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와노동 연구소

가짜뉴스, 선동, 검열, 그리고 오도된 세상 (part2)

허위는 어떻게 만들어지고 진실을 대체하며 퍼져나가는가? 


- 가짜뉴스, 선동, 검열, 그리고 오도된 세상 (Part2) 


2024년 4월 4일 / 이슈 리포트
글 권영숙 민주주의와노동연구소 소장

우크라이나전쟁, 한국 4.10 총선, FOMO, TINA, 여론조사, mass formation, ‘적백 내전’

1. 최초의 희생자, 혹은 예전에 죽은 목숨

볼로도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의 부인인 올레나 젤렌스카는 지난해 한국을 방문한 뒤 곧장 미국으로 향했다. 미국에서 젤렌스카는 힐러리 클린턴 등 저명한 여성인사들과 TV 아침방송에 출연했다(한국으로 치면 아침마당 비슷한 프로그램이다). 젤렌스카는 우크라이나 국민들이 얼마나 영웅적으로 투쟁하는지 설명하면서 ‘토마토 통조림 병'(tomato jar) 사건을 들었다. 우크라이나 키에프에 살고 있는 주부가 우연히 발코니에서 토마토 통조림 병을 들고 있다가 밑에 러시아의 드론(Sahed 136)이 날아가는 것을 보고는 통조림 병은 던져 격추시켰다는 것이다. 힐러리 클린턴은 이 영웅적 행위에 찬사를 보냈고, 젤렌스카는 “오직 우크라이나 여성들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자랑했다. 

Sahed 136은 사거리 1000km, 고도 100m, 속도 시속 약 100km로 날아가는 무인비행기다. 크기는 폭이 약 2.5m 가량 된다. 이 드론을 통조림 병을 던져 ‘격추’시키기 위해서는 발코니 위치가 지상에서 100m 이상에 있어야 한다. 즉 대략 25층이 넘어야 한다. 게다가 시속 100km면 1초 동안 가는 거리는 약 27m가 넘으며, 인간의 동체시력(어떤 상황에 목격했을 때 거기에 신체가 반응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이론상 0.4초가 된다(하지만 현실에서는 아무리 뛰어난 운동선수라고 할지라도 반응하는데 그보다도 훨씬 오래 걸린다). 그리고 Sahed 136 드론은 0.4초 동안에는 약 10m 이상 이동한다. 

물론 이론적으로 통조림병으로 드론을 요격하는 일이 불가능하지 않다. 온갖 우연과 기연과 기적과 행운이 겹쳐지면, 거기에다가 박근혜씨가 말한 ‘온 우주의 기운이 도우면’ 가능할 수도 있겠다. 그런데 그같은 ‘이적’은 오직 우크라이나에서만 발생한다. 공중전의 신화인 “키에프의 유령”(ghost of kiev)이나, 백발백중 일격필살의 jabline(미국 록히드마틴이 만들어 우크라이나에 준 대전차 로켓)도 우크라이나에서만 유효하다. 

 “전쟁의 최초의 사상자는 진실”

전쟁에 관한 오래된 격언 중의 하나는 “전쟁의 최초의 사상자는 진실”이라는 것이다. 당연히 전쟁에서는 거짓이 우선한다. 그러나 거짓에도 물리적 한계와 이성적 경계는 존재한다. 거짓이 도를 넘으면 그것이 아무리 반복적으로 외쳐져도 신뢰를 얻지 못한다.

거짓이 계속 유효하기 위해서는 과학적 사고를 넘어서는 ‘보상’이 존재해야만 한다. 즉 거짓말을 할수록 찬양받고 지원을 받아야 더 큰 거짓말이 탄생한다. 그래서 미국 사회학의 시조이자 진화사회론자였던 허버트 스펜서는 이렇게 말했다: “바보 짓에 상을 주면, 천지에 바보가 넘쳐나게 된다”. 거짓말도 마찬가지다. 

매우 역설적이게도, 이것이 우크라이나의 운명이었다. 우크라이나가 서구에서 ‘대중적’으로 전쟁 지원을 받을 수 있는 길은 ‘우리가 승리하고 있다’고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전쟁터에서 ‘물리적 현실’, 즉 장비, 병력, 전술에서 모두 뒤쳐진다는 객관적 사실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이들은 ‘영웅’과 ‘기적’을 불러내서 지원을 호소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전쟁터의 현실이 악화될수록 더 큰 거짓말이 요구된다. 마침내는 ‘토마토 통조림병 영웅 가정주부’가 탄생한다. 그리고 그것을 젤렌스키의 부인이 미국 부인들을 상대로 떠들어대고 현혹한다. 거짓이 더 큰 거짓으로 나아간다.  

단지 우크라이나뿐만이 아니다. 전쟁 초기부터 지금까지도 여전히 이어지고 있는 ‘러시아 탄약은 조만간 떨어질 것’이라는 주장은 미국 및 서유럽의 장성들과 정보기관, 군사 씽크탱크, 그들 국가의 정부 고위 관료들이 모두 목놓아 주장해왔던 말이다. 핵심은 이걸 알고 하는 소리냐, 아니면 진정 모르고 하는 소리냐 이다. 

원거리 포격전이 한창이던 지난 2022년 8월, 러시아의 퇴역 장성은 러시아 국영 TV에 출연해서 “러시아군은 전쟁에 대비해서 3년치 탄약 재고를 유지할 것을 원칙으로 한다”고 말한 바 있다. 이는 구소련때부터의 군사 정책이다. 문제는 이 ‘3년’이 우크라이나같은 국지전이 아니라, 나토군 전체와 상대하는 전면전을 전제로 한 것이라는 점이다. 이 때 러시아는 전면전에 약 550만명의 병력을 동원하는 것을 가정하고 있다. 

현재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전쟁에 동원한 총 병력은 약 65만명 정도로 추정된다. 그러니까 현재 전선에 투입된 병력의 9배의 병력과 3년 동안 쓸 수 있는 탄약 재고의 유지가 러시아 군의 원칙이라는 것이다. 

또한 영국 왕실군사연구소(RUSI)의 추정에 따르면 러시아는 지난 2022년에는 10개월 동안 약 1천만 발의 152mm 포탄을, 2023년에는 10월까지 10개월 동안 9백만발의 152mm 포탄을 사용했다. 월 평균 약 95만발(일 평균 약 3만2천발) 꼴이다. 만일 러시아가 3년 재고 원칙을 준수하고 있다면, 러시아는 앞으로도 10년은 더 현재와 같은 수준의 포탄 소비를 유지할 수 있다. 그리고 그 10년 뒤에는 그 기간동안 부지런히 생산한 새로운 포탄들로 다시 10년은 쓸 수 있을 것이다. 

이 ‘3년 재고 군사원칙’은 나토에도 잘 알려져 있다. 그러니 나토 군 장성들이 이를 모르고 러시아 포탄 곧 소진이라고 주장한 것인지, 알면서도 거짓말을 한 것인지는 오리무중이다(처음에는 의도적으로 거짓말하고 있다는 평가가 주를 이루었지만, 그 뒤 이들의 행적을 보면 놀랍게도 아예 몰랐을 가능성도 꽤 높다. 서구는 러시아를 잘 모른다!). 

전쟁에 관한 오래된 격언 중의 하나는 “전쟁의 최초의 사상자는 진실”이라는 격언이 있을만큼,  당연히 전쟁에 대한 뉴스는 사실이 아니다. 이에 대한 가장 큰 책임은 전황을 알리는 언론에 있기는 하지만, 언론이 터무니 없는 기사를 써도 그것을 받아들여주는 사회 시스템이 존재해야만 언론이 마음놓고 아무 말이나 할 수 있다. 

예컨대, 사상자 숫자를 보자. 전쟁의 사상자를 확인하는 방법은 매우 간단하다. 나날의 사상자는 당연히 언론이 알 수 없다. 그러나 장기적 통계를 내면 손쉽게 상황을 이해할 수 있다. 

전쟁 발발시에 우크라이나 군 병력은 26만명이었다. 그리고 예비사단과 경찰군 등을 포함한 준군사조직 병력은 약 31만명이었다. 총 57만 여명의 전투원이 있었다. 그리고 지난해 말까지 10차례의 동원령이 있었다. 우크라이나 정부가 당초 밝힌 목표대로라면 100만명이 징집되었어야 하지만, 실제로 얼마나 징집되었는지는 확인 불가능하다. 100만명 목표를 채웠다고 가정한다면 우크라이나 총병력은 모두 150만명이 넘는다. 이 병력은 다 어디가고 다시 50만영을 징집하는 총동원령이 나왔을까? 우크라이나 전선 곳곳에서 병력 부족 때문에 아우성치고 있다는 기사가 줄을 이어 나오고 있다. 

우크라이나 정부의 말을 곧이곧대로 수용한다면, 정부가 징집했다는 150만명으로도 병력이 부족할 정도로 사상자가 너무 많이 발생해서 추가로 50만명을 징집해야 한다면 우크라이나 정부군의 병력 손실은 어마어마하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우크라이나의 젤렌스키 대통령은 지난달에 우크라이나 정부군의 총 사망자 숫자는 고작 3만 2천명이라고 발표한 적이 있다. 우리는 이 사람이 전직 코미디언이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하지만 전쟁을 둘러싼 코미디라면, 이는 매우 슬픈 코미디이기는 하다. 

지난해 가을에는 영국의 의수, 의족 제작 의료업체가 우크라이나에서 5만개의 의수, 의족 제작을 주문받았다고 밝힌 바 있다. 2차 대전을 기준으로 놓고 말하자면, 영국군은 2차 대전을 통털어  4만 9천개의 의수, 의족을 공급받았다. 그리고 당시 전사자 숫자는 50만명이었다. 

역사에 대한 무지 

하지만 무엇보다 우크라이나 전쟁을 둘러싼 뉴스와 발언들에서 가장 놀라운 것은 ‘역사’에 대한 무지’다. 애당초 ‘우크라이나’라는 국가는 존재하지 않았다. 레닌과 볼세비키 혁명에 성공한 이들이 소비에트 연방(소련)을 창설하면서 인위적으로 만들어준 국가였다. 왜 멀쩡한 러시아 제국의 일부를 따로 떼어내서 우크라이나 공화국을 만들었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의견이 있다. 

가장 설득력이 있는 것은, 1차 대전 막바지에 러시아와 당시 프러시아 제국과의 평화협정에 따른 것이라는 주장이다(우크라이나가 양국 사이에 완충지대 역할을 한다). 유사한 견해로 1919-1921년 소련의 ‘적백 내전'(적군과 반혁명 백군간의 내전) 당시 개입했던 서구 국가들과의 타협의 결과라는 주장도 있다(당시 약 3만여명의 미국, 영국군이 러시아에 침입, 진주해 백군의 편을 들어 볼세비키 적군과 싸웠으며, 특히 미국은 해병대 8천명을 블라디보스톡에 진주시켰다). 

우크라이나의 불안정한 위치는 바로 역사상 이 시점에서 출발한다. 백군을 격퇴하고 러시아혁명의 ‘완수’를 선언하기 위해서 우크라이나라는 국가적 완충지대가 필요했을 수도 있다. 그리하여 거의 언급되지 않는 사실이지만, 우크라이나는 유엔 창설 당시 별개의 독립국가로서 유엔 회원국으로 가입했다. 벨라루스 공화국도 소련 연방의 일원이지만 마찬가지로 독립 국가로서 회원국이 되었다. 

더욱 알려지지 않은 사실은, 2차 대전이 끝난 뒤에도 우크라이나 갈리시아 지방(폴란드 접경의 엘포프를 중심으로 한 주변 지역)에서는 우크라이나 나치 부역자 잔당이 자신들의 빨치산 전쟁을 수행했으며 이는 1954년까지 이어졌다. 이 내전으로 약 10만 여명이 사망했다. 이 나치 부역자 잔당을 배후에서 지원한 것은 당시 영국과 미국이었다 (정확히 말하자, 미영등 연합국은 독일과 싸운 것이지 파시스트와 싸운 것은 아니다). 

소련도 나름 대비를 했다. 쿠바 미사일 사태로 유명한 흐루시쵸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은 우크라이나 출신이다. 그 뒤를 이은 브레즈네프 서기장 역시 우크라이나 출신이다. 특히 브레즈네프는 우크라이나의 드네프르페트로브스크시를 거점으로 정치적으로 성장했으며 집권 뒤에는 동향 인물들을 요직에 임명해 ‘드네프르페트로브스크 마피아’라는 별칭까지 얻었다. 소련은 레닌의 뒤를 이는 스탈린(그루지아 출신), 흐루시쵸프, 브레즈네프까지 무려 60년 가까이를 비러시아계 인물이 최고 권력자 자리를 차지했다. 그만큼 소련은 내부의 결합에 예민한 상태였다는 뜻이기도 하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에 대한 태도가 언뜻 모순적인 것도 이 때문이다. 러시아에게는 우크라이나는 ‘타국’이 아니라, 자신의 일부다. 수많은 러시아인들이 우크라이나 출신이거나 그에 연고가 있으며, 우크라이나도 마찬가지다. 왜냐하면 원래 한 국가였기때문이다. 이번 전쟁도 러시아에게는 기본적으로 ‘내전’의 성격을 갖는다. 러시아인들에게는 형제와의 싸움이며 동족과의 전쟁이다(그래서 초기에 대단히 관대했다). 

이 내전은 언제 시작되었을까? 2014년 5월이다. 그 해 초 미국의 전 국무차관 대행 빅토리아 눌란드가 “50억 달러를 투자했다’고 자랑한 유로메이단 쿠데타로 야뉴코비치 정권이 붕괴하자 우크라이나 남부의 러시아계 주민이 다수인 도시에서는 항위 시위를 벌였다. 이를 무차별적인 살육으로 진압한 것이 신나치 민병대 조직인 아조프 연대였다. 2014년 5월 2일 오뎃사에서 메이데이 시위대가 아조프 연대에게 쫒겨 노조 건물 안으로 피신하자 여기에 방화해 40여명이 사망했고, 그 일주일 뒤에 마리우폴에서도 아조프 연대에 의한 대규모 학살 사건이 벌어졌다. 당국은 처벌은 커녕 조사조차도 하지 않았다. 러시아계 주민들이 이에 대응해 무장봉기하자 일부 군대가 여기에 가담했고, 7월에는 전면적인 내전에 돌입했다.

2014년과 2015년 두 차례에 걸친 민스크 조약으로 휴전에 돌입했지만, 우크라이나 정부군의 민간인 거주지 포격은 지속되었고 약 1만여명이 사망했다. 러시아는 당시만 해도, 흑해함대가 있던 크림 반도를 병합하는데 그쳤다. 크림 반도는 17세기부터 러시아제국의 영토였고, 19세기 중반 치열한 크리미아 전쟁을 거쳐 확보한 곳이다. 게다가 주민의 90%가 러시아계이며, 1991년 구 소련 해체 당시에도 주민투표로 러시아 공화국 편입을 결정한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당시 대통령인 옐친이 서구의 눈치를 보면서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크림 반도 주민들은 그 뒤에도 4차례에 걸쳐 주민투표로 독립국가선언을 하거나 러시아 편입을 결정했다. 게다가 러시아 전체에서  공산당 세력이 여전히 가장 강한 곳이기도 하다. 

비록 제대로 지켜지지는 않았지만, 민스크 협정 이후로 잠잠하던 우크라이나에서 왜 다시 전쟁이 재연되었는지는 여전히 의혹이 남아있다. 지금은 죽어라고 싸우고 있지만, 지난 2020년 푸틴이 <Financial Times>지에 직접 기고하여 “우랄 서쪽뿐만이 아니라, 시베리아까지도 모두 유럽의 품에 안길 준비가 되어 있다”면서 자신들을 유럽의 일원으로 받아달라고 간청한 것을 기억하거나, 혹은 이를 다시 기사로 쓰는 언론인도 아무도 없다. 

뿐만 아니라, 눈에 빤히 보이는 일련의 전사들조차도 아무 말을 하지 않는다. 전쟁이 ‘결정’된 것은 정확히 2021년 11월이었다. 그리고 메신저는 놀랍게도 외교 담당자가 아니라, 미 CIA 국장인 윌리엄 번즈였다. 그는 모스크바를 방문하고 돌아오는 길에 EU 본부가 있는 브뤼셀에 들러 전쟁이 발발할 것이라고 통보했으며, 그 날부터 EU는 대러시아 경제 제재안 마련에 들어갔다. 

2021년 12월 중순에는 러시아의 최후 통첩이 있었다. 러시아는 “1997년 이전으로 나토군의 경계를 되돌려라”고 요구했다. 1997년 이전이면, 현 나토 회원국인 폴란드 헝가리 체코는 물론, 발트 3국도 모두 포함된다. 러시아의 요구의 근거는 1992년의 미국과 러시아와의 협약이었다(미국은 이 때 나토는 단 한발자국도 동진하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했었다). 이들 국가들이 나토에서 빠지면 미국은 유럽을 상실한다. 미국이 유럽을 상실할 뿐만 아니라, 아예 EU의 존립이 불가능해지며 그동안 EU 확장으로 역내 식민지를 구축해 먹고 살던 독일과 프랑스도 끝이 난다. 이번에는 유럽이 구소련이 되는 것이다. 

전쟁 직전인 2022년 1월 5일, 주요 핵무기 보유국인 미국 영국 프랑스 러시아 중국은 “핵무기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난데없는 공동합의문을 발표한다. 왜? 당연하다. 이제껏 수백차례 행해진 워게임에서 러시아와 나토군이 전면전에 돌입하면 100% 핵전쟁으로 발전한다. 따라서 뒤집어 말하자면, 핵무기를 쓰지 않겠다는 것은 나토군이 우크라이나 전쟁에 개입하지 않겠다는 뜻이며 동시에 러시아 역시 나토와 전면전으로 발전할 수 있는 전면적인 작전은 하지 않겠다는 뜻이기도 하다. 

2022년 4월, 그럭저럭 가능할 것 같았던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사이의 평화협정이 미국과 영국의 방해로 무산된다. 인도주의니 정의니 국제질서니, 이런 어림도 없는 얘기들을 빼고 보면, 왜 그같은 방해공작이 벌어졌는지는 아직도 완전히 드러나지 않았다 . 러시아가 2021년 12월의 최후 통첩 요구를 아직도 유지했을 수도 있고, 혹은  나토 사무총장인 옌스 스톨텐버그가 말한 것처럼 “우크라이나 전쟁은 향후 세계 경제를 누가 지배하느냐를 결정하는 사건”이기 때문일 수도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향후 세계 경제를 누가 지배하느냐를 결정하는 사건”

스톨텐버그의 발언은 진지하게 볼 필요가 있다. 단지 제3세계에 대한 러시아의 영향력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비록 지금은 미국(그리고 카타르)가 유럽의 에너지를 공급하는 새로운 소스로 나서고 있지만, 미국의 확정 천연가스 매장량은 현재 규모대로 생산시에는 불과 15년 뒤에는 완전히 고갈되고 만다. 추정 매장량은 260년을 더 쓸 수 있다고 미국 에너지부는 주장하고 있지만, 천연가스 추정 매장량은 공상과학 소설과 별로 다르지 않다(심지어 지난 2010년대 초반 미국 캘리포니아주는 그동안 알려졌던 추정 매장량의 95%가 사실이 아니라고 수정한 바도 있다). 러시아는 현재 수준대로 생산량을 유지한다면 약 70년, 만일 미국처럼 프랙킹(셰일 가스) 공법을 도입한다면 약 200년간 생산할 수 있는 확정 매장량을 가지고 있다(세계 최대의 천연가스 매장량을 가지고 있다. 2위가 이란, 3위가 카타르다). 

또 다른 문제는 중국이다. 러시아가 ‘감히’ 공격적인 행동을 할 수 있는 것은 배후에 중국이라는 세계 최대의 공장이 있기 전에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중국의 왕이 외교장관은 지난 2021년 3월 갓 출범한 바이든 정권의 블링컨 국무장관과 설리번 안보보좌관과의 알래스카 회담 자리에서 “미국이 강자의 위치에서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있는 시기는 지나갔다”고 직격탄을 날렸다. 미국이 더 이상 유일 헤게머니 제국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리고 폭풍이 시작되었다. 

중국을 상대하는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트럼프가 하는 것처럼 러시아와 손을 잡고 중국을 포위 고립하는 것이다. 단 이 때는 러시아의 요구를 들어줘야 한다. 그리고 이건 유럽이 참지 못한다. 반면 바이든의 전략은 러시아를 굴복시켜서 중국의 배후를 끊는 것이다. 중국은 러시아의 에너지가 없으면 버티지 못한다. 따라서 유럽과 손을 잡고 러시아를 무너뜨려 자원을 착취하고 중국을 무너뜨리는 것이다. 

이렇게 큰 그림에서 놓고 보면, 우크라이나 전쟁은 내전이자 동시에 국제전이면서 동시에 세계대전이기도 하다. 단지 대리전이기에 그 성격이 잘 드러나지 않는 것뿐이다. 따라서 이 구도에서 뉴스들을 평가하면 된다.

러시아가 ‘핵’을 언급할 때는 나토군이 우크라이나에 깊숙히 개입한 것에 대한 경고이며, 프랑스가 러시아를 비난하고 장거리 미사일을 우크라이나에 지원할 때는 아프리카 사헬지역 국가들(니제르, 부르키나파소, 말리)이 러시아의 지원으로 반프랑스 정책에 나섰다는 것을 의미하며, 독일이 타우루스 지대지 미사일 지원을 꺼리는 것은 러시아의 공세에 총알받이가 되기는 싫다는 의사 표시이며(동시에 중국 시장에 대한 참여를 보장받기 위한 수단이기도 하고), 중국이 중립적인 척 러시아를 지원하는 것은 순망치한, 그러니까 러시아가 무너지면 중국이 무너지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런데 왜 한국이 뭘 믿고 무슨 댓가를 받기로 했길래 러시아 적대 정책과 우크라이나에 대한 무기 지원을 하는지는 알 수 없다. 이 나라는 그저 ‘속국’이라 그렇다고 볼 수밖에 없다. 

이같은 전후 사정을 이해하면, 날마다 쏟아지는 개별 뉴스들의 진위를 평가하는데 도움이 된다. 적어도 각기의 사건들의 의미를 확정할 수는 있다. 그래서 다시 돌아오자면, “전쟁의 최초의 사상자는 진실’이라는 격언은 진실이 아니다. 이미 진실이 죽었기 때문에 전쟁은 벌어진다. 또는 진실이 이미 죽었어야만이 전쟁이 가능하다. 

가짜 뉴스로 구성된 가짜 세상은 ‘가상 세계'(virtual reality)가 아니다

가짜 뉴스로 구성된 가짜 세상은 ‘가상 세계'(virtual reality)가 아니다. 가상세계에서는 죽었다가도 다시 살아나며, 시간은 영원하다. 그러나 현실의 가짜 세계에서는 인간들은 실제로 죽고 피가 튀며, 살이 도려져 나간다. 영국의 수학자이자 분석철학자인 버트란드 러셀은 “에피큐로스학파(쾌락주의자)에게 고통이 실재한다는 것을 납득시키려면 실제로 다리를 부러뜨려서 고통을 느끼게 하는 수밖에 없다”고 말한 적이 있다.

주식시장에서의 대중 심리를 묘사한 풍자 카툰. 출처: <이코노미스트>

2. Wag the dog(주객전도

진실은 단지 전쟁터에서 죽는 것만은 아니다. 일상적인 진실의 죽음이야말로 전쟁터를 예비하는 징표다. 진실은 나날이 죽으며, 모든 곳에서 쓰러지고,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에서도 사라진다. 

미국의 코미디 영화 제목으로도 쓰인 ‘wag the dog’이라는 표현은 직역하면 “꼬리가 개를 흔든다’, 즉 주객이 전도되었다는 뜻이다(종종 경제학에서도 쓰인다. 파생상품이 본상품의 가격을 결정한다는 의미로). 그다지 놀랍지 않게도 wag the dog은 ‘가짜 뉴스’의 사회에서 일상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선거민주주의의 장점 중의 하나는 온갖 정치적 사회적 행태가 다 폭로된다는데 있는데, 한국의 이번 4.10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드러난 현상 중의 하나가 바로 wag the dog이었다. 

<뉴시스> 4월 3일자 기사에 따르면 경기도 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는 “모 정당의 당내 경선 여론 조사와 관련해 다수의 권리 당원 등에게 거짓 응답을 하도록 권유 유도한 당내 경선 후보 관계자를 경찰에 고발했다”. 

심의위원회가 적시한 고발 내용은 (법적으로 금지된) “권리당원 여론조사와 일반 여론 조사 둘 다 참여하도록 권유하는 메시지를 1만 6900통을 보냈다”는 것이다. 일개 지역구 경선에서 1만 6800통의 문자를 보낸 정도면, 중복 정도가 어느정도인지는 기사에 나오지 않지만 최소한 수천명이 넘는 수치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여론조사 근거 경선 결과를 충분히 뒤집고도 남을만한 숫자로 볼 수 있다. 기사에서는 어느 정당인지는 밝히지 않았다. 

이에 앞서 지난 3월에는 중구-성동을 국민의 힘 지구당 당내 예비 경선에서 맞붙은 하태경 후보는 이혜훈 후보 쪽에서 경선 전화 여론조사에서 응답자가 연령대를 속이도록 유도 권유하는 문자 메시지를 대량 발송했다고 항의한 바 있다(국민의 힘 중앙당에서는 그 여론조사 경선은 연령 가중치를 두지 않는 조사라고 밝혔기에 법적인 문제는 되지 않았다). 이같은 사례가 공공연히 드러난 경우는 거의 없다. 그러나 매우 귀중한 정보다.  

여론조사를 조사해봐야한다

전화 여론조사는 연령대별, 성별 가중치를 둔다. 여론조사는 전수조사가 아니라 표본 조사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일정 성별, 연령대별로 선거구에 거주하는 인구들의 비율만큼만 조사를 해서 채우도록 되어있다. 즉, 만일 중-성동을 지구에 20대 인구의 비율이 전체 거주자의 20%라면 여론조사에서도 그만큼의 비율이 반영되어야 한다. 그런데 60, 70대 노년층은 여론조사 접근이 용이하지만, 청년 중장년층은 여론조사에 응하는 비율이 훨씬 적다.

여론조사 업체에서는 일정 연령대의 비율이 다 채워지면 더 이상 그 연령대로 응답하는 피조사자의 응답은 결과값에 포함시키지 않는다. 불가피하게 어느 연령대는 넘치고 다른 연령대는 모자라면, 여기에 실제 인구 비율을 반영한 가중치를 두어 숫자를 보정한다. 

따라서 만일 70대 노인이 자신이 20대라고 속여 대답한다면, 조사 목표 숫자를 채우기 어려운 20대의 응답에는 포함되는 반면에 70대라고 대답한다면 이미 이 연령층의 인구 집단은 다 채워진 상태이기 때문에 가중치를 두어 비율을 감하거나 혹은 아예 조사를 초반에 중단한다. 

즉 만일 70대가 자신이 20대라고 속인다면 그의 응답이 여론조사 결과에 반영되는 비율은 1이 되지만, 70대라고 솔직히 말한다면 그 비율은 아예 0이 되거나 혹은 0.5밖에 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고의적으로 응답자들이 자신의 연령대를 속인다면, 이 여론조사는 왜곡될 가능성이 매우 높아진다. 동시에 이 응답자는 자신이 원하는 정치적 결과를 얻을 수 있게 된다. 

그렇다면 과연 이같은 ‘허위 응답’이 전국적인 일반 여론조사에서도 결과를 왜곡시킬만큼 큰 비중을 차지할 수 있을까? 경험적으로 검증할 수는 없지만, 이론상으로는 가능하다. 국민의 힘과 더불어민주당만을 예를 들더라도, 이들 두 정당의 권리당원 숫자는 합쳐서 약 100만명에 달한다. 전국 유권자 숫자가 약 4,400만명이므로 이들이 차지하는 비중은 약 2.3%에 달한다. 

그런데 여론조사에서 응답율은 공식적으로는 12-15%에 달하지만, 이 수치는 실제 여론조사 전화를 받은 사람 가운데 마지막 설문 문항까지 응답한 사람의 비율을 말할 뿐이다.
전국적으로 1000명의 표본을 갖는 설문조사를 할 때에 여론조사 업체가 통신사로부터 받은 가상전화번호의 총 숫자는 약 10만여개에 달하며, 이 가운데 통화를 시도한 전체 숫자는 평균적으로 약 8-9만 정도가 된다. 따라서 여론조사 업체가 전체 통화를 시도한 사람의 숫자를 기준으로 놓고 보면, 그 응답율은 실은 1.5-2% 내외에 불과하다. 

따라서 무조건 응답을 할 준비가 되어 있으며, 심지어는 언제 전화가 오는지만 목 놓아 기다리는 사람들(이들을 흔히 ‘정치 과몰입층’이라고 부른다)의 비율이 전체 조사대상의 2.3%라면 충분히 영향을 미친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조사 대상 표본수가 커지면 이런 위험은 비례적으로 감소한다(예컨대 일반적인 1,000명 대상 조사와 간헐적으로 행해지는 4,000명 대상 조사 사이에는 편차가 크다).  

물론 어떤 방식의 여론조사냐에 따라서 달라질 수도 있다. 예컨대 자동전화응답(ars) 방식과 전화면접(cati) 방식 사이에는 공식 응답율은 물론, 실제 응답율에서도 큰 차이를 보인다. 자동전화응답 방식의 실제 응답율은 약 3-5%에 달한다. 여론조사 업체인 ‘꽃’에서 매우 흥미로운 조사 결과를 발표한 적이 있는데 동일 지역을 대상으로 동일 기간 내에 자동응답 전화와 전화면접 조사를 동시에 수행하여 비교한 것이다. 이 결과를 보면, 자동응답 전화 방식은 이른바 ‘증폭 효과’가 매우 크게 나타난다(소수의 극렬한 목소리가 여론조사에 크게 반영되는 것). 이는 여론이 달라져서가 아니라, 전화면접 조사에서는 실제 인간 조사원을 대상으로 대답하기 때문에 자신의 정체를 숨기기가 상대적으로 어렵기 때문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따라서 전화면접 방식이 상대적으로 왜곡 가능성이 낮다. 

만일 어떤 특정 시기에 어느 여론조사 업체가 특정 사안을 대상으로 조사를 한다는 사실을 사전에 인지해서 여기에 어떤 대답을 해야할지 어떤 연령층이라고 해야할지 사전에 모의가 되어 있다고 가정해 보자. 그러면 이것이 전국적인 조사라고 할지라도 왜곡의 가능성은 매우 커진다(더군다나 서로 대립되는 의견에서 어느 일방만 이같은 정보를 공유했다고 한다면 그 가능성은 더욱 커진다). 

이같은 여론 조사 결과를 토대로 어느 한쪽은 일방적으로 자신들이 여론의 편에 서 있다고 주장할 수 있다. 그리고 ‘객관적’인 여론 조사를 기초로 했기 때문에 정치적 사회적 정당성은 이들에게 주어진다. 이같은 결과를 다시 방송과 신문에서 확산시키고 은갖 커뮤니티에서 재생산하면(커뮤니티에서 활동하는 인자들도 결국 동일한 과몰입층들이다), 그때부터는 그 여론조사에 나타난 왜곡된 소수의 견해가 전체의 견해, 즉 여론이 된다. 여론이 여론조사에 반영되는 것이 아니라, 여론조사가 여론을 만드는 것이다. 그것도 매우 객관적인 근거를 가지고. 

따라서 여론조사를 ‘조작’할 수 있다면, 여론을 조작할 수 있게 된다. 진정한 wag the dog이 탄생하는 것이다. 이것이 현대 선거 민주주의의 민낯이며, 여론의 현실이다. 


파시즘 태동기 독일 사회의 불안한 심리 내면을 스릴러로 그려낸 영화 <M>의 한 장면.
출처: 프리츠 랑 감독의 1931년 영화 <M>. 

 
3. FOMO(Fear of missing out), TINA(there is no alternatives), Mass Formation  

wag the dog은 지금 벌어지고 있는 한국의 국회의원 선거 과정을 설명하는데 유용하다. 예컨대, 국민의 힘의 선거전략은 거의 전적으로 이같은 메카니즘을 어떻게 발동하느냐에 맞춰져 있다. 네트웍의 구축 정도에 있어서는 뒤쳐지지만, 더불어민주당도 큰 차이가 없다. 

당연히 여기에는 여론조사 수행기관을 포함한 다양한 세력들의 결탁, 또는 네트웍이 필수적이다. 이런 저런 이슈들이 있어서 그것 때문에 여론이 반전되었다, 혹은 지지도가 반등했다 따위의 언명들은 실은 사전에 여론조사 방식, 장소, 시기등을 포함하여 발맞춰 진행되는 조작적 여론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아무리 온갖 커뮤니티와 언론에서 떠들어도 그것만으로는 “현실에서 겪어보니 그렇지 않은데”라고 의심하는 대중을 설복하기에는 부족하다. 이를 위해서는 사회 전체가 다른 독특한 사회심리적 메카니즘을 전제하고 있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FOMO(Fear of missing out)와 TINA(there is no alternatives)다. 

FOMO는 우리 말로 간단히 옮기기 힘들다. 대략 “뒤쳐지는데 대한 공포, 또는 소외되는데 대한 공포” 정도로 번역할 수 있다. 어떤 사안이 발생했을 때, 다수의 의견이 한쪽으로 쏠리면 그 흐름에서 벗어나는 다른 행동을 하는 것에 대한 위험 인식을 지칭한다. 이 기제는 실은 ‘왕따’ 현상의 반대쪽 표현이기도 하다. 만일 주류의 흐름에서 벗어난다면, 왕따를 당하고 거기에서 오는 위험에 공포를 느껴 주류에 동참하도록 만드는 심리적 기제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단지 학교에서만이 아니라, 성인이 되어 행동하는 사회에서도 이같은 왕따 현상이 직간접적으로 존재해야 한다. 비트코인을 비롯해 버블기의 인간들의 행동을 설명하는데 적합하다.  

TINA는 직역하면 “다른 대안이 없음”이다. 이것 역시 FOMO와 궤를 같이 한다. FOMO가 외부적 압력에 대한 공포를 표현한 것이라면, TINA는 이 외부적 압력에 대한 내부적 수용성을 지칭한다. 다른 수가 없으니 따라가는 것이다. (한국 총선을 예로 들면, 한동훈 국힘 비대위원장의 갑작스러운 험악하고 저급한 발언은 FOMO를 환기하기 위한 것이며, 윤석렬 대통령의 의대 정원 관련 발언은 TINA를 겨냥한 것이다). 

이 두 가지 기제가 작동하면 그 사회는 언론학에서 말하는 이른바 ‘대중 형성 mass formation’에 도달하게 된다. mass formation은 ‘떼거지 행동’이다. 어떤 사안이 발생하면 관련 구성원들이 그 사안에 대해 극단적으로 과몰입하며 동일한 방향으로 움직인다. 알아듣기 쉽게 얘기하면 과거 언론에서 말하던 ‘냄비 근성’이다. 10여년 전에 주한미군사령관이 한국인들을 ‘lemming'(쥐떼들)이라고 표현해서 물의를 빚은 적이 있는데, 비하이기는 하지만, 딱히 틀린 표현도 아니다. 다만 위안이 되는 것은 한국만이 아니라, 미국을 포함한 전세계가 같이, 쥐의 길을 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늘 쥐떼 앞에는 ‘피리부는 사나이’가 있다. 

소외공포를 지칭하는 FOMO는 과장된 참여를 유도한다. 출처: Study Smater

‘대중 형성 mass formation’

FOMO와 TINA를 거쳐 mass formation에 이른 사회에서는 현실에 대해 이미 주어진 것 이외에는 다른 견해를 가질 수 없다. 같이 미쳐야만이 살아 남는다. 여기에는 진보도 보수도 없으며, 좌도 우도 없다. 서로 다른 말을 하지만 모두 동일한 방식으로 움직이며 말은 다를 수 있지만, 이 방식을 수용하지 않는다면 ‘극단주의자’라는 딱지가 붙는다. 이렇게 해서 광기는 일상이 되고 이성은 극단이라고 손가락질 받는다.

이같은 사회적 메카니즘이 형성되면, 무엇이 진실인지 알 수가 없게 된다. 왜냐하면 그것이 혹여 ‘사실’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은 그 기원에 있어서 동원된 진실이며, 조작된 정의이기 때문이다. 오직 대립하는 두 개의 허위만이 존재할 따름이다. 심지어는 여기에서는 ‘국가’가 ‘진실’의 최종 심판자로 등장하지조차 않는다. 국가의 ‘공식 진실'(푸코의 용어를 빌자면 official knowledge)이 진실을 가름하는 최종 판정자였던 시대는 20세기로 이미 끝났다. 현존 체제는 무엇이 진실이냐를 결정하는 공식 권력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진실에 대한 혼란과 불신 그 자체를 목표로 하며 국가와 지배자의 목표는 이같은 불안정하고 불확실한 상태를 지속적으로 재생산해내는데 있다. 

힐러리 클린턴이 국무장관으로 있던 2016년에 가자에서 하마스가 선거에서 승리하자 힐러리는 크게 화를 내면서, “누가 승리하느냐가 중요한게 아니라, 누가 승리할 수 있는지를 미국이 결정할 수 있는지가 중요한 것”이라고 발언한 적이 있다. 힐러리의 발언은 진실의 기준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한국의 선거에서 심지어 반미 세력이 승리하더라도 상관없다. 그 반미세력이 승리하도록 미국이 결정할 수 있는 메카니즘만 구축하면 된다. 

왜냐하면 이 메카니즘 하에서는 미국은 언제든지 필요에 따라 다른 세력을 내세울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은 이렇게 표면적으로는 자신의 이해관계에 반하는 것처럼 보이는, 선택된 집단을 ‘유용한 멍청이'(useful idiot)이라고 부른다. 

진실로 내세울 수 있는 메카니즘

‘진실’에 있어서도 지배자의 관점에서는 어떤 진실이 승리해도 상관이 없다. 중요한 것은 어떤 것을 그 때 그 때의 필요에 따라 진실로 내세울 수 있는 메카니즘을 만드는 일이다.

여기에서 부시 정권의 백악관 보좌관이었던 칼 로브의 다음과 같은 언명이 나온다 ; “우리는 이제 제국이다. 그리고 우리가 행동할 때, 우리는 우리 자신만의 현실을 창조한다. 그리고 당신들이 -원한다면 법적으로든 뭐든- 그 현실을 연구하는 동안, 우리는 또 다시 새로운 현실을 창조하며, 그게 세상이 굴러가는 방식이다. 우리는 역사의 행위자다. 그리고 당신들 모두는 우리가 하는 것을 단지 뒤따라서 연구하도록 남겨져 있을 뿐이다”. 

그들은 스스로를 신의 자리에 올려놓았다. 피창조물인 인민들은 고작해야 신이 만든 세상에서 그 세상을 해석하느라 허덕일 따름이지만, 그들은 그 사이에 새로운 현실을 창조하고 인민의 언어들은 또 다시 그 뒤를 따라 간다. 인민들은 현실을 만들지 못한다. 그들은 고작해야 추종자들일 뿐이다. 

칼 로브의 발언은 비록 20년 전의 것이기는 하지만, 여전히 유효하다. 온라인이든 유튜브든, 또는 술자리에서든 ‘언어’들은 그들이 만든 가짜 현실에 춤추고 있으며 그 가짜 현실을 윤색하는데 일조하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현실은 지배자들이 현실을 창조하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지배자들은 2008년도에 패배했고(금융위기를 막지 못했다), 2022년에도 패배했으며(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오판했다), 다시 한번 결정적으로 패퇴할 것이다. 그 패배들은 인민들의 ‘의지’에 따른 변화가 아니라, 자본주의 자체가 더 이상 유효하게 작동하지 못한다는 자기 모순에 따른 것이다.   

키신저는 오래 살기는 했지만, 냉정한 현실주의자였다. 그는 이 ‘신적인 창조’의 위험성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죽기전 얼마전인 지난 2022년 4월 미국과 영국이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사이에 맺은 휴전 협정을 파토내려고 했을 때, 다음과 같이 경고했었다; “프로파간다를 하는 것은 좋다. 그러나 자신이 만들어낸 프로파간다가 ‘실제’라고 스스로 현혹되지는 말아야 한다”. 

유감스럽게도 키신저의 경고와는 달리, 지배자들은 스스로 매혹되었으며, 여전히 매혹되고 있고, 앞으로도 매혹될 것이다. 그것이 그들에게 구조화된 자본가의 계급의식이 인식할 수 있는 현실의 한계이며, 프로파갠더의 한계이기도 하다. 언어는 현실을 바꾸지 못하며, 인식은 계급적 한계를 뛰어넘지 못한다. 그러면 뻐꾸기 둥지를 어떻게 뛰어넘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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