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와노동 연구소

가자 위기 (GAZA Crisis)

민노연 창립식_087

가자 위기 (Gaza Crisis)

: 인간 살처분과 '약속된 땅'의 분노

2023년 10월 12일 / 글로벌 리포트 Global Report
<전망과실천> 편집부

팔레스티나 전쟁, 하마스, 알아크사 홍수, 인도주의적 봉기

1. 이것은 전쟁인가
– 바르샤바 게토 유태인들의 봉기

1943년 4월 폴란드 바르샤바 게토지역의 유태인들은 죽음을 결심했다. 4월 16일 그들은 독일 경찰 특수부대의 게토 파괴 명령과 항복 요구를 거부하고 진입하는 독일 경찰군에 맞서 봉기했다. 13,000여명의 유태인들이 죽었다. 절반 이상이 산 채로 불에 태워지거나 연기에 질식해 죽었다. 유태인들은 고작해야 몇 자루의 소총과 화염병, 그리고 게토로 몰래 반입해온 개인화기밖에 없었다. 독일의 사상자는 경찰 17명을 포함해 110명에 불과했다. 5만여명의 게토 거주 유태인들 가운데 살아남은 사람들은 아우슈비츠로 보내졌다. 그리고 거기 가스실에서 죽었다. 당시 사건에서 독일인과 유태인들의 사망 비율은 1:100이 넘는다. 독일인 한 사람이 죽으면 독일인들은 그 보복으로 100명이 넘는 유태인을 학살했다. 다른 점령지에서는 독일군 1명당 20명의 피점령민들을 죽였다(사실상 점령지 군정의 군사원칙이기도 했다. 이를 소재로 한 영화들도 있다). 그리고 독일인들은 유태인과 슬라브인, 아시아인들을 ‘sub human'(인간 이하)라고 불렀다. ‘가든’과 ‘정글’을 최초로 발명해낸 2500년 전의 그리스인들이 노예들을 ‘말하는 가축’이라고 명명했던 것처럼.  

이 봉기를 주도한 것은 게토 구역 내의 유태인 공산주의자들이었다. 전쟁이 끝난 뒤 봉기를 주도했던 ZOB(유태인 전투 조직)의 지도부 가운데 유일한 생존자였던 마렉 에델만은 “그것은 독일인들이 자기 맘대로 우리의 죽음을 결정할 시간과 장소를 허용하지 않기 위한 투쟁이었다”고 말했다. 이 봉기는 처음부터 성공할 가능성이 없었으며, 순수하게 군사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미친 짓’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가장 이성적인, 가장 인간적인 대응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어차피 게토 지역의 유태인들은 독일인들이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장소에서 죽을 것이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손으로 죽음을 선택할 수 있는 것, 그것이 바르샤바 게토 봉기에 참가한 사람들을 움직인 힘이었다.

죽음조차도 ‘저항’의 수단이 될 수 있다. 푸코는 “완전한 지배는 가능하지 않다. 스스로 죽음을 선택함으로서 그 지배를 끝낼 수 있기 때문에”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래서 그들은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손으로 죽음을 선택할 수 있기 위해서 싸웠다. 그것은 자신들이 ‘인간 이하 (sub human)’가 아니라 인간임을 증명할 수 있는, 인간으로서의 마지막 존엄성에 대한 예의이기도 했다.

하지만 아무도 이 때 유태인들의 싸움을 ‘전쟁’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역사책은 공통적으로 이 사건을 봉기(uprising)라고 규정하고 있다. 그것은 단지 전투가 일방적이었기 때문 만은 아니다. 정치적 성격이 다르기 때문이다.

전쟁이란 제도화된 무장세력(군대)을 갖고 있는 두 세력(주로 국가라고 불리는 정치 공동체) 간에 벌어지는 무장 충돌이다. 반면 봉기는 피억압자가 지배자에 대항하는 집단적 저항이다. 비록 그것이 ‘무력’을 동반할지라도. 즉 지배자와 피지배자 사이의 정치적 관계가 사건의 성격을 규정하는 결정적 요인이다. 나머지는 잡다한 에피소드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이것은 전쟁인가? 아니면 봉기인가?

2. 이것은 전쟁인가?
– ‘알 아크사 홍수(flood) : 분노가 차고 드디어 넘친 것

개인이 용감하거나, 혹은 무모할 수 있다. 아마도 최근 역사상 가장 유명한 일화 중 하나는 중국 ‘천안문 사태’ 당시 정규군인 진압군에 맞서 혼자서 탱크를 가로막던 어떤 비무장 남자에 관한 것이다. 그는 자신의 코 앞까지 다가온 탱크 앞에서 피하지 않고 손을 벌려 통행을 막았으며, 탱크가 그를 피해 돌아가려고 하면, 다시 탱크를 쫓아가 길을 막았다. 영상은 여기서 끝난다. 그가 이후 어떻게 되었는지는 공식적으로는 확인된 바 없다. 다만 현장에서 죽지 않았던 것만은 분명하다. 일설에는 감옥으로 끌려갔다가 죽었다는 얘기가 있지만 중국 언론이 세세히 그런 것을 알려줄 만큼 친절하지는 않다. 다만, 흥미로운 것은, 탱크가 그를 깔아뭉개고 지나가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탱크는 계속 그를 피해가려고 했다. 그가 앞을 막아서면 행여 깔아뭉갤까봐 탱크는 멈칫거렸다. 

2003년 3월 라헬 코리 Rachel Corrie가 죽었다. 가자 지구 남쪽의 라파라는 항구 인근에서 팔레스티나인들의 거주지를 파괴하려는 이스라엘 군의 불도저 앞을 막아 섰다가 깔려 사망했다. 그는 국제 팔레스타인 인도주의 지원기구 소속 회원이었으며, 사건 당시 자신의 신분도 밝혔고 형광색 자켓을 입어 식별도 가능했다. 그러나 이스라엘 정규군의 불도저는 그녀를 깔고 넘어갔다. 주위에 있던 다른 자원봉사자들에 의해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곧 죽었다. 24살이었다. 그녀는 미국인이었고, 백인이었다(Irish American).

2023년 10월 8일, 어떤 남자가 죽었다. 아마 20대 중반쯤 돼보이는 듯 싶었다. 그날 밤 그 팔레스티나 남자는 불도저를 몰고 이스라엘 군인을 죽이겠다고 유태인 정착촌을 헤매고 다니고 있었다. 그는 “Alluha Akbar”(신은 위대하다)를 외치며 한 시간여를 스스로 SNS로 중계하며 거리를 떠돌았다. 그의 죽음은 확인이 된다. 이스라엘군의 총에 맞아 불도저 옆에 쓰러져 있었다. 그 영상이 텔레그램 채널에 올라와 있다.

가자는 작은 지역이다. 서울시의 1/3밖에 안된다(가로 30km, 세로 8km). 그곳에 약 230만명이 살고 있다. 그 곳 인구의 절반은 14세 이하다. 그 아이들은 한번도 바깥 세상을 본 적이 없다. 가자는 나갈 수도 들어올 수도 없는 곳이다. 바다에 면한 곳을 제외한 동남북 방향은 높이 6m, 길이 65km의 장벽이 쳐져있고 전기는 하루에 절반밖에 들어오지 않으며 인구의 80% 이상이 정수되지 않은 물을 마신다. 실업율은 46%에 달하며, 아파도 바깥 세상의 현대적 병원에 갈 수가 없다. 그들은 거기서 태어나서, 거기서 죽어야 하며, 그것도 아주 일찍 죽어야 한다. 그곳은 세계에서 제일 큰 지붕없는 감옥이다(open-air prison). 그러나 출소가 불가능한 감옥이며, 나아가 아직 처형일자가 잡히지 않은 사형수들인 팔레스티나 민간인들을 수용하는 곳이다.

이스라엘군은 주기적으로 가자에 무단으로 진입해, 자신들이 보기에 위험 분자들을 처리한다. 슬프지만, 이를 이스라엘은 ‘잔디깎기'(mowing the lawn)라고 부른다.  즉 쓸만한 인간들이 성인으로 자라날까봐 미리 ‘인간 살처분’한다.

이것 역시 서구에서 유구한 전통을 가지고 있다. 고대 그리스의 스파르타인들은 주기적으로, 아무 이유 없이 노예들을 사냥하는 행사를 벌였다. 그들로선 성인이 되기 위한 통과의례이기도 했다. 노예들이 반란을 일으키거나 저항해서가 아니라, 이런 방식으로 무작위적으로 아무나 죽여야 노예들 사이에 ‘공포’를 불러일으켜 절대적으로 복종시킬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11세기 무렵 게르만인들은 프러시아 지역의 원주민들을 이런 방식으로 사냥했다. 그들은 원주민 사냥행사를 정기으로 벌였으며, 이 잔치에는 주변의 다른 민족들도 초대했다. 누구나 와서 원주민들을 죽이고 자산을 빼앗을 수 있었다. 그래서 14세기가 되면, 프러시아 원주민들은 모두 멸종하였다. 그 뒤, 그 지역을 차지한 게르만인들은 자신들을 ‘프러시안’이라고 불렀다. 이것이 바로 현재 독일의 시작이다.      

* 지난 70여년간의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영토 지도

하마스 지도부가 이 상황을 몰랐을까? 모를 수 없다. 수십배의 보복이 뒤따른다는 것을 모를 수는 없다. 그러나 어차피 죽을 것이라면, 그들은 자신의 죽음을 선택할 권리가 있다. 그리고 그들은 선택했다. 왜냐하면, 살아남는다고 해서,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다르게 행동할 수 없었을까? 예컨대, 보다 ‘인도주의적’으로, 인질들은 잡지 않는다든지 혹은 아이와 노인은 피해간다든지 등 방식으로. 그런 방식의 봉기를 ‘인도주의적 봉기’라고 하자.

아니다. 그렇게 하지 않았다. 하마스의 ‘닥치는 대로’는 의도적이며, 계산된 행위다. 하마스는 영어식으로 표현하자면, 테이블을 반대로 돌려놓은(turn the table) 것이다. 이스라엘인들에게, “이제 너희도 공포를 맛보아라”라고 행동으로 말한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인도주의적 규범을 다 무시했다. 인도주의야말로 안온해야 가능하다. 만일 그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팔레스타인인들의 70년의 시련을 무엇이라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왜 이스라엘인들은 아무런 도덕적 죄책감도 없이, 윤리적 비난도 받지 않고 팔레스타인인들을 학살할 수 있을까? 혹은 가자지역에 대한 이스라엘 국가와 군대의 행위에 대해 간혹 터져 나오는 그 ‘인도주의적’ 비난은 왜 이스라엘의 행위에는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을까? 

그래서 이 ‘봉기’는 ‘계산된’ 것이며, ‘정치적’인 것이다. 군사적인 것 따위는 흥미롭기는 하지만, 부차적이다. 그것은 단지 ‘정치’를 표현하는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하마스가 암묵적으로 질문하고 있는 것은, 당신들이 정말로 그렇게나 ‘인도주의적’인 인간들이라면, 왜 우리는 이렇게 고통 받아야 하는가이다. 그리고, 우리가 당신들이 우리에게 했던 그대로를 당신들에게 하면, 당신들은 이제 어떻게 할 것 인가이다. 그래서 하마스는 이 사건의 명칭을 ‘알 아크사 홍수(flood)라고 명명했다. 분노가 차고 드디어 넘친 것이다. 왜 일부 서구 언론들이, 그리고 앵무새 한국 언론들이 이를 ‘폭풍'(storm)이라고 제 멋대로 번역했는지 그 집단 무의식을 해명하는 것은 흥미롭지만, 동시에 시간 낭비이기도 하다. 소 귀에 경을 읽어 줄만큼 세상은 한가하지 않다.

인도주의자들은 하마스의 대 이스라엘 급습에 대해서, 이 잔혹함에 대해서, 그 야만성에 대해서 놀랐다. 그래서 평소 팔레스타인에 우호적인 인도주의자들조차도, ‘쌍방 과실’을 개탄하고 비인도적 행위를 비난했다. 

그러나 ‘인도주의적 봉기’는, 지배자의 관점에서 보자면, 감사하기 그지 없는 일이다. 지배자 그 누가 그걸 무서워하나. 인도주의가 세상을 바꾸는가? 지도를 보라. 팔레스타인인들이 ‘인도주의적’이지 않고 무장 투쟁을 해서, 땅을 빼앗겼는가? 국제법상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유태인들의 영토는 1947년 UN 안보리 결의에 의한 것뿐이다(위 지도 왼쪽 두번째). 나머지는 모두 국제법상 불법 점령이다. 하마스가 ‘학살’한 유태인 정착민들은 모두 불법적으로 팔레스타인인들의 땅을 빼앗은 주민들이다. 물론 국가가 그들 대신 빼앗아주었다.

그리고 유태인의 민족 규정상, 부계나 모계상 어느 한쪽이 ‘역사적으로’ 유태인의 핏줄인 것이 확인되면, 유태인으로 인정받고 이스라엘 국적을 취득할 수 있다. 이스라엘은 이중 국적을 허용하기 때문에, 먼 조상이 유태인에 한자락이라도 걸려 있으면, 이스라엘에 정착해서 ‘땅’을 가질 수 있다. 그래서 세상에는 생각보다 유태인이 많다. 우크라이나 대통령인 젤렌스키도 모계가 유태인 혈통이다. 따라서 언제든 이스라엘 국적을 취득할 수 있다(이미 했는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영국 국적은 취득했다. 대신 별장은 플로리다와 이탈리아에 있다). 그리고 2018년 기준으로 미국 상하원 의원 535명 가운데, 89명이 미국/이스라엘 이중 국적자다. 즉 미 연방의회 의원 6명 가운데 1명은 미국 시민이지만, 동시에 이스라엘 시민이기도 하다.  그런데 2020년 기준으로 미국내 유태인은 전체 인구중 2.4%, 580만명에 불과하다.

이스라엘은 팔레스티나 지역에서 ‘군사력’을 동원해서 침략하여 빼앗은 땅에 ‘유태인’들을 ‘만들어’ 넣으면서, 원주민인 팔레스타인인들은 게토로 몰아넣었다. 이를 고급스러운 용어로는 ‘인종 청소'(ethnic cleansing)라고 부른다. 흥미롭지 않은가. 독일 제3제국처럼 급하게 하면 인종 청소, 인종 학살이 되지만, 이스라엘처럼 70여년에 걸쳐 천천히 진행하면 세상은 그곳을 ‘약속된 땅(the promised land)’이라고 부른다. 또는 아마도, EU 외무위원장인 요시프 보렐의 표현을 빌자면, ‘가든’이 될 것이다.

이 가든은 나름 행복한 곳이었다. 약속의 땅 같았다. 이번 하마스의 공격 타겟 중 하나가 된 스베르돗은 가자가 내려다 보이는 언덕에 위치한 정착촌이다. 지난 2019년 이스라엘 공군이 가자를 폭격할 적에, 이곳 주민들은 언덕 위에 잔치상을 차려놓고 불타오르는 가자를 보며 파티를 벌였다. 문자 그대로 ‘강 건너 불구경’이었다. 아니, 자신들이 지른 불이기 때문에, 그것으로는 표현이 충분치 않다. 아마 네로가 로마 빈민촌을 불태우면서 시를 읊은 것에나 해당할 것이다(역사학자들은 네로가 불을 지른 것은 아니라고 결론내리고 있기는 하지만).

그래서 하마스는 제일먼저 스베르돗을, 그리고 트랜스 음악 축제를 겨냥했다 (빠른 템포의 최면성 음악 장르인 트랜스는 이스라엘에서 꽤 흥한 음악 장르다. 이스라엘서는 싸이트랜스라고 불리는데, 이런 종류의 파티에 참석했던 사람들의 말로는 ‘약 빠는’ 파티라고 한다. 약을 빨든 먹든, 그건 이스라엘 경찰이 알아서 할 문제지만, 거대한 게토인 가자 지구 바로 코 앞에서 ‘파티’를 한다는 것은 꽤 흥미로운 발상이다). 

하마스의 ‘홍수’ 작전은 이스라엘이 세운 가든을 ‘정글’로 만들려는 것이다. 만일 이스라엘이 안온하다면, 그래서 유태인의 핏줄을 자랑하는 외부의 누구라도 오고 싶어한다면, 팔레스타인인들에게는 그만큼 미래가 없다. 미래를 빼앗긴다. 이스라엘이 지옥일수록, 또는 이스라엘이 가자만큼 지옥일수록, 팔레스타인인들에게는 정글에서 탈출하여 성공할 확률이 높아진다. 그것이 가자 인구의 절반을 희생하는 일일지라도. 이 아이러니.    

이스라엘이 건설한 가자 장벽.  출처: Alwaght.net

3. 홍수 뒤

다시 한번. 가자는 작은 곳이다. 그러나 아르테모브스크(우크라이나명 바흐무트)에 비하면 7배 가량이나 된다. 우크라이나 전쟁전 아르테모브스크의 인구는 7만명이었다. 거기서 시가전이 두 달 반 동안 벌어졌고, 주민들은 이미 모두 피난 갔기 때문에, 전투요원들만 러시아, 우크라이나 합쳐서 약 6만-8만 가량 전사했다. 시가전은 힘든 일이다. 현대 군사 교리는 병력이 약 6배의 우위가 있어야 시가전에 승리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가자지역에 거주하는 230만의 주민이 피난 갈 곳이 없이 장벽으로 봉쇄된 상태에서 만약 시가전이 벌어지면, 과연 얼마나 죽어야 이 전쟁은 끝이 날 수 있을까?

지금 우크라이나 아르테모브스크의 모든 건물들은 성한 것이 하나도 없다. 그나마 이 건물들은 구 소비에트연방 시절 요새도시로 새워진 것이라 아주 튼튼하기 때문에 그 정도 손상에 그쳤다. 만약 이명박 시대의 건축 규정으로 지은 건물들이었다면 종이짝 처럼 찢어졌을 것이다. 가자 지구의 건물들은 그만큼 튼튼하지는 않다. 세계는 지옥도를 한참 동안 보게 될 것이다.

하마스의 홍수 작전은 기껏해야 불도저로 장벽을 부수고, 고작 모터글라이더로 날아오르고(사진), 초보적인 드론(FPV)으로 폭탄을 떨구며, 골프 카트를 타고 진격하는 정도의 군사력을 가지고 진행되었다. 아이디어는 참신하지만, 그것으로 전투기 미사일 155mm포, 탱크, 장갑차를 이길 수는 없다. 이스라엘의 방공망(iron dome)을 뚫기 위해 수천발의 미사일을 발사했다지만, 그 미사일들은, AP 통신의 보도를 빌자면, 이스라엘 군이 폭격한 포탄 중에서 불발탄을 모아 거기서 화약을 빼내 만든 ‘사제 미사일’도 포함되어 있었다. 서구가 우크라이나에 지원했던 무기들이 가자 공방전이 본격화되면 등장할 가능성이 높지만, 그래봤자 재블린이나 manpad(대공 휴대용 유도탄) 수준이며 그것으로 현대화된 이스라엘군과 맞설 수는 없다. 다만 시가전이라는 환경적 요인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하마스 대원들이 모터글라이더로 장벽을 넘어 이스라엘로 향하고 있다. 출처 : 유튜브 캡쳐

이스라엘군이 가자에 진입한다면, 살육 이외에 얻게 되는 것은 무엇인가? 없다. 실은 이것이 이스라엘이 지상군을 투입하기 어렵게 만드는 가장 큰 요인이다. 정치적으로 이스라엘이 달성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다시 이스라엘의 점령지 ‘가든’으로? 그건 이미 불가능하다. 가자 한 곳에서만 너무 많은 사람이 죽어야 하기 때문에, 서구가 아무리 선전전에 능하다고 해도 ‘인도주의의 함정(trap)’을 벗어날 도리가 없다.

게다가 만일 지상군이 투입된다면, 그래서 아랍 내부에서 대중들이 동요하기 시작한다면, 레바논의 헤즈볼라가 개입할 명분을 준다. 이스라엘은 두 개의 전선을 맞이하게 될텐데, 승리가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 그 직간접적 피해가 너무 크기 때문에 선택하기 쉽지 않다. 대신에 헤즈볼라의 개입을 불러오기 위해서 가자 지역 역시 정말 처절할 정도로 어마어마한 피해를 감수해야 한다(하마스와 헤즈볼라는 서로 이슬람 종파도 다르고 노선도 다르다. 하마스는 수니파이며, 헤즈볼라는 시아파다. 이란이 하마스, 헤즈볼라와 이번 홍수 작전을 공동기획했다는 <월스트리트 저널>의 보도는 세상 물정 모르고 하는 얘기다. 하마스를 ‘실제로’ 지원하는 곳은 카타르다. 이란은 정치적 구호만 클 뿐이며, 이스라엘을 견제하기 위한 용도로만 하마스를 활용한다. 게다가 이 기사를 쓴 기자는 아랍토후국연방(UAE)의 두바이에 앉아서 자판을 두들겼다. 하마스와 헤즈볼라 ‘간부’가 두바이에서 <월스트리트 저널> 기자를 만나서 주절이 주절이 떠들 가능성은 혜성이 지구에 충돌할 확률보다 낮을 것이다).

그리고 헤즈볼라가 개입하면, 그 때는 전 아랍이 모두 나설 수밖에 없게 된다. 이 때는 진지하게 73년의 석유 파동 재림을 걱정해도 된다. 홍수 (하마스의 공격) 바로 다음날 아랍연맹의 사무총장이 러시아로 급히 날라가 푸틴과 회동하고, 지난 9일에는 이라크 총리가 푸틴과 회담했으며 러시아는 양쪽 모두 자제할 것을 촉구했는데, 이걸로 보면 국제전으로 확전 할 가능성은 아직은 높지 않다고 본다. 다만, 서구의 정치적 선전전을 위한 전투는 당분간 필요할 것이며, 이를 위해서는 공중 폭격하면서 팔레스티나인들을 무차별 살상하고 지상군의 일부 투입(특공대를 보내 하마스 지도부를 처형했다든지 하는 스턴트) 하는 일은 진행될 것으로 보인다.

현재 상황에서 이스라엘로서 가장 부담이 적은 시나리오는 앞에 언급한 ‘상징적인’ 가자 진격에 더해서 이 기회에 가자를 완전 봉쇄하는 것이다(민간인 거주 지역에 대한 봉쇄 행위는 국제법상 전쟁 범죄 행위다). 이는 전격적인 작전이 아닌, 지공(遲攻)을 의미하며, 따라서 봉쇄가 길어지면 다시 가자 지구의 ‘인도주의’ 문제가 대두될 수밖에 없다. 그 때는 ‘(팔레스타인)인도주의 vs (이스라엘)인도주의’가 대립하는 양상이 된다. 그리고 인도주의적 관점에서 말싸움을 하기 시작하면, 사태의 본질은 사라져 버린다. 그것이 이스라엘이 바라는 장기적 대응일 것이다. 누가 더 잔인한가, 혹은 누가 덜 잔인한가를 가르는 프레임에 빠진다면, 팔레스타인은 지난 70년의 역사를 되풀이해서 겪을 수밖에 없다.

이미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하마스의 홍수 작전을 “순수한, 고삐 풀린 악”으로 규정했으며, 이스라엘 국방장관은 팔레스타인인들을 ‘인간 짐승'(human animal)이라고 불렀다. 1930년대 말에도 자신 이외의 민족들을 그렇게 부른 사람들이 있었다. 나치라고 불렸던 사람들이 유태인을 향해서 그렇게 불렀다, “인간 이하(sub human)이라고. 그들은 자신들이야말로 신이 약속한 성스러운 과업을 수행하는 전사들이라고 자부했다. 이제 이스라엘은 나치가 되었는가? 그렇다. 당신이 과거에 희생자였고 피해자였다는 사실이 오늘날 당신이 학살자이고 가해자라는 사실을 정당화해주지는 못한다.

자본주의의 지배층들은 곤궁해지면 파시스트가 되며, 여유가 생기면 리버럴이 된다. 그리고 그들은 지금 여유가 없다.

결국 핵심은, 누가 누구를 지배하는가, 왜 어떻게 지배하는가이며 그 지배에서 벗어나야만이 비로소, 팔레스타인-이스라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첫걸음을 디딜 수 있다. 그리고, 아마도 유감스럽게도, 이 세계는 그 첫걸음을 영영, 또는 아주 낙관적으로라도 아주 오랫동안은, 떼지 못할 가능성이 더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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