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와노동 연구소

2024년 제 22대 총선 분석 – 선거와 계급: 누구의 승리인가?

제 22대 총선 분석 
선거와 계급: 누구의 승리인가?

2024년 4월 18일 / 이슈 리포트
글 권영숙 민주주의와노동연구소 소장

rentier class(토지자산계급), 자영업자, 22대 총선, 계급, 부동산정책, 금리, 인플레이션, 조국혁신당,
정치의 사법화

선거가 끝났다. 누가 승리했나? 이것이 첫번째 질문이다. 두번째 질문은, 투표는 세상을 바꾸는가 하는 것이다. 

1. 국회의원 선거를 앞둔 사회경제적 조건 

2020년 코로나 사태로 일시적인 침체에 빠졌던 글로벌 경제는 21년 하반기부터 급속히 반등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2022년 2분기부터 인플레이션이 발생했다. 이 과정을 불가피한 ‘자연적’ 현상이라고 해석할지라도(실제로는 논란의 여지가 많다. 왜냐하면 코로나 시기의 정책들은 ‘의도적’ 선택이었기 때문이다), 22년 이후 지금에 이르기까지의 상대적 경기 침체는 상대적으로 각 계층, 계급에 각기 다른 영향을 미쳤다.  우리는 22대 총선을 앞두고, 이 지점, 즉 선거의 정치경제학, 혹은 다양한 사회 집단의 사회경제적 조건을 살펴봐야한다. 그들은 투표장에 들어서기전에 어떤 사회경제적 조건에 처해있었던가?

글로벌 경제 

지난 2022년 이후의 인플레이션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은 ‘공급 충격’(글로벌 공급망의 단절 혹은 지연)이었다. 동시에 그 배후에는 2020년 하반기부터 시행된 역사상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금융 완화’가 있었다. 

문제는 공급 충격 하에서 인플레이션이 발생하면 중앙은행과 정책 당국은 금리 인상과 재정 축소(이른바 건전재정) 이외에는 딱히 쓸 수 있는 수단이 없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는 또 다른 문제를 낳는데, 민간부채 비율이 높고 변동금리 의존도가 높으며, 대외무역 비중이 높은 국가는 금리를 인상할 수 있는 여지가 매우 적다는 것이다. 그리고 한국은 이 세 가지 조건에 완벽하게 부합한다. 

이러한 금융정책상의 한계를 돌파하기 위해서는 긴축적 재정 정책을 쓰게 된다. 하지만 금리 인상과 재정 축소 이 두 가지 정책은 고전적인 총수요 억제책이기는 하지만, 동시에 차별적 효과를 낳게 되며, 이것이 집권 세력에게는 정치적 부담으로 다가온다. 

인플레이션이 발생하자 한국은행은 금리를 인상한다. 그러나 민간부채 비율이 GDP의 130%가 넘는 한국 민간 가계의 상황(부동산 대출이 전체의 90% 이상)을 고려할 때(2015년 이후 국제결제은행은 한국 민간가계 부채를 고위험 수준으로 분류하고 계속 경고해 왔다), 인플레이션 자체만을 목표로 기준 금리를 운용한다면, 한국의 부동산 시장은 순식간에 몰락하고 말 것이다. 이는 단지 부동산 시장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한국 금융 시스템 전체를 위기로 몰아넣는다(즉 2008년도 미국의 금융 위기 축소판이 나타난다). 

따라서 중앙은행의 금리 인상 정책은 한계에 봉착하며, 심지어는 부채가 너무 과중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낮은 금리 하에서도 부동산 가격은 벌써 하락 압력을 받으며 이는 건설업체등의 연쇄 도산 위험을 가중시킨다 (건설업계의 project financing 위기는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윤석열 정권의 경제정책: 물가, 부동산, 긴축재정

이같은 조건에서 중앙정부는 어떤 정책을 취했는지 보자. 윤석렬 정권은 이른바 ‘건전 재정’(긴축 재정, 즉 OECD가 권유하는 GDP의 3.5% 미만의 재정 적자 수준)을 기치로 내세웠다. 

그 결과, 정부 예산은 문재인 정권 하에서는 연 평균 8% 이상의 증가율을 기록했지만, 윤석렬 정권 하에서는 23년도에는 증가율이 5%에 못 미쳤으며, 24년에는 3.5%로 책정되었다. 23년도의 예산 증가율은 당해년도의 물가상승률(연간 3.5%)을 감안할 때, 사실상 1%대이며, 24년은 1% 미만일 가능성이 높다. 만일 올해 물가상승률이 외부적 요인 때문에 더 높아진다면, 정부 예산은 불변 가격으로는 사실상 감소하는 것이다.

윤석렬 정부의 부동산 감세 정책에도 불구하고 부동산 지표는 하락하고 있다. 출처 : 부동산R114
윤석렬 정부의 부동산 감세 정책에도 불구하고 부동산 지표는 하락하고 있다. 출처: 부동산R114

일반적으로, 경기 하강기에는 재정을 확대하여 경기를 부양하는 것이 주류 경제학 교과서의 원칙이다. 그런데, 한국경제는 이미 지난 2022년 2분기 중에 고점을 찍고 하강 중이며 23년 하반기에는 이미 침체 국면에 접어들었다. 그런데 이같은 실물경제 조건에서 정부는 사실상 예산을 동결한 것이나 다름없다. 그리고 이는 ‘불가피한’ 선택이다. 만일 정부가 경기를 부양하기 위해서 재정을 확대한다면, 이는 인플레이션 상승 압력을 가져올 것이다. 그러면 중앙은행은 금리를 인상해야 하는데, 이 때는 부동산이 전면적인 타격을 입는다. 
즉, 윤석렬 정부는 부동산과 경기 중에서 부동산을 택한 것이다. 따라서 이 선택에서 배제된 ‘실물’에 해당하는 계층들은 더 큰 타격을 입는다. 그들이 바로 주로 자영업자들이다.

그 결과, 통계청이 지난 2월 발표한 23년 4/4분기 전국 서비스 및 소매 판매 지표를 보면, 소매 판매는 22년에는 연간으로 0.3% 감소했는데, 23년에는 1.4% 감소했다. 특히 3분기와 4분기는 각각 2.8%, 2.4%나 감소해서 낙폭이 커지고 있다. 사실 경기 불황기에도 소매 판매가 이 정도로 감소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음식료품 소매 판매의 경우, 심지어는 2008년 금융 위기 여파로 글로벌 경기 침체가 가장 심했던 2009년조차도 소폭 증가했었지만, 지난 22년에는 2.5%, 23년에는 2.6%나 감소했다. 즉, 2008-2009년 침체기보다도 더 극심한 위기를 지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자영업자들은 선거에서 어떤 선택을 했을까?

윤석렬 정부의 정책에는 또 다른 측면이 있다. 정부는 금리 대신에 재정 긴축을 통해 총수요를 줄이려고 했을 뿐만 아니라, 대기업과 부동산에 대한 감세 조처를 취했다. 그 결과, 재정 긴축에도 불구하고 재정 적자가 오히려 확대되었다.
그렇다면 부족한 재정을 어떻게 충당했을까? 한국은행 차입, 환율 안정을 위한 기금 (외평기금)을 전용해 재정 부족을 메웠다. 이는 재정 준칙에 위배될 뿐만 아니라, 한국은행 차입의 경우 사실상 양적 완화(QE)에 해당하기 때문에 금융 시장에 미치는 파급 효과가 굉장히 크다. 그리고 필연적으로 원화 환율 상승 요인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시간이 지남에 따라 오히려 인플레이션을 가중시킨다. 그런데 왜 이런 선택을 했을까? 왜 국채를 더 발행하지 않았을까?

현대 자본주의 하에서 국채는 모든 상품 가격의 기초가 된다(19세기의 금과 같은 역할을 한다). 만일 국채를 추가 발행한다면, 국채 가격이 하락(국채 금리 상승)할 것이다. 그러면 한국은행은 금리를 올리거나, 혹은 원화의 추가적 약세를 방치할 수밖에 없게 된다. 따라서 어떤 길로 가든간에 결과는 동일하다. 일시적인 진정 효과가 끝나고 나면, 만성적 인플레이션과 원화 약세, 그리고 국채 가격의 하락이 발생한다. 

그런데 윤 정권은 오히려 세제 감면을 통해 부동산 시장을 부양하려 했고, 재정 축소로 수요를 억압하려 했다. 전형적으로 rentier class(토지자산가계급)의 정책을 펼친 것이다. 이는 단지 한국만의 일은 아니다. 미국의 자넷 옐렌 재무장관이 연방준비제도 이사회 의장으로 재임할 때부터 지금까지 지속된 정책이기도 하다. 

토지자산계급정치 (rentier class politics)

이 대립은 이미 노무현 정권 때부터 시작된 것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 시절, 그토록 낮은 지지율을 기록했던 것, 또는 경제 호황에도 불구하고 전혀 평가를 받지 못했던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이른바 죠지스트(19세기 미국 토지사상가 헨리 죠지의 이념을 따르는 토지공유론자들)들이 청와대에서 부동산 정책을 결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은 이미 1982년부터 부동산 버블을 유도할 수 있는 글로벌 저금리 정책을 수행하고 있었고, 한국에서도 IMF 금융 위기가 일단락되자 풍부한 글로벌 유동성이 공급되었기 때문에 주택 가격 상승의 조건들은 모두 갖춰졌지만, 노무현 정권은 이를 세금과 규제로써 억압했다. 이 때 사용한 정책이 총부채상환비율(DTI)인데, 우스꽝스럽게도, 2008년 금융 위기 이후 한국의 이 정책은 모범적인 부동산 억제 정책으로 전세계 각국에 소개되었다(국제결제은행 BIS가 극찬을 했다).

2007년 대선에서 정동영 후보가 이명박 후보에게 참패한 것은, 단순히 민주당 내부의 분열 혹은 정동영의 개인적인 선거 운동의 실패의 문제가 아니었다. 수도권을 중심으로 부동산 규제 해제(즉 가격 상승)을 요구하는 세력이 너무 컸으며, 그 목소리를 막을 방도가 없었다. 이 선거에서 이명박의 당선은 한국에서 부동산족(강남으로 대표되는)의 승리였으며, 주택(아파트)이 금융 자산의 기초로 자리잡게 된다는 신호였다.

그리고 이는 문재인 정권 하에서도 반복되었다. 문재인 정권은 총액대출규제와 조세정책(종부세 강화), 규제강화(다주택 규제)를 정책으로 내세웠지만, 글로벌 저금리 하에서 넘쳐나는 유동성 시장 속에서 부동산 가격 상승을 막을 수 없으며, 오히려 행정적 능력의 과시(코로나19 관리 능력)에도 불구하고 잠재적인 경제적 불만 세력을 키울 뿐이었다.

물론 부동산 과열의 가장 근본적인 그리고 가장 손쉬운 해결책은 금리다. 그러나 글로벌 저금리 하에서 한국만이 금리 인상으로 부동산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금리 인상만큼 경기 위추의 정치적 부담이 존재하며, 동시에 저물가에도 불구하고 왜 한국만 유독 금리를 인상하느냐는 반론에 맞설 수도 없기 때문이다(동시에 이는 금융자본의 이해에 반하기 때문에 거의 파국적인 결과를 가져왔을 것이다. 또한 현재의 한국은행법상 반금융시장 정책을 정부가 강요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재인 정권은 한국은행법을 포함한 금융시장 법안을 전혀 개정하려 하지 않았다).

문재인 정권의 부동산정책은 차라리 ‘커뮤니케이션’, 즉 정치적 메세지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정권의 관점에서 보면, 솔직하게 한국의 부동산 문제는 저금리의 문제이기 때문에 정책 수단에 한계가 있다고 고백하고 그 기반 위에서 정책을 짜나가는 편이 훨씬 유리했을 것이다. 물론 그것도 불가능했다. 왜냐하면 문재인 정권 자체가 ‘제도주의자’로 채워져 있었을 뿐만 아니라(실제로 규제와 조세로 부동산 억제가 가능하다고 본 것 같다), 당 내에서도 박원순 서울시장등 민주당 출신 지자체장들은 주택 공급 확대에 유보적이었기 때문이다(즉, 중앙정부와 지방 정부 사이에 부동산 정책에 대한 이해가 달랐다).

이것이 바로 윤석렬이 대선에서 승리한 직접적인 원인이었다. 선거 직전의 조국 사태는 그저 도덕적 핑계에 지나지 않았고, 윤석렬이 손바닥에 임금 王이 아니라 日王이라고 쓰고 나왔어도 당선되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었을 것이다. 수도권에서의 막판 지지표(이른바 숨은 보수표)는 그렇게 나왔다.

그리고 이번 22대 국회의원 총선거 역시 숨은 카드는 ‘부동산’이었다. 이를 rentier class politics (토지자산계급정치)라고 칭하기로 한다. 그리고 이 결정의 정치적 희생타는 부동산정책으로 영향받는 물가와 임대료의 교차지점에 서 있는 자영업자들이었고, 그들이 짊어질 경제적 운명이었다. 그 결과는 바로 4.10 총선으로 드러났다. 이것이 선거의 정치경제학이다. 2024년 22대 총선 결과를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자영업의 침체는 22대 총선에 강력한 영향을 미쳤다. 출처 : 국민일보 행정안전부에 따르면 지난해 일반음식점·휴게음식점 등 전국 외식업 폐업률은 10.0%에 달했다. 전년 대비 1.2%포인트 증가한 수치로, 폐업률이 10%대를 기록한 것은 지난 2005년 이후 처음이다.
자영업의 침체는 22대 총선에 강력한 영향을 미쳤다. 출처: 국민일보.  행정안전부에 따르면 지난해 일반음식점·휴게음식점 등 전국 외식업 폐업률은 10.0%에 달했다. 전년 대비 1.2%포인트 증가한 수치로, 폐업률이 10%대를 기록한 것은 지난 2005년 이후 처음이다.


2. 선거와 계급

2024년 22대 국회의원 선거는 두 가지를 묻는 자리였다. 하나는 아직도 2022년 대선 구도(즉 rentier class politics)이 유효한지, 그리고 보다 크게는 현재의 헌법(이른바 87년 체제)가 지속 가능한 것인지를 묻는 자리였다.

누가 지지했는가?

위에서 언급한 경제적 조건과 이에 대응하는 정부의 정책을 다시 보자. 현 정권 하에서 가장 손해를 보는 계급은 자영업자다. 이들은 어떻게 행동했을까? 조국혁신당으로 갔다. 조국혁신당의 핵심 지지층은 자영업자와 사무전문직 노동자, 세대별로는 40-50대다(그리고 남성). 왜 쁘띠부르조아인 자영업자들이 여하튼 제도정당들중에서 가장 ‘좌파적(?)’인 조국혁신당을 지지했을까? 

지난 3월 30일에서 4월 2일까지 KBS의 의뢰로 한국리서치가 5,000명을 대상으로 수행한 전화면접 여론조사에 따르면 전체 응답자의 24%가 조국혁신당을 지지한다고 대답했다(더불어민주연합은 17%, 국민의 미래는 28%). 연령별로는 50대가 36%로 가장 높았고, 그 다음이 35%로 40대가 차지했다. 

흥미로운 것은 직업군에 의한 분류다. 자신의 직업을 자영업이라고 대답한 응답자의 28%가 조국혁신당에 투표하겠다고 대답했다. 자영업자 가운데 국민의 미래 지지자는 32%, 더불어민주연합은 17%였다. 이 수치는 자신이 화이트칼라라고 대답한 응답자 가운데 29%가 조국혁신당에 투표하겠다고 답한 것에 이어, 모든 직군 중에서 두번째로 높은 비율이다. 블루칼라(육체노동자) 21%보다도 훨씬 높다. 또한 자신이 경제적으로 상위 계층에 속한다고 답한 응답자들의 조국혁신당 지지비율이 중위계층이나 하위계층 소속자들의 지지비율보다 높았다. 

또 윤석렬 대통령 직무수행도에 대한 평가에서도 “매우 잘못하고 있다”고 대답한 비율이 자영업자 가운데 49%나 되었다. 이는 화이트칼라 직군의 52%에 이어 두번째로 높은 비율이며, 블루칼라의 43%보다도 높다(이 조사는 표본수가 5,000명으로 일반적인 여론조사 모집단 1,000명에 비해 훨씬 많으며 전화면접방식으로 수행되었기 때문에 신뢰성이 높은 편이다.)

또다른 여론조사결과인 캐이스탯리서치와 코리아리서치 공동조사인 NBS 전국지표를 봐도 윤석렬 대통령에 대한 지지도를 묻는 설문조사에서 ‘매우 잘못하고 있다’와 ‘잘 못하는 편이다’는 응답의 비율이 대략 7:3에 해당한다, 그냥 잘못하는 정도가 아니라, 도저히 더 이상 참을 수 없을 정도라는 대답이 압도적이다. 그리고 이 여론조사에서 이 비율이 가장 높은 직업집단은 자영업자와 사무전문직 노동자다. 이들은 전통적인 ‘정권에 대한 견제’로는 만족하지 못한다. 만족하지 못한다기보다는 윤석렬 정권이 계속되었다가는 자신들의 존재 기반이 무너질 것이라고 판단한다. 따라서 가장 강력하고 확실하게 현 정권을 제거할 것이라고 기대되는 집단인 조국혁신당에 지지를 보냈다. 즉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투표했다.

조국혁신당은 선거 기간 내내 ‘권력구조 개편’에 집중했으며, “3년은 너무 길다”라는 구호로 자신들의 정체성을 요약했다. 투표 직전 사회적 연대 임금제로 약간의 소동은 있었지만, 조국혁신당을 구성하고 있는 인물들은 사실 ‘좌파적’이라기 보다는 대중에게 ‘확실히 개혁적인, 또는 ’분명히 현재 권력을 바꿀 세력’으로 인식되었다. 따라서 이 당은 쁘띠부르조아나 상층 노동자에게 전혀 ‘반자본주의적’으로 비춰지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들의 자본주의적 이해관계를 지켜주거나 다시 살려낼 정당 제 1후보로 비춰졌을 것이다. 그 당의 간판인 전 법무부장관 조국이 이전 80년대에 사노맹(NLPDR 노선) 출신이라는 것은 지지자들에게도, 그를 ‘빨갱이’라고 공격한 국민의 힘 추종자들에게도, 그리고 조국 자신에게도 잊혀진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이미 다른 출신이 되었다. 단 서울대 법대 출신이라는 것빼고.

토지자산계급(rentier class)의 분화

그럼 토지자산계급(rentier class)는 어디로 사라졌을까? 아니다. 그들은 여전히 유효하며, 심지어는 더욱 유효하다. 다만 그들은 분화되었다. 서울에서 국민의 힘의 의석수 확대는 전적으로 이들(아파트 소유자)의 덕이라고 할 수 있다. 비록 표면적으로는 경기도에서 민주당이 압승한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 내역을 보면 득표율 차이는 지난 2020년 총선에 비해 크게 줄어들었다. 그리고 이는 부동산 가격 상승폭이 클수록, 또는 고가 주택이 많을수록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런데 그 구성 성분이 특이하다. 흔히 생각되는 것과는 달리, 국민의 힘의 가장 열렬한 지지층은 60대 여성이다. 이들은 자고 깨면 이른바 틀튜브(노인 대상 극우 유튜브)라고 조롱받는 70대 이상 남성층보다도 보수적이며, 모든 연령대와 세대에 있어서 가장 반 민주당 성향을 지니고 있다. 이는 한국 사회에서 구세대가 갖는 부 축적 과정과 의사결정 과정의 특수성에 기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rentier class의 분화가 가장 뚜렷하게 드러난 곳은 서울의 마포와 동작, 그리고 매우 역설적이게도 개혁신당의 이준석이 승리한 동탄 지역이다. 여론조사에서 윤석렬에 대한 평가가 60:35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들 지역에서는 5% 이상의 차이로 국민의 힘 후보가 승리했으며 이 격차는 지난 20년 총선보다도 더 크다. 이 차이에 대한 가능한 유일한 설명은 20년보다 주택 소유자의 보수적 성향이 강화되었으며(실제로 윤 정권하에서 가장 큰 수혜자이다), 더 적극적으로 투표에 참여했다는 것이다.

이준석 신당(개혁신당)은 rentier class의 또 다른 가지라고 할 수 있다. 이준석 승리에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은 동탄을 선거에서 고가 아파트(대략 시가 7억 이상) 지역에서의 몰표였다. 현대자동차 사장 출신이자 한때의 학생운동권이었던 민주당 공영운 후보가 선거 운동을 잘하지 못한 탓도 있지만, 민주당 지지도가 60%가 넘는 지역에서 이준석이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고가 아파트 소유자의 이해를 확실하게 대변해 줄 것이라는 믿음을 주었기 때문이었다. 반면 국민의 힘 후보는 중간 가격 아파트 단지에서만 지지율이 높았다.

이같은 현상은 단지 동탄만이 아니다. 개혁신당의 비례대표 득표율을 보면, 강남 서초 용산 송파 등 고가 아파트 밀집 지역에서 다른 곳에 비해 훨씬 높게 나타난다. 이는 윤정권에 실망한 고가 주택 소유자들이 개혁신당을 대안으로 삼았다는 뜻으로 풀이할 수 있다. 다만, 이들의 득표율이 그다지 높지 않은 것은 이들이 세대적으로 아직 고가 주택을 소유하기에는 부의 축적이 쉽지 않은 젊은층이기 때문이다. 즉, 이준석의 지지층은 온라인상의 떠돌이 이빨꾼들이 아니라, 부잣집 아들들이다(성별로도 남성들이 압도적이다).

그의 행적과 지지층을 보면 결국 이준석은 박근혜의 아들로 시작해서 파양했다가 다시 이명박의 사위로 재입적한 셈이다. 따라서 이준석당의 국회 입성은 양당제의 폐해 때문도 아니고, 가치의 다양성에 대한 옹호 때문도 아니며, 심지어는 성별 갈등의 소산조차도 아니다. 즉 그들이 여태껏 주장했던 제3당의 가능성 때문이 아니라, 윤 정권이 기존의 자신의 지지기반을 제대로 흡수하지 못했기 때문에 생긴 자체 분화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개혁신당은 다시 국민의 힘으로 돌아가거나 혹은 국민의 힘 내부의 반대파(예컨대 홍준표)들과 연합하여 외부에서 국민의 힘을 재공략하는 스탠스를 취할 것이다.

정치의 사법화, 정치의 실종

그렇다면 왜 윤정권은 자신이 대선에서 얻었던 지지기반을 유지하지 못했을까? 두 가지 요인이 있다. 하나는 정치적인 것이다. 기본적으로 윤 정권은 사법정권이다. 따라서 정치를 사법화한다. 따라서 정치적 공간을 법정화하며, 심판의 장으로 만든다. 윤정권의 탄생 배경(조국 사태)이 그했기 때문에, 이는 단지 주체 구성(검찰 정권)의 한계일뿐만 아니라, 이들의 이념 사고방식 행동방식까지도 지배하는 기본 원칙이다.

문제는 정치가 사법화되면, 승자와 패자(유죄와 무죄)가 나눠지고 법이 정치화되며 정치적 유연성(이른바 ‘협치’)은 감소한다는 것이다. 즉, ‘독단’이 불가피하게 뒤따른다. 여기에 사법 주체들의 실무 능력의 한계가 겹쳐지면(이른바 무능), 정권이 정치력을 발휘할 수 있는 한계가 크게 줄어들고 만다. 이런 난관에 부닥치면 사법정권은 오히려 자신의 사법성을 더욱 강화시키는 경향이 발생하는데, ‘설득’이 아니라, 위협과 억압으로 정치를 수행하며 이는 기존 지지층마저 배제시키는 효과를 낳는다.

윤 정권의 부동산 정책을 보자. 윤 정권은 부동산 규제를 완화하고 세금을 감면하여 기존 rentier class의 이해에 부응했다. 문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 값 하락을 막지는 못했으며 이자 부담을 줄이지도 못했다는 것이다. 즉, 부족했다. 그렇다면 다른 방도가 있었을까? 없다. 문제는 없다는 것을 설득할 도리는 없다는데 있다. 이들이 주택 가격 하락에 속수무책이라는 것이 드러나는 순간 윤 정권의 수명은 끝난다. 이들이 사법화한 정치는 다시 자신들에게 되돌려지며, 심판했던 자들이 심판대에 오르게 된다.

만일 윤 정권이 주택 가격을 지지, 부양하기를 정말로 원한다면, 이들은 금융시장을 완전 통제하고 내수 산업자본과 싸워야 할 것이다. 즉, 토지자산가들을 위해서 금융 자본이나 산업 자본 분파와 대립해야만 한다. 역사적으로는 파시즘이 이런 노선을 취하기는 했다. 역설적으로 만일 윤 정권이 노골적으로 파시즘 노선을 취한다면 rentier class는 전폭적인 지지를 보낼 것이다(말로는 반대하는 척 하더라도).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이들은 자신들의 이해를 관철해줄 다른 세력을 찾는다. 그리고 이 분열은 사법정치를 다시 사법 심판대로 올려 놓게된다. 

분배와 노동이 없는 정권심판

그럼 민주당은 무엇을 했을까? 여론조사에서 윤석렬 정권의 지지도는 35-40%를 거의 넘지 못했다. 반면에 정권 반대 세력은 55-60%를 넘나들었다. 그런데 총선 득표율은 비례대표 투표의 경우에는 민주당과 조국혁신당을 합쳐서 50%였으며, 지역구 득표율은 49(민주당):45(국민의 힘)로 좁혀졌다. 지난 20년 총선의 49:41에 비해 크게 그 격차가 줄어든 것이다. 즉, 민주당은 ‘정권 심판’이라는 프레임을 만들기는 했지만, 이를 ‘표’로 모두 연결시키지는 못했다. 여기에도 숨은 사정이 존재한다.

하나는 이른바 ‘샤이 보수’다. 적어도 3-5% 가량의 샤이(shy: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보수가 존재했으며, 이들은 투표장에 나왔다. 문제는 왜 샤이 보수가 존재하는가이다. 미국의 예를 본다면, 지난 2016년 대선에서 트럼프 지지자들이 샤이 보수였다. 이 때문에 여론조사가 곤욕을 치뤘다. 왜 트럼프 지지자들은 ‘샤이’였을까? 투표 한 달 전인 2016년 10월 초 뉴욕타임즈의 르포기사가 시사적으로 그 대답을 해준다. 스윙스테이트 중의 하나였던 펜실베니아주의 보수적 기독교가 압도적인 소도시의 투표자 성향 르포기사에서 트럼프 지지자인 독실한 침례교도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여기 주민들은 도덕적인 사람들이다. 우리도 트럼프가 도덕적이지 않으며, 무슨 짓이든 할 인물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반대로 바로 그 때문에 우리는 트럼프를 지지하는 것이다. 트럼프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우리를 위해서 해 줄 것이다”.

한국의 ‘샤이’도 동일하다. 정권이 제정신이고 이성적이라서가 아니라, 비이성적이고 비도덕적이기 때문에, 따라서 물불 안가리고 자신들의 이해 관계를 관철해줄 것이기 때문에 지지한다. 즉, 비합리적일수록 지지한다. 그런 점에서 이번 총선은(이미 지난 2012년 대선에서도 그 경향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당파적이며, 계급적이었으며, 자신들이 이해에 충실했다. 노동계급만 제외하고는.

윤석렬은 어떻게 대선에서 승리했는가? 손바닥에 임금 王자를 쓰고 나타났기 때문이다. 한동훈은 어떻게해서 35:60이라는 정권 심판 구도 속에서 108석을 얻어냈는가(심지어는 득표율은 지난 2020년 총선보다 높아졌는가)? 선거 막판에 모든 것 다 버리고, 온갖 상소리를 다 했기 때문이다. 비판자들에게 ‘저거 미친 놈 아냐?’라는 조롱을 들을수록 지지자들에게는 안심이 된다. 베버는 권력에서 이같은 효과를 ‘카리스마’라고 불렀다.

민주당의 선거전략에는 특이한 점이 존재한다. 선거 프레임을 ‘정권 심판’으로 정하기는 했는데, 그 구체적인 내용이 없었다. 오히려 가장 크게 역할을 한 것은 윤석렬 스스로가 만든 ‘대파 파동’이었다. 이 사건으로 ‘인플레’, 즉 경제 문제(이른바 민생)가 이슈가 되었다. 왜 민주당은 경제 문제 특히 인플레와 주택 문제를 본격적으로 거론하지 못했을까? 민주당은 ‘정의’, ‘심판’, ‘검찰 독재’와 같은 추상적인 구호에만 머물렀을까? 

민주당의 계급적 이념은 1997년 김대중 이래 글로벌리즘, 신자유주의를 옹호하면서 동시에 이같은 정책의 여파로 탈락한 계층들에 대한 ‘분배적 정의’를 모토로 한다. 따라서 부동산을 제외하고는 근본 문제에 있어서 국민의힘과 이념상 차이를 찾기는 힘들다. 민주당 역시 대자본을 비롯한 산업자본 분파를 대변하며, 부분적으로는 미중 대립 속에서 균형에, 그리고 금융시장에 있어서는 재정의 확대적 역할에 동의하는 한 전혀 손을 대려하지 않는다. 따라서 민주당이 금리나 부동산 문제를 정치적 이슈로 끄집어내어 그 손익을 대중에게 설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는 그들의 이념에도 반할 뿐만 아니라(이미 ‘중도, 협치’를 대변하는 김부겸을 선대위원장으로 할 때 드러난 것이다), 대중들에게도 수용되지 않는다(한국은 압도적으로 부동산 자산가 계급, 혹은 이 계급에 편입되기를 원하는 차하층이 많다). 선거 과정에서 ‘경제’에 관한 내용은 이재명 총재가 중간에 잠깐 ‘25만원 전국민 지원금’을 내비친 것 이외에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았다. 즉 민주당은 계급적일수도 없었으며, 계급적이지도 못했다. 민주당이 내세울 수 있는 것은 ‘행정적 실무 능력’과 ‘정치의 복원’(이를 위해 정치적 심판은 조국혁신당에 넘겼다)이었으며, 민주당이 ‘정치적’인 만큼, 지지율은 줄어들었다. 이재명이 선거 유세 과정에서 6번이나 찾아갔던 동작을(8% 포인트차로 나경원 승리)의 결과가 이를 말해준다.

22대 총선 결과 더불어민주당이 과반수를 넘어 1당 자리를 차지했다. 출처 : BBC News 코리아
22대 총선 결과 더불어민주당이 과반수를 넘어 1당 자리를 차지했다. 출처 : BBC News 코리아

 

누가 승리했는가?

그러므로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자. 누가 승리했는가?

윤석렬은 패배했다. 왜냐하면 자신의 대선 당시 지지기반에 이반이 발생했고, 180석의 패스트 트랙도 막지 못했으며, 자신을 심판하겠다고 달려드는 세력이 돌풍을 일으켰다. 
한동훈은 패배했다. 왜냐하면 이 정치의 사법화의 주역으로서 그는 소수파로 법정에 오르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재명은 패배했다. 그는 60:35라는 구도 하에서도 완벽한 승리를 거머쥐지 못했으며 아무런 미래도 제시하지 못했다. 
조국도 패배했다. 그가 원하는 200석은 주어지지 않았다. 게다가 그는 자신이 원치 않았을지도 모르는, 급진화된 쁘띠부르조아를 자신의지지 세력의 한 축으로 삼게 되었다. 급진화된 쁘띠부르조아는 혁명화된 프롤레타리아보다 훨씬 무섭다. 훨씬 파괴적이며, 어디로 튈지 모른다. 
이준석은 패배했다. 그가 내세웠던 세대론은 소멸되었으며, 화려한 의회 입성과는 달리, 고작해야 부잣집 아들 정당이라는 좁은 틀에 갇혀버렸다. 
녹색정의당은 패배했다. 사회적 이해관계의 선거에서 정의나 기후, LGBTQ와 같은 추상적 가치들은 설 자리가 없다. 녹색정의당이 ‘누구’의 이해를 대변하는지는 아마 당원들조차도 모를 것이다. 
자유통일당(전광훈)도 패배했다. 단지 과시가 목적이 아니라면, 한 석이라도 건지거나 혹은 국민의 힘과 타협했어야 했다. 그냥 힘 자랑하는 동네 노인네 집단에 불과하다.

선거의 결과는 모두가 실패했다는 것이다. 승자가 없기 때문에 이들은 협력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지금 한국 사회가 직면한 것은 어느 한 계급의 위기가 아니라, 지난 30 여 년간 작동했던 체제가 더 이상 효율적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번 총선은 이들의 세력 구도를 바꾸지 못했으며 사법화된 대통령 권력과 의회 권력 사이의 대립 속에서 ‘합의’를 보지 못한다면 이 체제를 안정적으로 지속하기 힘들 것이다. ‘개헌론’, 즉 ‘87년 체제의 폐기’ 가능성은 여기에서 나온다. 

그리고 가장 큰 실패는 아무런 목소리도, 대변자도, 미래도 제시하지 못한 노동자 계급이다. 그들은 자본가 분파들 사이의 대립에 그저 포섭(co-opt)되었을 뿐이며, 민주주의가 옆 집 잔치라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한 채로 끝났다. 

승리한 것은 오직 ‘민주주의’, 또는 ‘주권자’라는 공허한 구호들이며, 이마저도 아마도 조금만 힘을 주면 바스라질만큼 허약하다. 선거는 민주주의의 꽃이다. 잔치는 끝났다. 설거지는 누가 할 것인가.

댓글 남기기

Social media & sharing icons powered by UltimatelySocial
Scroll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