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와노동 연구소

건국(建國)과 광복(光復)과 국가보안법- 대한민국 국가의 기원은 계속 질문해야한다

건국(建國)과 광복(光復)과 국가보안법

- 대한민국 국가의 기원은 계속 질문해야한다

2024년 8월 22일 / 권영숙의 낯선 새로움
권영숙 민주주의와노동연구소 소장

건국절, 광복절, 국가보안법,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이승만, 뉴라이트, 자유주의 역사관 

한국은 일본 제국주의 치하 식민지에서 해방되자. 관청에 일장기를 내리고 성조기를 올렸다. 그리고 1948년 8월15일 정부 수립을 선언하고 태극기를 올렸다. 이 3개 국기들의 순서가 그러하다. 일장기-성조기-태극기 순이다(그런데 이 삼국기가 ’광복‘ 100주년을 훌쩍 넘어선 21세기 현대 한국의 극우세력 집회에 그대로 나란히 등장하여 휘날리고 있다).

그러니 그것을 과연 ‘광복’이라고 할 수 있을까. 최근 한국일보의 컬럼(필자 김영민)처럼 재해석한다고 해도 말이다. 
그 글은 ‘광복’이란, 빛을 회복했다라는 강한 뜻이 아니며 여기서 ‘광’은 수식어로 해석하여 영광스럽게 회복하였다라는 의미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렇게 광복이란 한자를 뜻풀이하는 것은 그닥 새로운 것은 아니다. 그렇게 해석해왔다. 문제는 그가 제기한대로 이 ‘광복에서 목적어가 빠진 것이고 심지어 주어도 빠진 점이다. 무엇을 회복하였는가 혹은 어떻게 영광을 만들었는가이다 (정치외교학자가 이렇게 한자 뜻풀이만 하고 마는 것은 좀 지적인 게으름이 아닌가라는 느낌을 받았다)

그렇다면 과연 그 때 거리로 쏟아졌던 민중은 과연 단지 일제로부터 독립을 의미하는 ‘광복’에만 환호했을까? 그들은 동시에 멸망한 대한제국을 넘어서는 새로운 국가의 ‘건준’을 기대하고 고대하며 설레임으로 환호한 것은 아니었을까? 그 환호와 설레임의 복합적인 측면과 그것이 어떻게 이후 전개되었는가가 바로 ’영광스럽게 회복하다‘의 의미를 구체화하는 것일 것이다.

하지만 ‘해방'(혹은 독립) 이후 현대사, 대한민국의 ‘건국’의 역사는 민중적인 건준과는 거리가 멀었다. 심지어 1945년 일본의 전쟁패배와 항복으로 조선은 ’독립‘하지도 ’해방‘되지도 못했다. 3년간의 점령군 통치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를 ’해방정국‘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국내 양대 건준 세력은 경쟁하기도 했지만 담합하고 음모에 동참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처음에 ‘건준’이라는 약칭으로 불리며 실제적인 ‘건준’을 준비했던 ‘조선건국준비위원회(朝鮮建國準備委員會)라는 건준 세력은 처절하게 지워졌다. 또한 박헌영등 좌파가 주도한 ‘인민공화국(인공)’ 수립도 탄압으로 절멸시켰다. 미군정 통치를 지나가면서 국가를 건설할 준비세력이 갑자기 달라진 것이다. 이 과정에서 김구는 처음에는 이승만과 입장을 같이 했고, 여운형은 남북 통일(단일국가 수립)을 위해서 인공을 해산할 의도가 있다고 밝혔다. 이리하여 광복도 건준도 모호해졌다.

 

1945년 8월15일 일본의 항복선언 다음날인 8월16일 거리로 쏟아져 나와 환호하는 조선의 민중들
1945년 8월15일 일본의 항복선언 다음날인 8월16일 거리로 쏟아져 나와 환호하는 조선의 민중들

이 과정을 극명하게 드러내며 대표하는 것이 바로 1948년 5월 제헌헌법 제정이후 같은해 12월에 이뤄진 국가보안법의 제정 과정이다.  국가보안법은 ‘국헌(國憲)을 위배하여 정부를 참칭(僭稱)하거나 그것에 부수하여 국가를 변란할 목적으로 결사 또는 집단을 구성한 자’에 대해서 최고 무기징역의 형벌을 가하는 등 10개조로 구성된 법률로 제정되었다.

대한민국의 국가건설이든 정부수립이든간에, 당시 이승만세력과 자유주의세력은 모두 자유민주주의를 지향했고, 그것은 미국 주도의 반공체제 내에서 제도화되었다. 즉 냉전체제의 제도화로서 ’48년체제’의 시작이다. 제헌헌법이 일부 ‘사민주의적’ 성격을 띠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현실과 큰 괴리를 빚어낼 수 밖에 없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현실에서는 좌파적인 민중적인, 사민주의적인 요구는 철저히 무시되고 탄압당하고 절멸시킨 과정이 시작되었다. 그를 뒷받침한 것이 국가보안법의 제정이었다. 고로 많은 정치학자들이 인정하듯이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이념과 기초를 담은 것은 헌법이 아니라, 혹은 헌법과 동시에 국가보안법이었다. 즉 실제로 남한의 정체(polity)를 규정한 것은 후자인 국가보안법이었다.

한편으로 대한민국이 1948년에 건국되었다는 건국론이든, 다른한편으로 대한민국이 1919년 발족한 상해 임시정부의 법통을 이을 뿐 아니라 임시정부만이 ‘해방된 국가’의 유일한 전신이라고 규정하며 그 연도를 ‘국가’의 기원 연도로 삼든간에, 이들 양대 세력. 즉 전자의 친미 친일 우파 부역 지주들의 한독당과, 후자의 한민당등의 자유주의 세력은 국가보안법을 입법하고 대한민국의 국가보안법 체제화를 용인하기로 했다. 그것은  당시 해방정국에서 가장 민중적 대중적 지지를 받던 좌파적인 ‘인민민주공화국’의 건준에 반대하는 일치된 행보였고, 정확히 민중적 건준에 대해서 등을 돌리는 과정이었다.

그 점에서 현재의 건국절론과 광복절론은 둘 다 문제를 안고 있다. 건국절론이 논리적으로 역사적으로 자기오류를 내장하고 있다면, 광복절론은 건국절론에 대해 ’역사부정‘이라고 맹렬히 비판하지만, 이들의 논리 역시 마찬가지로 한국 현대사의 일부 측면에 대한 ’역사 부정‘에 암암리에 동참하는 지점이 있다. 예를 들어 이들 광복절론자들은  좌파 무장투쟁세력의 존재, 임시정부 외부의 세력에 대한 평가에 있어서 모호한 입장을 보인다. 설사 1948년 8월15일, 날자도 같은 날에 ‘정부 수립’이 선언었으므로 이런 차원에서 8.15 광복절을 국가 건국이 아닌 ‘정부 수립’일이라고 인정하는 견해 역시 한국 현대사 전체를 포괄하기에는 문제적이다. 이제 이에 대해서 살펴보자. 

먼저 건국절론은 임시정부등 독립운동의 ‘국가적 기원’을 무시한다. 그런 점에서 ’역사 부정‘이 맞다. 이들을 한국적 ‘뉴라이트’라고 칭할 수도 있겠다(서구의 ’뉴라이트‘와 여러 면에서 다르기도 하다 서구의 뉴라이트가 사회경제체제 및 국가의 성격을 문제삼는다면 한국의 뉴라이트 주장은 ‘건국’론에 매몰돼있다). 그들이 ’건국의 국부‘로 숭상하기도 하는 이승만은 임시정부의 한 파벌이었고 그러면서 미국을 등에 엎고 ‘국부’가 된 이이다. 그렇게 이승만은 대한민국 초대 국회의장이 되었다. 그리고 1948년 5월31일 열린 초대 국회 개원식에서 국회의장 이승만은 1948년을 ’대한민국 건국 30년‘이라고 공개적으로 말하면서 1919년 임시정부를 대한민국의 시작이라고 못박기도 했다.

게다가 대한민국 제헌의회의 수립은 어떻께 이뤄졌는가. 미군정이 귀국한 이승만등 우파 임시정세력과 야합하면서 1948년 5.10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총선거를 일방적으로 진행하였고, 남북한 단일국가 건설을 요구한 건준 좌파와 중도파의 요구를 묵살하여 가능했다. 이 과정에서 미군정은 남한 ’우익‘ 민병대들과 합세하여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제헌의회 선거 실시에 항의하는 제주 도민들을 총칼로 짓밟으며 4.3 제주항쟁을 피비린내 나는 학살로 진압했다. 그리고 1948년 5월10일 총선거 결과를 근거로 8월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선언했다. 

5.10 단독정부수립 총선거 벽보. 남북한 단일국가 건설을 요구한 건준 좌파와 중도파의 요구를 묵살하고, 미군정과 남한 ’우익‘들이 단독정부 수립에 항의하는 제주 도민들을 총칼로 짓밟으며 4.3 제주항쟁과 학살이 일어난 가운데 1948년 5월10일 총선거를 거치고 8월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선언했다. 초대 국회의장은 이승만이었다.
5.10 단독정부수립 총선거 벽보. 단독정부 수립에 항의하는 제주 도민들을 총칼로 짓밟으며 1948년 5월10일 총선거를 거치고 8월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선언했다. 초대 국회의장은 이승만이었다.

이런 점에서 건국론자들 역시 일률적이거나 똑같지 않다. 그들간에 분기가 이뤄진 이유다. 예컨대 80년 전두환 쿠데타를 인정하였고, 바로 쿠데타세력에 의해서 세워진 국보위의 일원이었고, 이후에 민정당 민자당의 당 요직을 두루 거친 이종찬이 현 광복회장인 이유이기도 하다. 우파 독립운동을 했던 부친을 두었다는 이유로 현 광복회장인 그가 이번 815 ’광복절‘에 현정부가 주최하는 행사와 별도의 기념행사를 열면서 윤석열 정부에 대해서 ’친일‘적이라고 비판하는 것은, 참으로 역사의 괴이함을 느끼게 만든 순간이기도 했다. 적어도 80년과 그이후 80년대 이종찬의 모습을 기억하는 사람들이라면 그러리라. 

하지만 동시에 이는 역사적인 사실을 증거하기도 한다. 임시정부는 그렇게 좌파라기보다는 우파적인 국가의 기원에 가깝다는 사실 말이다. 일제하에서 임시정부가 모든 독립운동 혹은 민족해방운동을 포괄한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 말이다. 그것 역시 부정할 수 없는 한국 현대사의 ’기원‘이기도 하다. 그 점에서 임시정부의 법통과 임시정부를 대한민국의 유일한 국가의 기원으로 삼는 것 역시 신중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1948년 ‘건준’론의 반대편에서 이에 대해서 기를 쓰고 비판하며, 한국의 국가적 정통성과 기원이 임시정부에 있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과연 ‘독립운동’의 전부를 포괄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 독립운동 중에서 가장 치열했고,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는 30년대 무단통치이후에 우파적 독립운동이 거의 명맥만 유지할 때조차, 더한 탄압을 받으면서도 활동을 멈추지 않았던, 그래서 독립 직전에는 대중적으로 더 주목받았던 좌파 독립운동은, 임시정부 안에 없었고, ‘밖’에 있었다. 그 점에서 임시정부는 다양했던 좌우 독립운동중 단지 우파적인 기원이라고 할 수 있다.
덧붙여서 과연 건준론을 비판하는 이들은 임시정부의 일원이었다는 이유로, ‘4.19 혁명’으로 하야한 이승만을 국부로 인정하는가. 혹은 이승만을 인정하듯, 우파와 자유주의 정권의 수립마다 정치적 행보를 해왔던 광복회도 당연하게 인정하는가. 이 점도 흥미로운 점이다.

하지만 가장 결정적인 쟁점, 그러나 의도적인지 아닌지 묵살되는 쟁점 하나가 더 남았다. 건준이 아니라 광복을 주장하는 이들은, 8.15의 의미를 ‘국가 건설’이 아닌 ‘정부 수립’일이라고 말한다. 3.1독립운동이 일어나고 임시정부가 세워졌던 1919년을 대한민국 국가의 기원으로 보지만,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한 날은 1948년 8월15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8.15를 정부 수립일로서 기념한다라는 논리 역시 문제를 안고 있다. 결국 이는 45년이후 3년간의 미군정체제로부터 독자적인 ‘정부’를 수립했다고 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1945년부터 1948년까지 대한민국은 ’광복‘이 아니라 미군정체제라는 또하나의 식민지 상태였다는 것이 된다. 이는 또한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인정하면서 북한을 ’반국가단체‘로 간주하는 현행 실정법인 국가보안법과도 상충하게 된다.

1948년 8월 15일 열린 대한민국 정부 수립 국민 축하식1948년 8월 15일 중앙청(구 조선총독부)에서 열린 ‘대한민국 정부수립 국민 축하식’.

결국 정부 수립을 기념한다는 논리는, 이미 국가는 임시정부로부터 법통을 이어받았을뿐 아니라 나아가 국가가 시작됐다고 보는 것이고 이에 따라 1945년 ‘광복’이후 3년간 미군정 통치의 위치는 애매해진다. 정부수립이라는 규정으로 인해 역설적으로 미군정으로부터 독자화가 희미해진다.

이것이 결국 ‘토착왜구’라는 말을 만들어내고, 일본에 대해서는 No,라고 말하지만, 미국에 대해서는 친화적이고 결국에는 No.라고 말하지 못하는,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에는 불가피한 듯 동조하면서 국내 대기업 자본주의에 영합하는 자유주의 정치의 국가관에 저변에 깔려있는 역사관이다.

그렇다면 자. 이제 다시 한번 저 첫 사진을 들여다보라. 저들의 얼굴에 환희는 과연 무엇에 대한 즐거움이자 무엇을 향한 설레임이었을까? 그리고 그것을 송두리째 부수고, 현재의 대한민국이라는 공화국을 만드는데 합의를 한 이들은 누구일까? 그들이 합의한 대한민국의 모습은 1948년 헌법과 1948년 국가보안법에 걸쳐있다.

그러므로 건국도 광복도 다 담아내지 못하는 해방정국의 국가건설 혹은 정부수립에 대한 문제제기는 여전히 필요하다. 대한민국의 ’국가‘적 성격에 대한 질문도 여전히 필요하다. 대한민국은 1919년과 1948년의 한 사건과 시간으로 한정할 수 없는 국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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