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의 대륙
: 아시아 노동운동을 위한 새로운 역사 서술
2025년 11월 27일 / 연구자의 시선
글 장대업 연구위원 (서강대학교 글로벌 한국학)
세계 자본주의가 한쪽에서는 노예제나 불안정 노동에 의존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비교적 높은 임금을 받는 자유노동자들에게 의존하고 있다면, 이 가운데 무엇이 자본주의 세계체제에서 ‘진짜’ 노동인가? 오랫동안 우리는 후자가 ‘진짜’라고 배워 왔다. 반대로 전자는 불행히도 현재까지 남아 있는 과거의 잔재로 간주되며, 후자만이 미래로 나아갈 임무를 부여받는다. 이것이 자본주의 발전에 대한 우리의 이해뿐 아니라 노동운동에 대한 우리의 시각까지 규정해 온 근대화론적 인식론이다. 근대화론과 그 역사주의적 상상 속에서, 서구의 자본주의 발전은 아시아가 결국 도달해야 할 미래를 의미한다. 같은 논리에서, 제도적 형태·법적 권리·노동조합·협상 구조 등을 갖춘 유럽과 북미 등 북반국의 노동은 아시아 노동운동이 궁극적으로 따라가야 할 모델로 제시되며 수많은 논문들이 이들의 사례를 닳고 닳도록 복습해왔다.
그 결과, 아시아의 많은 노동 ‘전문가’들—연구자와 활동가 모두—은 서구만을 바라보며 유럽과 북미에서 모델을 찾고, 유럽·미국의 거울에 비친 ‘못생긴’ 아시아 노동의 모습을 한탄해 왔다. 그러나 어쩌면 아시아 노동운동이 더 시급하게 해야 할 일은 “과거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이 인식론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아시아의 과거는 북반국의 거울에 비추어진 것보다 훨씬 더 풍부하며, 아시아 노동의 새로운 전략을 위한 자원을 충분히 제공한다.
우리가 필요한 것은 아시아 자본주의 경제, 더 나아가 글로벌 자본주의 변동 속에서 아시아 노동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에 대한 인식론적 전환이다. 이 오랫동안 지체되어온 전환은 아시아를 “세계의 공장”이 아니라 “노동의 대륙”으로 다시 상상하는 데서 출발할 수 있다. 이는 유럽의 부상 이래 지속되어 온 기존의 아시아 발전사 서술에서 벗어날 것을 요구한다. 아시아 노동, 따라서 아시아 자본주의를 글로벌 자본주의라는 총체성의 중심에 두는 새로운 역사 서술이 필요하다. 이것은 단순한 이론적 유희가 아니라 현재 아시아 노동운동이 직면한 교착 상태를 돌파하기 위해 필수적인 작업이다. 어떠한 전략도 그것을 규정하는, 기록된 역사의 권위를 뛰어넘지 못한다. 우리는 과거의 역사를 다시 써야만 미래의 전략을 다시 쓸 수 있다.
캄보디아 메이데이 노동자 시위. 2013. 5.1
글로벌 팩토리
‘글로벌 팩토리(global factory)’는 세계은행이 1993년 동아시아 지역에서 나타난 일련의 경제 성장을 동아시아의 기적(East Asian Miracle)이라 지칭한 이후 동아시아에 붙여진 이름이다. 한국, 대만, 홍콩, 싱가포르, ASEAN 국가들, 그리고 중국 등 동아시아의 2·3세대 신흥경제들이 부상한 이후, 사회과학 문헌들은 이 지역의 급속한 경제 성장과 세계적 제조업 허브로서의 부상에 초점을 맞추어 왔다. 나는 이러한 연구 경향 전체를 ‘세계공장 문헌’이라 부르며, 이는 아시아 자본주의 발전에 대한 다양한 분석을 포괄한다. 이 문헌의 초기 단계는 개발국가라는 상상적 개념에 초점을 둔 “경제기적” 문헌들로 대표된다. 개발국가론은 동아시아의 성장을 효율적인 국가 개입으로 설명하며, 동아시아를 다시 학계의 주요 논쟁의 장으로 끌어올렸다.
이 초기 연구들은 아시아의 결함보다 강점에 주목하며, 상세한 경험 연구에 기반해 아시아를 정체적이거나 내향적인 지역 이상으로 보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아시아 신흥 경제의 발전은 여전히 “기적”으로 묘사되었는데, 이는 정상적인 상황에서는 일어나지 않아야 할 일이었다는 의미로, 결국 호랑이와 용 같은 신화적 이미지로 치장되었다. 그렇다면 이러한 서술에서 아시아의 ‘정상’ 위치란 대체 무엇이었는가? 뒤처진, 전통적, 정체적, 전제적, 내향적이며, 역사가 없는 대륙으로 묘사되는 것이었다. 대부분의 세계공장 문헌은 자본주의가 유럽에서 형성되었고, 유럽이 홀로 근대성을 획득했으며, 이후 이를 뒤처진 아시아로 확산시켰다는 오래된 유럽중심적 역사서술방법을 유지했다. 이 서술에서 아시아의 특수성은 확산된 자본주의와 결합해 서구 혹은 북반구자본주의의 일종의 파생형인 ‘아시아 자본주의’를 만들어낸 것으로 간주되었다.
이 초기 세계공장 문헌의 특징들은 19세기 아시아에 대한 인식틀에 그 기원을 가진다. 이 인식틀은 근세 초기에 형성되어 식민지 시대에 절정에 이르렀으며, 전통과 근대의 시간적 단절(temporal rupture), 서구와 나머지 세계의 공간적 구분이라는 사회과학의 정통 세계관으로 굳어졌다. 그렇다면 이 19세기적 인식틀이란 무엇인가? 이는 ‘동양적 전제주의(oriental despotism)’ 개념을 중심으로 형성된 유럽의 아시아관이었다. 이 관점 속 아시아는 내적 역동성이나 역사성이 없는 정체적 공간이자, 시간 속에 얼어붙은 사회로 묘사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에서 베르니에, 몽테스키외, 헤겔로 이어지는 전통을 이어받은 이 관점은 아시아를 피상적 자연·사회적 특성에 따라 다음과 같이 규정했다: 척박한 토양, 거대한 공공사업을 수행하기 위한 중앙집권 국가의 필요성, 절대 국가 권력에 수동적으로 복종하는 목가적 농촌 공동체, 자유의 부재, 국가의 토지 독점, 사유지의 부재, 그리고 결과적으로 자본주의 ‘씨앗’의 부재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광범위하고 억지스러운 일반화 속에서 터키, 페르시아, 인도, 중국 같은 다양한 사회들은 동양적 전제주의라는 범주 아래 묶였고, 19세기 유럽 사상가들은 이들 사회를 인류 문명의 단선적 위계질서에서 최하위에 배치했다. 그 정점에는 자본주의 유럽이 위치했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아시아가 세계 제조업의 중심이자 세계경제 성장의 엔진으로 부상하자, 서구가 아시아를 뒤처진 주변부로 보는 관행에는 일부 변화가 나타났다. 20세기의 경제기적 문헌과는 달리, 최근의 글로벌 팩토리 문헌은 아시아의 부상을 ‘기적’이 아니라 ‘재부상(resurgence)’으로 설명하며, 아시아 혹은 동아시아의 세기가 도래할 것이라 전망한다. 이렇게 21세기의 글로벌 팩토리 문헌은 서구 도래 이전부터 존재했던 아시아 내부의 역동성과 글로벌 자본주의의 필수적 구성요소로서 아시아의 능동적 역할을 인정하기 시작했다.
이전의 근대 세계사가 본질적으로 유럽 자본주의의 확산 과정이라는 관점을 넘어, 보다 급진적인 문제 제기를 한 이들도 있다. 이들 이단적(heterodox) 학자들은 세계사의 중심을 아시아로 이동시키며 전 지구적 역사 서술을 재구성한다. 예를 들어, 안드레 군더 프랑크(Andre Gunder Frank)는 『리오리엔트(ReOrient)』(1997)에서 인류 역사 전체를 통틀어 아시아가 세계경제에서 장기간 우위를 점해 왔으며, 19세기와 20세기 사이의 짧은 예외적 시기만이 그 흐름을 일시적으로 끊어놓았다고 주장한다. 프랑크에게 21세기는 세계경제가 다시 “정상화”되는 시기, 즉 동아시아가 세계경제를 재정렬(reorient)하거나 “재-오리엔탈화(re-orientalise)”하고, 유럽은 이전의 주변적 지위로 되돌아가는 시기이다. 지오바니 아리기(Giovanni Arrighi)의 『베이징의 아담 스미스(Adam Smith in Beijing)』 역시 중국 경제가 전근대 세계경제에서 차지했던 중심성을 인정할 뿐 아니라, 중국이 자본의 지배 없는 시장경제라는 형태로 현대 신자유주의 발전에 지속 가능한 대안을 제시할 가능성까지 제시한다.
그러나 아시아의 역사적·현대적 중요성을 인정한다는 점에도 불구하고, 이들 이단적 학자들은 아시아를 글로벌 자본주의의 구성 요소로서가 아니라 글로벌 자본주의와 병렬적으로 존재하는 또 하나의 세계로 상정함으로써 이러한 결론에 도달한다. 프랑크는 세계경제사를 일종의 단일하고 탈역사적인 전지구적 교환체계의 순환적 진화 과정으로 그린다. 그 결과, 그는 16세기 이후 자본주의의 역사 전체를 초역사적 세계시장 시스템의 흥망성쇠에 대한 분석으로 대체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프랑크는 세계사 속에서 아시아의 위치를 재정립하는 듯 보이나, 실제로는 유럽 제국주의 아래 아시아가 종속적 위치로 편입된 바로 그 자본주의의 ‘특이성’—즉 아시아가 겪은 피비린내 나는 종속과 착취의 역사—를 시야에서 지워버린다.
아리기 역시 송대에서 21세기 중화인민공화국에 이르는 기간 동안 비자본주의적 시장경제가 지속적으로 존재해 왔다는 가정을 통해, 아시아의 세계경제사적 위치를 재구성한다. 아리기에 따르면 역사적으로 예외적인 것은 중국의 장기적인 전근대적 우위가 아니라, 유럽의 부상기에 나타난 일시적 쇠퇴이다. 그는 중국의 발전을 자본의 지배 없는 시장 확대의 역사로 규정하며, 이 경로가 우월한 군사력을 기반으로 한 유럽 자본주의의 팽창 앞에서 굴복했다고 본다. 그리고 20세기 후반 개혁·개방 정책 이후 중국이 한때 중단되었던 비자본주의적 시장 발전이라는 경로를 다시 이어가기 시작했다고 해석한다. 이러한 전제 위에서 아리기는 중국이 세계에서 가장 큰 자본주의적 노동력을 보유하고, 글로벌 제조기업들에 노동력을 공급하며, 세계시장을 위한 재화를 생산해 글로벌 자본의 신자유주의적 축적을 떠받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중국은 자본주의도 아니고 신자유주의도 아니다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두 학자 모두 유럽중심주의를 극복한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동아시아에서 자본주의가 피와 땀으로 구축된 실질적 역사를 희생시킴으로써 이를 달성한다. 두 사람은 아담 스미스가 말한 초역사적·자연적 시장경제—즉 인간이 문명 탄생 이래 자기이익을 추구하며 분업을 확장하고 교환을 늘려 생산력을 높이고, 그부를 사유재산으로 축적해 왔다는 전제—에 의존한다. 그리고 아시아가 이러한 발전경로를 태생적으로 유지해 왔으며, 유럽 자본주의가 끼어든 시기는 단지 이러한 발전경로의 일시적 중단에 불과하다고 가정한다. 그 결과, 그들은 유럽 자본주의와 나란히 존재하는 아시아의 평행우주(parallel universe)를 만들어낸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19세기 유럽이 상상했던 아시아의 불변성이라는 관념에 결국 묶여 있다.
이들은 서구의 대안을 찾으려는 열망에 지나치게 사로잡혀, 오리엔탈리즘이나 반(反)오리엔탈리즘을 완전히 넘어서지 못한다. 결국 “타자(the Other)”가 유럽의 근대성과 자본주의와 병렬적으로 작동하는 또 하나의 세계에 존재해 왔다는 상상에 머물게 된다.
이러한 역사서술적 한계의 중심에는 아시아 노동과 그 행위자성(agency)의 부재가 있다. 이들의 서술 속에서 아시아는 세계 시장경제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지만, 마치 무역을 통해 교환된 노동생산품이 과거에도 현재에도 땅속에서 저절로 솟아난 것처럼 다루면서 실제로 그 시장교환을 위해 생산을 수행해 온 아시아 노동이 어떠한 사회적 관계 속에서 동원되었는지는 전혀 분석되지 않는다. 그 결과, 앞선 세계공장 문헌이 국가와 자본만을 역사적 행위자로 중앙에 복귀시켰던 것처럼, 이들 이단적 이론도 아시아 노동을 역사 밖으로 밀어낸다.
마르크스의 오리엔탈리즘과 인식론적 전환
아시아의 역사적 중요성을 인정하기 위해 굳이 아시아가 글로벌 자본주의의 외부에 존재한다거나, 아시아적 시장경제라는 평행 우주를 상상할 필요는 없다. 훨씬 더 생산적인 접근은 아시아 노동을 글로벌 자본주의의 역사 서술 속으로 다시 가져오는 것이다. 자본주의의 등장 이전과 이후 모두에서 노동을 중심에 놓고 세계경제를 이해하면, 다른 지역과 비교했을 때 아시아가 지닌 압도적 규모와 역사적 비중이 드러난다. 특히 오늘날의 글로벌 자본주의에서는 아시아 노동력이 전 세계 노동력의 55% 이상을 차지하며, 유럽은 약 10%, 북미는 약 5%에 불과하다.
노동하는 사람들의 존재에 우리의 시선을 돌리기 위해서는 애덤 스미스보다 칼 마르크스(Karl Marx)를 다시 불러오는 것이 훨씬 더 효과적이다. 그렇다고 해서 마르크스가 유럽중심주의나 오리엔탈리즘에서 자유로웠다는 뜻은 전혀 아니다. 그는 분명 19세기적 인식틀의 영향을 받았다. 『공산당 선언』(1848)에서 젊은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중국의 운명은 이제 끝났으며, “중국의 장벽(Chinese walls)”은 부르주아지 상품의 “값싼 가격 앞에서” 무너질 것이라고 썼다. 나아가 이러한 값싼 상품이 “야만인들의 완강한 외국인 혐오를 굴복시킨다”고 주장했다.
마르크스가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1859) 서문에서 처음 공식적으로 언급한 ‘아시아적 생산양식’은 아시아를 생산양식의 진화에서 가장 원시적 단계에 위치시켰다. 그러나 그는 『정치경제학 비판』에서도, 1857~1858년에 집필된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Grundrisse)』의 “자본주의 이전의 생산 형태들”에서도 이 생산양식을 떠받치는 사회관계가 무엇인지, 그것을 뒷받침할 근거가 무엇인지 명확히 밝히지 않았다. 그는 부분적 증거와 과도한 일반화에 기반한 ‘동양적 전제주의’라는 상속된 관념에 의존했다. 이 관념은 다양한 아시아 사회들을 하나의 이상형으로 축소시켰고, 사람들이 전제적 국가에 수동적으로 복종하는 이유를 건조한 환경에서 대규모 수리사업을 수행해야 한다는 자연적 필요성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1853년, 마르크스는 중국을 “미신적 신앙”, “은둔적 고립”, “세습적 우둔”으로 특징지었고, 인도는 “아득한 고대 이래” 변함없는 사회, “역사가 전혀 없는” 사회로 묘사했다. 그는 인도의 사회관계를 퇴행적인 것으로 깎아내리고 영국 식민주의가 필요한 “혁명”을 가져올 것이라고 믿었으며, 영국을 “역사의 무의식적 도구”라고 규정했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뒤따르는 저작들은 비(非)유럽 주변부에 대한 그의 관점이 미묘하게 변화했음을 보여준다. 그는 곧 제국주의적 폭력이 아시아 역사에 진보를 가져다줄 것이라는 생각을 버렸다. 이전에는 아시아인들에게 적용하던 “야만(barbarian)”이라는 표현을 유럽으로 돌려, “부르주아 문명의 내재적 야만성”을 비판했다. 미국 남북전쟁을 다루는 글에서는 비유럽 지역의 식민주의와 노예제가 유럽 자본주의 발전의 주요한 기폭제였음을 인정했고, 『자본』에서는 식민적 수탈이 유럽의 부상을 위한 필수 전제임을 분명히 했다. 그는 또한 반식민 투쟁을 유럽 혁명의 촉발 요인으로 보기도 했다. 더 나아가, 주변부가 유럽과 동일한 자본주의 발전 과정을 거치지 않아도 탈자본주의적 발전의 기반을 발견할 수 있으며, 그러한 기반은 주변부의 ‘비자본주의적’ 공동체 속에서도 존재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함으로써, 스미스 이래 고전정치경제학이 놓아두었던 단선적·단계론적 발전 모델과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무엇이 마르크스의 관점을 바꾸었는가?
마르크스는 초기에는 자본과 유럽의 혁명적 역할에 집중했고, 식민주의를 생산력을 전 세계로 확산시키는 수단으로 보았다. 따라서 식민지의 대중 노동자들은 유럽 프롤레타리아와 달리, 자신들의 해방을 스스로 이룰 수 없는 수동적 존재로 간주되었고, 제국적 자본이 그들의 해방을 ‘대신’ 수행해 줄 것이라 여겨졌다. 그러나 태평천국운동(1850–1864)과 세포이 항쟁(1857–1859)에 이르는 아시아 인들의 식민주의와 전제정에 대한 광범위한 저항은 아시아인들이 전제주의의 수동적 신민이 아니었음을 보여주었다. 이 사실은 마르크스로 하여금 해방의 잠재력을 자본이 아니라 사람들, 즉 저항하는 민중 속에서 찾도록 이끌었다. 유럽 제국, 토착 지배층, 새롭게 등장한 사회세력들이 서로 충돌하는 가운데 아시아의 평범한 사람들이 사회경제적 변동에 참여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그의 인식론적 전환의 핵심적인 출발점이 되었다.
마르크스는 아시아 사회관계를 본격적으로 분석한 저작을 남기지 않았고, 주요 저작에서 유럽중심주의를 명확히 폐기하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그가 아시아와 주변부를 글로벌 자본주의의 필수적인 구성 과정으로 인정한 것은 아시아를 자본주의의 외부가 아니라 자본주의의 구성적 요소로 이해하는 데 중요한 출발점을 마련한다. 마르크스가 보여준, 자본의 행위자성에서 평범한 사람들의 행위자성으로의 관심 전환은 아시아를 분석할 때 고정된 전제를 반복하는 대신, 평범한 사람들이 어떻게 변화하는 사회관계를 통해 역사를 만들어 가는지에 주목해야 한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새로운 역사서술을 위한 방법으로서의 아시아 노동
마르크스가 완성하지 못했지만 중요한 인식론적 전환을 보여준 지점을 새로운 출발점으로 삼아, 나는 아시아 노동을 글로벌 자본주의 속 아시아의 위치에 대한 19세기적 인식틀을 극복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 제안한다. 이 인식틀은 여전히 학계의 담론을 규정할 뿐 아니라, 동아시아 노동자의 복지를 개선하기 위한 변혁적 전략을 상상하는 운동가들의 상상력까지 제한하고 있다. 이것을 극복할 수 있는 노동 중심의 아시아 역사서술이 바로 내가 ‘노동의 대륙(Continent of Labour)’이라 부르는 접근이다. 이 접근은 유럽·자본 중심의 역사서술을 넘어, 아시아와 세계경제를 노동 중심의 시각에서 재구성하고자 한다. 즉 아시아뿐 아니라 셰계 자본주의 형성에 참여해온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등 여러 지역을 “노동의 대륙”으로 바라보며, 이들 노동인구가 함께 글로벌 자본주의를 구축하고 세계사를 형성해 왔다는 사실을 전면에 두는 것이다.
노동의 대륙 접근은 아시아 안팎에서 자본주의 발전을 연구하는 데 세 가지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첫째, 이 접근은 동아시아의 부상을 찬양하는 대신 문제화함으로써, 기존 글로벌 팩토리 문헌과는 전혀 다른 출발점을 제시한다. 동아시아가 글로벌 팩토리이자 세계 자본주의의 성장 엔진으로 부상한 것은 여러 요인 중에서도 특히 노동 착취·수탈의 세계적 허브로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무엇이 얼마나 생산되었는가에 매혹된 글로벌 팩토리 문헌은 동아시아의 눈부신 성장 뒤편에서 웅크리고 있는 거대한 존재—노동—을 보지 못했다. 노동의 대륙 접근은 동아시아의 글로벌 팩토리화가 양적·질적·지리적으로 변화하는 노동 및 고용구조와 어떻게 맞물리는가에 대한 질문을 다시 던진다.
둘째, 이 접근은 노동을 아시아 자본주의 발전을 형성하는 행위자로 바라보게 해 준다. 노동은 단순히 재발견된 연구대상이 아니라 아시아를 바라보는 창이다. 즉 ‘아시아의 노동’을 보는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노동을 통해 아시아’를 보게 하는 것이다. 노동의 행위자성을 아시아 자본주의 발전사 속에 되돌려놓으면, 발전의 형태와 단계는 더 이상 자본 투자나 금융 흐름, 국가의 의도적 정책만의 결과가 아니라, 노동과 국내·국제적 사회세력 간 상호작용의 역사적 산물임을 이해할 수 있다. 요컨대 아시아 노동의 행위자성이 없었다면 아시아 자본주의 발전(나아가 세계 자본주의 발전)은 지금과는 전혀 다른 형태를 취했을 것이다.
셋째, 노동을 통해 아시아를 보면 글로벌 자본주의의 총체성(totality)을 다시 구성할 수 있다. 아시아의 자본주의 경제를 서로 연결하고, 이들을 세계체제로 연결하는 것은 바로 노동이기 때문이다. 노동의 대륙 접근법이 가진 기본 명제는 다음과 같다: 글로벌 자본주의는 여러 대륙의 사회경제 공동체 간 연결을 필요로 하며, 그 연결은 양측에서 노동이 수행되어야만 성립한다. 노동은 서로 다른 ‘대륙’들 사이의 사회경제적 연계를 위한 기본 조건이며, 글로벌 전체성 자체를 구성하는 데 필수적이다. 세계 여러 지역에서 서로 다른 형태의 노동이 글로벌 자본주의를 위해 일해 왔고, 바로 그 과정이 지역들 간의 연결을 매개했다. 노동이 만들어낸 이 연결성에 주목하는 역사서술은, 발전을 국민국가 내부의 상호작용에 귀속시키는 기존의 방법론적 민족주의(methodological nationalism)에서 벗어나게 해 준다.
경제권들이 노동을 통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을 인정하면, 아시아는 최소한 글로벌 자본주의의 형성 초기부터 결코 유럽 자본주의의 ‘타자’나 외부에 존재한 적이 없다는 사실이 명확해진다. 노동이 만들어낸 연결성에 주목하면, 글로벌 자본주의의 역사를 유럽 사회의 자본주의가 전 세계의 비자본주의 사회로 확산된 것으로 설명하는 유럽중심적 확산론(diffusionism)을 넘어설 수 있다. 이러한 확산론은 노동에도 동일하게 적용되는데, 즉 자본주의적 사회관계와 임금노동이 유럽에서 시작해 유럽 내부의 자본축적을 가능하게 했고, 이후 비유럽 세계의 ‘전통적’ 사회관계를 대체하며 확장되었다고 보게 되는 것이다.
이 확산론은 블라우트(Blaut)가 “터널 시야(tunnel vision)”라 부른 관점에서 출발한다. 이것은 유럽 외부 세계의 역사가 유럽 내부의 변화를 추동했다는 사실을 보지 못하는 시야이다. 예컨대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 로버트 브레너(Robert Brenner)는 자본주의의 기원을 “하나의 지리적 지역—영국 농촌”에서 찾는다. 그곳에서 농민들의 ‘절반의 성공’에 그친 계급투쟁이 농노제와 독립 소농을 모두 해체했고, 그 결과 지주–자본가 소작인–농업 임노동자로 구성된 삼분 농업 체제가 등장하여 대규모 농업 운영, 자본투입, 기술혁신을 촉진 했으며, 이를 통해 영국이 다른 유럽 지역이나 세계의 사회경제 공동체들과 근본적으로 구별되는 농업 자본주의를 형성했다는 것이다. 브레너에게 자본주의의 핵심 표지는 바로 노동이 상품이 되는 ‘자유 임노동 체제’이다.
브레너의 설명에서 영국의 자본주의 전환은 철저히 내부에서 자생적으로 발생한다. 세계시장은 농업에서 공업으로의 전환기에 외부 수요를 제공하는 역할을 했지만, 이는 영국만을 위한 특수조건이 아니라 유럽경제의 보편적 조건이었기 때문에 내부적으로 발생하여 자본주의 발전에 “유리했던 계급·사회 생산관계”에 비해 부차적이었다. 따라서 그의 역사서술 속에서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아시아의 노동이 유럽 자본주의 성립 이전과 이후에 수행한 수탈된 노동은 “진정한” 자본주의적 노동이 아니며, 자본주의의 탄생을 구성하는 필수적 요소도 아니다.
이 단일 기원(single-origin) 이론은 글로벌 자본주의 형성 과정에서 역사적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었던 다양한 노동 형태들을 분리시킬 뿐 아니라, 동일한 역사적 순간을 살아가며 노동했던 이들 사이에 지리·인종·발전단계에 따라 위계적 구분을 만들어낸다. 식민지 시기에 형성된 ‘전근대적 수탈 노동’과 ‘근대적 착취 노동’ 사이의 암묵적 위계는, 오늘날 주변부의 ‘비정상적’ 노동이 ‘저발전’을 낳고 핵심부의 ‘정상적’ 산업노동이 ‘발전’을 낳는다는 서술 속에서 재생산된다.
이 관점은 역사적으로 다양한 구체적 형태를 가진 노동잉여 추줄의 관계를 가진 자본주의 세계체제에서 자본관계와 임노동이 중심적이라는 사실을 이들이 필연적·독점적 메커니즘이라고으로 오해함으로써, 체제전체를 구성하는 훨씬 넓은 노동의 스펙트럼을 보지 못한다. 마르크스주의자로서 브레너는 자본주의적 노동을 이렇게 좁게 정의하고 다른 형태의 노동을 자본주의 발전에서 배제하는 관점이 마르크스에게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마르크스가 19세기 자본주의 비판을 자본관계에 집중시켰다는 것은 사실이다. 마르크스에게서 프롤레타리아는 주로 ‘유럽의’ 자유 임금노동자로 나타나며, 이들은 자신의 노동력을 임금과 교환하는 존재로 그려진다. 그러나 이들은 마르크스가 자본주의의 형성 과정에서 관찰한 노동의 전체는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자본』에서 마르크스가 제시한 임금노동이 잉여가치를 창출하고, 그것이 자본으로 전환되며, 자본이 끊임없이 축적되고, 자본관계가 확대·재생산된다는 서사 전체가 실제로는 재구성된 논리적 그림(logical reconstruction)에 가깝다는 점이다. 『자본』에서 마르크스는 토미치(Tomich, 2004: 18)가 “이론적 역사(theoretical history)”라고 부르는 것을 구성하고 있으며, 이는 실제 역사 전체의 복잡성을 담은 ‘완전한’ 역사라기보다 상품·가치·화폐와 같은 추상적 범주 위에 재구성한 역사이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을 분석하면서 추상(abstraction)의 방법을 사용했는데, 이는 더 구체적인 사회관계로부터 보다 단순하고 일반적인 사회적 속성·관계를 나타내는 개념 범주를 추출하는 방식이다. 『자본』을 집필하는 과정에서 마르크스는 재귀적 서술 방식을 사용하여, 상품·가치·화폐 같은 일반적이고 추상적인 범주 위에 점차 복잡성을 더하여, 자본·잉여가치·임금노동 같은 더 구체적이고 특수한 범주로 나아간다. 이 범주들이 함께 모여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역사적 이미지가 형성된다. 토미치는 마르크스의 방법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상품–가치–화폐–자본이라는 범주의 연속에서, 각 범주는 그 후속 범주의 더 단순하고 기본적인 형태로 간주된다. 각 범주는 앞선 범주 위에 구축되면서 그것을 넘어선다. 동시에 앞선 범주들은 뒤에 오는 범주들 위에서야 완전한 발전을 이룬다. 이 범주들은 함께 ‘많은 규정의 집중’으로 이루어진 복합적·이질적 총체를 형성하며, 이는 다양한 관계와 과정을 통합된 이론적 체계로 엮어내고 그 상호관계를 이해할 수 있게 한다.”
마르크스가 『자본』에서 재구성한 것은 세계 자본주의의 피와 땀을 담은 ‘완전한’ 역사라기보다 추상적 범주의 논리적 전개에 부합하는 역사였다. 이 논리적 전개 속에서 사회적 부는 상품들의 집합으로 나타나고, 상품은 가치에 따라 교환되며, 가치는 화폐로 표현되고, 화폐는 노동력상품과 결합하여 자본이 되고, 노동력은 생계비 수준의 임금과 교환되며, 자본가는 노동자가 창출했으나 지급되지 않은 잉여가치를 통해 착취를 실현한다. 이 모든 것은 상품·가치·화폐 형태가 사회관계의 지배적 형태로 확립된 조건을 전제한다. 마르크스가 『자본』 전반에서 말하는 ‘착취’는 노동에 대한 무보상이나 노동자의 물리적 예속을 특징으로 하는 전근대적 혹은 폭력적 수탈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마르크스는 이상적·정상적 조건의 자본주의적 축적 과정에서도 착취는 여전히 일어난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마르크스는 자본주의가 이러한 조건에서 절대 벗어나지 않는다고 생각했는가? 19세기 노동자들이 모두 자유 임금노동자였으며 항상 생계비 수준의 보상을 받았는가? 자본주의는 단일한 노동 형태만을 필요로 하며, 그러한 노동의 존재가 자본주의의 기원이라는 증거가 되는가? 그렇지 않다. 『자본』 제1권 말미에 이르면, 마르크스는 마침내 유럽 내부와 외부 모두에서 훨씬 직접적이고 잔혹한 폭력이 자본주의를 생산·유지하기 위해 동원되었던 역사적 순간들에 주목한다. 마치 그는 논리적 전개를 위해 그동안 자본주의의 잔혹한 현실을 ‘숨겨두었다가’, 책 말미에서야 그것을 폭로하는 듯 보인다.
마르크스가 『자본주의적 축적의 일반법칙』에서 그의 시대 영국의 “부유하는(floating), 잠재적(latent), 정체된(stagnant) 상대적 과잉인구”가 겪는 고통을 서술하면서 암시하는 것은, 노동 인구의 수탈(expropriation)이 자본주의 이전의 역사적 전제나 식민지의 이야기일 뿐 아니라, 자본축적이 이루어지는 어디에서든 자본주의의 동시대적 구성 요소라는 점이다. 아일랜드의 기근으로 죽어가던 빈민층과 영국 농업 프롤레타리아트와 더불어, 마르크스는 자신의 시대 노동력을 구성하던 훨씬 광범한 인구―저임금층 노동자, 유랑 인구, 악명 높은 작업장(workhouse)의 빈민, 농촌 이주민, 불완전 고용의 숙련노동자―을 “착취 가능한 인간 재료(exploitable human material)”, “말하는 도구(speaking instrument)”, “인간 잡초(human weeds)”라고 불렀다. 이들은 마르크스의 논리적 축적조건 아래서 살지 않는 노동 인구이며, 그들의 현실은 “비참의 축적, 노동의 고통, 노예상태, 무지, 도덕적 타락과 야만화”의 상태로 구성된다. 이러한 순간들―자본주의적 축적의 ‘적대적 성격’이 더 선명히 드러나는 순간들―에서 자본주의는 축적과 극도의 빈곤이 공존하는 세계이다.
노동력 상품의 임금과의 일상적 교환, 또는 노동자의 생계 유지와 재생산이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못하거나 이루어질 필요가 없는 상황들을 묘사하면서 마르크스는 우리가 『자본』에서 논리적으로 전개되는 역사를 곧바로 자본주의의 실제 역사로 오인하는 위험에 대해 경고하는 것처럼 보인다. 마르크스가 암시하듯, 자본주의적 노동(혹은 더 정확히 말해 “자본주의 하의 노동”)은 착취(exploitation)와 수탈(expropriation) 모두에 노출되며, 자본관계 내부·주변·외부에 걸쳐 광범한 노동 형태의 스펙트럼 속에서 존재한다. 다시 말해, 자본주의적 노동은 수탈에서 착취까지 이어지는 하나의 연속체로 존재한다. 자이러스 바나지 (Jarius Banaji)가 올바르게 지적하듯, 마르크스의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은 단일한 착취 형태로 환원될 수 없는, 구체적이고 역사적으로 규정된 복합 범주이다. 현실에서의 자본주의는 서로 다른 노동 사회관계에 기초한 경제 영역 간의 지속적 상호작용을 포함하며, 오늘날에도 전적으로 자본관계에만 의존하는 ‘순수한 자본주의’는 존재하지 않는다.
자본주의는 “자본관계의 체계적 재생산을 중심으로 하지만, 역사적으로나 논리적으로 자본관계 그 자체로 환원되지 않는 더 넓은 구성(총체성)”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실제로 자본주의는 “현대적 특성을 띤 사회관계뿐 아니라, 그 이전의 사회관계에 의해서도 특징지어질 수 있다”. 폭력적 예속, 생계비 이하의 임금 지급, 절대적 빈곤은 유럽 내부와 외부 모두에서 자본주의 형성에 참여한 노동 인구가 보편적으로 겪은 조건이었다. 즉“노동의 상품화는 다양한 형태로 존재하며, 자신의 노동력만을 판매하는 자유 임금노동자는 그중 하나의 예에 불과하다.” 따라서 전 지구적 총체로서의 자본주의는, 잉여 추출 방식이 서로 다르게 조직되고 유지되는 다수의 ‘노동의 대륙(continents of labour)’으로 구성된다. 파텔(Patel)과 무어(Moore)가 말하듯, 영국 산업혁명의 자유노동자들은 미국의 원자재에 의존했고, 모든 세계의 공장은 세계의 플랜테이션에 의존했다. 산업혁명을 주도한 맨체스터의 임노동자들 뒤에는, 흑인 노예 노동으로 면화를 공급한 미시시피가 있었다. 즉 유럽의 임노동자들이 잉여가치를 창출해 자본축적을 가능하게 했던 그 순간, 아시아·아프리카·라틴아메리카의 노예·원주민들은 유럽 자본주의의 이윤을 만들어내기 위해 수탈되었다. 역사 전반에 걸쳐 잉여 추출을 위한 다양한 노동 형태들은 서로 분리된 것이 아니라 동시에, 서로 연결된 방식으로 작동해 왔다.
홍콩 부두노동자들의 파업. 2013. 4. 26.
주변부주의(peripheralism)를 넘어서
노동의 대륙(Continent of Labour) 관점은 아시아의 방대한 노동력이 식민지 수탈, 냉전기 산업화, 신자유주의 세계화 전반에 걸쳐 수행한 모순적 역할—즉, 글로벌 자본주의를 구축했을 뿐 아니라 그것에 도전하면서 그 방향을 형성해온 역할—을 올바로 인식할 것을 요구한다. 아시아 노동은 글로벌 자본주의의 동시적이고 불균등한 (simultaneous and uneven) 형성과정 속에서 구성적 요소로 참여하며 식민지 시기에 막대한 식민지 이윤을 창출했다. 이전의 스페인·포르투갈 침투가 동–서 교역 참여 확보를 목표로 하였고 아시아의 번성한 상업세력과 경쟁해야 했던 것과 달리, 17세기 이후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가 주도한 아시아 식민주의는 아시아 경제들이 유지해온 대륙 내부의 연결망을 파괴하고, 아시아 식민지들이 원자재를 공급하고 유럽의 신흥 산업자본주의가 이를 흡수하는 대륙 간 노동 분업을 만들어냈다. 이와 동시에 중국 중심의 조공 국제질서 또한 유럽 자본주의의 식민지 확장으로 해체되었다. 아편전쟁 패배 이후 동아시아에서 쇠퇴하던 중국의 패권은 유럽 제국과, 유럽적 근대성을 수용하고 국가 주도 산업화를 추진한 일본으로 대체되었다. 일본의 제국주의적 팽창은 조선과 대만의 식민화, 만주 점령으로 이어졌고, 이 지역들을 값싼 농업·공업 노동력과 저가 상품을 생산하는 배후지로 전환시켰다.
이러한 대륙 간 분업은 아시아 노동의 착취와 수탈을 통해 식민지 이윤을 창출하고, 동아시아의 화폐경제를 확대하며, 지역적 생산관계를 파괴했다. 초기 식민지 이윤은 다양한 식민지 수탈·작물재배 체제 하에서 자영농들에게서 잉여를 추출하는 방식으로 생산되었으며, 식민지 지배가 정점에 달했을 때에는 영세농의 토지와 노동 수탈, 플랜테이션·광산에 결박된 이주노동자들의 수탈, 제한적 식민지 공업시설의 임금노동자 착취 등 다양한 방식으로 창출되었다. 18세기부터 20세기까지 유럽의 산업 확장을 떠받치는 구성적 역할을 수행했음에도 대부분의 식민지 민중은 즉각적으로 자본주의적 관계에 편입되지 않았으며, 편입된 이들도 ‘자유’ 임금노동이라는 좁은 정의에 맞지 않았고, 다양한 신체적 구속과 사적 처벌에 시달렸다.
그러나 아시아 노동자들은 침묵하는 노동자가 아니었다. 만약 그랬다면 아시아인들은 지금도 식민지 민중으로 살고 있을 것이다. 아시아 노동자들은 잔혹한 제국주의 권력에 맞서 싸웠다. 아시아의 거의 모든 공동체에는 반제국주의적 노조·농민조직을 결성하고 식민지 자본주의 발전에 대한 대안을 모색한 역사가 있다. 대륙 곳곳의 지역사회는 강력한 제국들로부터 식민지 지배를 종식시키고 독립을 획득한 성공의 경험을 공유한다. 많은 경우, 이러한 투쟁은 자본주의 발전의 주변부적 성격에 저항하는 동시에 자본주의 자체를 넘어서는 다양한 대안들을 향한 것이기도 했다.
냉전기 산업화 시기 아시아의 신흥 공업국들의 노동은 미국·유럽 시장을 위한 값싼 소비재 생산을 통해 글로벌 북반구의 전후 호황을 함께 구성했다. 대부분의 탈식민지 아시아 경제가 여전히 식민지 유산에 기반한 1차 상품 생산에 머무르는 동안, 대만·싱가포르·한국·홍콩 등 신흥공업국 노동자들은 가부장적이고 권위주의적 개발국가 아래에서 신설된 수출 제조업체들을 위해 노동했다. 이러한 국가들은 특히 농촌 출신의 젊은 여성 노동자를 혹독하고 위험한 노동 과정에 복종시키는 데 우선순위를 두었다. 이러한 노동체제가 1980년대 민주화 이전까지 동아시아 산업화를 지배했고, 북반구 소비자-노동자들의 복지와 전후 호황을 지원했다. 노동자들은 극도로 긴 노동시간, 참혹한 작업환경, 저임금에 시달렸다. 수십만 명이 안전하지 않은 환경에서 목숨을 잃었고, 많은 이들이 교육과 자기실현의 기회를 박탈당했다.
그러나 미국의 동아시아 동맹국 노동자들이 개발신화가 묘사한 ‘산업전사’의 역할에만 충실했던 것은 아니다. 그들은 진보적 민주주의의 건설자이기도 했다. 폭력적 국가 탄압에도 불구하고 개인적이고 집단적인 저항과 함께 노동조합과 비밀결사들은 계속 등장했다. 1980년대에 이르러 노동자들은 정치적 민주주의뿐 아니라 경제적 민주주의까지 요구하기 시작했고, 개발국가 이론가들이 지금도 칭송하는 가장 잔혹한 두 개발독재 체제에서 민주화를 주도했다. 한국과 대만에서 평범한 노동자들은 1970년대부터 민주화운동의 주요 동력이 되었다. 역사적으로나 경험적으로 이들은 동아시아에 ‘장기적 반민주주의 전통’ 따위는 존재하지 않음을 보여주었다.
보다 최근의 신자유주의 세계화 시기, 아시아 노동은 미국의 자유·민주주의·굿 거버넌스 담론과 아시아의 초고속 경제성장이 일시적으로 결합한 글로벌 신자유주의 체제의 핵심이었다. 신자유주의는 경제 발전의 교리로서 결코 대중적이지도 효율적이지도 않았으며, 긴축정책, 제3세계 부채위기, 1997–98년 동아시아 금융위기 등을 통해 국내·국가 간 불평등을 심화시켰다. 신자유주의의 조기 실패는 전 세계적 반세계화 운동을 촉발했다. 이에 대응해 신자유주의는 굿 거버넌스, 빈곤감축, 환경지속성의 의제를 포괄하며 ‘포스트-워싱턴 컨센서스’와 ‘포용적 신자유주의’, 더 나아가 프레이저가 ‘진보적 신자유주의’라고 칭하는 자유주의적 이상형을 형성했다. 그러나 신자유주의를 조기 붕괴로부터 구해낸 것은 이러한 이론적, 담론적 수정이 아니라 아시아, 특히 중국의 경제성장이었다. 중국은 수출지향 산업화를 공격적으로 추진하며, 특히 동아시아계 초국적 기업들에 수천만 농촌 이주노동자를 공급하며 1998~2007년 연평균 10% 성장했고, 동아시아와 세계경제 회복을 이끌었다. 중국의 수출산업은 값싼 소비재를 제공함으로써 미국 저소득층의 생계 또한 지탱했다.
2007–2008년 금융위기 직전까지 글로벌 신자유주의를 떠받친 것은 바로 아시아의 막대한 자본주의 노동력의 규모였으며, 이로써 아시아는 글로벌 자본주의의 ‘노동의 대륙’이라는 지위를 확고히 했다. 그러나 글로벌 신자유주의를 지탱한노동력의 규모 뒤에는 아시아의 ‘노동 역설’이 있었다. 즉 아시아의 노동자—특히 개발도상국의 노동자—는 전후 ‘황금기’ 동안 글로벌 자본주의 중심부에서 안정적·보호된 고용을 누렸던 전형적 산업노동자와 거의 닮지 않았다. 동아시아의 부상은 신자유주의 스웻숍, 화전 농지, 플랜테이션, 도시 거리 등에서 일하는 다양한 비정규·비공식 노동자를 결합한 분절된 노동계급에 의해 가능했다. 이러한 아시아 노동은 오늘날까지도 세계경제를 지탱하고 있다.
이시기에 아시아 노동자들은 동아시아 신자유주의 발전의 ‘노동 역설’에도 대응했다. 새롭게 등장한 불안정 노동자들의 초기 투쟁은 종종 고립되었고, 기존 제도권 노동조직들의 연대를 받지 못했다. 그럼에도 아시아 노동자들은 “들꽃”과 같은 노동저항(wild-flower labour activism)—전통적 노동조합의 좁은 대표성 바깥에 놓인 주변화된 이들이 자율적·자발적으로 수행하는 저항—을 통해 지속적으로 행위자성을 발휘해왔다. 이러한 행동은 공식·비공식 경제, 농촌·도시 공간 전반에서 반복적으로 발생하며 탄압 속에서도 사라졌다가 다시 피어난다. 이들은 비교적 개방된 사회에서부터 잔혹한 군부 체제에 이르기까지 지역 전역에서 나타났으며, 그 보편성과 회복력을 특징으로 한다. 종종 산발적이고 비효과적이라 평가되지만, 이러한 들꽃 패턴의 저항들은 특히 탄압이 권위주의 정당성을 약화시키는 상황에서 변혁적 잠재력을 지닌다.
대표적 사례로는 캄보디아 의류노동자들의 조직화, 홍콩의 청년 저항과 노조화, 미얀마 시민불복종운동에서의 노동 참여, 인도네시아의 시위·점거·파업, 한국 비정규 노동자들의 자주적 조직화, 중국·베트남 이주노동자의 와일드캣 파업, 대만·중국의 청년 프레카리아트 운동, 태국의 빈민운동과 청년 반군부 시위 등이 있다. 어떤 투쟁은 폭력적 진압에 희생당하고, 어떤 투쟁은 기존 노조의 무관심으로 좌절되며, 또 어떤 투쟁은 광범위한 사회운동 및 노조와 결합할 때 새로운 동력을 얻는다. 패턴은 달라지지만 핵심은 노동자들의 미시적이고 자생적인 행동, 기존 노동조합의 적극적 개입, 시민사회의 광범위한 연대를 결합하는 선순환을 만들어내는 데 있다. 이러한 들꽃 저항은 흩어지고 자생적으로 보이지만, 잘 배양되고 연결될 경우 동아시아의 불안정한 노동자들에게 변혁의 원천이 될 수 있다.
이처럼 아시아에서 전개된 다양한 노동운동의 역사와 오랜 착취 그리고 수탈의 경험은 아시아 노동자가 결코 주변적 노동력이 아니라 글로벌 자본주의의 현재와 미래를 형성하는 구성적 힘이었음을 보여준다. 아시아 노동이 주변부의 노동이 아니라 글로벌 자본주의를 떠받치는 노동이고, 아시아 자본주의가 글로벌 자본주의의 외부나 주변이 아니라 그 구성적 부분이라면, 아시아의 노동 전문가들—연구자와 활동가 모두—이 유럽과 북미 노동에 시선을 고정한 채 미래 모델을 찾으려 하는 것은 정당화되기 어렵다. 프란츠 파농이 대안을 모색하는 탈식민지 민중들에게, 그들의 미래를 유럽을 쫒아 건설하고자 한다면 차라리 “나라의 운명을 유럽인에게 맡기는 것이 나을 것”이라 경고한 대목은 우리가 아시아 노동의 미래를 상상하는 과정에도 날카로운 교훈으로 남는다. 미래는 유럽이 아닌 아시아의 역사 속에 있으며, 그 역사—고용관계, 노동운동, 노동조합주의의 기존 규범이 형성된 유럽의 역사보다 훨씬 더 넓고 풍부한 역사—에서 찾아야 한다. 기존의 규범들은 전면적으로 재고되어야 한다. 우리는 소위 선진국의 제도화된 단체교섭이 아니라 아시아 노동의 와일드캣 파업에서, 유럽 노동조합의 제국주의 협력사가 아니라 아시아 노동의 반제 투쟁사에서, 복지국가와의 사회적 협약이 아니라 아시아의 잔혹한 권위주의 국가에 맞섰던 투쟁에서 우리의 규범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아시아 노동운동은 “중심”의 운동을 모방해야 하는 주변부 운동을 뛰어넘어야 한다. 노동의 대륙이라는 역사적 관점은 아시아 노동의 미래에 대한 상상을 제한해온 뿌리깊은 주변부주의로부터 벗어날 것을 요구한다. 주변부주의는 아시아 노동을 북반구의 노동보다 “비정상적”이고 뒤처진 것으로 보이게 만들었으며, 아시아 노동이 한 단계 더 나아가기 위해서는 먼저 북반구 노동처럼 “정상적”이고 “현대적”이어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이 틀 속에서 아시아 노동은 과거에 갇힌 존재가 된다. 이제 아시아 노동운동은 분명히 말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지금 세계가 실제로 가지고 있는 자본주의 노동이며, 이것이야말로 노동운동이 조직해야 할 “정상적” 노동이다. 우리는 아시아 노동을 비정상이 아니라 정상, 주변이 아니라 중심으로 인식하는 것에서 새로운 전략의 모색을 시작해야 한다. 글로벌 자본주의의 목줄을 쥐고 있는 것은 다른 누구의 노동이 아니라 바로 아시아의 노동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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