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자본주의와 행정법>을 썼는가
2025년 10월 31일 / 연구자의 시선
글 이계수 (건국대 법과대학원, 행정법)
나는 대학에서 행정법을 강의하고 있다. 그러나 나의 정체성은 ‘행정법’ 교수가 아니라 법 연구자이다. 그래서 늘 개별 판례 해설이나 도그마틱에 대한 관심보다는 행정법을 받치고 있는 기본적인 정치 철학과 사상, 행정법이라는 개념과 제도가 등장하게 된 역사적 맥락을 탐색해왔다. (신)자유주의와 행정법, 절차적 정의의 신자유주의적 맥락 등은 나의 오래된 연구 관심사다.
나는 <자본주의와 행정법> 이전에 이미 ‘행정법1(방송대학교출판부)’이라는 책을 17년 전에 썼다. 공무원이 많은 방송대 학생들을 염두에 두고, 그들이 행정업무를 본다면 행정법 집행은 이렇게 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담아 쓴 책이었다. 이 책을 2024년 봄 이후 1년 반 넘게 새로 다듬어서 이번에 출판한 책이 바로 <자본주의와 행정법 (1), (2)>다.
(1) 이 책을 통해 나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핵심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었다
첫째, 자본주의와 행정법의 관계를 분명히 얘기하고 싶었다. 이 책은 ‘교과서’ 제목에 자본주의라는 말이 들어간 우리나라에서 나온 첫 번째 법서가 아닐까 싶다. 일본이나 독일에도 이런 제목의 책은 없는 것 같다. 사실은 이런 제목의 책을 오랫동안 찾아헤맸으나 찾지 못했다. 어딘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보지 못했고, 그런 것에 늘 목말랐다. 그냥 내가 써보자, 하고 시작했다. 우리는 자본주의 체제에 살고 있다. 좋든 싫든 자본주의와 무관한 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특히 행정법의 등장은 자본주의의 성립·발전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
행정법과 자본주의를 함께 묶은 이유는 현재의 행정법도 영원할 수 없다는 얘기를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자본주의 이후의 삶을 상상하듯이, 현재의 자본주의 행정법도 그 ‘시효’가 있다. 우리는 얼마든지 다른 세상을 설계하고, 다른 행정법을 창조해낼 수 있다. 법의 독자성을 믿으며, 법 없이는 사회질서도 없다는 생각을 지지하며, 궁극적으로 ‘법이 지배’하는 세상을 신봉하는 이들에게는 이런 얘기가 허황되게 들리겠지만, 부르주아 지배체제의 대들보와도 같은 법에 대해 다른 마음을 품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둘째, 관료주의 권력, 관료제 권력과 ‘관료 권력’은 다르다고 말하고 싶었다. 행정법 학자들은 관료 권력에 대한 지나친 거부감이 있다. 그러나 비판해야 할 것은 독단적인 관료주의 권력이다. 반면, 관료 권력은 국가의 ‘정당한 일’과 연결된다. 사회의 위임을 받아 관료는 시장과 자본을 규제하는 데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사회적 공화국’을 향한 길에 행정법은 중요한 뒷받침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주류 행정법학자들은 자유주의 행정법학을 한없이 밀어붙인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법의 지배는 곧 (사실상 마음대로 할) 자유의 지배이다. 자유주의법학-자유주의자들은 이것에 대해 하등의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국가와 관료에 대해서도 그들의 자유에 개입하지 말 것을 요구한다. 그러다가 그들은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경제적 공황과 같은 위기를 맞이한다. 그 위기는 트럼프와 같은 대통령 독재적 권력을 호출한다. 이런 국면이 되면 사실 몰락하는 것은 (쁘띠) 부르주아지들이다. 쁘띠 부르주아지의 법인 행정법의 극단이 쁘띠 부르주아지의 몰락을 가져오는 것은 아이러니다. 몰락과 파탄을 방지하려면 행정법과 행정법학은 관료 권력을 “규율”하는 문제에 진심이어야 한다. 구체적으로 관료 권력의 행사를 어떻게 민주주의적으로 정당화할 것인가, 어떻게 하면 행정공무원을 ‘사회적 공화국’의 집행자로 끌어들일 수 있을까 고민해야 한다는 뜻이다. 마르크스는 “지배계급이 피지배계급의 가장 뛰어난 인물을 자기 속으로 끌어들이는 능력이 크면 클수록 그 지배는 더욱더 강고하고 위험한 것이 된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그 반대도 타당하다.
셋째, 이건 꼭 행정법만의 문제는 아니지만, 법학을 공부할 때는 법의 역사성을 항상 생각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었다. 법학개론 교과서들은 ‘사회가 있는 곳에 법이 있다’라고 하는데, 이 말은 맞는 말이기도 하고 틀린 말이기도 하다. 대체로 사회 있는 곳에 법이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이런 걸 무시하고 세상에는 언제나 법이 존재하고, 또 존재해야 한다고 말하면, 법물신주의에 빠진다. 법은 우리 삶을 규제하고 교통정리하기 위해 등장한 하나의 수단인데, 법 자체가 목적이 돼 버린다. 그래서 이렇게 말해야 한다. 사회가 있는 곳에 법이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특정한 사회에 특정한 법이 있을 뿐이다. 우리 행정법(학)의 기초가 된 독일 행정법(학)은 1850년대부터 1945년까지 대략 100년에 걸친 독일의 헌정사와 정치, 사회를 배경으로 성립, 발전, 변화해 온 것이다. 이러한 법의 역사성, 행정법의 역사성을 인식하고 그때그때 등장한 이론의 의의와 한계를 분명히 인식하면서 행정법 공부를 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었다. 이런 식으로 공부하면 교과서에 등장하는 행정법 개념이나 제도도 다르게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 이런 인식 혹은 통찰이 가능해야 현재의 지배적 해석을 상대화하고 새로운 해석으로 나아가는 길을 열 수 있다.
“뒷걸음질을 친 동자동의 4년… 공공개발 끝내 좌절되나”, 출처: 주간경향 2025.2.10.
전국의 쪽방촌 중 어느 지역을, 어떤 방식으로 개선하고 정비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법률로부터 자유롭게”(gesetzesfrei) 관료들이 결정할 수 있는 영역이다. 문제는 그들이 이것을 적극적으로 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기존의 행정법과 그 해석이 이것을 가로막고 있다면, 그 한계를 새롭게 설정하고 헤쳐나갈 지혜를 행정법학이 제공해야 한다.
(2) 이 책은 교과서이지만 주류적 견해를 따르지 않았다
독일의 대표적 행정법학자인 포르스토프는 생전에 펴낸 마지막 교과서(제10판) 서문에서, 자신은 지배적 견해, 통설, 공통의견(communis opinion)에 휩쓸리지 않으려고 노력했다고 말했다. 그 말이 참 마음에 와 닿았다. 이 책을 쓰면서 생각해보니, ‘교과서’ 저자들은 통설과 다른 입장을 취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느낌이 들었다. 다른 얘기를 함으로써 ‘동업자단체’로부터 배척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그러나 연구자라면, 특히 ‘민주주의법학연구회’ 회원으로서 비판적-급진적 법이론을 고민해온 연구자라면 과감할 필요가 있겠다는 결심을 했다. 그래서 내 생각대로, 그러나 분명한 논거를 계속해서 찾아나가면서, 집필했다.
문체도 교과서체를 쓰지 않고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내 생각은 이렇다’라고 썼다. ‘우리’라는 복수 주어를 쓰지 않은 것은 내가 책임지는 나의 주장이자 견해를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비판을 감수하면서도 ‘나는’ 이라는 주어를 써서 나의 견해를 밝히고 싶었다. 이 책에는 소제목이 거의 없다. 소설책 읽듯이 쉽고 편안하게 읽어나가면 행정법에 대한 전반적인 상(象)을 그릴 수 있을 것이다.
<자본주의와 행정법>은 모두 2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제1권은 행정법의 개념과 원리, 제도를 설명하지만 거기에는 공법의 기초가 다 들어가 있다. 법치국가, 사회국가는 무엇인지, 민주주의 원리는 무엇인지, 권력분립은 어떤 의미를 갖고 있고 정치가들은 어떤 방식으로 이 개념들을 쓰고 있는지 마르크스주의 정치경제학의 관점에서 설명했다. 법에 근거해 국가 행정이 이루어진다는 것은 어떤 실체와 허상을 갖고 있는지(이른바 ‘의회유보’의 한계), 법규명령과 같은 행정부의 입법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도 다루었다. 제2권은 독일행정법 모델을 기초로 자본주의 행정법의 구체적인 작동방식을 기존 교재의 순서대로 하나하나 살펴보았다. 그러면서도 계속해서 미국, 프랑스, 스웨덴 행정법과의 비교법적 관점을 유지하였다.
특히 내가 관심을 둔 것은 프랑스행정법과의 비교이다. 칼 슈미트의 <헌법학>(Verfassungslehre)은 ‘프랑스혁명사의 헌법서’라는 평가를 받는다. 나는 <자본주의와 행정법>이 아주 조금은 프랑스혁명사의 행정법서라는 ‘소리’를 듣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나는 이 책을 쓰면서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을 위시하여 마르크스의 프랑스혁명사 3부작을 열심히 읽었다. 마르크스는 <도이치 이데올로기>(1845)나 <공산당 선언>(1847)을 쓰고 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브뤼메르 18일>을 집필했는데, 이 후자의 논지는 앞의 그것과는 사뭇 다르다. 한마디로 대당적 계급 간의 변증법적 역학을 기반으로 한 ‘이론적’ 설명들은 사회 전체에 걸쳐 분산된 다종다양한 사회세력들의 증식과 점증하는 사회적 적대의 복잡성에 대한 세세하고 두터운 ‘역사적’ 기술과 분석들에 의해 지속적으로 도전받고 잠식당한다. 마르크스가 불과 몇 년 전에 제시했던 유명한 역사적 유물론의 명제 중 어느 것 하나도 <브뤼메르 18일>에서, 때로는 명시적으로 때로는 암묵적으로, 문제화되거나 반박되거나, 또한 최소한 재고되지 않은 것이 없다.
행정법의 역사적 발전이라는 측면에서도 19세기 프랑스혁명사와 행정법의 관계 규명이 중요하지만, <브뤼메르 18일>에서 마르크스가 보여준 통찰 – 1848년 6월 봉기의 실패후 프롤레타리아트는 철저히 고립되고 무력화(無力化)되었고, 그 결과 두 주요 계급의 나머지 한 축인 부르주아지만 남는다. 그렇다면 이 계급은 누구하고 대립하고 투쟁하는가? 자기 자신이다. 곧, 상이한 생산 조건과 이해관계로 분열된 계급으로서의 부르주아 분파 간의 내부 투쟁이 그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부르주아-자유주의 행정법의 기초를 파악하고, 그것을 변혁하는 데 필요한 인식을 제공한다.
프롤레타리아트 계급은 부르주아 분파 간의 대립을 이해하고, 자신에게 유리한 국면을 만들기 위해 이 내부투쟁(여기에는 당연히 법해석투쟁이 포함된다)에 어떻게 개입할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자신의 고유한 이해관계를 구체화하고 연대와 투쟁의 전략을 적절히 구사해나가야 한다. 나는 <자본주의와 행정법>을 연구하면서 이런 일관된 이해관심을 가졌지만, 그런 관심이 실제의 집필에서도 체계적으로 관철되었는지는 장담할 수 없다. 다만, 이런 한계를 나 스스로 인식하고 있으므로, 기회가 닿을 때마다, 논지를 수정·보완해나갈 생각이다.
베를린에 몇 남지 않은 점거주택 중 하나. 이 건물은 통일 직후인 1991년부터 존재했던 퀴어들의 대안적 주거실천공간이다. 건물 앞 벽면에 “자본주의는 우리의 삶을 규범화하고, 파괴하고, 살해한다”는 문구가 걸려있다.
(3) 이 책은 소재 혹은 다루는 대상 면에서도 기존의 행정법교과서와 다른 차별성이 있다
그중에서 특히 강조하고 싶은 것이 바로 ‘커먼즈의 행정법’이다. 가령 관습법을 설명한 부분을 예로 들어보자. 관습법은 대체로 부정적으로 묘사돼 왔다. 교사의 체벌에 법적 근거가 없었을 때 과거 독일에서는 관습법에 근거한 교사의 훈육권이라고 말했다. 민주주의 국가의 법과는 맞지 않아 관습법은 퇴행적이고 보수적으로 묘사되지만, 나는 관습법이 보수적일 수도 있고 진보적일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국가도 시장도 아닌 제3의 영역을 요즘은 커먼즈라고 한다. 영어 commons를 그대로 소리나는 대로 표기한 것인데 공동재산, 공유재산이라고 번역하기도 하지만, “커먼즈”는 이런 옮김말보다 그릇이 더 큰 말이다. 예를 들어, 바다의 갯벌을 마을 공동체가 커먼즈로 관리한다면 이것을 행정법적으로 어떻게 보장할 것인가 하는 것을 진보적 관습법의 관점에서 설명했다. 나는 아직까지 관습법을 진보적 관점에서 설명하는 행정법 교과서 혹은 헌법 교과서를 보지 못했다.
커먼즈에 대한 논의는 국가책임법을 해석하는 부분에서도 이어지고 있다. 기후위기 시대에 국가배상책임의 엄격한 추궁이 과연 국가책임법의 관점에서 바람직한가 하는 점을 짚었고, 수변구역을 확대하고 그에 대한 조정청구권을 인정하거나 손실보상책임을 적절히 배분하는 쪽으로의 변화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는데, 이것이 가능하려면 커먼즈 논의는 필수적이다.
한국사회의 급격한 보수화는 법학교육의 현장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판례를 추종하다 못해, 이제는 거의 그것만 가르치고 배운다. 로스쿨 학생들은 판례 위주의 수업을 하지 않는 교수가 개설한 과목은 아예 수강신청을 하지 않으려고 한다. 모든 것이 변호사 시험과 관련되어 있고, 모두가 합격률에 목을 맨다. 이런 상황이라면 진보적-커먼즈 수호적 관습법에 대한 고민 같은 것은 나올 수 없다. 솔직히 말하면 암담한 상황이다.
그래도 이 책을 쓰면서 많은 질문을 던졌고, 나만의 답을 제시했으며,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했다. 주류법학자들의 반응이 궁금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길을 가면 된다. 카를 마르크스는 『자본론』 제1권 제1판(1867년) ‘서문’의 마지막 문단에서 단테의 말을 인용한다. “너의 길을 걸어라, 그리고 남이야 뭐라고 하든 그냥 내버려 두어라!” Segui il tuo corso, e lascia dir le genti! 『신곡』 「연옥편」 제5곡의 표현을 조금 변형한 문장이었다. “나는 남이야 뭐라고 하든” 신경 안 쓸 배포는 없지만, 그래도 “너의 길을 걸어라”는 말에 용기를 얻어 이 책을 썼다. 이 글을 읽을 여러분들의 ‘동지적’ 관심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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