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와노동 연구소

낫과 망치 – 동요하는 서구

민노연 창립식_087

'낫과 망치' : 농민시위와 파업, 동요하는 서구

2024년 4월 18일 / 국제 노동/운동 동향 Intl Labor & Resistance

권영숙 민주주의와노동연구소 소장

농민시위, 녹색성장, 기후위기, EU 파업, 미국 노동쟁의, 미국 노조가입율, 21세기판 ‘엔클로져

19세기와 20세기 혁명의 화두 중의 하나는 노동자와 농민의 동맹이었다. 이른바 낫(농민)과 망치(노동자)로 상징되는 혁명적 노동동맹 (적녹동맹)은 그러나,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잊혀져갔고 오히려 종종 두 세력은 대립적으로 충돌했다. 혹은 이들은 앞에 ‘혁명적’이라는 말은 거세된 채 제도화를 향한 동맹이 되었다.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의 적녹동맹은 그렇게 현실화되어 사회복지국가가 되었다. 농민 기반의 강력한 쁘띠 부르조아 정당과 온건화된 계급정당이 비혁명적인 적녹동맹으로 결실을 맺은 것이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의 사민주의 정치체제였다.

그리고 지난 1970년대 중반 이후의 세계화 과정에서 중심부 서구 국가들에서는 이들이 체제 전환의 주체였다는 사실조차도 망각되어갔다. 적녹동맹은 해체되거나 약화되었고, 도시와 농촌에 걸쳐 보수화된 사회집단들을 중심으로 극우파까지 정치세력화하였다. 그리고 이들 국가들은 줄줄이 미국이 서유럽과 맺은 군사동맹인 NATO에 가입하였다.

그런 점에서 2023년-2024년은 상징적인 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세계화 이후 주변부로 밀려났던 노동자와 농민이 비록 아직 무대 중앙은 아니더라도, 무대의 한 자리나마 차지할 수 있으며, 주연들의 연기를 훼방놓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1. 낫

처음에는 폴란드에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매우 단순했다. 지난 2023년 가을, 우크라이나산 저가 곡물이 폴란드로 쏟아져 들어오자 폴란드 농민들이 국경 도로를 막고 수입을 저지했다. 그리고 곧 이웃 슬로바키아 체코 루마니아 등지로 퍼져나갔다.

2023년 말이 되자, 농민 시위는 인근 네델란드 독일로 확산되었다. 정부가 ‘녹색 성장’과 ‘기후 위기’와 관련한 EU 합의를 근거로 국내 농업 보조금을 삭감하고 농업생산량 감축을 시도하자 농민들은 ‘도시’를 점거하기 시작했다. 독일에서는 수천대의 트랙터가 베를린을 포위하고 브란덴부르크 광장을 점령했다. 그리고 이 집단적 저항행위는 프랑스로 이어졌다. 프랑스는 전통적으로 농민 시위가 과격하다. 프랑스 농민들은 이번에도 역시 과격하게, 도시 봉쇄뿐만이 아니라, 아예 ‘퇴비’(실은 가축 분뇨, 즉 똥이다)를 정부 건물에다 퍼부었다. 화염병 대신 똥을 쓰는 것도 프랑스 농민의 역사적 전통이기도 하다.

유럽에서 농민 시위의 전개는 EU를 탈퇴한 대부분의 유럽 국가에서 거의 동시적으로 나타나기는 했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초기 발단(폴란드)과 이후의 확산은 성격이 좀 다르다. 폴란드등 대부분 동구권 국가에서 농민 시위는 ‘가격 보장’(저가 우크라이나 농산물 수입 저지)을 목표로 하고 있었지만, 이후 독일과 프랑스로 확산되었을 때는 농업 보조금과 농업 규제 철폐가 주요 요구사항이었다.

농민 시위가 가장 극렬한 곳은 아니지만, 정부의 농업정책이 가장 ‘급진적’이었던 국가는 네델란드였다. 네델란드 정부는 지난해 초 기후 위기에 대응하겠다면서 농가가 기르던 전체 가축의 1/3을 줄이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발표했다. 농민들의 반발이 거세지자, 마르크 뤼테 총리는 7월 사임을 발표했고(차기 나토 사무총장으로 가장 유력한 후보로 떠오르고 있다), 이후 총선에서 이른바 ‘극우’ 정당들이 대거 의회에 진출했다. 

이같은 일련의 과정들을 유럽의 엘리트들이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지 <Financial Times> 기사를 통해 살펴보자. 

24년 1월 25일자, “극우파들이 농민 시위에 개입하면서 브뤼셀(EU)은 농민들을 진정시키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24년 2월 1일자, “EU 리더들은 성난 농민들을 달래기 위해 보다 많은 양보를 약속했다”.
24년 2월 5일자, “EU는 농민 시위 이후 농업 관련 오염물질 배출량 축소 계획에서 후퇴했다”.
24년 2월 6일자, “브뤼셀은 환경 보호 목표를 축소하여 농민 시위에 굴복했다”. 

FT 기사 제목만 보고도 올 봄 유럽을 휩쓴 농민 시위의 성격을 짐작할 수 있다. 첫째는 정책적으로는 EU가 계획하고 있는 농업 보조금 중단과 이른바 ‘녹색 성장, 기후 위기’ 정책에 대한 농민들의 반발이다. 농민들이 이 정책으로 먹고 살기가 너무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농민들은 계속해서 EU 정책에 의해 고통받아왔다. 소수의 대형 농업기업을 제외하고는, 농사짓는 일은 가장 호시절에서조차도 큰 위험과 별 볼 일 없는 보상에 만족해야 했다. 농부들은 최근 몇년간은 인플레이션과 우크라이나 전쟁 때문에 대출 비용이 급등했다고 불평한다. 이윤은 가격을 후려치는 중간상과 소매상들 때문에 줄어들었다. 거기에다가 우크라이나에서의 곡물 수입은 유럽의 문호를 키에프(우크라이나)에게 열어주는 일이라고 불만을 터뜨렸다”. 

유럽 농민 시위의 근본 원인은 ‘농업 이윤율 하락’에 있다. 유럽의 농민들은 이같은 이윤율 하락을 농업 보조금(EU 전체로 약 600억 유로에 달한다)과 낮은 금리로 버텨왔다. 그런데 인플레이션으로 인한 금리 상승과 가뜩이나 낮은 농산물 가격을 더 떨어뜨리는 우크라이나산 저가 곡물 수입, 그리고 기후 위기를 이유로 한 각종 규제에 더 이상은 버틸 수 없는 정도에 이르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 농부들에게는 두 가지 선택의 길밖에 없다; 하나는 자영농을 포기하고 대기업 농업기업에 농업 노동자로 들어가든지, 아니면 빚잔치해서 다 때려치우고 도시로 흘러들어가 이민자와 경쟁하는 하급 노동자가 되는 것이다. 

전자(농업 노동자로의 전락)는 이미 영국에서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다. 한국에서 ‘진공청소기’로 잘 알려진 다이슨의 창립자인 제임스 다이슨은 영국 찰스 왕에 이어 영국 내에서 두번째로 큰 토지를 소유하고 있는 대지주다. 농업에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영국 세법상 농업용 토지에 대해서는 상속세를 면제해주기 때문이다. 즉 조세 회피 수단이다. 그래서 영국의 부자들은 재산을 물려주기 위한 수단으로 농지를 매입한다. 이 때문에 영국의 농지 가격은 상대적으로 매우 비싸다. 비싼 농지 가격은 신규 농업 종사 희망자의 진입을 어렵게 만든다. 대신에 기존 농부들은 고가의 농업기계와 낮은 이윤율로 망해가고 있다. 기존 농부들은 망하는데, 신규 농부 진입은 어렵다. 결국 자본력이 있는 개인이나 농업기업의 손으로 농지가 넘어간다.

유럽에서 ‘녹색’이나 ‘기후’의 이름으로 진행되고 있는 모든 일들은 좋은 말로 하면 ‘토지개혁’, 역사상 전례에 비춰보면 21세기판 ‘엔클로져’라고 할 수 있다. 옛날에는 양이 사람을 잡아먹었지만, 지금은 ‘녹색(green)’이 사람을 잡아 먹는다. 물론 이제는 대부분의 유럽 국가에서 농민 인구는 고작해야 3% 남짓이기 때문에 대규모 사회적 비극으로 제시되지는 않는다. 

폴란드 농민들이 트랙터에 "푸틴, 우크라이나 끝내거든 브뤼셀도 좀 와줘"라는 구호를 걸고 시위하고 있다. 출처: TheHindu,
폴란드 농민들이 트랙터에 “푸틴, 우크라이나 끝내거든 브뤼셀도 좀 와줘”라는 구호를 걸고 시위하고 있다. 출처: TheHindu,


FT의 기사에서도 알 수 있듯이, EU, 또는 유럽의 엘리트들의 인식에서 특히 중요한 것은 농민 시위가 ‘극우파’들과 결합하는데 따른 위험성이다. 일반적으로 유럽의 극우파 정당들은 반EU 정책을 취한다. 따라서 농민들과 극우파가 결합하는 것은 유럽 통합론자들에게는 매우 심각한 위험일 수밖에 없었고(게다가 EU 의회 선거가 올 6월로 예정되어 있다), 결국 올 봄 농민 시위에 굴복하여 보조금 지속과 농업 규제의 일부 철폐, 우크라이나 곡물 수입 제한 등의 양보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왜 농민들은 극우파와 결합하는가? 대답은 매우 간단하다. 유럽에서 ‘진보’, ‘좌파’ 또는 ‘사민주의’는 기후 위기나 환경정책(예컨대 재생에너지 100% 정책을 요구하는 RE100이나, 이산화탄소 감축을 위한 전기차로의 완전 전환 등 강력한 환경 규제 정책)의 대표적인 주체 세력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같은 정책들은 자영농민과 하층 노동자들에게는 오히려 경제적 곤란을 가중시킨다. 즉, 이들은 ‘무식해서’ 혹은 ‘파플리스트’라서가 아니라, 자신들의 즉각적인 계급적 이해관계 속에서 현 지배체제와 그 정책들에 반대하는 세력과, 또 즉자적으로 결합하게 되는 것이다.

유럽의 지배층도 이같은 상황을 인식하고 있다. FT에 따르면, “다른 영역의 녹색 전환과 마찬가지로, 브뤼셀과 EU 국가들은 가장 취약한 집단에 대한 충격을 상쇄하면서 전반적인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방안을 찾아야만 한다”고 인정한다.

그런 점에서 최근의 유럽의 농민 시위는 그 이전 프랑스의 노란조끼(yellow vest) 운동이나 캐나다의 트럭커(trucker) 운동 등과 마찬가지로 현 체제가 지향하는 ‘체제 전환’ 방향에서 가장 경제적 타격이 큰 집단들의 사회적 저항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들은 거의 예외없이 이른바 ‘극우 정치세력’과 결합하고 있다. 따라서 정치적 고려 때문에라도 EU는 정책을 전환하거나 늦춰 시행할 수밖에 없었다.

유럽의 농민 시위에는 또 다른 배경이 있다. 지난 2022년 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하자 EU는 러시아산 천연가스 수입을 금지시켰다. 천연가스는 농사에 필수적인 화학비료의 주원료다. EU의 수출금지 조처로 유럽 비료 생산공장의 절반이 문을 닫았다. 미국으로부터 수입된 천연가스는 가격이 너무 비싸서 경쟁이 되지 못한다. 흥미롭게도 유럽 농민 시위에 등장한 플래카드 중의 하나는 “푸틴, 와서 (EU) 손 좀 봐줘!”라는 것이었다. 즉, 농민 시위는 EU 통합론자들의 전체 계획을 무산시킬 파급력이 있었던 것이다. 결국 EU는 오는 2040년까지 농업 관련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절반으로 줄인다는 당초 계획을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2. 망치  

2023년은 노동의 관점에서도 매우 흥미로운 한 해였다. 세계화가 시작된 이래 인플레이션이 처음으로 본격화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에 대응한 노동의 저항도 표면화되었다.

미국 파업건수와 파업일수 (2023). 출처: 코넬대학 노사관계대학원 ‘Labor Action Tracker 2023’
미국 파업건수와 파업일수 (2023). 출처: 코넬대학 노사관계대학원 ‘Labor Action Tracker 2023’.

 미국의 노동쟁의를 추적해온 코넬대학 노사관계대학원의 ‘Labor Action Tracker 2023’에 따르면 2023년 미국의 파업건수는 전년 대비 9% 증가했으며, 특히 파업 참여 노동자 숫자는 141%나 늘어났다. 이는 노동쟁의가 대규모화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전미자동차노조(UAW)의 파업이 크게 영향을 미쳤다. UAW를 비롯한 카이저 의료보험 노조와 로스앤젤러스 교원 노조 파업 등 4개 대규모 파업이 전체 파업노동자의 65%를 차지했다. 

노동쟁의들의 주요 요구 사항은 1) 임금 인상 2) 의료보험 및 안전 조항 개선 3) 인원 보충이었다. 반면 비노조파업은 이전 년도 대비 22% 감소했으며, 또 쟁의 기간도 단축되어 전체 파업의 62%가 5일 이내에 종료되었다. 

또 하나 흥미로운 점은 소규모 사업장(50인 미만)의 쟁의가 대폭 증가했다는 점이다. 이는 영세사업장일수록 저임금에 노동환경이 나쁘다는 점을 감안할 때, 실제 인플레이션 하에서의 노동력 부족 현상이 겹쳐져 노동자의 발언권이 확대된 결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미국 노동통계청(BLS)에 따르면 지난 23년의 미국 노조조직률은 10.0%로 22년과 차이가 없었다. 즉 쟁의 건수나 파업 참여자수는 증가했지만, 조직률 자체는 거의 변동이 없었던 것이다. 또한 공적부문의 노조 조직률이 32.5%로 민간부문 조직률 6.0%보다 5배 이상 높았고, 가장 노조 조직률이 높았던 산업 분야는 교육, 훈련, 도서관업과 보호서비스업이었다.  또 비노조 노동자의 시간당 임금은 노조 가입자의 86% 수준이었고, 인종별 성별 분류에서는 흑인 여성의 노조 가입률이 가장 높았다. 

미국내 노동 쟁의가 증가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노조 가입률은 여전히 역사적 저점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 그리고 이는 여전히 미국 노동자들이 노조에 가입하는데 장벽이 있거나, 혹은 노조가 신뢰를 얻지 못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미국 노동쟁의 장기 현황 (1947년-현재). 출처: Pew Research Center
미국 노동쟁의 장기 현황 (1947년-현재). 출처: Pew Research Center


장기적인 관점에서도 미국의 노동쟁의는 매우 흥미롭다. 미국의 Pew Research Center에 따르면, 미국의 쟁의는 2차 대전 직후 급증하기 시작해서 70년대 초반 최고 수준에 이르렀다. 그 이후 쟁의 뿐만 아니라, 노조 조직률도 지속적으로 감소하기 시작하는데, 이 때가 바로 세계화의 시기, 혹은 금융시장에서 ‘대안정기’(저금리 및 저변동성을 특징으로 한)이라고 불리는 때이기도 하다. 즉 세계화의 시기에는 미국 내에서 산업공동화 현상과 이에 따른 고용불안 문제가 제기됐음에도 불구하고 노동쟁의는 오히려 감소했으며, 동시에 실업률도 지속적으로 감소했다.

문제는 지난 2016년 이후 세계화가 본격적으로 후퇴하기 시작하면서부터다. 과거 사례를 본다면, 세계화의 후퇴는 해외에서 해결책을 찾지 못한다면 국내에서 노동과 자본의 대립이 격화되는 양상으로 표출된다. 지난 2018, 2019년의 두 해는 인플레이션률이 높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노동의 저항이 지난 수십년만에 처음으로 드러난 때이기도 하다. 그리고 코로나로 인해 억제되었던 노동의 저항은 2023년 인플레이션과 더불어 재개되었다.
만일 역사가 가르키는 바가 있다면, 저 그래프는 다시 위를 향해 치솟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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