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와노동 연구소

죽은 자들의 민주주의 : 미국 정치체제의 진퇴양난

죽은 자들의 민주주의 : 미국 정치체제의 진퇴양난

2024년 7월 18일 / 글로벌 리포트 Global Report
권영숙 민주주의와노동연구소 소장

미국 정치, 양당 정치, bi-partisan politics, anti-system politics, ‘3자위원회’(trilateral commission), 민주주의

System Works

흔한 오해와는 달리 리처드 닉슨 전 미국 대통령은 탄핵당하지 않았다. 탄핵절차가 의회에서 진행되는 중에 그는 사임했다. 더욱 알려지지 않은 사실은, 닉슨은 기소되거나 유죄 확정판결을 받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미국 대통령 닉슨은 재임 중 워터게이트 도청 사건을 ‘은폐’하려던 혐의로 의회 조사를 받고 탄핵 절차가 진행 중이었지만 그가 사임해버렸고, 이어 취임한 제럴드 포드 대통령은 닉슨을 사면했다. 미국의 대통령 권한은 엄청나서 유죄 확정 이전에 심지어 기소 이전이라도 포괄적인 사면 조치를 내릴 수 있다. 더 더욱 잊혀진 세 번째 사실은, 포드 대통령은 선거로 선출된 대통령이 아니라는 점이다.

1972년 대선에서 닉슨의 러닝메이트였던 스피로 애그뉴 부통령은 워터게이트 사건 와중에 ‘위증’ 혐의로 사임했고, 닉슨은 당시 연방 하원의장이었던 제럴드 포드(공화당)를 부통령에 임명했다. 그 직후 닉슨은 사임했으며, 포드는 대통령 자리에 올랐다. 이것 역시 법적으로는 문제가 없었다. 부통령 유고시에 대통령이 부통령을 지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질적인 민의의 반영이라는 민주주의의 정신에 비추어 보면, 그리고 미국 유권자의 입장에서는 정말 황당한 일일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스스로 ‘민주주의의 주창자’라고 주장하는 미국의 민주주의다. 

그러나 미국은 워터게이트 사건의 이러한 후처리에 대해서, 그리고 민의를 대변하지 못하는 정치민주주의에 대한 반성적인 사고를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워터게이트 사건 과정에서 나온, 가장 유명한 두 가지 표현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syetem works’(시스템은 작동하고 있다)라는 말이다. 이는 닉슨이 지명했던 부통령이자, 닉슨 사임후에 대통령으로 오르고, 아직 기소단계인 닉슨에 대해 사면을 실시한 포드 대통령이 닉슨을 사면한 직후 했던 말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deep throat’다. 즉 체제의 내밀한 기밀을 폭로한 자를 의미한다).

system works라는 말은 미국에서 종종 아니 매우 흔하게 “민주주의가 작동하고 있다”는 말로 번역되고 오해된다. 하지만 포드가 말한 system은 ‘민주주의’가 아니다. 이 때 시스템이란 상층부에서, 즉 권력 엘리트들이 자신들끼리 권력을 주고 받으며 기득권을 수호하고 체제를 유지하는 ‘담합’ 구조를 말하는 것이다. 즉 권력 카르텔의 작동을 말한 것이다.

포드 대통령은 취임하자 부통령으로 록펠러 가문의 후계자인 넬슨 록펠러를 부통령으로 임명했다. 그리고 넬슨 록펠러는 1973년 미국과 유럽, 일본의 막후 실력자들(king makers)들을 모아 이른바 ‘3자위원회’(trilateral commission; 또는 3극위원회로 번역하기도 한다)이라는 국제 담합 조직을 만든다. 이 비공식 조직은 닉슨이 길을 연 globalization을 각 지역별로 어떻게 수행할 것인가를 논의하고 각기 맡은 바 역할을 맡았다. 

그 결과가 미국에서는 바로 닉슨 이후 추락한 미국 정치와 워싱턴 정가의 이미지를 개선하기 위한 참신한 인물을 대통령으로 만드는 것이었고(지미 카터), 일본에서는 국내 산업의 이해를 대변하여 세계화(globalization)에 반대한 다나카 가쿠에이 총리를 ‘록히드 뇌물사건’으로 낙마시켰으며, 유럽에서는 EU를 태동시켰다. 

포드에 이어 대통령이 된 지미 카터는 당시만 해도(그리고 지금도) 2차 대전 이후 가장 청렴하고 도덕적인 대통령이자 인권 수호자로 칭송받았다. 그러나 미국 컬럼니스트 Alastair Crooke는 오늘날의 비자유주의적(illiberal) 체제의 기원을 카터에게서 찾기도 한다: 
“윌리엄 엔달은 어떻게 1970년대 데이빗 록펠러와 스트롱과 관련된 무리들이 엘리트 조직과 씽크 탱크를 탄생시켰는가를 기술한다. 이 무리들에는 신맬서스주의자들인 로마클럽과 3자위원회(trilateral commission)이 포함되어 있다. 이 중에서도 3자위원회는 이 체제의 핵심에 자리잡은 비밀 조직이었다. 카터가 대통령에 취임했을 때 그의 내각은 거의 전적으로 록펠러의 3자위원회 멤버들로 채워졌다. 그래서 일부 워싱턴 인사이더들은 카터 내각을 ‘록펠러 대통령제’라고 부를 정도였다” 

3자위원회의 영향력은 막강했다. 오죽하면 1977년 당시 언론인인 Craig Karpel은 “미국 대통령과 내각 핵심 자리는 다국적 은행과 다국적 기업들의 국제적 이해에 미국 국내적 이해관계를 종속시키는 민간 조직들에 의해 좌우되었다. 3자위원회가 카터 행정부를 장악했다는 것은 제대로 된 표현이 아니다. 3자위원회가 곧 카터 행정부 그 자체다”라고 쓸 정도였다. 카터 행정부에서 미국 외교 안보라인의 수장인 국가안보보좌관 자리를 맡은 쯔비그뉴 브레진스키는 3자위원회의 의장 출신이었다.

결국 카터는 미국의 첫 신자유주의 대통령이었으며, 여기에서부터 신자유주의가 탄생했다. 그러나 그 탄생은 동시에 ‘비민주적’이고 ‘비자유주의적’인 것이었다. 그것은 소수의 자본가, 권력가들 사이의 담합과 흥정, 계획의 결과였으며, 대중들은 속절없이 동원되었을 뿐이다.

흔히 초당적(bi-partisan, 혹은 uni-party)라고 불리는 정치적 과정은 신자유주의 시대의 정치의 방식이었다. 그리고 미국을 비롯한 대부분의 서구에서 이같은 ‘신사협정’은 유지되어왔다. 그리고 미국은 지난 2008년 금융 위기 이후 occupy 운동 등 대중적 저항이 거세지자 그 전까지는 관례에 불과했던 초당적 합의를 아예 제도화시켰다.

오바마 정권 후반기부터는 미국의 민주 공화 양 당은 각기 상하원에서 2명씩 모두 8명으로 구성된 의회 지도부에서 주요한 사안들을 결정하기 시작했다. 이들을 ‘Gang of Eight“(8인의 갱단)이라고 부른다. 따라서 대중들이 투표장에서 누구에게 투표하든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선택은 대중이 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자리를 잡고 있는 기득권자들, 이른바 파워엘리트가 한다. 이를 두고 지난 2016년 미국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 당시 민주당전국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낸 도나 브라질은 “유권자들이 선택한다. 그러나 메뉴를 정하는 것은 우리다”라고 말한 바 있다. 유권자들은 ‘주어진 것’ 안에서만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힐러리 클린턴이 버니 샌더스 후보를 누르고 승리한 2016년 민주당 당내 경선은 편법과 불법이 난무한 부정으로 얼룩진 선거였다. 그러나 민주당 지도부의 관점에서 본다면, 그것은 부정선거가 아니라, ‘시스템의 작동’(System works!) 이었을 뿐이다. 

System doesn’t Work

세계화 (globalization)를 연 최초의 인물인 리쳐드 닉슨은 호되게 정치적인 봉변을 당했지만, 그 뒤 50여년 간의 미국 정치 체제는 민주당과 공화당이 서로 정권을 주고 받으며 평화로운 질서속에 유지되어 왔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는 이른바 ‘숙청’(purge), 혹은 정치보복이라는 것은 있지 않았다.

하지만 클린턴이 대통령이 되었을 때, NAFTA와 대외정책(EU 확장 지원 및 중국 키우기)에서 국내자본 분파와 다국적 자본 사이에 이견이 발생했다. 여기에 문화적 차이가 덧씌워져 정치적 갈등이 커져 탄핵 절차에 이르렀다. 그러나 클린턴은 정치적인 모욕은 당했을지언정 탄핵이라는 법률적 조치를 당하지는 않았다.

사실 정적에 대한 사법적 제재는 미국 역사에서 매우 드문 일이다. 이미 19세기 초 토마스 제퍼슨 대통령이 정적인 아론 버 부통령을 제거하려다 실패한 이후에는 미국 정치사에서 사법적 방식을 통한 정치적 투쟁은 거의 나타나지 않았다(오히려 물리적 방법-정치적 테러가 선호되었다). 

그런 점에서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야말로 매우 예외적인 존재다. 그는 재임시에는 물론이고 퇴임 후에도 온갖 소송과 사법 처리의 위협 하에 놓였다. 뿐만 아니라, 아주 실제적인 의미에서(즉 물리적인 의미에서) 신체적 위협까지도 받고 있다. 7월15일 유세장에서 연설도중 그에 대한 암살 시도는 미국 사회에서 정치적 갈등이 정치적 제도 내에서 소화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해졌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일뿐이다. 문제는 왜 이렇게 심각해졌느냐는 것이다. 엘리트들 사이의 초당적 합의에도 불구하고 왜 사회는 더욱 분열되었을까?  

2021년 1월 6일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을 지지하는 시위대가 워싱턴D.C 미 의사당 앞에서 부정선거 항의 시위를 벌이고 있다. 출처: <The Colorado Sun>
2021년 1월 6일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을 지지하는 시위대가 워싱턴D.C 미 의사당 앞에서 부정선거 항의 시위를 벌이고 있다. 출처: <The Colorado Sun>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죠셉 스티글리츠는 이미 지난 2013년에 “우리(미국)의 경제 시스템은 대부분의 시민들을 곤궁하게 만들고 우리의 정치 시스템은 금전적 이해에 포박당했기 때문에, 우리의 민주주의와 시장 경제에 대한 신뢰는 미국의 국제적 영향력 감소와 더불어 잠식되고 있다. 우리가 더 이상 기회의 땅이 아니며 우리의 법치와 사법 시스템은 손상되었으며 심지어는 우리의 국가적 정체성조차 위기에 빠졌다는 현실 인식이 자리잡기 시작했다”고 말한 바 있다. 즉 갈등을 해소하고 이해관계를 조정하든 기존의 정치적 제도가 더 이상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없어졌다는 것이다. 기존의 정치, 그리고 ‘민주주의’가 해결 능력을 잃어버린 것은 정치 그 자체에도 원인이 있다.

정치이론가인 Benjamin Studebaker는 <미국 민주주의의 만성적 위기; 출구는 없다(The Chronic Crisis of American Democracy; the way is shut)>(2023)라는 저서에서 “만일 당신이 경제적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한다면, 당신은 인민주의자(populists)들의 불만을 정당화하며 나쁜 사람들을 방조한다는 비난을 받을 것이다. 이를 회피하기 위해서 미국의 엘리트들은 점점 자신들만의 협소한 문화적 토론에 갇혀버렸으며, 문제를 제대로 이해하거나 그에 대응하려는 노력조차도 하지 못할만큼 ‘한심스러운 인간들’(the deplorables)을 비난하는데만 몰두한다”고 관찰했다. ‘한심스러운 인간들’(the deplorable)은 힐러리 클린턴이 트럼프 지지자들을 조롱조로 부른데서 연유한 표현이다.

그래서 Studebaker는 미국은 민주주의 이외에는 다른 해결책을 찾지 못하는데, 이미 민주주의로는 해결할 수 없는 정치가 되어 버렸고, 따라서 해결할 도리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민주주의를 수행해야 할 사람들(정치인)이 이미 현실을 인식하고 대응할 수 없는 조건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남은 길은 고작해야 온갖 수단을 다 쓴 현상유지일 뿐이다. 그는 이를 “죽은 자들이 만든 제도를 죽은 자들이 지키고 있다”고 요약했다.

런던정경대 정치학과 교수인 Jonathan Hopkin은 <반체제 정치: 부유한 국가들에서의 시장 자유주의의 위기 (Anti-System Politics: The Crisis of Market Liberalism in Rich Democracies)> (2020)에서 anti-system politics를 단지 인종적 증오나 비이성적 믿음(가짜 뉴스)로 치부하기 보다는 인민주의(populism)의 일환으로 보아야 한다고 지적한다. 그는 금융위기 이후의 대중적 저항들(occupy 운동, Black Lives Matter 운동, 그리스의 시리자 등)을 분석하면서 이같은 운동은 불평등이 심화된 곳에서 발생하며, 신자유주의의 수명이 다했다는 신호이며, 반체제 정치(anti-system politics)라고 규정한다. 그가 말하는 신자유주의는 오직 소수만을 위해 작동하는 경제 모델과 이에 대한 대안을 봉쇄해버리는 정치를 말한다.

또 매사추세트-엠허스트대학의 사회학 교수인 Cedric De Leon은 루즈벨트 대통령 시절과 민권운동기에 형성된 민주당 내의 제도들이 우파든 좌파든 간에 새로운 세력들의 봉기를 막는 장벽의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그는 뉴딜 데모크라트(혹은 뉴딜 시기에 형성된 자본-노동 사이의 동맹)이 사실상 사회변혁을 막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Jacobin> 6월 10일자, “Why the Center holds”). 그는 민주당이 지난 2008년 대선과 2020년 대선에서 ‘뉴딜 동맹’(new deal coaltion)을 되살리는데 성공했다고 말한다. 1930년대 뉴딜과 60년대의 민권운동기에 이른바 좌파들은 끊임없이 민주당을 지지했다. 그러나 이같은 좌파의 지지는 민주당 내에서는 냉대밖에는 얻을 것이 없었다. 그래서 드 레온은 좌파 블록과 민주당의 동맹(뉴딜 동맹)이 미국 정치를 ‘중도’로 머물게는 하지만, 동시에 그 때문에 역설적으로 우파(트럼프)의 승리를 가져올 수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는 트럼프주의는 신자유주의의 실패일 뿐만 아니라, 새로운 뉴딜(오바마가 주창한 신동맹)의 실패이기도 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Studebaker나 De Leon 둘 다, 그리고 종종 다른 미국의 진보적/좌파 학자들의 시각은 매우 협소할뿐만 아니라 왜곡되어 있다. 예컨대 De Leon은 트럼프의 정치적 구호를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트럼프의 구호는 명료하다 : 미국의 정치적 경제적 시스템은 백인 다수의 한 때 도전받지 않았던 권력과 특권을 앗아갔으며, 이를 받을만한 가치가 없는 이민자, 흑인, 말만 시끄러운 페미니스트들, 그리고 변태들에게 넘겨주었다“.

물론 트럼프는 표면적으로는 종종 그렇게 말한다. 그러나 트럼프가 성공한 이유는 단지 거기에서 머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가 기껏해야 일베 수준의 중2병 정치 구호나 외치고 있었다면 그는 결코 대중들을 획득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내부’(미국 내부의 계급 및 인종 관계)를 말할 때는 반드시 ‘외부’와의 연관 속에서 말한다. 트럼프는 미국이 자신들을 위한 결정을 내린다면 충분히 자기들만으로도 잘 살 수 있는데, NAFTA(북미자유무역협정), FTA, 기후협정, Green Deal, IRA(인플레이션법)과 같은 ‘외부’에 ‘퍼주느라’ 미국이 어려워졌으며, 따라서 미국 내의 계급 및 인종 갈등이 심해졌다고 말한다. 여기서 그는 민족주의자(nationalist)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anti-globalist 혹은 국수주의자의 스탠스를 취한다. 그에게 있어서 미국 대중의 즉각적인 이해에 반하는 모든 것은 ‘반미국적’이며, ‘반국가적’이다.

따라서 위에 언급한 학자들의 주장과는 달리, 트럼프는 반노동자적이지도 않고(반노동계급적일 뿐이다), 인종주의적이지도 않으며(왜냐하면 그는 백인이든 흑인이든 다 잘 살게 해주겠다고 공언하고 있다), 미국 대중들의 ‘특권’을 빼앗간 것은 미국 내부의 ‘흑인, 변태, 페미니스트’가 아니라 외부(중국, 유럽)이며 외부와 결탁한 미국 내의 기득권 세력들(민주당, 좌파들)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즉, 현재 미국의 소위 ‘진보’세력(the progressive)은 트럼프의 진정한 역사적 성격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트럼프는 미국 국내의 뒤쳐진 자들(left behind)의 유감 속에서 탄생한 망령이 아니다. 그는 지난 50여년간의 역사적 추세(globalization)를 뒤집어엎겠다고 선언한 인물이며, 그것만이 미국 내의 뒤쳐진 자들을 끌어올리고 기득권자들을 끌어내리는 길이라고 천명한 인물이다. 트럼프는 그런 점에서 ‘populist’다.

아마 미국 역사 속에서 트럼프와 가장 비슷한 인물을 찾는다면, 그것은 1896년 미국 대선에 민주당 후보로 나섰던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일 것이다. 브라이언은 미국의 대자산가들이 지배하는 금 본위제가 농민과 중소자영업자들을 질식시키고 있다고 주장하며 은 본위제를 주장했다(은 해방 운동-free silver movement라고 불린다). 그는 근소한 차이로 패배했지만, 이 때의 경험들은 훗날 <오즈의 마법사>의 알레고리가 된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1945년 3월 일본 유황도 전투에서 미군이 성조기를 꽂고 있다.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피습 직후 주먹을 쥐고 'fight, fight, fight'를 외치고 있다.
1945년 3월 일본 유황도 전투에서 미군이 성조기를 꽂고 있다.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7월14일 피습 직후 주먹을 쥐고 ‘fight, fight, fight’를 외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트럼프가 다른 미국의 정치가들과 구별되는 점이다. 트럼프는 지난 50년간의 ‘초당적’(bi-partisan) 전통을 깼다. 왜냐하면, 그 초당적 전통은 미국을 기존의 경로(globalization)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따라서 system을 위배한 것은 트럼프가 먼저다. 그는 정치적 불문율을 깼다. 그에 따른 댓가를 치러야 한다. 그것이 트럼프가 지금 겪고 있는 수많은 쟁송들이며, 총알이고 모욕들이다.

트럼프 집권 1기 때만 하더라도 트럼프에게는 지금과 같은 힘은 없었다. 그가 부통령으로 마이클 펜스를 택한 것은 기존 공화당 주류(중에서도 네오콘 일파)와 타협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트럼프는 JD Vance 오하이오주 연방상원의원을 부통령 후보로 지명했다. 

Vance는 백인 서민층 출신이며 여전히 그 정서를 간직하고 있고(있다고 주장되고), 젊다(39세). 즉, 트럼프는 Vance를 택함으로써 차기까지 염두에 두고 있으며 새로운 지지자들을 확보하는 포석을 둔 셈이다. 그러나 알려지지 않은 속내가 더 중요하다. Vance는 법률대학원 졸업 이후 Peter Thiel의 헷지펀드에서 일했다. Thiel은 실리콘밸리의 핵심 투자자 중의 하나다. 

즉, 트럼프는 신흥 금융자본과, 그리고 가장 선진적인 산업자본 일파와 손을 잡은 것이다. 따라서 트럼프의 정치적 구호와는 달리, 그가 진정으로 globalization을 완전 중단하고 미국 내 기득권자들을 혁파할 가능성은 당연히 전혀 없다. 대신에 그의 임기 내에는 미국이 군사적 옵션을 선택할 가능성도 거의 없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트럼프는 목소리는 크겠지만, 결국은 돈을 달라는 얘기지 실제로 때려부수지는 않을 것이다. 따라서 트럼프는 민주당이 노동자들을 배신했던 것처럼, 자신의 지지자들, 즉 the deplorable들을 배신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트럼프가 발흥한 이유이자, 동시에 미국에서 정치적 갈등이 격심해진 이유이기도 하다. 트럼프는 지난 50년을 되돌리려 하고 있다. 그 50년에는 너무 많은 이해관계가 걸려 있다. 이것은 밥그릇 싸움이며, 따라서 개처럼 싸울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개 밥그릇 싸움이 되며 밥그릇 안에 도토리가 들었는지 젤라또가 들었는지는 차후의 문제다. 지금은 그릇이 밥보다 중요하며, 따라서 가끔은 밥그릇이 엎어지기도 한다.

역사를 길게 둘러보면 이같은 싸움은 조용히 끝난 적이 없다. 스탠포드대학의 고전역사 교수인 Walter Scheidel은 지난 2018년 저작 <Great Leveler>(위대한 평형자)에서 ”어떻게 해서 세계 역사를 통털어 오직 폭력과 재난만이 지속적으로 불평등을 줄여왔는가?“를 고찰한다. 그의 대답은 간단하다;
역사 속에서 불평등은 오직 전쟁(혁명), 재난, 정부의 붕괴, 대규모 전염병과 같은 사태가 발생할 때만이 감소했다. 4가지가 한꺼번에 찾아오지 말란 법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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