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와노동 연구소

전범(戰犯; WAR CRIMINAL)

민노연 창립식_087

전범(戰犯; WAR CRIMINAL)

2023년 12월 7일  / 한마디의 세상 Word of the World
<전망과실천> 편집부

헨리 키신저, 전범(war criminal), 냉전체제, 데땅뜨, 베트남전, 미중 수교, 세력균형

Henry Kissinger, 출처 : <Al Jazeera>

헨리 키신저 미 전 국무장관이 죽었다. 미국 좌파 웹진 <Jacobin>이 올린 그의 부고 기사 제목이 가장 압권이었다. “착한 사람은 일찍 죽는다(“the good die young”). 그는 오래 살았다. 100년을 살았다. 동양식으로 표현하자면, 천수(天壽)를 누렸으니, 하늘도 무심하다.
키신저 전기를 쓴 작가에 따르면, 헨리 키신저 ‘ 때문에’ 죽은 사람의 숫자는 3백만이 넘는다. 그러나 키신저는 살아서 그에 대해 어떠한 유감조차도 표명한 적이 없었다.

한국 언론들은 키신저를 외교의 ‘거장’, ‘거목’, ‘거인’으로 부르면서 ‘개관적으로’ 그의 삶을 조명했다. 그는 부인할 수 없이 전후 냉전체제하의 국제관계에서 중요한 인물이었지만, 중요성만으로 ‘거’(the great) 자를 거창하게 붙일 수는 없다. 아무도 이완용을 거장이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아래 전 세계 주요 언론의 키신저 사망 기사 제목을 모아봤다. 서구 좌우 언론들의 키신저 평가는 들쭉날쭉이다.

“Henry Kissinger, who shaped U.S. cold war history, died at 100”(미국 냉전 역사를 만든 헨리 키신저, 100세로 죽다) – <New York Times>

“Henry Kissinger, war criminal beloved by America’s ruling class, finally died”.(미국의 지배계급이 사랑한 전범 헨리 키신저, 마침내 죽다) – <Rolling Stone>

“Henry Kissinger, dominant US diplomat of cold war era, dies aged 100”(냉전기를 주도한 미국 외교관, 100세로 죽다) – <Reuters>

“Kissinger, the World’s most dangerous man”.(키신저,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사나이) – <Counter Punch>

“Henry Kissinger, diplomat who helped to reshape, dies at 100”(세계를 재편하는데 일조한 외교관 헨리 키신저, 100세로 죽다) – <Politico>

“Kissinger, giant of statecraft, molded post-war US history”(2차 대전 후 미국 역사를 주조한 국가기예의 거인) – <France24>

“Henry Kissinger, America’s Most Notorious War Criminal, Dies att 100”(미국에서 가장 악명 높은 전범 헨리 키신저 100세로 죽다) – <Huffington Post>

“Former US Secretary of State, dies at 100(전 미 국무장관 헨리 키신저, 100세로 사망) – <AP News>

“Henry Kissinger: Nobel Prize-winning ‘warmonger’ has died at 100”(헨리 키신저: 노벨 평화상을 받은 전쟁광 100세로 사망) – <Al Jazeera>

“US Stateman Henry Kissinger Dies Leaving a Mixed and Controversial Legacy”(미국 국가관료 헨리 키신저, 논란 많은 유산을 남긴 채 사망) – <Sputnik>

“May there be successors to Henry Kissinger in the US: Global Times editorial”(미국에 키신저의 후계자들이 있기를 바란다) -<Global Times>(중국의 반관영 해외통신사).

키신저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엇갈리는 것은 미 해병대 정보장교 출신의 국제문제 분석가인 Scott Ritter가 쓴 것처럼, 그는 “세계를 구한 전쟁 범죄자”(war criminal who saved the world)이라는 인식 때문이다. 그는 70년대 미국 닉슨 정권 하에서 국가안보보좌관과 국무장관을 지내면서 베트남전 휴전협정을 성사시켰고, 중국과 수교했으며 소련과 데땅뜨를 이뤄내 2차세계대전후 냉전 구조를 해체시켰다.

말하자면 키신저는 오늘날의 글로벌 구도를 만든 인물이다. 동시에 그는 이미 1968년 존슨 행정부에서 내부적으로 결정한 베트남전쟁 종식 계획을 폐기하고 전쟁을 계속하도록 만들었으며, 베트콩의 군사 지원 루트를 끊는다는 명목으로 전쟁 당사자가 아니었던 캄보디아와 라오스를 무차별 폭격하도록 했고, 이로 인해 최소한 수만 명의 민간인이 죽었다(일부 연구에 따르면 캄보디아에서 킬링 필드로 악명을 떨친 폴 포트 정권이 죽인 민간인 숫자보다 미군 폭격으로 죽은 민간인 숫자가 더 많다).

그는 결국 5년이 지난 1973년 월맹과 휴전 협정을 맺었는데, 오히려 이 ‘공로’로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베트남전쟁 민간인 학살과 칠레에서의 쿠데타(아옌데 정권 전복 및 민간인 학살) 사주등의 범죄 혐의까지 더해져 그는 국제사법재판소(ICJ)에 기소되었고, 이 때문에 한동안 미국 밖으로 나가기를 꺼렸다(키신저가 전후 ‘제조’한 지역분쟁은 수십 곳에 이른다).

그는 베트남전에 단지 ‘정책적’으로 개입한 것이 아니라, 폭격 지점과 시기, 방법을 직접 군에 지시하기까지 했다. 왜냐하면, 키신저에 따르면, “군인은 너무 멍청해서 장기판의 졸로 쓰여야만 하기 때문”이었다. 키신저에게 ‘군인’이란 ‘군바리’였으며, 이는 서구 정치인들의 일반적인 인식이기도 했다. 1차 대전 종전기에 프랑스 대통령이었던 죠르쥬 끌레망소는 “전쟁은 군인들에게 맡기기에는 너무 심각한 사안”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런 점에서 그는 철저하게 “전쟁은 정치의 다른 수단”이라는 클라우제비츠의 명제에 충실한 19세기적 인물이었다.

키신저의 하버드대 박사학위 논문은 나폴레옹 전쟁 뒤의 1820년대 비인 체제에 관한 것이었으며, 그는 거기서 ‘세력 균형’ 개념을 발전시켰다. 키신저에게 세력균형이란, 냉전과 같은 분리된 두 세계가 아니라 여러 강대국들이 상호 영향을 주고받는 ‘균형’을 의미하고 이를 위해 다른 ‘강대국’들도 이 ‘균형’에 동참해야만 했다. 베트남전과 중국 수교는 이를 위한 글로벌 전략의 일부였던 것이다. 키신저는 이 ‘균형’ 내에서 미국이 가장 유리한 자리를 차지하도록 외교적 군사적 수단을 사용했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아낌없이 ‘거래’도 했고 전쟁을 서슴없이 ‘제조’하기도 했다.

그리고 키신저는 중국을 ‘자본주의’ 체제로 끌어들이기 위해 ‘하나의 중국’ 원칙에 동의했으며 그 때까지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이었던 대만을 유엔에서 축출하고 하루 아침에 중국을 상임이사국으로 만들기도 했다. 그 배후에는 키신저의 ‘세력 균형’론으로 포장된, 다국적 기업들의 이해관계가 자리잡고 있었다. 그런 점에서 <Rolling Stone>이 지적했듯이, 그는 ‘미국의 지배 계급이 사랑한 전범’이었으며, 현재 중국의 관점에서는 “또 다른 키신저가 미국에 있기를 바란다”는 언론의 후한 조사처럼 이것이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부합한다.

반면 키신저의 대중동 전략, 즉 이스라엘 전략은 그가 군인을 ‘졸(pawn)’이라고 표현했던 것처럼, 이스라엘을 중동의 ‘졸’로 쓰는 것이었다. 그는 이스라엘의 군사적 위협을 무기로 삼아 중동 산유국들과 사회주의 국가들을 위협했고 내부를 분열시켰다. 동시에 여기서도 그 특유의 ‘거래’는 이뤄졌다. 중동 산유국들은 미국의 이스라엘 지원을 빌미로 ‘대미 원유 금수 조치’(이른바 오일 쇼크)를 단행했지만, 동시에 바로 그 시기에 사우디아라비아를 비롯한 중동 산유국들은 앞으로 모든 원유 거래는 미국 달러화만으로 하겠다는 비밀협정을 미국과 맺었다(이른바 오일 달러의 탄생). 이같은 키신저의 대중동정책에 위험을 느낀 이스라엘의 리쿠드당(현 집권당)의 일부 의원들은 키신저 암살 계획을 세운 적도 있었다.

키신저는 유태인이었고 나치의 박해를 피해 베를린에서 미국으로 도피한 난민 출신이었지만, 유태 민족에 별 애정은 없었다. 그는 자기 입으로 “내가 유태인으로 태어났기에 망정이지, 만일 내가 다른 인종 출신이었다면, (유태인처럼) 2천년이나 계속해서 박해받는다는 것은 이 족속이 뭔가 문제가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라고 말한 적도 있다.

결론적으로, 키신저의 냉전 해체(데땅뜨)와 세력 균형론은 더 넓은 시장과 더 많은 자본의 축적을 원하는  자본주의 다국적 기업의 이해관계의 정치적 외교적 표현이었고, 키신저는 이 글로벌 대자본의 이해관계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실현하고 구사할 줄 아는, 피로 뒤덮인  ‘외교 기술자’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만든’ 세계가 그 유통기한이 다 되어 이제 해체되어 가고 있는 것까지 볼 수 있을 정도로 오래 살았다.

지난 수십년 동안, 최소한 21세기가 되기 전까지, 비판적 지식인들에게 헨리 키신저는 적어도 전쟁과 쿠데타, 비밀공작을 상징하는 최악의 악인이었다. 그의 부고와 조사들이 그를 ‘악당들 중에서 그나마 나은’ 인물로 평가한다는 사실은, 또는 ‘엇갈리는 역사적 평가’를 운운한다는 것 자체는, 지금 이 세계가 얼마나 퇴행하고 전락했는지를 보여준다.
어쩌면 이것이 키신저가 남긴 가장 큰 유산일 것이다: ‘인간’을 이 바닥까지 그토록 순조롭게 끌고 내려온 것, 그리고 이 바닥 밑의 무저갱을 보며 더 큰 공포에 자지러들게 만든 것.

하지만 부디, 천당은 없어도 상관없으니, 지옥은 꼭 있기를 바란다. 그래야 하늘이 무심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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