이루는 것이 ‘기후위기’의 ‘급진적인, 근본적인’ 전략일 것이다. 결국 초점은 ’개혁‘에 있으며, 거기에 ’노동계급‘의 동원이 필요할 뿐이다. 하지만 과연 시스템의 ’비개혁적‘이지만 ’개혁인 것이 과연 ‘체제의 전환’이라고 할 수 있을까? 게다가 영어와 달리, 한국어 번역은 심각한 지적 실천적 물타기가 아닐 수 없다(누구는 이를 ‘지적 사기’라고 심한 말로 표현할 수도 있겠다). 동시에 이 ‘비개혁주의적 개혁’은 당연히 자본의 양보도 요구하겠지만, 그러나 마찬가지로 노동계급에도 위기이기 때문에(‘인류’의 일부로서 위기), 따라서 당연히 (단지 비율상의 문제일 뿐으로) 노동자들도 양보하고 희생해야 한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자본주의가 소멸하거나 폐지될지는 비확정적이고 미결정적이다. 근데 이것이 체제전환이다? 

그러나 위의 system 개념의 한계에서 보듯이, 시스템은 불안정과 무질서를 극복하는 ‘시스템 변화’를 통해서 다시 재안정하여 ‘평형 equilibrium’을 찾아가는, 자기 완결적인 구조다.  system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이 바로 이 평형 equilibrium이라는 개념이다. 따라서 자본주의가 불확정성과 불안정의 정상화를 통해서 ‘평형 (equilibrium)’을 찾아가는 ‘시스템’으로 인식되는 한, 자본주의는 소멸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는다. 자본주의는 변화를 통해서 재구성되고 존속하게 된다.
 
그렇다면 과연 기후위기에 맞서 비자본주의적인 자본주의가 가능한가? 2차 세계대전 직후 이윤율을 제한하여 자본주의를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 있다고 간주하던 유럽 사민주의와 ’현존 신좌파‘ 일부의 기후 위기론은 어느 정도 구조적 상동성(homology)을 가지고 있다. 이들이 이론적인 근거로 드는 고르의 논지가 대표적이다. ‘외적 환경이 인간의 궁극적 한계’이기 때문에 인간이 자신을 통제해야 한다는 논리는 자본주의든 사회주의든 ‘지구인들'(인류)은 공동의 적을 지니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인식체계 하에서는 계급 적대는 모호해지거나 사라지며, 자본주의 철폐를 위한 노동계급 혁명은 당연히 인식론적정치적인 지평에서 소실된다.

마지막으로 이들의 주장대로 ‘비개혁적’이긴 한데, 즉 혁명적이긴 한데, 혁명은 아닌 것을 추구해야 하는 이유는 그렇다면 과연 무엇일까? 시스템을 완전히 폐지하고서는 변화도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시스템이 있어야 시스템의 변화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들이 말하는 system change, 그리고 한국에서 의도적으로인지 비의도적으로인지 번역되고 있는 ‘체제전환’은 ‘전환’ transformation도 변혁 revolution도 아니어야 한다. 물론 기후위기때문에 지구상에 사는 ’인류‘가 멸종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좌파’의 기후 위기 담론하에서는, 그리고 이런 system change 하에서는 자본은 그 어디에서든 분명히 살아남을 것 같다.

그러므로 흥미롭게도 이 책의 제목을 “시스템 변화를 위한 ‘기후 어젠다” (A Climate Agenda for System Change )로 하거나, “기후 어젠다를 위한 ‘시스템 변화 (A System Change for Climate Agenda)”로 하거나, 그 순서는 하등 문제가 되지 않는다. 어떤 식으로든 가능하다. 둘은 그렇게 ‘친화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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