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아도 꿈결, 속여도 꿈결”
: 전세계 민주주의 인식 지수
2024년 5월 23일 / 오늘의 챠트 Chart of the Day
글 <전망과실천> 편집부
민주주의, 의회민주주의, 민주주의동맹재단, 민주주의 인식지수, 전쟁
얼마 전 대만 의회에서 난투극이 벌어졌다. 다수당인 국민당이 행정부의 권한을 축소하는 법안을 통과시키려 하자, 지난 행정부 총통 선거에서 승리한 소수당인 민진당 의원들이 무력으로 맞섰다. 민진당 의원들은 법안 문서를 빼앗아 염소처럼 씹어 먹었고, 아예 투표지를 탈취해 의회당 밖으로 달아나기도 했다. 대만 의회의 격투기는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다. 우크라이나와 더불어 전 세계에서 무력이 토론과 표결에 우선하는 의회민주주의의 대표적인 장소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대만 시민들은 이같은 ‘말보다 가까운 주먹’을 어떻게 평가할까?
군사적 네오리버럴리즘(military neo-liberalism)을 표방하는 유럽의 싱크탱크인 ‘민주주의동맹재단’(Alliance of Democracies Foundation)은 해마다 각국 시민들이 자국의 민주주의를 어떻게 평가하는지를 묻는 여론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나라별 ‘민주주의 인식지수’(Democracy Perception Index)를 발표한다. 이 지수를 발표하는 단체가 군사적인 신자유주의를 표방하는 유럽의 싱크탱크라는 점을 염두에 두고 내용을 살펴보자.
2024년 올해 2-4월 사이 전 세계 53개국에서 6만 3천여 명을 대상으로 한 이번 조사에는 흥미로운 얘깃거리가 많다.
첫째, 조사 대상국 가운데 자국 민주주의가 ‘충분’하다고 응답한 비율이 가장 높은 나라는 바로 다름아닌 ‘한국’이다. 그리고 중국이 아슬아슬하게 2위에 올랐다. 근소한 차이로 ‘격투기’ 대만이 3위를 차지했다. 베트남이 4위, 스위스가 5위, 필리핀이 6위다. 당연하거나 흥미롭거나.
둘째, 자국이 민주주의라는 응답률은 이스라엘이 세계 1위다. 일본은 선진국 가운데 가장 낮았는데, 러시아보다 낮고 파키스탄과 같았다. 심지어는 민주주의가 중요하다는 응답률은 일본이 파키스탄보다도 낮다. 왜 일본인들의 자국 민주주의에 대한 신뢰는 이렇게 바닥일까?
셋째, 미국인들 중에서 미국이 민주주의라고 대답한 비율은 이집트, 멕시코, 인도네시아 국민들이 자국 민주주의에 대해서 평가한 지수보다 낮다. 민주주의가 중요하다고 대답한 미국인 비율도 역시 이들 국가 시민들보다도 낮다.
넷째, 지난 수년 사이에 정부가 소수 집단의 이익을 대변한다는(즉 민주적이지 못하다는) 응답률의 변화가 특징적으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지역들이 있었다. 주로 전쟁 관련이지만, 유럽, 특히 독일은 예외다. 독일은 왜 높을까?
이스라엘과 러시아는 전쟁을 계기로 정부에 대한 시민의 의식이 바뀌었다. 전쟁에서 패배하고 있는 우크라이나는 그 반대가 되었다. 독일은 국내 전쟁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정부의 민주성에 대한 시민의 의식이 역전되었다.
물론 민주주의에 대한 시민의 ‘인식’(perception)이 민주주의의 ‘현실’(reality)을 말해주지는 않는다. 그러나 지배층이 시민들을 좀 더 털어먹어도 되겠구나, 혹은 더 밀어붙여도 체제가 위험에 빠지지는 않겠구나 하는 판단들을 하는 데는 이런 지수가 중요한 근거가 될 수 있다. 특히 전쟁의 ‘효용’에 관해서는 위험한 선택을 할 가능성을 높여준다.
하지만 체제를 믿을수록, 혹은 안주할수록 시민들이 감수해야할 미래의 위험은 더 커진다.
시인 이상이 일찍이 말했던 것처럼, “속아도 꿈결, 속여도 꿈결”(<봉별기>)이지만, 꿈이 길면 꿈자리도 더 뒤숭숭해지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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