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조합운동과 법률투쟁
– 그 다음 또는 그것과 함께
2024년 7월 18일 / 연구자의 시선
글 조연민 연구위원 (변호사)
자본주의 생산관계의 규범적 지지대로서의 노동법
우리가 오늘날 알고 있는 노동법은 자본주의 사회를 지탱하는 규범적 구조물 중 하나다. 인간 행위로서의 노동 그 자체는 인간이 외부세계와 관계맺고 사회를 구성하고 생산활동을 하는 순간부터 존재했으되, 우리가 이야기하려는 노동법은 탈역사적인 노동 일반이 아니라 ‘자본주의 생산관계 하에서의 노동에 관한 법’으로, 자본주의의 태동 및 발전과 흐름을 같이하는, 자본주의의 산물이다.
노동법의 시초를 이야기할 때 자주 거론되는 것이 영국의 공장법이다. 자본주의의 심화에 따른 마침표 없는 노동조건 및 생활환경의 악화에 직면하여, 자본의 지속적인 활동을 가능케 하기 위해서라도 자본의 원천인 노동에 대한 기초적인 보호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던 것이다. 초기 공장법은 주로 아동과 여성의 노동보호에서 시작하여 이후 성인 남성 노동자에게까지, 나아가 특정 유형의 노동에서 시작하여 노동 전반에까지 확장되는 경과를 거쳤다. 그 과정에서 노동조합도 이른바 그 형성을 범죄시하는 ‘단결금지 법리’로 집약되었던 가혹한 탄압의 시기를 투쟁으로 통과해 나가면서 점차 합법화되었고, 초기의 공제조합이나 직능조합의 모습에서 산업별 노동조합 등 확장된 형태로 발전하였으며 경제투쟁, 정치운동만으로 국한되지 않는 다양한 역할과 기능을 수행하게 되었다.
자본은 자신의 영속적인 확대재생산에 유념하며, 자본주의 국가기구는 자본의 그러한 본질을 통치체제와 이데올로기로 정당화함으로써 유지시킨다. 이러한 틀에서 노동법은 왜 존재하며 어떤 의미를 갖는가. 노동법과 같은 규제가 없다면 자본의 활동은 한층 자유로울 수 있을 것이다. 마르크스의 표현처럼 “자본은 근로자의 건강과 수명을 고려하는 것을 사회가 강제하는 것이 아니라면 조금도 고려하지 않”음을 본질로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거기에 어떠한 제한도 가해지지 않는다면 자본 그 자체가 터잡을 수 있는 생산관계 자체가 붕괴될 우려가 있음을 경제위기와 전쟁, 그리고 혁명의 역사적 경험이 보여준 바 있다. 이와 같은 파국의 도래를 막기 위해 자본으로 하여금 노동을 ‘조금이라도 고려하도록’ 만드는 사회적 강제의 일종으로서 노동법은 기능한다. 그렇기 때문에, 노동법에는 물론 노동 보호라는 일차적이고 획기적인 기능이 있지만(이른바 종속노동에 대한 사용자의 단독결정 제한), 보다 궁극적인 목적은 노동을 보호하여 자본주의 생산관계를 보호하기 위한 것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법이 포착한 노동, 노동이 포착한 법
그런데 기실 이는 사회를 지탱하는 규범의 틀로서의 법 일반의 기능에 충실한 것으로, 우리가 보고 있는 노동법은 ‘법이 포착한 노동’의 측면에 국한되는 것이다. 법의 눈으로 보았을 때 노동3권은 갈등을 예방하고 산업평화를 이룩하기 위한 것이고, 이를 위해 근로조건 노사대등의 원칙이 법으로 정해진 것이기도 하며, 시간외노동에, 임금수준에, 해고 등 징벌적 처분에, 비정규직 노동의 사용에 일정한 제한을 가하는 것이기도 하다. 또 다른 한편, 법의 눈으로 보았을 때 집단적 노사관계는 단일한 ‘사업 또는 사업장’의 테두리 안에 안전하게 묶여 있어야 하며, 노동자는 사용자가 제정한 취업규칙 등 복무규율을 준수해야 하고, 사용자의 시설관리권을 침해해서는 안되고, 복수의 노동조합이 있는 경우에는 원칙적으로 교섭창구를 단일화하여야 하는 것이다. 이처럼 상이한 측면의 여러 요소들이 노동법이라는 이름으로 묶여 있는데, 이것은 어디까지나 ‘법이 포착한 노동’의 모습일 뿐이다. 법이 미처 다루고 있지 못하거나 간과한 노동의 측면은 언제나 존재해 왔고, 거기서부터 때로는 투쟁이, 때로는 상상력이 발현되기도 했다.
시선의 방향을 바꿔 노동은 법을 어떻게 바라보아왔는지를 살펴보면, 그것은 전통적으로는 노동에 대한 자본과 국가의 탄압의 무기이고 복종을 강요하는 기제였으며 현재도 외피만 달라졌을 뿐 그러한 본질에는 변함이 없지만(노사‘법치’주의라는 신조어를 떠올려볼 수 있다), 노동조합운동이 제도화되면서 점차 노동에 의해서도 도구로 활용되어 온 흐름이 있다. 더 나은 노동조건을 얻어내기 위한 소송, 고용안정을 확보하기 위한 소송, 부당노동행위를 문제삼기 위한 소송, 사용자의 법률적 탄압에 대응하는 소송과 같은 것들은 이제 노동조합활동의 일부가 되었다. 또 산업별 노동조합이나 총연합단체 차원에서는 정책 및 입법운동도 일상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노동법이 노동조합운동의 고유한 언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필요할 때 집어들 수 있는 매력적인 도구의 하나로 확실히 자리잡은 양상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가 종종 놓치게 되는 질문은 그 현상을 넘어선 의미에 관한 것이다.
싸움의 외주화, 투쟁의 개별화
노동조합운동은 법률투쟁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 우리 스스로 이 질문을 던져야 하는 이유는, 그렇지 않으면 노동조합운동이 법률투쟁으로 쉽게 축소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노동조합이 처음부터 그렇게 의도한 것은 아니었더라도 어느 순간 그러한 길에 접어들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노동법을 포함한 모든 법에 내포되어 있는 중요한 속성은 그것이 사회적 ‘약속’으로 기능한다는 것이다. 어떠한 노사관계 이슈를 법의 장(場)에 던지기로 하는 순간 그 향방은 당사자의 손을 떠나게 된다. 노동위원회든, 법원이든, 노동부든, 검찰이든, 행정부든, 국가기구가 판단을 내리고 그것이 확정되기 전까지 그 장의 외부에서 운동이나 합의를 만들어갈 수 있는 가능성의 여지가 현저히 줄어든다. 노동조합의 입장에서는 법률투쟁을 통하여 사용자를 압박한 다음 더 유리한 결과를 얻어내려는 전략으로써 소송을 기획할 수 있지만, 막상 소송이 시작되고 시간이 흐르면서부터는 그러한 기획의도가 퇴색되고 법원에서 모종의 ‘결판’이 나기 전까지 동력을 모으지 못하는(심지어는 동력이 점점 소실되는) 상황이 도래하는 것을 우리는 자주 목격한다. 마치 싸움이 ‘외주화’되는 양상인 것이다.
특히 소송은 3심제가 보장되어 있고, 반드시 불법파견이나 통상임금처럼 당사자 수가 많고 규모가 큰 사건이 아니더라도 사실관계가 방대하거나 중요한 쟁점을 담고 있는 사건들은 확정되기까지 수 년이 걸리는 경우가 다반사이기 때문에, 여기에 모든 논의가 얽매이게 되면 노동조합 자체의 동력은 사라지고 조합원들이 굳이 노동조합으로 뭉쳐 집단적인 목소리를 낼 이유도 사그라든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는 소송이 너무 오랫동안 진행되고 그 밖에 다른 활동은 이루어지지 못한 나머지 소송이 끝날 즈음에는 조합원이 겨우 몇 명으로 축소되어 버리고 당초 소송을 주도한 조합 간부 일부만이 남는 안타까운 상황도 발생한다. 노동조합이 그 투쟁을 잘 해내기 위해서, 조합원이 자신의 노동조건을 지키고 개선하기 위해서 시도하는 것이 법률대응인데, 오히려 법률대응에 노동조합과 조합원의 다른 모든 투쟁의 가능성이 종속되어버리는 경우 발생할 수 있는 결과다.
2012년 1월 13일 서울 양재동 현대차그룹 본사 앞에서 열린 금속노조 집회. ‘불법파견 정규직화’, ‘노동법 전면재개정’을 요구하고 있다. (출처: 금속노조 신동준)
비단 동력뿐 아니라 당초 노동조합이 가졌던 목표 또한 흐려지거나 실정법적 가치로 치환되어버리기도 한다. 이 측면에 있어 여전히 어려운 고민의 지점을 던져주는 대표적인 예가 불법파견 소송이다. 불법파견 소송은 위장도급의 실체를 드러내고 원청에게 그가 파견노동으로부터 향유하는 이익에 상응하는 사용자로서의 법적 책임을 지운다는 의미가 있다. 그런데 동시에 불법파견 소송은 실정법의 언어로 풀이하면 ‘개별 노동자(원고)의 직접고용 정규직 되기’를 목적으로 하는 싸움이기도 하다. 또한 이러한 소송은 다툼을 필연적으로 개별화시키고, 이는 단결과 연대의 규범을 본질로 하는 노동조합활동을 상대화시킨다. 아울러 불법파견 소송의 근거가 되는 파견법은 간접고용 철폐를 위해 발본적으로 의심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불법파견 소송에서 승소하기 위해 활용되어야 할 노동의 도구이자 무기가 된다.
법률투쟁 그 다음 또는 그것과 함께
앞서 자본주의 사회 안의 노동법에 대하여, 그것이 실제로 수행하고 있는 노동보호의 기능은 노동보호 그 자체가 아니라 궁극적으로 노동법 자신이 서 있을 수 있는 구체적인 생산관계를 재생산하는 데 복무하는 것임을 지적했다. 노동조합운동의 법률투쟁에 활용되는 도구인 노동법이 그러한 속성을 가지는 한, 노사분규 소송 하나하나에서의 승패 자체가 운동의 최종적인 목적지일 수는 없다. 법률의 제정이나 개정, 폐지를 이야기한다면 그 다음 또는 그것과 함께, 또 판례의 변경을 이야기한다면 그 다음 또는 그것과 함께, 법률쟁송을 통한 노동조건의 개선을 이야기한다면 판결이 내려진 그 다음 또는 그것과 함께 노동조합운동이 채워나가고자 하는 바를 고민할 수 있어야 법률투쟁에 의존하거나 종속되지 않는 경로를 모색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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