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와노동 연구소

전지구적 공안정국: 공포와 검열, 공안의 가치동맹

전지구적 공안정국

: 공포와 검열, 공안의 가치동맹

2024년 8월 22일 / 글로벌 리포트
권영숙 민주주의와노동연구소 소장

    검열, 공포, 런던 백인폭동, 공안정국, 공안기법, 다원주의, 선진국 가치연합, 공조, 명백하고 현존한 위험

영국이 ‘신사의 나라’인 이유

영국의 국제문제 전문 독립 저널리스트인 리챠드 메드허스트(Richard Medhurst)는 지난 8월 17일(이 글 쓰기 5일전이다), 영국 런던 히드로우 공항의 비행기 내에서 6명의 영국 경찰에 의해 체포되었다. 그는 중동에서 영국으로 돌아가던 중이었다.
그에게 적용된 죄목은 팔레스타인(가자 지구) 문제에 대해 쓴 기사가 영국의 반테러법 12조 위반이라는 것이었다. ‘테러집단’으로 간주된 조직을 지지, 옹호하거나 또는 이들과 회동하면 최고 14년형에 처할 수 있다는 조항이다. 한국으로 치면 국가보안법 상의 ‘고무 찬양죄’ 및 ‘통신 회합죄’를 합쳐놓은 조항이라고 할 수 있다.
메드허스트는 약 24시간 동안 구금되었다가 풀려났다. 그는 구금 중에 자신이 가족과 연락하거나 변호사의 조력을 받는 것조차 거부당했다면서, 자신이 아마도 반테러법 12조를 적용해 조사받은 최초의 언론인일 것이라고 자신의 X(구 트위터) 계정을 통해 밝혔다. 이 사건은 매우 흥미롭다;  쟁점은 메드허스트의 기사가 과연 영국 정부가 규정한 ‘테러리스트 집단’(하마스)을 지지 옹호하는 것이냐 하는 문제다.

지 2023년 12월 ‘과학에서의 자기검열의 위험’ 제하의 기사 이미지<The Wire>지 2023년 12월 ‘과학에서의 자기검열의 위험’ 제하의 기사 이미지 

그렇다면 영국 정부는 무엇을 근거로 메드허스트에게 반테러법 12조를 들이댔을까? 영국 정부는 아직 아무런 공식 설명을 내놓지 않았다.  그런데 이 조항을 적용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문제가 남는다.

첫째, 전통적으로 ‘언론인’(기자)은 예외적 취급을 받았다. 왜냐하면 언론인의 활동(기사든 기사를 위한 취재 활동이든)은 ‘공익’을 위한 것이라는 대전제가 있기 때문에 설사 ‘테러리스트’들과 접촉하거나 그들의 주장을 전달하더라도 ‘위법 행위’로 간주되지 않았다. 심지어는 한국에서조차 KBS가 지난 2000년대 초반에 탈레반(미국과 영국에서 테러리스트로 공식 지정되었다)과 인터뷰한 적도 있으며, 지난 2016년에는 IS와도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그렇다면 영국 정부는 지난 백여년 간의 관례를 깨고 언론인이 ‘범죄자’와 취재를 위해 접촉하는 것을 범죄 행위로 간주하기 시작했다는 것인가. 메드허스트는 ‘독립 저널리스트’(independent journalist)다. 정해진 소속사가 없으며, 어떤 사안이 생기면 언론사들과 계약을 맺고 ‘통신사’(correspondent) 혹은 기고자(칼럼니스트)로 활동한다. 그는 알자지라와 계약을 맺고 가자 지구 관련 기사들을 내보내고 있다. 이스라엘 언론이 그를 ‘기자’가 아니라 ‘논객’이라고 표현한 것은 단순한 ‘폄하’가 아니라, 법적으로 메드허스트의 지위를 매우 애매하게 만드는 효과를 겨냥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둘째, 메드허스트의 취재 활동과 기사가 과연 ‘친 하마스’적인가 하는 점이다. 지난해 10월 봉기 이후의 그의 기사와 X 게재글을 보면, 그는 주로 이스라엘의 행위를 ‘인권적’ 관점에서 비판하는데 중심을 두고 있다. 그가 체포되기 직전인 지난 16일 게시한 X의 글을 보면, 그는 지난해 10월 7일 이후 115명의 가자 지구 영아들이 살해되었다면서 태어난지 사흘된 쌍동이 딸의 출생신고를 하러 간 사이에 이스라엘군의 폭격으로 아내와 두 딸이 죽은 남자의 소식을 전하고 있다.  즉, 메드허스트는 하마스를 명시적으로 지지하는 글을 쓰지는 않았다. 다만  이스라엘이 불법적이며 반인권적인 행위를 하고 있다고 비난한다. 

만일 그의 이같은 주장이 ‘범죄’가 된다면, 그것은 과거 5공 시절까지의 한국의 국가보안법 5조 (고무찬양죄)의 영국 버젼에 정확하게 해당한다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을 비판함으로써, ‘결과적으로’ 하마스에 유리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공안의 논법’이다. 즉, 우리 편을 비난하면 적에게 유리하기 때문에, 우리를 비판하는 모두는 적이며 따라서 범죄로 처리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냉전 시기 독일의 현대시인인 헬무트 바이센뷔탈의 표현을 빌리자면, “밤에는 모든 고양이가 다 검게 보이며”, 조금 구태의연한 한국식 표현을 빌리자면,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        

공안의 논리에 따르면, ‘우리편’의 정당성은 ‘국가’에서 찾을 수 있다: 2차 대전 이후의 역사만 슬쩍 둘러보아도, 맥카시즘 시절에는 ‘Un-American’(비미국적), 알제리 독립 전쟁 이후 위기에 처한 60년때 프랑스 드골 정권 때에는 ‘Reason D’ete’(국가의 존재 이유)였고, 지금의 이스라엘은 ‘right to exist’(국가가 존재할 권리)로 불린다. 물론 셋 다 역사적으로나 자연법적으로나 그리고 철학적으로도 근거가 없는 얘기이며, 이를 두고 논쟁해야 할만큼 인생이 길지는 않다.
물론 영국 정부가 ‘정말로’, ‘진지하게’ 메드허스트를 기소할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신사의 나라인 영국이 그런 양아치 같은 일을 할리는 없다. 단지 ‘조사’한다는 제스쳐를 보임으로써 은근히 ‘으름짱’을 놓는 효과를 노리는 것뿐이다. 이것만으로도 언론 활동은 크게 위축되며 제약받는다.

그러나 언론의 자유, 더 나아가 표현의 자유, 그리고 사상의 자유는 단지 영국에서만 숨통이 끊어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전세계적이다. 미국, 뉴질랜드, 독일, 그리고 한국등. 그 사례는 도처에서 넘쳐나고, 과거와는 유가 다르게 진행되고 있다. 그리고 국가간에 서로 익히고 배우며, 공안기술의 전파가 이뤄지고 있다.
 
미국 FBI는 그동안 미국의 우크라이나 전쟁 개입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스콧 리터(전 해병대 정보장교)의 여권을 취소하고 러시아행 비행기에서 끌어내렸으며, 그의 집을 압수 수색했다.
뉴질랜드의 법무장관은 그동안 미국이 요구해왔던 KimDotcom의 창립자에 대한 미국 송환을 승인했다(송환 거부 소송을 제기할 수 있기 때문에 실제 송환까지는 수년이 걸릴 것이다).
독일은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한 러시아의 주장에 동조했다는 이유로 자국 언론인에 대해 기소될 것이라고 직접 경고한 바 있다(그는 결국 러시아로 망명했다),

공포와 검열(Terrorizing and Censorship)

공안기관의 으름장의 효과는 단지 사상, 표현의 자유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Brownstone Institute는 지난 7월 보고서에서 현대적인 공안 기술을 분석하고 있다.
Brwonstone Institute는 매우 재미있는 think tank다. 지난 2021년 백만장자 투자자이자 자유주의 작가인 제프리 터커가 2020년 코로나 사태 이후의 lock down(사회 폐쇄)에 반대하여 세운 단체이다. 터커는 Mises Institute, 론 폴 전 공화당 상원의원 대선 캠프 등에서 일한 바 있는 고전적 자유주의자다. 흔히 오해되고 있는 것과는 달리, 미국에서 ‘자유주의’(19세기적 의미의 자유주의)의 전통을 이어받은 것은 공화당이다. 80년대 레이건 하에서 공화당이 남부 전략(southern strategy)를 내세우며 이른바 ‘전통적 가치’를 내세우며 세계화에 뒤쳐진 지역과 인민들을 재조직화하고 이를 국수주의적인 네오콘들과 연계시키기 전까지는 공화당은 심지어는 당시의 민주당보다도 더 ‘진보적’이었다. 오죽하면 60년대 흑인민권운동 시기에는 학생 운동가들 사이에서 ‘북부의 민주당과 남부의 공화당이 합당하는게 낫겠다’는 말이 돌 정도였다. 

이제 이 고전적인 자유주의자의 눈으로 본 신자유주의자들의 최종 진화 형태인 국가주의에 대한 평가를 조목 조목 들어보자. 그는 영국의 사례를 근거로 분석하고 있다

  1. 영국에서는 일상생활의 모든 국면에서 국가 후원 하의 조작이 보편화되고 있다. 건강 문제, 공중교통, TV 드라마, 혹은 국세청과의 조정에 이르기까지 인민들의 정신은 국가의 지원을 받는 테크노크라트들에 의해 심리적으로 조작되고 있다. 
  2. 영국에서의 행태과학(behavioral science)의 급격한 세력 확장은 우연이 아니다. 영국 공공건강국(현 영국 건강안전국)은 2018년 보고서에서 “행태과학과 사회과학은 대중 건강의 미래”라고 밝힌 바 있으며, 이들의 최우선 목표의 하나는 이같은 지식 기술들을 우리 조직의 주류가 되도록 만드는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3. 코로나 사태 전반에 걸쳐서, 영국 정부의 커뮤니케이션은 인플레이션 공포, 모욕주기, 희생양 만들기와 같은 심리적 전술에 의거했다. 
  4. 영국 정부가 대중들을 겁박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기준은 터무니없을 정도로 낮았다. 예컨대 2021년 1월에는 2020년 3월만큼 대중들이 코로나를 무서워하지 않기 때문에 더 강한 공포가 필요하다고 정부 보고서는 밝히고 있다.  

하지만 Brownstone Institute의 보고서에서 ‘행태주의’가 마치 이같은 사태의 주범으로 묘사한 것은 오류다. 행태주의는 원인이 아니라, 결과일 뿐이다. 50년대 후반 나타나기 시작한 행태주의는 인간이 역사의 진로를 ‘주체적으로’, 즉 자의적으로 결정할 수 있다는 ‘인간주의’ 세계관의 영향 하에서 탄생했으며, 제국이 성장하는 동안에는 ‘유효했다’. 행태주의는 path-dependent(경로 의존적) 사고를 바탕으로 한다. 어제 우리가 한 행동이 오늘 우리의 행동을 제약한다는 것이다. 다만 이 보고서가 프로파갠더가 삶의 전국면을 지배하고 있다는 관찰은 유효하며 국가가 어떤 전술을 구사하는지 포착해 낸 것은 주목할만 하다. 

공안의 논리

검열은 그 자체가 목적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검열을 한다는 사실 자체가 환기하는 특정한 사회심리적 상태를 목표로 한다. 그것이 공포이며, 겁박이다. 그리고 이같은 공포와 겁박을 지속적으로 생산해내는 체제를 ‘공안’(정국)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공안의 논리는 예나 지금이나 ‘공포’(fear) 혹은 ‘겁박’(terrorizing)에 기초한다. 그리고 겁주기를 정당화하는 수많은 장치들 – 온갖 사례들, 실제로 매우 위험한 대중적 일탈 행위 및 범죄, 프로파갠더, 그리고 행태과학을 비롯한 지식 장치들-이 동원된다. 그 폭은 일반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넓다.

프랑스를 예로 들어 보자면, 지난 7월 마크롱 대통령이 전격적으로 의회를 해산하고 총선을 실시하면서 프랑스 국채 시장이 널뛰기를 했을 때, 집권 ‘르네상스당’의 한 의원은 ”르펭의 인민전선이 선거에서 승리하면 어떤 일이 발생할지 미리 맛보기로 보여주어 대중들에게 겁을 주기 위한 것“이라고 아예 노골적으로 그 배경을 설명하기도 했다.
마찬가지로 지난 8월 중순 미국 증시가 일시적으로 급락하기 직전에 로버트 루빈 전 미국 재무장관(클린턴 행정부 당시 재무장관으로 아시아 금융 위기와 한국의 IMF 구제금융 사태의 주범이었다)이 New York Times에 기고한 칼럼에서 ”트럼프가 승리하면 증시가 폭락할 것“이라고 경고했는데, 이 역시 ‘공포의 맛뵈기’라고 할 수 있다. 아마도 트럼프가 11월 대선에서 승리한다면, 제3세계 국가의 부채 위기를 계기로 전세계적 금융 위기가 촉발될 것이다. 

당연히 모든 공안은 ‘법’과 ‘가치’의 이름으로 행해진다. 다만 그 양상은 과거의 공안정국에서조차 상상하기 힘든 것들을 포함한다. 8월 초부터 영국 런던에서 일어난 백인 청소년들이 중심이 된 반이민자 인종주의 폭동을 두고서 영국 정부는 폭동 참가자들의 ‘인종주의적 편견’을 비난하면서 몇 가지 극단적인 조치를 내놓았다. 그 중의 하나는 런던 법원 영장 담당 판사가 ”시위 과정에서 단지 주변에서 구경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체포 구금된 사람들에 대해서 보석을 허가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힌 것이다.
런던 법원 판사의 발언은 두 가지를 내포한다; 하나는 시위대 근처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체포될 수 있으며, 다른 하나는 체포되면 ‘법적으로’ 보석없이 처벌될 것이라는 점이다. 

한국에서 5공 시절에도 시위대 근처에 단지 ‘구경’하고 있다가 막무가내 체포되는 일들이 드물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법적으로’ 처벌받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기껏해야 전경버스(닭장버스)에 실려 먼 교외에 내려지거나 혹은 정말 운이 나쁘면 경범죄로 하루 이틀쯤 경찰서 유치장에 갇혀 있다 나왔다.
한국의 80년대를 능가하는 ‘법’과 ‘공안’을 2024년 영국에서 볼 수 있다는 것은 희귀한 경험이다(아마도 앞으로는 일상적인 경험이 될 것이다). 근대적 자유의 법적 출발점이 ‘인신 구속’을 둘러싼 투쟁이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영국은 근대 이전으로 씩씩하게 돌진하는 중이다. 물론 영국이 선구자인 것은 아니다. 구경꾼이 체포 구금되는 현실은 지난 2020년 캐나다의 트럭 운전사들 시위에서도 벌어졌던 일이다.   

영국 런던 사우스포트에서 발생한 백인 인종 폭동 현장에서 차량이 불타고 있다. 출처 : <Financial Times>영국 런던 사우스포트에서 발생한 백인 인종 폭동 현장에서 차량이 불타고 있다. 출처 : <Financial Times>

그리고 이건 단지 ‘현실’에서만 벌어지는 일은 아니다. 온라인 상에서 ‘눈팅’만 해도 당신은 잡혀갈 수 있다. 런던 백인 폭동 진압 담당자인 런던 경찰국장은 ”온라인 상에서 폭동에 동조하거나 선동하는 언행은 그 글의 게시자가 영국 이외에 있더라도 반드시 잡아서 처벌하겠다“고 선포했다.
만일 당신이 뉴욕에 살고 있으며, 영국 인종 폭동을 지지한다는 매우 쓸모 없는 글을 남겼다고 가정해 보자. 영국 경찰은 범죄인 인도조약을 통한 송환을 요구할지, 아니면 이스라엘 모사드가 그랬듯이, 또는 이미 미국이 지난 80년대 중반부터 중남미의 마약 단속을 이유로 그랬듯이 당신을 ‘폭동 선동혐의’로 잡아가 처벌할 수 있다. 그렇다. 아직은 단지 ‘겁’만 주는 것이다. 그러나 이게 현실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상상하면 곤란하다. 

문제는 ‘겁주기’(terrorizing)에 있다. 이를 위해서는 사건이 ‘커’야 한다. 마치 엄청난 사건이 발생한 것처럼 과장되어야 한다. 많은 영국인들이 지적하듯이, 이번 영국 인종 폭동은 지난 1981년의 흑인 청소년들이 백인 경찰에 저항해 발생한 흑인 인종폭동(런던 Brexton riots)에 비한다면 그야말로 새 발의 피에 불과한 규모였다(1981년의 폭동은 거의 무장투쟁 수준에 이르렀다). 그런데 폭동을 둘러싼 소음들은 지난 40여년 전보다 훨씬 크고 광범위해졌다. 근대적 통치 기술은 지난 수십년 동안 옷만 갈아입었을 뿐, 하나도 발전하지 않았다. 단지 그것을 경험했던 사람들이 이제는 너무 늙거나, 혹은 붕어처럼 잊었을 뿐이다.

다원성의 해체, 여기서 주체는 끝난다 

지난 7월 AP 통신은 독일 내무장관이 Compact라는 이름의 잡지를 ‘극우 극단주의 잡지‘라는 이유로 폐간시켰다고 보도했다. 낸시 패세르 내무장관은 이 잡지가 ”반유대인, 반이민 주장을 퍼뜨리고 있으며 이는 이민의 역사와 의회 민주주의 역사를 가진 독일 인민을 거스르는 것이다“고 말했다.
Compact는 독일대안당(AfD)의 외곽 기관지에 해당하는 잡지다. 이 잡지가 반유대인, 반이민자 노선인 것은 분명하지만, 이를 명분으로 언론을 폐간시킬 수 있는가는 전혀 다른 문제다.

예컨대 독일 헌법재판소는 지난 1956년 공산당을 합법화(서독 공산당은 합법화, 반면 동독 공산당에 뿌리를 둔 다른 공산당 조직은 불법화)하면서 두가지 원칙을 남겼는데, 하나는 다양성을 인정하되, 다른 하나는 민주주의에 위협이 된다면 처벌해야 한다는 것이었다(이른바 전투적 민주주의). 독일의 판례 직후에 나온 미국 연방대법원의 유명한 맥카시즘 판결(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협이 아니라면 허용되어야 한다)도 같은 맥락에 있다.

독일과 미국의 판례는 이후 서구에서 파시즘 체제의 완화에 결정적인 공헌을 한 것으로 평가된다. 그런데 여기에는 오해가 있다. 미국 연방대법의 판례에서 나타나는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clear and present danger)은 ’위험‘하지 않다는 뜻이 아니라, 그게 별 거 아니라면 허용해도 된다는 뜻일 뿐이다.
이 판례의 피고였던 미국 공산당은 그다지 위험하지 않아서, 즉 세력이 별 거 아니라서 허용되었다. 만일 공산당이 커진다면, 그 때는 위헌이 될 수 있다는 뜻이다. 그 점은 한국도 마찬가지다. 이 점에서 한국의 좌파들은 스스로 반성해야할지도 모른다. 국가보안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좌파는 여전히 혹은 80년대 전반기 이후에는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의 잠재상태에도 이르지 못했다는 점 말이다.

여하튼 미국 대법원의 판결을 기초로 이른바 ’다양성‘ 혹은 ’다원주의‘(pluralism)가 탄생했으며, 맥카시즘이 해체되었고 이 다원성의 주체가 오늘날의 identity politics의 뿌리가 되기도 했다. 즉 신자유주의의 원형인 다원주의는 위협이 제거된 채, 또는 더 이상 위협이 되지 않는다면 허용된다는 전제 아래서 출발한 것이며, 그 발전체인 신자유주의의 최종 단계에 이르자, 다시 ’위험‘한 것들을 정비하기 시작했다. 바로 이것이 현시점에서 중요한 포인트다.

오늘날 사회를 가르는 수많은 선들, 즉 성, 인종, 이민자(gender race immigrants) 등등은, 위의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이라는 공안의 기준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애당초 별 게 아니었기 때문에 즉 자본가들의 통치에 아무런 위협이 아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혹은 고의적으로 육성되었던 주체들이기도 한 것이다. 이 점은 한국의 좌파들만큼, 정체성 운동들도 숙고해봐야할 지점일 것이다.

영국 폭동진압 경찰이 런던 사우스포트에서 발생한 백인 인종폭동 현장에서 진을 치고 있다. 출처 : <Le Monde>.

그렇다면 Compact라는 잡지는 ’극단주의‘인가? 극단주의라면 검열과 폐쇄의 대상이 될 수 있는가? 이는 단지 ’기술적인‘ 문제인 것만은 아니다. 예컨대, 독일 출판사는 트럼프의 러닝 메이트가 된 JD Vance의 자서전인 <Hillibilly Elegy>의 독일어 번역판이 절판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재판을 찍지 않기로 결정했다. 이 책은 베스트 셀러였으며, 지금도 여전히 수요가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출판사는 ’극단주의적‘ 내용을 담고 있다는 이유로 이 책의 재판을 거절했다. 이는 다른 형태의 ’분서갱유‘에 해당한다. 도서관에서 아예 치워버린다든지, 혹은 판매를 국가가 금지하는 것과 같은 공식화된 방식은 아니지만 여전히 대중들은 이 책을 읽지 못하게 만드는 효과를 낸다(심지어 이 책은 한국에도 번역 출간되어 있다). Vance 부통령 후보는 극단주의자인가? 밤에는 모든 고양이는 검게 보인다.   

확실히 역사는 되풀이된다. 한번은 비극이고 한번은 희극일지, 아니면 계속 비극의 연속일지, 아니면 계속 희극뿐일지. 그것은 미확정적이다. 예를 들어 영국에서 1981년 흑인 폭동의 흑인의 자리는 이제 백인들이 차지했을 뿐이며 보수당의 대처 정권은 노동당의 스타머 정권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대처 총리가 전쟁(포클랜드 전쟁)과 공안(런던 폭동 진압과 탄광 및 항만 노조 파업 파괴)을 통해 신자유주의의 문을 열었듯이 노동당의 스타머 총리도 신공안정국을 통해 새로운 미래를 열려고 한다. 그리고 이 미래는 대처 이전으로의 회귀가 아니라, 대처가 만들어 놓은 것을 필사적으로 수호하기 위한 국가의 재충전과 재편성을 목표로 하고 있다.
또한 대처가 ‘국제적’이었듯이(영국의 대처와 미국의 레이건), 스타머도 ‘국제 공조’적이다. 이를 ‘자유민주주의 선진국의 가치 공유’(shared values)라고 그들은 나름 멋있게 부른다.  이 엄숙한 공동체적 가치 수호의 이름 아래 여론과 여론조작, 경찰과 국가의 역할은 달라지지 않았다. 기실 되풀이되는 두번째 역사는 희화적(farce)이지만, 동시에 너무도 진부하고 가학적이기도 하다.  

손에 손잡고 : 민간기업의 검열에서 국가 검열의 국제공조로

영국의 폭동 과정에서 사라진 것은 ‘불평등론’이었으며, 남은 것은 ‘공포와 검열’이었다. 지난해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앵거스 디튼(Angus Deaton)은 지난 5월 영국의 대학 졸업 미만자들의 임금이 지난 50년 동안 상승하지 않았으며, 이들 집단이 영국의 평균 수명을 3년은 낮추고 있다고 경고한 바 있다. 그는 이같은 일은 지난 100년 동안 발생한 적이 없으며, 영국은 미국의 길을 뒤따라 가고 있다고 지적했다.
디튼이 지목한 집단은 영국의 ‘중년’ 노동자들이다. 그리고 이들의 ‘자식들’이 바로 7월말부터 타오르기 시작한 런던 인종폭동의 주역이 된 백인 청소년들이다. 가난한 부모의 가난한 자식들이 벌인 소란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눈을 씻고 봐도, 최근 런던 백인 폭동의 과정에서 노동‘계급’의 ‘불평등’에 대한 언급들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폭동을 둘러싼 담론들은 거의 대부분 ‘이민자, 이슬람, 청소년 일탈’과 같은 ‘외부적 요인’에만 맞춰지고 있다. 동시에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즉 폭동을 어떻게 진압할 것인가에만 초점이 모아졌다.

지난 11일 스타머 총리는 폭동에 관한 대인민 성명서에서 거의 80% 이상을 ‘온라인 통제’에 할애했다. 온라인이 이같은 증오와 혐오, 폭동을 일으키는 온상이며, 이를 효과적으로 통제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는 전혀 새롭지 않다. 이미 이른바 ‘인터넷’이라는 것이 생긴 이래로 ‘정치적 검열’은 존재해왔다. 그러나 방식에 있어서는 새롭다. 지난해까지는, 적어도, 온라인 검열은 정부 기구와의 연계 속에서 민간 플랫폼에서 자체적으로 수행되어 왔다. 구글,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틱톡, 트위터(X)와 같은 대규모 온라인 플랫폼들은 자체적으로 검열 기구를 작동시켜왔으머, 그 과정에서 이른바 알고리듬(혹은 인공지능)을 적용시켜 왔다. 그리고 바이든 집권 이후에는 단지 민간기업에게 검열 위탁을 맡기는 것만으로는 부족해서 국가기구가 직접 검열하는 방식이 모색되어 왔다(대부분 정치적 저항으로 관철되지 못했다).

이 도식이 깨어진 것은 구체적인 계기로는 매우 역설적이게도 테슬라의 엘론 머스크가 트위터를 인수하면서부터였다. 머스크가 트위터를 인수한 뒤 30%가 넘는 인력을 집단해고하면서 밝힌 바로는 이들은 국가로부터 위탁받은 검열 업무에 종사하던 인물들이었다. 심지어는 FBI가 직접 인원을 파견하기도 했다. 그러니까 최소한 2022년까지는 국가는 검열 사실을 은폐한 채, 민간에게 아웃소싱하고 있었던 셈이다.

매우 역설적으로 대자본가이자, 자유주의자이며, 기존의 미국의 국가 관료 및 정보 산업계와는 이해관계를 달리하는 머스크는 이같은 도식을 정면으로 깨버렸다(머스크의 산업적 이해관계가 지향하는 곳이 바로 트럼프의 대외정책의 목표라고 할 수 있다).
물론 트위터가 머스크 인수 이후 ‘자유로와’졌다는 뜻은 아니다. 여전히 이유를 알 수 없는 검열은 횡행한다.  다만 그 정도가 덜해진 것도 사실이며, 그러나 언제든지 다시 민간이 주도하는 검열의 시대로 되돌아갈 수 있는 것도 분명하다. 그리고 머스크 이후 다른 플랫폼들도 검열에 대해 부담스러워하기  시작한 것도 분명하다. 결국 영국 총리 스타머의 대국민 성명서는 국가가 직접 나서기 위한 정치적 돌파구를 마련하는 계기로 작용하는 시금석이라고 할 수 있다. 

검열은 사상과 표현의 자유가 죽는 사형대이다. 그러나 검열이 부정적인(negative) 담론 형성 방식이라면, 프로파갠더(선전)와 아지테이션(선동)은 긍정적인(positive) 방식의 담론 형성을 목표로 한다. 21세기 들어 가장 널리 쓰인 방식이 이른바 댓글부대이지만, 이는 수공업적이고 비효율적이다. 보다 체계적인 접근이 필요하며, 이를 위해서는 국가가 가진 자원들을 다방면으로 동원해야 한다.

그 법적 근거가 미국에서는 개정된 Smith-Mundt Act라고 할 수 있다. 원래 이 법은 세계 제 1차 대전 직후에 미국에서 아무 상관도 없는 전쟁에 참여하여 수많은 인명이 희생되었다는 반성 아래 제정된 것이었다. 원래 Smith-Mundt Act는 미국 정부가 국민을 상대로 한 프로파갠더를 엄격하게 금지시켰다. 그리고 거의 100년 만인 지난 2013년 미국 의회는 이 법안을 수정했고 오바마 대통령이 승인했다. 이제 정부는 국민을 상대로 프로파갠더를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동일한 일이 한국에서도 벌어졌다. 지난 4월 윤석렬 대통령이 통일부에 지시한 ”대북한 간첩 책동에 대한 대비책“에 대해 통일부는 ”국민을 상대로 한 선전 교육“이라고 밝혔다. 즉, 북한을 핑계로 국민들에게 프로파갠더를 하겠다는 것이다. 프로파갠더는 단지 있는 일들을 긍정적으로 해석하는 활동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프로파갠더의 제1원칙은 목표 대상이 믿게끔 만드는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하는 것이다. 즉 허위 사실, 마타도어, 흑색선전, 왜곡 등등이 모두 포함되며 실은 이것들이 가장 중요하다. 

8월 20일 한미 합동군사훈련인 을지훈련 중 목에 ‘공산당 Out’이라고 쓴 팻말을 건 훈련 참여자가 부상자 역할을 맡아 호송되고 있다. 출처 : <한겨레신문>.  

Minority Report

스타머 영국 총리의 성명서 중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검열에 있지 않다. 그는 전혀 새로운 컨셉을 제시하고 있는데, 그것은 ‘사전 제압’(before they can even board a train)이다. 그는 온라인상의 게시글들을 통해 ‘사전에’ 위험 분자와 위험 요인들을 걸러내야 한다고 주장한다. 통상적으로 살인이나 내란과 같은 극히 일부의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범죄는 행동이다. 행동으로 옮겨져야 범죄가 구성된다. 그런데 스타머는 행동 이전의 ‘영혼’ 또는 ‘의식’을 걸러내야 한다고 주장한다. 푸코가 말한 완벽한 파높티콘의 세계가 펼져지는 것이다. 문제는 유감스럽게도, 자본주의 하의 노예들에게는 영혼이 없다는 점이다. 자본주의는 영혼없는 인간-기계를 육성하는 것을 목표로 하기 때문에, 자본이 성공할수록 영혼은 소멸되며, 따라서 걸러낼 실체가 사라진다.

스타머의 보좌관은 한 발 더 나아간다. 온라인 매체 <UnHerd>에 따르면, 스타머의 보좌관인 존 우드콕은 런던 인종폭동을 진압하기 위해 코로나 당시 행해졌던 폐쇄(lock down) 수단을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니까 통금과 이동제한, 접촉 금지를 시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드콕은 ”영국 인민들은 우리가 무슨 조치를 취하든 지지해줄 것이다“고 말했다.
여기서 질병에 대한 통제와 사회적 소요에 대한 통제를 동일한 선상에 놓고 접근하는 영국 노동당의 노선을 발견할 수 있다. 보다 고전적인 언어로는, 계엄령 때리고 총칼로 위협하는 것이다. 우드콕이 주장한 사회폐쇄와 계엄령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을까?

스타머 총리는 사전제압 이외에도 ‘공조’를 제안했다. 영국 내에서의 공조가 아니라, 국제적 공조다. 따라서 온라인상에서 불순분자, 혹은 ‘극단주의자’들을 걸러내는 작업은 단지 영국 국가기구의 소관일 뿐만 아니라, 미국 프랑스 독일 그리고 한국의 소관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이들은 가치를 공유하는 동맹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당신이 한국에서 이스라엘의 가자  지구 학살을 비판하는 글을 쓴다면, 그것이 비록 한국에서는 합법적이고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할지라도, 전세계에서 최소한 40여개국의 공안기구가 당신을 노려보고 있으며, 심지어는 당신을 잡으러 올지도 모른다. 우리는 이것을 ‘민주주의’라고 부른다. Huey Long이 말했듯이.

검열의 문제는 늘 동일하다. 누가 이 글이 ‘불온’한지, 또는 ‘위험’한지, 또는 ‘진실’(truth)인지를 결정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정부가? 학자들이? legacy media가? 인민들이? 할리웃이? 지금의 담론 체제의 균열과 그에 대한 국가의 공식적 개입(검열)의 강화는 대자본가들 사이의 대립에서 촉발되고 확산된 것들이다. 온라인 상에는 수많은 목소리들이 떠돌아 다니지만, 거기에는 아주 희미하게밖에 인민들의 목소리는 묻어있지 않으며, 그조차도 계급적이지는 않다. 누가 진실을 말할 수 있는가? 당신의 목소리는 진실인가? 모두가 미친 놈들이라면, 누가 ‘광기’를 결정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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