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제냐 반독점이냐
- 한국자본의 대약진, 글로벌 자본가동맹의 구축, 그리고 ‘10.29 한미 관세합의'
2025년 10월 31일 / 권영숙의 테제11
글 권영숙 민주주의와노동연구소 소장
자본주의, 제국주의, 제국, 반제, 반독점, 국가독점자본주의, 금융화, 계급전쟁, 10.29 한미합의, 공급망, 글로벌동맹, 자본 대약진, 안보-경제 축(security-economy nexus)
자본주의와 제국주의는 하나로 이해해야 한다: 반제가 아니라 ‘반독점’에 대한 문제의식이 절실하다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전반부에 이르는 국가독점자본주의와 제국주의의 문제는 비교적 잘 알려져 있다. 자본의 독점화 경향, 국가와의 융합, 그리고 제국주의 국가들의 식민지 착취와 상호 전쟁 사이의 연관성은 이론적으로 어떤 프레임을 갖느냐의 문제이지 역사적 사례로서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로 남아있다. 그리고 그같은 역사를 만들어낸 근저의 힘은 한편으로는 ‘계급전쟁’(내전을 회피하기 위한 자본가들의 외부 시장 진출)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자본들 사이의 경쟁이라는 점도 분명하다.
아마도 레닌이 제국주의론에서 인용한대로, 대영제국의 남아프리카 공화국 총독 세실 로즈의 연설이 대표적인 증거다. ”대영제국의 4천만 국민을 내전으로부터 구해내려면 우리 식민지정치가들은 하루빨리 새로운 영토를 손에 넣어 과잉인구를 이주시키고, 공장과 광산에서 생산된 물건들을 팔 새로운 시장을 만들어 내야 한다. 내가 항상 말해 왔지만 제국은 결국 빵과 버터의 문제다. 내전을 피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제국주의자가 되어야만 한다“.
이에 대해서 로자 룩셈부르크가 했던 말, 즉 “제국주의 정치는 어떤 한 국가 또는 몇몇 국가들의 작품이 아니다. 그것은 자본주의 세계 발전에서 특정 성숙도의 산물이다. 그것은 국내에서부터도 국제적인 현상이자 그 모든 상호관계들 속에서만 인식될 수 있고 그로부터 어떤 국가도 벗어날 수 없는 하나의 분할될 수 없는 전체이다”(<유니우스 팜플렛>, 1914)”라는 말만큼 제국주의의 성격을 더 잘 요약할 수는 없을 것이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제국주의를 인식하는데 중요한 기준을 제시했다. 즉 제국주의를 말하는데 있어서, 무엇을 제국주의라고 말하고, 어떻게 제국주의를 이해하는가의 문제이다. 첫째 제국주의는 한 국가의 문제가 아닌 자본주의 세계발전과정이며, 둘째, “국내에서부터도 국제적인 현상“이며 따라서 국내-국제의 모든 상호관계를 이해하고, 마지막으로 제국주의는 어떤 한 국가의 문제가 아니고 어떤 한 국가도 벗어날 수 없는 ‘전체’라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레닌이 제국주의를 ”자본주의의 최신 단계 (the latest stage of capitalism)”라고 했던 언명처럼, 룩셈부르크도 제국주의를 자본주의의 현발전단계 혹은 체제로서 이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정작 제국주의 2차 전쟁(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의 자본주의 세계에 대한 규정은 훨씬 모호하다. 심지어는 1990년 대 중반에 이르기 이전까지는 당대의 자본주의를 ‘제국주의 시스템’으로 규정하려는 이론적 시도조차도 흔치 않았다. 이론적으로는 차라리 (매우 수정주의적인) 안토니오 네그리의 <제국>(2000년)이 거의 50여년이 지나서야 제국주의론을 새롭게 되살렸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다.
동시에 그 언어도 바뀌었다. 제국주의는 ‘신식민주의’로 이해됐고, 그것을 내재적으로 비판한다는 이론은 ‘인종적, 문명적’ 차별성을 강조하는 ‘오리엔탈리즘’으로, 그리고 ‘종속’은 ‘상호의존’으로 명명되었다. 그것은 자본주의 헤게머니를 행사하는 주도 세력의 정체가 커튼 뒤로 가려지고 오직 ‘피해자’의 관점에서 또는 그들의 인간적 고통으로 사태를 설명하려는 시도로 제국주의를 국한시켰으며, 따라서 ‘식민지’에서의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의 형성과 왜곡, 그리고 자본주의 종주국 자본가 및 노동계급과의 이중적 상호관계에 대한 분석은 사라져 버렸다.
심지어 제국주의를 자본주의와 분리하는 방식으로 변화하였다. 자본주의와 제국주의는 마치 다른 개념이 된 듯하다. 자본주의와 분리된 제국주의는 국가간의 문제로 이해되고, 민족주의 혹은 국가주의의 개념과 연결된다. 따라서 제국주의에 맞선 ‘반제라고 할 때, 그것은 ’반독점‘과 다른 무엇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반독점이야말로 반제담론의 본령이다.
결국 우리는 지금 거의 100여 년 동안 새롭게 변화한 자본주의 세계 시스템에 대한, 그에 적합한 사회주의 이론을 갖지 못했다. 단지 과거의 역사적 사례에 대한 비교와 그 역사를 설명하는 이론들을 훈고학적으로 반복하는데 그쳤다. 미국이 1980년대 후반들어 전면적인 금융자본주의 국가로 전화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제국주의 국가의 관점에서 또는 국가독점자본주의 관점에서, 그리고 세계적 규모의 계급 투쟁의 관점에서 설명해내지 못했다.
이같은 이론적 무능은 심지어는 금융자본주의가 그 자체로 파탄을 빚은 2008년 이후에도 여전히 지속되었다. 금융 위기, 노동계급에게는 금융재난에 대한 대응은 고작 ‘월스트리트 점거(occupy wall street)’가 가장 급진적인 운동이었다. 그런데 월가를 점령해서 무엇을 하려는 것인가? 월가가 사라지면, 컴퓨터 속의 수십조 달러의 자본도 함께 사라지는가? 자본가들도 함께 사라지는가? 국가 엘리트들 뿐만 아니라, 국가 기구도 함께 사라지는가? 21세기의 자본과 국가는 19세기의 공성전을 하던 성곽이 아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에 걸맞는 이론도 실천도 갖지 못했다. 그 딜레마가 바로 트럼프가 벌이고 있는 관세전쟁에 대한 혼란이다.
트럼프가 ‘해방절’이라고 이름붙이면서, 미국의 무역 상대국가들에게 고관세를 매기겠다고 엄포를 놓은 4월1일 그 날 이후, 전세계는 제국주의의 첨예한 경쟁과 세계화 속에서 계속 후퇴하면서 ‘우위’가 사라지고 이제는 다른 강대국들과 어깨를 나란히 경쟁해야하는 미국이 벌이는 관세 전쟁의 소용돌이에 대면하였다.
하지만 미국은 더 망하기 전에 과거에 투자해 놓았던 것을 회수하려고 하는 것이다. 즉 헤게모니를 돈으로 바꾸기(현금박치기) (moneytizing hegemony) 하려는 것이 관세전쟁의 본질이다. 이는 트럼프가 재선한 후 현존하는 무역질서를 무시한 고관세를 ‘상호관세’란 이름으로 매기고 미국 국채를 사도록 만들겠다고 한 ‘마라라고 협정’에서부터, 그것이 현실적으로 변형되어 진행중인 각국과의 이자간 관세합의에서 계속 드러나고 있다 (“미국의 헤게모니 현금화하기 (moneytizing hegemony)”, 2025년 10월31일 참조)
동시에 그것은 미국 중심으로 자본-기술-공급망 체제를 재구성하는 것이기도 한데, 이는 경제와 안보라는 양대 ‘축’을 하나로 한 동맹체제의 재편으로 나타난다. 고로 관세현상 혹은 관세전쟁은 안보-경제축(security- economy nexus)로 하나로 묶는 미국의 글로벌 동맹체제 재편이기도 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자본투자, 첨단기술 합작, 공급망체제의 정비 3가지 모두를 포함한다.
한국 자본주의는 이같은 세계적 변동의 한 가운데 위치한다. 한국은 기존의 수출주도발전전략을 포기하지 않는한, 새로운 공급망체제와 동맹체제 재편에 함께 해야 한다. 하지만 이는 동시에 한국 대자본가들이 국내 내수 산업화 또는 국제 대자본의 하청관계를 넘어서 글로벌 자본으로 약진하고자하는 ‘야심’과 자신감의 발로이기도 하다(이에 대한 논지는 “이재명 정권의 ‘123국정과제’ 한국 부르조아의 자신감과 발전노선의 수정”, 2025년 09월 25일)
이를 이재명 정부는 정확히 이해하여 ‘자본의 대약진’을 위하여 미국과의 관세협상을 무사히, 대자본가들의 이익에 부합하게 잘 짜낸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이재명 대통령이 대통령선거 공약으로 내세웠던 ‘진짜 성장’이고 ‘진짜 대한민국’이기도 하다(“이재명의 대선 슬로건 “진짜 대한민국”이 의미하는 것: 21대 대선 당선 유력 후보 이재명의 공약 정책 이념 평가“, 2025년 05월 21일)
그리고 이러한 발전전략의 채택은 결국 국내 자본의 더 심화된 독점화와 금융화로 귀결될 것이다. 그것은 한국 자본주의가 필요로 하는 해외자본과 기술력의 결합체제를 국가가 보증하여 집행해주는 방식이다. 이는 정확하게 10월29일 한미 합의에서 드러나고 있다. 또한 그것은 이재명정권의 내각 구성과 트럼프정권의 내부 구성이 보여주듯이 자본가들이 전면에 나서서 국가 재정정책을 운용하는데까지 이르른 것이다. 한마디로 국가독점자본주의의 새로운 모습이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제국주의의 현단계 성격에 밀접하게 관련이 있다,
지난 10월 29일 경주 APEC 동안 열린 한미 정상회담에서 이재명 대통령이 트럼프 대통령에게 신라의 금관을 선물하고 있다. 출처 : <아이뉴스>
관세 전쟁이라는 표현이 은폐하고 있는 것
– 초국적자본의 제국주의시대에 국가간 관세가 의미하는 바는?
트럼프가 시작한 관세전쟁은 실은 ‘관세’ 전쟁도 아니며, ‘관세’가 목적도 아니다. 심지어는 관세 논리의 근거가 되는 무역수지 통계 자체에 결정적인 결함이 있다. 물론 미국 행정부 관료들이나 정치인들이 이걸 모르고 벌이는 짓은 아니다. 그건 중국도, 한국도, 일본도, EU도 다 안다. 나머지는 쇼이며 그림자 놀이일 뿐이다.
다음 챠트를 보자.
아일랜드에 지사, 법인을 둔 다국적 기업의 이윤 (단위 : 10억 유로, 4개 분기 합산)
출처: Brad Setser(2025), Foreign Affair
이 챠트는 전 미국 재무부 차관보를 지냈으며, 미국의 최고 엘리트 권력 기구인 Council on Foreign Relation(미국 국제관계협의회)에서 국제관계 담당 이코노미스트로 재직 중인 Brad Setser가 최근 Foreign Affair 2025년 9월호에 게재한 논문에 실린 것이다. 위의 챠트에서 그래프는 아일랜드에 지사나 법인(자회사)을 두고 있는 다국적 기업들의 이윤액 변화 추이를 나타낸다.
아일랜드 소재 다국적 기업들의 이윤은 2025년 2분기 말 기준으로 무려 2500억 유로(1개년 누적)에 달한다. 그럼 이 2500억 유로는 다국적 기업들이 아일랜드에서 영업해서 벌어들인 돈일까? 아니다. 아일랜드에 세계적인 경쟁력을 가진 기업이 뭐가 있는지 단 하나라도 이름을 대보라. 그런 거 없다. 이 돈은 모두 단지 아일랜드에 지사, 법인을 둔 다국적 기업들은 전세계를 상대로 영업을 하여 벌어들인 ‘이윤’이다. 그리고 단지, 회계상으로 아일랜드 소재 지사, 법인의 이윤을 잡힐 뿐이다. 왜냐면 아일랜드가 유럽에서, 그리고 선진국들 가운데 가장 법인세가 낮기 때문이다(15%).
1980년 대 레이거노믹스 세계화 이후 전세계적인 법인세 인하 경쟁 속에서 최후의 승자는 아일랜드였다. 유로존에 속해 있어 상법상 안전장치는 든든한 상태에서 물어야 할 세금은 가장 낮은 나라가 아일랜드다. 그 결과 기막힌 통계 왜곡 현상이 벌어진다. 지난 2024년 2분기에 아일랜드의 경상수지 흑자는 GDP 대비 무려 24%에 달했다. 이걸 한국 경제로 대입해서 말하자면, 1개 분기 동안에 4500억 달러(월간 1500억 달러)의 흑자가 난 셈이다. 물론 이건 통계상의 일이지, 실제 그같은 경제 활동이 아일랜드에서 벌어진 것은 아니다.
아일랜드의 ‘무역 흑자’의 대부분은 미국을 상대로 한 수출로 벌어들인 것이다. 결국 미국은 세금은 거의 못거둬들이고 애플과 마이크로소프트 제품들을 ‘소비’만 한다. 왜냐하면 애플과 마이크로소프트의 대부분의 공장은 미국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관세’의 근거는 이처럼 다국적 기업들의 회계상의 ‘트릭’을 반영하는 국가간 무역수지에서의 흑자/적자를 기준으로 한다. 기초 통계가 엉터리인데, 그 대책이 엉터리가 아닐 수 없다.
전세계 교역을 교란하고 있다는 중국도 마찬가지다. 경상수지(상품+서비스+순투자수지) 관점에서는 중국은 2000년대 초반 흑자를 기록하다가 2008년 이후에는 지속적인 적자를 보였다. 그러다가 2022년부터 흑자가 급증하기 시작한다. 다른 말로 해서, 트럼프 행정부나 미국의 이코노미스트들이 ‘대중국 무역적자!’라고 비명을 지르지만, 실제로는 중국이 무역을 포함한 순자본수지가 흑자가 된 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이것이 그많은 무역 흑자에도 불구하고 중국 위안화가 미국 달러화에 대해 오히려 그리고 여전히 약세를 보이는 진짜 이유이기도 하다. 즉, 중국은 상품을 수출하지만, 돈은 다국적 기업이 벌며 그 돈은 끊임없이 중국에서 빠져나가고 있다.
그런데 다국적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 당연히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구의 자본가들의 것이다. 다국적 기업이 번 돈은 누구의 돈인가? 당연히 미국과 유럽의 자본가들의 돈이다.
이것이 초국적자본의 제국주의 시대의 모습이다. ‘자본’에게 국경이 없는 것은 미국에 ‘국적’을 둔 것으로 여겨지는 자본에게도 마찬가지다. 물론 한국 같은 나라의 초국적 자본도 국경이 없다. 이번 10.29 한미 관세합의는 이를 극명하게 드러내는 사례이다.
그러면 미국의 관세‘전쟁’은 누가 누구를 상대로 한 전쟁인가? 이는 말하자면 미국 자본가들의 왼팔과 오른팔끼리 벌이는 격투기다. 왜냐하면 미국산 다국적 기업이 해외에서 벌어들인 돈에 대해 미국 정부가 세금을 매기겠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당연히 WWE(미국 프로레슬링)이며, 당연히 쑈다.
그런데 왜 이 난리법석의 쇼를 하는가? 물론 미국 정부의 재정 사정은 난감하다. 다국적 기업의 수익으로부터 세금을 못 걷어들이는 건 큰 문제이기는 하다. 그래서 얼마전 OECD를 매개로 각국의 최저 법인세율 하한선을 정하자는 논의가 있었다. 정작 미국이 반대했고, 결국 미국만 예외로 하고 최저 법인세율(15%)에 합의했다.
그러면 미국은 자신이 법인세율을 인하해서 집(국경) 바깥으로 나간 다국적 기업들을 불러들이면 되지 않을까?
첫째, 정치적으로 부담이 된다. 현재 미국의 공식 법인세율은 20%를 약간 넘고 실효세율은 고작 10%대 초반에 불과하지만, 이걸 더 낮추면 표받기 힘들다. 둘째 다국적 기업들도 반대한다. 다국적 기업의 수익은 미국의 규제에서도 벗어나 저세금 지역이나 아예 조세회피지역에 예치되어 있다(그래서 케이만군도의 미국 국채 보유 규모가 늘 3-4위나 된다). 단지 세금만이 아니라 규제에서 자유로워야 한다는 것도 다국적 기업에게는 중요하다.
게다가 다국적 기업들의 해외 생산기지는 단지 저임금(wage-arbitrage) 때문만은 아니다. 노동시장 유연성과 공급망(supply chain) 및 원료 수급 차원에서 신흥시장이 훨씬 유리하기 때문이다. 만일 진지하게 미국의 다국적 기업들이 해외 생산기지를 미국 내로 옮기거나(이른바 on-shoring), 혹은 회계상의 이윤 예치처를 미국 내로 옮긴다면 먼저 이들 기업의 이윤이 감소하고 그 다음에는 세후 이윤도 감소해서 결국 주식가격이 폭락할 것이다. 그러면 미국의 ‘금융투자자 계급’(불로소득 계급)들이 붕괴하고, 이건 금융자본주의의 끝이다. 따라서 ‘절대로’ 미국이 그런 자살행위를 할 리가 없다.
그러면 지금 벌어지는 트럼프의 관세전쟁을 둘러싼 전지구적인 소음은 다 무엇이란 말인가? 분석의 편의상 두 가지로 나누어서 보아야 한다: 국가적 차원과 계급적 차원.
첫째는 국가적 차원이다. 자본주의 생산력은 정말로 놀라운 것이기는 하다. 글로벌 헤게머니 자본주의 국가인 미국의 직간접적인 ‘착취’에도 불구하고 중국은 경쟁력이 있는 자신들만의 생산체제를 구축했다. 그리고 이미 국제 경쟁에서 미국을 뛰어넘었다 (“실질구매력(PPP) 기준 GDP – 세계 각국 경제력 순위 1위는?”, 2024년 12월 22일 참조)
각국의 중간 기술 및 고기술 제품의 수출 비율(세계 전체 대비, %). 출처 : 유엔개발기구(UNIDO)
위의 “각국의 중간 기술 및 고기술 제품의 수출 비율” 챠트는 전세계의 중간 기술 제품 및 고기술 제품 수출 가운데 각국이 차지하는 비율을 표시한 것이다. 이 차트는 고기술 첨단산업의 수출국가들에 대한 상식과 허상을 동시에 깨뜨리는 중요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차트에 따르면 세계화가 본격화된 지난 1995년 이후 기존의 주요 산업국이던 독일, 일본, 미국의 고기술 제품 비중은 확연히 감소했다. 대신 지난 2008년 금융 위기를 기점으로 중국이 세계 1위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며 지금은 감히 경쟁자가 없다. 즉 흔히 여전히 가지고 있는 상식(편견화된)과는 달리, 중국의 주력 수출 상품은 더이상 저임금에 기반한 값싼 저기술 제품이 아니라, 높은 기술을 바탕으로 한 제품들이다. 특히 중국의 대미 수출 상품 가운데 70%가 자본재, 중간재다. 즉 미국은 중국 제품 수입이 없으면 아예 산업이 돌아가지 않는다. 월마트에 중국산 소비재가 사라질 것이라는 공포가 문제가 아니다.
이 챠트에서 가장 흥미로운 것은 일본이다. 1995년만 해도 미국과 더불어 양대 제조업 생산국이던 일본의 고기술 제품의 수출은 전세계 수출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지속적으로 감소하여 마침내 2024년에는 심지어 한국에도 추월당했다. 실은 일본이야 말로, 이제는 저기술 저임금 수출에 목을 매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
한국 역시 20017년 이후에는 완만하게나마 고기술 제품의 시장 장악 비중이 감소하고 있다. 이것이 실은 얼마전 최태원 SK 그룹회장이 주장한 ‘한일 경제공동체’론의 배경이기도 하다 (출처, “이제 수출로는 못산다…한일 경제 통합해야 – 최태원 회장 단독 인터뷰”, 2025년 10월26일).
즉 한국과 일본처럼 경쟁에서 뒤처지기 시작한 국가들이 손잡고 글로벌 기술 경쟁체제에 대항하자는 것인데, 이런 말이 한국같은 나라에서 ‘제2의 을사조약’으로 비난받지 않는 것도 신기하지만, 어차피 제안 자체가 현실화될 가능성도 낮다. 왜냐하면 패자 둘이 뭉쳐서 승자를 상대로 이겨본 사례는 역사 속에서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위의 챠트는 미국, 그리고 미국과 국제분업 사슬에서 중요했던 일본, 한국등 동맹국들의 고기술 제조업 장악력이 현저하게 하락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게다가 중국의 GDP 대비 대미 수출 비중은 24년 말 기준으로 2.9%로 그다지 높지 않다. 즉 중국은 미국 없이도 살 수 있다(어려움을 겪기는 하겠지만). 그러나 현 조건에서 미국은 중국없이 살 수 없다. 심지어 단지 중국이 희귀원소(rare earth) 수출 통제 가능성을 언급한 것만으로도(실제 통제조치를 한 적도 없다) 미국은 평정심을 잃어야 했다(희귀원소는 무엇보다도 첨단제품과 무기 생산에 결정적이다).
‘10.29 한미 관세합의’의 본질: 안보-경제 축과 글로벌 동맹의 재편
전지구 정치경제질서와 무역체제 안에서 바로 힘의 불균형이 벌어지기 시작했다는 것이야말로 한편으로는 관세전쟁의 결론에 대한 예상을 하게 하고, 동시에 왜 미국이 중국을 상대로 관세 전쟁을 벌일 수밖에 없었는가를 동시에 설명해 준다.
미국은 이제 전혀 예상치 못했던 분야에서마저 미국산 다국적 기업들의 독점적 지위가 위협받고 있다. 테슬라는 BYD에 밀리고, 2차 전지는 CATL이 세계를 평정하고 있으며, 구글의 유튜브는 Tiktok에 뒤쳐졌으며, 심지어는 항공산업마저 위협받고 있다.
그리고 이는 단지 미국의 다국적 기업들을 위협할 뿐만 아니라, 지역적 하청 지위를 지니고있던 한국 일본등 동맹국들의 기업들은 더 심각한 위협에 직면했다. 일본의 고기술 제품 수출 비중이 감소한 것이 그 징표이다.
따라서 미국은 기존의 국제노동분업 체제를 재편해야할 필요가 생겼다. 관세를 명분으로(물론 조세 수입은 실질적인 도움도 된다. 그러나 그 영향은 그다지 크지 않다), 미국은 동맹국들에게 미국내 투자를 강제하고 동시에 이를 통해 국제 공급망 체제를 재편하려고 한다. 즉 이제는 더 큰 시장이 되고 있는 중국으로부터 멀어져 미국을 중심으로 한 배타적 시장을 구축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실은 관세는 2차적인 것에 불과하다. 관세는 핑계에 불과하며, 실제로 겨냥하는 것은 투자수익률이 높지 않은 산업 분야에 대해서 동맹국들에 대한 투자 강요가 진정한 목적이다. 이 점이 이전의 바이든 민주당 정권과 차별화된 트럼프 정권2기의 새로운 국제 무역절서 전략이다. 애당초 ‘경제적 유인’으로 미국내 투자를 독려했던 바이든 정권하의 ‘반인플레이션법’이 거의 효과가 없다는 것이 드러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바이든 정권에서는 예정한대로 진행된 외국자본의 공장 건설이 한 곳도 없다)(“2025년 국제 정세 전망 : 누구나 처음엔 창대하리라”, 2025년 02월 01일).
기존의 글로벌 공급망을 중국 중심에서 미국이 통제할 수 있는 동맹국 네트웍으로 이전하려는 것이 트럼프 행정부의 관세 전쟁의 진정한 목적이라고 볼 수 있다. 그 배경에는 기존의 미국 다국적 기업들의 독점적 지위가 위협받고 있기 때문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그리고 이는 미국뿐만 아니라 미국과 마찬가지로 고기술 수출 품목에서 뒤처지기 시작한 일본, 한국등 주변의 동맹국들의 대자본도 원하는 바이기도 하다.
동시에 이는 계급 투쟁적 차원에서도 볼 수 있다. 단지 이데올로기적으로 ‘사회주의’ 중국이 자본주의 미국과의 경쟁에서 승리한 것으로 나타나는 것을 방지하려고 할 뿐만이 아니라, 미국을 중심으로 한 국제 공급망 재편은 기존에 구축되어 있던 계급 관계도 재편한다. 이는 관세란 무엇이고 어떻게 작동하는가를 곰곰이 들여다 보면 알 수 있다.
먼저 미국의 관세는 수출업자가 지불하는 것이 아니다. 미국의 수입업자가 지불한다. 즉 미국이 관세를 80%다, 25%다 15%다 매긴다고 하면, 그것은 한국이, 일본이, 중국이 지불하는 것이 아니다. 미국 수입업자가 미국 정부에 지불하는 ‘세금’이다. 고로 관세 자체가 ‘수탈’이고 ‘강탈’이라고 볼 수 없다. 오히려 한국과 일본등은 그동안 무관세등으로 인해서 미국에 대해서 그만큼 싼 가격 책정으로 가격경쟁력을 확보했었다.
트럼프의 고관세정책이 작동한다면 그럼 어떤 일이 벌어질까? 이미 조사결과가 발표되어있다. 월가의 투자은행인 골드만삭스는 미국이 부과하는 관세 가운데 18%는 수출업자가, 18%는 미국의 수입업자가 그리고 65%는 미국의 소비자들이 부담하게 될 것이라고 계산한 바 있다. 결국 고관세로 인한 상품 물가 상승 압력(인플레이션)은 결국 미국내 소비자들, 그것도 하위 노동자계층이 대부분 지불하게 된다.
미국의 고 관세 방책을 두고 미국내의 민심 동향을 예민하게 주시하는 것도 이런 이유이다. 하지만 미국내에서 트럼프의 관셰를 둘러싸고 심각한 반발은 보이지 않는다. 미국민들 역시 아직은 트럼프에 대한 불만이 ‘민주주의’의 훼손에 대하여 표출되는데 집중하고 있고, 사회경제계급적인 이슈로 전화하고 있지 못한 한계를 보이고 있다.
하지만 미국 헌법은 의회에게만 관세결정권을 부여하고 있다(헌법 8조1항). 이미 트럼프의 일방적인 ‘상호관세’ 부과와 이를 행정명령으로 제도화하는데 대해서 제동을 걸기 위해서 미국내 수입업자들이 연방법원에 소송을 제기한 상태다. 그리고 그에 대한 대법원 판결이 빠르면 12월중순에 나올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즉 이 판결에 따라서 트럼프가 10월29일 한국의 이재명대통령과 맺은 ‘관세합의’와 관련된 대미 투자등 모든 것들이 수포로 돌아갈 수도 있다는 말이다.
반면 한국 이재명 정권의 대외경제/안보정책은 트럼프 정부의 고관세 압력에 대해서 안보와 연계된 경제투자협정을 맺음으로써 한국 대자본가들의 한미 글로벌 자본동맹으로의 도약을 가능하게 하고, 이로 인한 국내 투자의 감소를 대규모 AI 투자와 에너지 고속도로등 국책 사업으로 보충하려는 시도이다. 그리고 이는 다시 국내 자본의 독점화 금융화 및 해외 자본투자를 강화할 것이다.
결국 필자의 표현대로 하면, 이재명정권이 지향하는 ‘자본의 대약진’(Great Leap Forward)은 한국 자본주의의 살 길을 글로벌 자본동맹과 국가독점자본주의의 강화로 방향을 잡고 있다. 트럼프의 고관세 압박은 압력이기도 하지만 한국 자본주의에겐 기회가 되는 셈이다. 그리고 대한민국이라는 국가는 자본, 특히 대자본가들을 위한 국가의 역할을 충실히 다하고 있다. 흥미롭게도 이재명 정권에 대거 포진한 장관들이 ‘자본가’ 출신들이라는 점은 트럼프 정권에 포진한 다수의 장관들이 자본가 출신들이라는 점과 ‘상동적’이기도 하다 (“이재명 정권의 성장 전략(1) – 자본의 대약진운동(Great Leap Forward)”, 2025년 07월 03일, 그리고 “이재명 정권의 성장 전략(2) – 자본과 노동 : 한미 글로벌 자본가동맹과 국내 계급투쟁의 봉쇄”, 2025년 08월 08일)
미국과 중국 양국은 APEC 미중 정상회담을 고비로 잠정휴전 상태에 들어갔다. 당연히 예상되었던 일이다. 다만 예상보다도 평가가 요란스럽고 더 후하다. 한국도 미국도 윈-윈 했다고 떠들고 있는데, 그건 ‘자본’의 관점에서 보면 맞는 말이다. 트럼프는 중국과 ‘영구적인 평화( everlasting peace)를 얻었다면서 “God bless china!”를 연발한다. 중국은 이 모든 요란스러운 찬사들을 점잖게 바라보며, 내가 너희 모두를 당장의 평화와 안도감을 가지도록 만들었노라는 표정을 짓고 있다. 시진핑의 태도를 보라.
특히 가슴에 나치 문신을 새기고 ‘상무정신’을 울부짖던 자칭 전쟁부 장관인 미국의 국방장관 피터 헤그세스 Pete Hagseth(미국에서 내각 부서 명칭은 의회 관할이라 행정부 마음대로 변경할 수 없다. 아직까지도 국방부가 맞다)가 지난 11월 1일 쓴 트위터(X)는 분위기를 한껏 끌어올리고 있다.
: “나는 트럼프 대통령과 대화를 나눴으며, 우리는 동의했다 – 미국과 중국 사이의 관계는 이제껏 가운데 제일 좋다…나는 말레이시아에서 중국의 동준 국방부 장관과 회담했으며 오늘 밤에도 다시 통화했다. 우리는 평화, 안정, 그리고 선린관계가 위대하고 강력한 양국에 최선의 길이라는데 동의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말한 것처럼 ‘G2 회담’은 영구적 평화와 성공을 위한 초석이다. …신이여, 미국과 중국에게 축복을 내려주시기를”
이번 APEC 과정에서, 트럼프가 ‘G2’라고 말한 것은 분명히 상징적이다. 왜냐하면 미국은 이제까지 중국이 자신들과 대등한 지위를 가졌다고 인정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오바마의 American exceptionalism은 미국이 유일한 헤게머니 국가라는 주장이다). 트럼프는 바이든의 민주당 정권과 달리 유럽과의 민주주의 ‘가치동맹’을 해체하면서 동맹체제를 재편하겠다고 했고, 중국에 대해서 바이든 민주당 정권의 적대정책에서 선회, 중국을 경쟁자로 인정한 점이 차이다. 하지만 G2라고 명확히 말한 것은 이를 현실로 완전히 인정한 셈이다.
중국과의 전쟁을 울부짖던 파시스트 ‘전쟁부장관’의 이같은 태세 전환은 부분적으로는 중국이 지난 10월 말 양회(의회)에서 향후 5개년 계획을 수립하면서 기존의 중국 기업들 사이의 극한 경쟁을 자제하는 정책을 수립한데 따른 것이기도 하다. 지난 2017년 이후 미국의 정책이 기존 다국적 기업들의 독점적 지위 유지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다면, 중국의 산업 정책은 국내 기업들 사이에 경쟁을 오히려 부추겨 혁신과 효율성을 극대화하는데 있었기 때문이다. 고로 자본주의 미국은 독점을 옹호했고, 사회주의 중국은 경쟁을 부추겼다. 그 결과 미국은 상처를 입었으며, 일단 휴전을 외쳤다.
‘제국주의’적 강탈, 조공인가, 글로벌 자본동맹인가
미국의 관세를 무기로 한 투자 협박은 분명히 ‘강탈’이다. 왜냐하면 관세를 핑계로 강요하지 않았더라면 한국의 자본가들조차 감행하지 않았을 사업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강탈은 누구의 것을 누가 뺏어가는 강탈인가? 이 강탈은 ‘미국’, 즉 미국의 국민들이 가져가는 강탈인가? 미국의 자본가들이 가져가는 강탈인가? 이 강탈로 미국 노동자들은 덕을 보는가? 한국의 자본가들은 이 강탈로 손해를 보는가?
지난 10월 30일 서울 강남 “깐부” 치킨 매장에서 젠슨 황 엔비디아 CEO와 삼성그룹 이재용 회장, 현대차 정의선 회장이 치맥을 먹고 있다. 이들은 자본가들의 ‘우애’를 보란 듯이 과시했다. 출처: <한국경제신문>
현대자동차의 정의선 회장은 이번 한미협상 타결로 3조원 가까운 손실을 막았다고 이재명 대통령에게 빚을 졌다는듯한 표현으로 감사의 뜻을 표했다. 한국 자본가들을 강탈당한 피해자라고 할 수 있을까? AI와 연동된 반도체산업은 이미 미국발 공급망 구축의 수혜를 10.29 합의전에 듬뿍 받았다. 조선산업도 마찬가지다. 한화자본은 국내 재벌10위권에 들어가고 싶어 안달이더니, 대우조선소를 산업은행(즉 국가)로부터 싼값에 매수하더니, 이제 한미 ‘안보동맹’ 속에서 일약 글로벌 자본으로의 도약을 노리고 있다. 자동차야말로 트럼프의 ‘상호관세’라는 이름으로 관세 폭탄을 맞았는데, 이번 ‘10.29 한미 관세합의’로 살아났을뿐 아니라 AI연동한 산업전환의 계기를 확실히 마련하였다.
그렇다면 한국의 노동자들은, 또는 국민들은 이 강탈로 손해를 보는가? 아니면, 올해만해도 벌써 증시 상승으로 국민연금이 투자 잘해서 200조원을 벌었다고 칭송받듯이, 한미간의 자금 돌리기는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석이조인가? 이 강탈에는 분명히 수혜자들이 있다. 강탈의 공범이라고 말하면 도둑이 되니 그것은 아니지만, 강탈의 수혜자들이 있다. 그 속에서는 앞서 언급한 반도체, 조선업, 자동차, 방위산업등 초국적 대기업에 고용된 정규직 노동자들, 즉 한국 노동계급의 상층부도 포함된다.
우리는 적어도, 구조적으로는 이것이 세계 경제 시스템의 변동이며, 그 근간은 자본간의 세력관계의 재편이며, 근본적으로 이것이 노동계급의 저항을 분쇄하고 착취율을 높이려는 시도라고 말할 수 있어야한다. 문제를 조공이니, 강탈이나 수탈이니라고 표현하는 한 이를 제대로 직시하고 분석하기 어렵다. 즉 반제가 아니라 반독점의 문제다. 제국주의의 문제이지만, 그 제국주의는 자본주의로서의 제국주의이지, 민족주의 국가주의에 대항항으로서 제국주의가 아니다.
우리는 세계경제 시스템의 변동의 핵심인 자본간의 세력관계의 재편의 구체적인 작동 방식, 자본가와 국가가 서로 연동하는 방식과 기구들, 그리고 사회를 재편하고 이데올로기를 재생산하는 기제와 내용들에 대해서 파악해내야한다. 그러기에는 아직도 너무나 모르는 것이 많고 더 다듬어야 할 것이 많다. 하지만 더 늦기 전에 현재를 진단하고 미래에 대응하여야 한다. 과학적 이론으로 무장하고 싶다면 말이다.
그리고 그것은 로자 룩셈부르크의 언명에서 드러난 것처럼, 제국주의와 자본주의를 분리된 것이 아니라 하나로 이해하는 방식이고 전체로서 이해하는 방식이다. 오늘날의 제국주의는 더욱 독점화되고 금융화되는 자본주의의 최신 단계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반제’는 반독점‘ 속에서 천명되고 실천되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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