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와노동 연구소

노동계급정치와 ‘노동자정치세력화’는 같은가? (2)

민노연 창립식_087

노동조합 정치가 아닌 좌파 계급정치

- 노동계급정치와 ‘노동자정치세력화’는 같은가? (2)

2023년 12월 7일 / 권영숙의 낯선 새로움
권영숙 (노동사회학자, 민주주의와노동연구소 소장)

노동계급정치, 노동자정치세력화, 노조 반대파, 노조정당, 좌파정당, 공산주의, 부르조아시민혁명, 자유주의

노동조합이 만드는 정당

마지막 질문에 대한 답을 이제 시작해보자. 과연 노동자 정치세력화는 무엇인가?그리고 정치방침에 있어서 노동자 정치세력화, 아니 더 정확히 말해서 노조중심의 정치세력화를 당연시하는 것은 맞는가? 즉 이것이 과연 ‘계급적 정치방침’과 동일시될 수 있을까? 민주노총이, 노동조합이 계급정치의 중심이고 계급정당의 행위자가 되는 것이 과연 노동계급의 정치세력화인가?

물론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조합이 정당을 만든 예들이 있다. 흔히 이른바 영미의 경로, 이른바 ‘앵글로색슨의 길’이라고 불리는 역사적 경로이자 사회적 모델이었다. 미국의 노조들이 자유주의 정당인 민주당에 자신의 ‘정치적 대표정당’이 되어달라고 의탁하는 방법이거나 영국에서 노조가 기반이 되어 만들었으나 대리정치로 귀결된 ‘노동당’이 대표적인 예들이다. 이를 노조가 주도하는 정당 즉 노조- 정당(union- party_라고 하기도 하고, 흔히 ‘영미식 유형’이라고 한다. 이는 노조-정당(union-leftist) 관계나 정당내 노조(union in party)와는 구분되는 유형이다.

그런데 이는 단지 노조와 정당의 관계 혹은 노동자들이 노조를 만들어 정치세력화하는 특정한 경로와 모델일뿐 아니라, 나아가서 노동체제, 사회경제제체, 복지체제까지 아우르며 상호 ‘제도적 보충성’을 가지는 일관된 특징이 있다. 그러므로 ‘영미식’은 단지 유형일뿐 아니라 체제이고 경로이기도 하다.  노조의 정치세력화가 노조정당일지 좌파정당내 노조일지에 따라 노동체제도 복지체제도 연동하여 변화하였고 제도화했다. 우리는 역사로부터 이 점부터 분명히 인식할 필요가 있다.

영미식의 유형은 정치체제로서 사회민주주의가 결합된 서유럽의 사민주의와는 어느정도 구분되는 ‘자유민주주의 체제’이고, 사회조합주의 노동체제와 결합된 사회복지국가와도 다른 ‘최소 사회복지국가’ 내지 자유방임적 국가였다. 영미식의 유형은 ‘조직노동’이 정치세력화하여 정당의 뼈대를 이뤘지만 결국 기존의 부르조아지가 만든 ‘자유당’을 대체한 ‘민주주의 보편정당’이 되었거나(영국), 기존의 보수적 정치엘리트- 주로 남부의 인종주의적 지역정당에 불과했던_의 민주당과 결합하여 조직노동의 배타적 이해를 도모하는 방식(미국)이다.

그런데 현재 한국 노동계급은 아니 노동조합은, 아니 민주노총은 형식적으로는 이미 영미식의 유형인 ‘노조정당의 길을 시도한 적이 있다. 바로 민주노총이 창립하자마자 1기 권영길 위원장 집행부가 ’국민승리21‘이란 준정당을 거쳐 만든 ’민주노동당‘이 바로 일종의 ’노조정당‘이었다. 하지만 민주노총등 민주노조운동은 이 시도와 정치전략을 영미식의 유형이라고 보지 않는다, 혹은 인정하지 않는다. 민주노총 위주의 정치방침을 정하면서도 이를 노조의 정치세력화라고 하지 않고 ’노동자의 정치세력화‘ 혹은 나아가 ’노동계급정치‘라고 일반화해왔다. 나아가 민주노총을 중심으로 한 민주노조운동은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이나 넓게 서유럽의 사회복지국가를 지향한다. 사민주의라고 불리는 것이다. 이렇듯 한국에서 노조의 정치세력화는 노동자의 정치세력화이기도 했고, 노동계급의 정치화로서 ’노동계급정치‘이기도 했다. 하지만 구분하지 않는다고 해서 구분이 안되랴!

그렇지만 일단 액면 그대로, 구분하지 않은 채 살펴보자. 민주노조운동, 혹은 민주노총 중심의 정치세력화는 영미식의 길이 아니라는 말인데, 과연 민주노총은 무슨 수로 자신들의 정치세력화는, 노조가 중심이 되는 정치세력화는 이들 미국과 영국과 다른, 그래서 ‘노동계급정치’일 수 있다고 자임하는가? 혹은 다른 미래를 자신하는가? 과연 조직화된 노동은 노동자의 정치세력화와 등치될 수 있는가? 혹은 노동자들이 ’노조‘로 조직된 틀을 정치화하고 정당화한다고 해서 과연 계급정치일 수 있는가? 조직노동은 계급정치의 주체일 수 있는가? 이 질문들이기도 하다. 결국 이는 노동계급정치가 애초에 왜 자본주의 사회에서 필요하고 어떤 이념적인 질을 가져야하며, 어떤 역사적인 사회적인 역할을 해야하는지에 대한 문제이다.

9월13일 민주노총과 4개 ‘진보정당’ 합의문. 출처 <노동과 세계> 2023.9.15

노동계급정치의 시작

근대 산업자본주의의 발전과 함께 형성된 부르조아지 시민들은 정치적 세력화를 통해서 봉건제하 군주와 토지귀족들이 독점한 ’정치시장‘에 진출을 꾀했다. 그것이 군주제를 입헌 군주제로 변경하고, 귀족들과 부르조아지들이 함께 정치를 논하고 결정하는 ’의회‘를 만들자는 것이었고, 그것을 위해서 서로 사생결단의 쟁투를 벌이는 가운데, 일부 자유주의자들은 급진화되어 자코뱅(산악파 급진파) 세력이 되어 ’공포정치‘를 하기도 했고, 결국 ’테르미도르 반동‘을 거쳐 입헌군주제하에서 귀족과 신흥 대 부르조아지, 자유주의 부르조아지가 함께 하는 ’민주주의‘ 정치체제를 만들었다. 그 과정에서 부르조아지는 규모면에서 도시안에서 커져가던 노동계급(막 ’프롤레타리아‘라는 신조어를 가지게 된 사회집단)의 동원과 협조가 불가피했고 그것이 1848년 혁명을 가능하게 했다.

민주주의자들이 노동계급을 새로운 부르조아 자유주의 정치질서 안으로 포섭하기 위해 ’공화주의‘라는 포괄적인 민주주의를 제시했지만, 그것은 1830년 봉기나 1848년 혁명이 곧바로 반혁명으로 돌변한 것만큼이나, 자본주의적 계급 불평등과 정치적 불평등에 대한 대안이 될 수 없었다. 그런 공화주의와 온갖 사회주의들을 대체한 것이 바로 1848년 혁명과 반혁명기에 칼 맑스가 집필한 <공산주의자 선언>에 명료하게 강령적으로 정식화된, 역사적 유물론에 근거한 사회주의, 아니 공산주의 이념이었다. 1789년 프랑스 시민혁명이후에 부르조아지와 쁘띠 부르조아지 내 급진분파에 불과했던 ’좌파(the Left)‘는 이제 공산주의자를 의미하는 것으로 더욱 구체화되었다. 맑스가 <공산주의자 선언>에서 온갖 ’사회주의‘ 부류들까지 비판하고 사회주의와 구분되는 ’공산주의‘라는 말을 사용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었다.

그리고 이제 형성기를 거친 노동계급은 한편으로 또다른 ’근대적 발명품‘이기도 했던 ’노동조합(trade union)‘으로 결집하고 조직하는 과제와 더불어 좌파와 노조의 결합이라는 이중적 과제를 동시에 안게 되었다. 이중적 과제다! 그리고 동시적 과제다! 그리고 후자에서 첫 번째 발걸음이 바로 자유주의 정치로부터의 독자화였다. 1848년 혁명의 한계를 뛰어넘는 것, 이제 노동계급을 동원하기만 원하는 급진민주주의나 공화주의를 비롯한 온갖 자유주의 민주주의 이데올로기와 정치를 대체하는 자신의 계급적 이념을 내세우는 계급정치를 시작하는 것이다.

하지만 자유주의로부터 독자화만이 계급정치의 시작이 아니다. 이는 단지 계급 외부에 대한 최소한의 대타적인 정립일뿐이다. 1789년 프랑스 부르조아시민혁명, 즉 부르조아(쁘띠 부르조아)가 주도하는 시민민주주의가 당시 출현하기 시작한 새 계급 프롤레타리아의 혁명적 동원은 하되, 정치적 계급으로 인정하지 않았을 때, 19세기 노동계급의 첫 번째 과제인 부르조아 시민세력, 즉 자유주의로부터의 독립 혹은 자립이었다. 19세기 근대 민주주의 정치는 이렇게 하여 부르조아지 시민혁명이 군주제의 철폐도 이루지 못한 ’미완의 부르조아지 민주주의‘로 귀결될 때, 노동계급의 민주주의라는 새로운 이념의 압박 속에서 재구성되기 시작하였다.

여하튼 이런 대외적인 표방은 얼마든지 혹은 어느 정도 형식적으로 가능할 것이다. 또 외부적으로는 가능하다. 하지만 그것이 ‘내부적 정립’을 꼭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앞서 언급한 영국에서 노조가 주축이 되어 만들어진, 최초의 노조기반 정당인 (즉 좌파 중심으로 만든 좌파정당이 아닌) 노동당의 경우가 그렇다. 그들은 보수당과 자유당에 대타적으로 정립하여 제3세력으로 나섰지만, 이후 우경화를 거듭하면서 자유주의 부르조아의 이해를 대변하였던 자유당을 대체하는 당이 되었고, 현재 보수당과 함께 양당정치 구도를 분점하고 있다. 해서 내가 보기에 영국의 노동당은 외부적 정립의 성공, 내부적 정립의 실패 사례이다 (한국에서 여전히 일부 신좌파들이 영국 노동당을 노동정당, 심지어 좌파정당이라고 보는 것은 근거가 부족하고 현실정치로 보면 적합하지 않다).

한국의 경우도, 이를테면 이주노동자에 대해 배외주의적, 국수주의적 플랭카드를 내건 민주노총의 어느 건설노조 지부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그들 역시 ‘노동자(노조)의 정치세력화’와 ‘이제 민주당으로는 안된다’는 말에 대해선 동의하고 있다. 또 올해 국회 보궐선거에서 전주 강성희 국회의원 당선자처럼, 당선사례로 “민주당 고맙습니다”라는 플랭카드를 내걸고도 민주당으로부터 독자화라고 우길 수도 있다. 당선을 위해서 전주라는 지역이므로 이런 현수막은 내걸지언정 우리는 민주당이 아니니까 말이다.

이제 ‘양당정치’로는 안된다는 식의 분리선언은 도처에서 터져나오고 있다. 민주당 내부에서도 비판세력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재명류에 대한 비판이 더 압도한다는 점에서 민주당 보수 우파쪽의 흐름이 주도하지만 그들 역시 ‘양당정치’ 극복을 말하기도 한다. 노조운동 안에서도 민주당에 대한 ‘대타적인 독립’은 이제 다들 말한다. 한마디로 격세지감이다. 그리고 잊을만하면 나오는, 소위 진보정치, 의회정치를 하자고 할 때 나오는 레퍼토리가 되고 있다. 하지만 정작 문제는 바로 이 지점이다. 이 지점에서 노동계급정치는 노동자 정치세력화가 되기도 하고, 노조 정치세력화로 귀결되고 만다.

필자는 2011년부터 사회적파업연대기금을 제안하고 활동하면서 동시에 민주당에 대한 비판, 자유주의 비판을 꾸준히 해왔다. 노동계급정치의 시작은 자유주의로부터, 쁘띠 부르조아지로부터 정치적 독립에서 출발한다고 말하고 글쓰고 강의했었다. 그렇다면 지금의 ‘양당정치 불가론’으로 나타나는 변화의 양상들은 나 역시 환영해야한다. 하지만 환영할 수 없다. 오히려 씁쓸하다. 내용과 방향성이 없는, 혹은 내용과 방향성을 스스로 정립하고 드러내지 않는, 자신의 편이 될 리 없는 외부에 대한 대타적인 정립의 목소리들이 자못 공허하다. 이것은 출발 이전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는 출발하기 전에 정립하여야할 문제인 것이다.

 9월14일 민주노총 임시 대의원대회. 출처 <노동과 세계> 2023.9.15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모호성과 한국 자유주의정치

그러니까 지금 한국에서 노동정치에 대한 다수의 견해는, 이렇게 정리된다. 민주당으로부터 독자화한 노동자 정당을 만드는 것이 노동계급정치다. 그리고 이것을 두루뭉술하게 ‘노동자 정치세력화’라고 말하기로 한다. 또한 계급이라는 말도 삭제한 ‘노동정치’라고도 말한다. 혹은 이들 대다수중에 또 다수는 노동자 정치세력화를 노조의 정치세력화와 등식화한다. 그렇다면 현존하는 양대 노총인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이 조합원들을 정치적 조직적 기초로 한 정당을 만들면 그게 바로 노동(계급)정치이고 노동자정치세력화라는 것이다.

결국 핵심 단어는 ‘노동자 정치세력화’다. 근데 이건 과연 무엇인가? 왜 계급정당이라는 말, 노동계급정당이나 노동계급정치라는 말을 극구 피하고 이 말을 사용하는가, 이는 자기 검열의 결과인가? 심지어 이것이 말이 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즉 계급없는 노동정당, 아니면 계급으로 형성되지 않은 노동자, 아니지 정확히는 노조로 조직된 노동의 정당, 즉 조직노동의 정당을 계급정치라고 말할 수 있으련가. 현재 ‘노동자 정치세력화’론자들과 노조중심의 정당운동을 주창하는 이들은 여전히 모호하게 이 근처 어디를 유령처럼 배회하고 있을 뿐이다.

맑스는 “공산주의라는 유령”을 말했고, “계급투쟁의 역사”를 말했는데, 한국에서 민주화이행이후 민주주의 정치하에서 ‘계급정치’는, 정작 중요한 ‘계급’이라는 단어는 빠지고 ‘노조’가 좌파를 대체하는 정치를 노동정치로 내세우는 것이 현재의 모습이다. 과연 이럴진대 노동자 정치세력화는 무엇인가? 그리고 다음 뼈아픈 질문은, 왜 굳이 한국의 노동계급이, 그리고 좌파가 이 조직노동이 만드는 정당에 함께 해야하는가 라는 말이다.

물론 이런 시나리오를 가정해볼 수 있다. 첫째, 예컨대 만약 미국처럼 민주당이 이재명 당대표가 조직노동에 대한 폭넓은 개량정책을 취하면서, 이른바 ‘자유-노동동맹(lib-lab coalition)’ 전략을 택하게 된다면, 그것은 노동자 정치세력화나 노조정치세력화와 어떤 차이가 있을까? 혹은 자유주의 세력이 그렇게 입장을 좌쪽으로 일보 선회한다면 노동자 정치세력화라는 구호는 과연 살아남을까? 미국의 경우처럼 민주당- 민주노총이 되지 말라는 법이라도 있는가?
(주: ‘자유-노동동맹’개념에 대해서는 필자의 졸고, “촛불의 사회운동정치(2018)” 참조)

물론 현재 지형으로 보면 아마도 그런 일은 크게 구도가 바뀌지 않는한, 한국에서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한국의 자유주의정치를 대표하는 민주당은 민주노총이 만든 혹은 만들려는 정당을 무력화, 약화시키면서 자신들이 친노동정당이라는 식으로 진격할 것이다. 알량한 노동정책 일부의 ‘개선과 ’개악‘을 반복하면서, 노동계급정치로의 전망을 계속 가릴 것이다. 즉 노조정당의 소수 약체화, 나아가 노조정당의 필패.

혹은 둘째, 지금 민주노총의 관료들, 조합주의자들, 전투적 조합주의자들이 공통적으로 가진 지반처럼, 민주노총이 중심이 된 진보정당을 만드는 방법도 있다. 이것은 영국의 노동당의 경로다. 한국의 경우 전국회의라는 최대정파와 진보당이 나아가려는 방법이라는 점이 흥미롭다. 뿐만 아니라 현재 활동하는 진보정당들 역시 일제히 민주노총과 연계되는 진보정당 전략을 내세우고 있다. 좌파정당으로 나선 노동당(구 변혁당이 합당한)도 결국 이번 2024년 총선 전략을 수립하는데 있어서 이 방향으로 많이 선회했다. 녹색당, 정의당은 ’노동부재‘에 대한 비판을 수용해서인지, 아니면 보편정당catch-all party로서 투표율의 한계를 경험해서인지 부쩍 민주노총등 조직노동에 러브콜을 보내고 있다.

그 결과 9월13일 민주노총과 진보당, 정의당, 녹색당, 노동당등 4개정당의 총선방침 합의문이 가능했다. 민주노총은 9월12일 중앙집행위에서 단일 정치방침을 확정했고, 이로써 ’노조반대파‘는 반대할 명분을 4월24일 대의원대회에서 이미 반납하였으므로 ’반대없는 합의‘가 9월15일 임시대의원대회에서 재적 대의원 933명 중 770명(82.5%)가 찬성함으로써 이뤄졌다. 단지 반대는 한 대의원이 제안중 “아래로부터의 힘을 모아내는 방식으로”라는 표현에 대해 “아래가 있다면 위가 있다는 의미”라고 문제제기하여 이를 없앴다고 한다. 

민주노총과 4당 합의문이기도 하고 민주노총 중집에서 확정한 안이기도 하고 대대에서 통과된 안이기도 한 정치방침은, 2026년 지방선거까지 연합정당 건설을 목표로 2024년 총선에서는 연합정당 건설부터 정책연대, 후보단일화, 공동 선거운동 등 모든 가능성을 열고 다양한 형태로 총선에 공동대응한다는 것이 골자다.

근데 그렇게 만들어지는 ’노조정당‘이 혹은 ‘계급연합정당’이 계급정당이라고 할 수 있으랴, 그리고 좌파정당이라고 할 수 있으랴? 영국의 경우 노조 간부들이 정치인이 되고, 심지어 좌파 블록도 대거 진출하여 노동당내에 자리를 잡았고, 의원 내각제하에서 노동당을 통해서 의회에서 정치를 했고 집권도 수없이 했는데 그들이 과연 무슨 ’노동정치‘를 했던가? 그것이 ’노동계급정치‘이긴 했던가. 아니면 그것 역시 부르조아 민주주의 정치였을 뿐이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왜 굳이 노동정치를 독자적으로 구분하였던가. 또 경제적 위기와 사회적 위기때 노동조합이 기반이 된 노동당이 노동-자본의 사회적 관계에서 어떤 포지션을 취했던가.

영국 노조들이 만든 노동당은 결국 앞에서 언급한대로 부르조아지 계급이 만든 자유당을 대체하면서, 양대 부르조아 정당중 한 정당으로 잘 유지되어 왔다. 조직노동(노조)는 그 정당에 간부들을 수혈하여 공급하고 정치적 조직적 기반이 된다. 노조는 조합원들의 배타적 이해를 노동당을 통해서 보호받고 정책으로 수립하도록 한다. 그 정책과 제도는 전계급적일 리가 없다.

혹은 영국식의 경로가 아니고 만약 사민주의 정당을 만들고 싶다면 지금이라도 분명히 그 노선을 말해야한다. 애매하게 ‘노동자 정치세력화’라고 말하지 말고 말이다. 아니면 “노조주도 연합정당”의 결성이라고 애매하고 말하지 말고 말이다. 연합정당이란 말 앞에 붙는 수식어는 분명 계급이나 노동이 아닌 ‘진보’일 것이다. 이른바 ‘진보연합정당’은 2026년까지 민주노총이 주도하는 진보정치의 프로그램이다. 하지만 한국 정치에서 진보가 무슨 진보인지는 언제나 분명치 않았다. 진보인척 하기 위한 진보, 진보를 자칭하기 위한 진보가 도처에 유령처럼 출몰하는 것이 한국의 운동정치, 제도정치다. 마치 19세기에 봉건 토지귀족부터 부르조아, 쁘띠 부르조아등 다양한 정치세력이 ‘온갖 사회주의’를 참칭하고 그래서 ‘진정한 사회주의’라고까지 자기 주장한 것처럼, 이 사회, 21세기 남한사회에서 진보는 과연 무엇인지 갈수록 오리무중이다. 이유는 이 말이 모든 ‘분별’과 ‘정립’을 모호하게 만드는데 아주 탁월한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치적으로 분별할 수 있도록 자신의 정치를 정확히 드러내는 것이 대혼란의 시대에 혼란을 줄이고 각자 정립, 함께 정립이 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분명히 알아야할 것은, 노동자가 정치세력화한다고 해서, 일부 노조 관료들이 정치인이 된다고 해서, 그들이 중심이 되고 노조가 정치적 기반이 되는 정당을 만든다고 해서, 그것을 우리는 ‘노동계급정치’라고 하진 않는다는 것이다.

자유주의정치로부터 독자화란 차이, 분별, 정립

그러므로 자유주의정치로부터 독자화라는 말도 잘못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자유주의로부터 독자화는 단지 민주당등 자유주의정당에 대해 조금 다른, ‘진보적인’정당들을 만들거나 노동자들이 정확히는 노조가 정당을 만든다는 의미가 아니라, 말그대로 한국 노동계급의 정치적 계급적 독자화이다. 그것은 첫째, 한국 노동이, 조직노동으로 구성된 노동이든 뭐든 계급으로 자신을 주장하고 선언하는 것이다. 둘째, 조직노동이 아니라 계급으로서 정치를 하겠다는 입장을 정립하는 것이다. 그래서 셋째, 민주주의를 독점하고 주도해온 부르조아와 쁘띠 부르조아의 정당정치인 자유주의로부터 정치적으로 독자화하는 것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자유주의정치로부터 독자화는 이 3가지를 모두 포함하는 말이다. 그래서 ‘노동계급정치’라는 말이 정확해지는 것이다. 그리고 네번째로 의회민주주의와 의회정당은 다른 정치, 다른 지향을 가진 정치, 즉 노동계급의 정치를 향한 교두보로서, 운동적인 쓸모로서 ‘의회’와 선거정당을 활용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노동자 정치세력화와 노동계급정치는 엄연히 구별되어야한다. 심지어 현재의 한국의 좌파와 노동계급운동을 둘러싼 지형으로 보면 계급정치는 지금이야말로 ‘노동자 정치세력화’로부터 스스로 반정립되어야한다. 여기서 첫 걸음부터 분명히 해야한다. 노동계급정치는 노동자들이 조직노동이 자유주의정당과 다른 정당을 만드는 형식적인 분리가 아니다. 단순히 노동자들과 노동조합들이 형식적이고 물질적인 정치정당을 만들거나 노동자들이 의회로 진출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노동계급정치는 자유주의로부터 내용적 이념적 분리와 독자화를 의미하는 것이다. 즉 그것은 자유주의정치로부터 형식적인 독립선언을 하는 ‘제3당’ 혹은 ‘제3지대’를 만드는 의미로 중립적으로 이해될 수 없다. 그것은 노동계급이 자신의 계급적 정치사상을 갖지 못한채 자유주의와 민족주의로 경도됐던 흐름을 끊고, 노동계급과 노동조합 외부에서 발현한 사회주의라는 근대 정치적 이데올로기를 자신의 계급적 사상과 정치적 이념으로 삼는 내용적인 독립을 말하는 것이다. 이를 노동계급과 사회주의의 결합이라는 의미에서 계급정치, 노동계급정치라고 하는 것이다.

하지만 지난 4월 민주노총 임시대의원회대회에서 우리가 확인한 것은, 이 모든 것에 대한 ‘미분별’, 그리고 ‘미분화’된 상태였다. 서로 열심히 반대하고 찬성하지만, 사실은 찬성하는 것도 반대하는 것도 크게 내용과 메시지에서 차이가 없다. 나아가 9월14일의 민주노총 임시대의원대회는 4월24일 대의원대회에서 이미 제출됐던 안건에서 차이없는 ‘노조 정치세력화’의 입장을 담아냈다. 그리고 차이라면 그 6개월동안 진보당, 노동당과 정의당, 녹색당등 4개 정당이 민주노총이 주도하는 정치전략에 다들 발을 담기로 한 것이다. 여기서 순서도 참 흥미롭게도 9월12일 중앙집행위 단일안 확정, 9월13일 민주노총과 4개정당 합의, 그리고 9월14일 임시 대의원대회 표결이다. 하지만 이를 표결이라고 할 수 있을까? 4.24 대대의 ‘질서있는 토론’은 결국 9월14일의 ‘질서있는 표결’로 마무리되었다. 그 어디서도 노동계급정치의 방향을 두고, 그 이념을 두고 격렬한 ‘사회변혁적’인 토론도 쟁투도 없었다. 과연 이렇게 평화롭고 질서만 있어도 될지 걱정스러울 정도이다.

결국 한국의 민주노조운동은 여전히 노동조합을 ‘정치적 기관’으로 혹은 ‘정치적 엔진’으로 생각한다. 기관과 엔진은 있으나 사상과 지도가 없는데 그것은 노동자주의라는 애매한 주의로 대체한다. 노동자주의 (workerism)는 87년이후 노동배제적 민주주의라는 악조건 때문에 더욱 강화되었고, 이는 좌파가 아닌 노동조합을 중심으로 한 정치정당화의 길을 열었고 그것이 민주노동당이었다. 그리고 여전히 현재의 민주노총등 민주노조운동은 노조중심의 진보정당을 만드는 것을 노동자 정치세력화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것은 노동계급정치가 아니라 범계급연합정치일 것이다. 계급정치 없는 진보정치, 그리고 좌파없는 노조정치 일 것이다.

결국 사회주의가 없는 노동자 정치세력화는 노조의 경제주의와 정치에서 의회주의라는 쌍날개를 주축으로 한국 노조운동의 우경화, 조합주의화, 그리고 정치적 독자성의 실패로 귀결될 것이다. 왜냐하면 노동자 정치세력화를 노조 정치세력화로, 나아가 노동자들이 투표소에서 민주당 대신 찍을, 노동조합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정당을 하나 만드는 것쯤으로 이해한다면 그것은 여전히 계급정치로서의 독자화라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계급정치와 좌파의 부재속에서 노동자의 정치세력화는 결국 자유주의 정치의 한계를 넘어서는 독자화에 이르지 못할 것이다. 계급정치는 여전히 이렇게 출발선에서 서성이고 있다.

결국 다르지 않으니 분별이 되지 않고,
분별이 되지 않으니 차이가 없어진다.
차이가 없으니, 정립을 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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