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2월 11일 / 연구자의 시선
글 박준성 연구위원 (역사학연구소)
1.대우조선 노동자 이석규의 죽음
2026년 1월 15일 거제도 구 옥포관광호텔 자리를 보러 갔다. 관광호텔은 물론 주위 건물들도 모두 헐고 펜스를 빙 둘러 쳤다. 연결 부위에 틈새 하나 없어 안을 들여다 볼 수 조차 없다. 옥포 네거리 근처 건물 복도로 올라가 살펴 보았다. 어디가 어딘지 짐작하기 힘들 정도로 허허벌판이 되었다. 카카오맵 ‘스카이뷰’로 보는 것이 현재 상태가 더 잘 알 수 있다.
1987년 8월 8일 거제 대우조선 노동자들은 ‘민주노조 결성, 임금인상’을 외치면서 투쟁을 시작했다. 8월 11일 노동조합을 결성하였다. 8월 20일 6차례에 걸쳐 협상을 진행한 뒤 노동조합은 14개의 합의사항을 발표했다. 노동자들은 이 합의안을 전면 거부했다. 노동조합은 22개 부서별로 1,350명을 선발하여 서울 대우본사 상경투쟁을 벌이기로 하였다. 경찰 12개 중대, 1,500여 명이 장승포에서부터 옥포까지 도로를 차단하고 노동자들에게 최루탄을 쏘아댔다. 8월 22일 옥포 사거리에서 시위를 벌이며 밤을 새운 노동자 3천여 명이 단체교섭이 진행중인 옥포관광호텔 진입을 시도하였다. 경찰서장이 “평화적 시위를 보장하겠다”고 약속했다. 조합원들은 돌멩이를 버리고 20열 종대를 갖추어 오리걸음으로 행진하였다. 언덕을 올라 옥포 관광호텔이 막 보이는 지점에서 경찰은 약속을 저버리고 최루탄과 사과탄을 난사하였다. 스물한 살 노동자 이석규가 최루탄을 맞고 쓰러졌다. 병원으로 이송 중 숨을 거두었다.
1982년에 개관한 옥포광광호텔은 대우조선이 회사 측 손님 접대와 선박 영업 마케팅 용도로 세웠다. 1987년 8월 노동자투쟁 때 노동조합이 회사측과 협상을 벌이던 곳이다. 2000년에 이름을 애드미럴 호텔로 바꿨다. 2021년 대우조선해양은 호텔을 매각하였다.
이석규 열사가 최루탄 맞고 쓰러진 장소를 알게 된 것은 1999년 10월 금속노조 역사기행 때였다. 1987년 8월 22일 그 자리에 함께 있었던 대우조선 노동자가 알려줬다. 오리걸음을 할 때 이석규는 대열 앞에서 셋째 줄에 있었다. 최루탄이 난사되는 과정에 최루탄을 맞고 쓰러졌기 때문에 꼭 집어 정확히 한 자리를 짚을 수는 없어도 어느 부근인지는 기억하고 있었다. 이제는 들어서 아는 나만큼도 이석규 열사가 쓰러진 곳을 증언해 줄 수 있는 노동자를 만나기 어렵다.
2022년 11월 18일 답사를 갔을 때 관광호텔을 철거하려고 내부 집기를 걷어내고 있던 중이었다. 그때 찍은 사진이나 그것을 바탕으로 그림을 그렸다. 의도를 가지고 찍고 그렸으니 이것도 이제는 자료가 되었다.
사진을 찍고 그림을 그린 곳이 1987년 8월 22일 대우조선의 노동자 이석규가 최루탄을 맞고 쓰러진 장소였다. 현장에 이석규 열사가 최루탄 맞고 쓰러진 곳이라는 어떤 안내 표지도 설치되지 않았다. 지금은 눈으로 어딘지 확인하기 힘든 상태로 바뀌었다. 재개발이 진행되면 지형이 바뀌면 위치를 확인하기 더 어려워질 것이다. 카카오맵 스카이뷰에 쓰러진 곳을 표시하였다.
구 옥포관광호텔과 1987년 8월 22일 대우조선 이석규 열사가 최루탄 맞고 쓰러진 곳 그림: 박준성

2.연세대학교 대학생 이한열의 죽음
1987년 7.8.9 노동자대투쟁을 대별하는 노동자가 이석규 열사라면 6월항쟁을 상징하는 인물은 연세대학교 학생 이한열이다. 이한열은 6월항쟁이 시작되기 직전 6월 9일 최루탄을 맞고 쓰러져 6월항쟁이 끝난 뒤 7월 5일 숨졌다. 이한열과 이석규는 1966년생으로 동갑이다.
2026년 1월 27일 신촌에 있는 이한열기념관을 찾아보았다. 이한열기념관은 2005년에 개관하고 2014년에 사립박물관으로 인가되었다. 이한열과 같은 해 최루탄을 맞고 숨진 이석규에 대한 흔적을 볼 수 있지 않을까하는 기대를 가지고 갔다. 3층과 4층이 전시관이다. 3층에는 2025년 6월항쟁 38주년을 맞아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시민들이 불렀던 민중가요를 소개하는 ‘광장의 노래’가 전시되고 있었다. 2025년 6월 9일부터 12월 26일까지 했던 전시인데 그대로 두고 있었다. 내가 한동안 ‘노래와 사진으로 보는 근현대사’강의를 하고 다녔기 때문에 전시된 카세트테이프, 민중가요집, 안내 설명이 모두 익숙한 내용이다. 4층이 상설전시관이다. 이한열 열사의 유품과 자료들이 보존되어 있다. 이석규 열사에 대한 기록은 없었다. 남의 집에 와서 내 물건 찾는 것 처럼 머쓱했다. 2017년의 ‘보고 싶은 얼굴 전’ 자료집에서 나규환 작가가 조각한 ‘청춘’상을 보았다. 이한열 열사와 이석규 열사가 어깨동무를 하고 구호를 외치는 모습을 조각했다. 실물은 전시되어 있지 않았다. 사진으로라도 반가웠다. 이석규 기념관이 있다면 똑 같은 조각을 한 개 더 만들어 각각 전시하면 좋겠다.
나규환 조각, ‘청춘’ 보고싶은 얼굴전, 2017
1994년 동학농민혁명 10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사발통문 작성지인 정읍시 고부면 신중리 주산마을에 무명동학농민군위령탑이 건립되었다. 5m 높이의 주탑을 1.2m의 보조탑 32개가 둘러쌓은 형태로 조성되었다. 무명 동학농민군을 되새기는 조형물로서는 전국에서 처음으로 세워진 탑이다. 가운데 주탑은 ‘無名東學農民軍慰靈塔’이라고 이름을 새긴 받침대 위 네모난 화강암 판에 쓰러진 동료를 일으켜 감싸안고 죽창 들고 외치는 농민군 모습을 얕게 파서 새겼다. 그림의 이미지는 1987년 6월 9일 최루탄을 맞고 쓰러져 피흘리는 이한열 학생을 일으켜 안은 동료가 전두환 정권을 향해 분노의 눈길로 바라보는 사진을 차용했다. 노동자들이 주축이 돼서 싸운 노동자대투쟁과 이석규 열사의 죽음에서 따왔다 이름은 있으되 역사 속에 이름남기지 못한 하층 농민들과 더 잘 매치됐을 텐데 그렇게 하지 않은 면이 아쉽다.
고부면 신중리 ‘무명동학농민군위령탑’ ⓒ박준성
거제도에 갔다 온 다음날 2026년 1월 16일 바로 연세대학교 정문 앞 이한열 열사가 최루탄 맞고 쓰러진 자리를 찾아갔다. 이석규 열사가 최루탄 맞고 쓰러진 자리에는 아무런 표지판이 없는데 비해 이한열 열사가 쓰러진 자리에는 동판이 설치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정문 앞 중간쯤이라고 짐작하고 있었는데 없다. 주차관리하는 경비원과 학생들 몇 명한테 동판이 있는 곳을 물었다. 한결같이 동판이 있다는 자체를 모른다. 정면에서 보아 왼쪽 교문 앞에서 찾았다. 동판은 이한열 피격현장을 알리는 것과 2016년 6월 9일 이한열기념사업회와 연세대학교에서 “1987년 6월 9일 오후 5시 당시 연세대 2학년이었던 이한열 열사가 최루탄을 맞고 쓰러진 이곳 유월민주항쟁의 불꽃이 피어올랐다”고 새긴 것 두 개가 이어져 있다. 이한열동산에는 여러번 갔어도 교문앞 동판은 처음 찾아보았다.
연세대학교 교문 앞 이한열 피격 현장 동판, ⓒ박준성
연세대학교 안에는 이한열동산과 이한열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기념비는 처음 1988년 9월 14일 세운 것이 손상되어 2015년 6월 9일 다시 세운 것이다. 노동자의 죽음과 대학생의 죽음은 기억과 기념에서도 차이가 많다.
연세대학교 이한열동산 이한열기념비 ⓒ박준성
3. 1988년 제1회 전태일열사정신계승 전국노동자대회와 ‘노동해방’
연세대학교에 간 김에 노천극장에도 가보았다. 노천극장에서는 1987년 7.8.9 노동자대투쟁이 마무리 된 뒤 11월 1일 ‘노동3권쟁취 및 군부독재종식을 위한 수도권노동자 결의대회’가 열렸다. 1988년 5월 1일에는 세계노동자의 날 기념 노동3권 쟁취 수도권 노동자대회가 열렸다. 이날 중심 구호는 “세계 노동자의 날 정신 계승하여 노동해방 쟁취하자!!”였다.
1988년 11월 13일에는 ‘전태일 열사 정신계승 및 노동악법 개정 전국노동자대회’가 열렸다. 매년 가을이면 열리는 노동자대회의 시작을 알리는 대회였다. 노동운동의 지향이 ‘노동해방’임을 노동자 대중 앞에 전면적으로 선언한 날이기도 했다. 대회장은 “계승하자 열사 정신! 철폐하자 노동악법” “노동운동 탄압하는 군부독재 타도하자!” “열사정신 계승하여 노동해방 쟁취하자!”는 구호로 가득 찼다. 선서식을 끝낸 뒤 노동자들 40여 명이 연단 위로 뛰어나갔다. 선봉대 노동자들과 인천 세창물산 노동자들이었다. 도루코 면도날을 손에 들고 손가락에 금을 그어 흐르는 피로 하얀 광목 위에 ‘노동해방’을 썼다. 연세대학교 노천극장 어디에도 노동자들의 노동해방 역사를 알리는 안내 표지는 찾아 볼 수 없다.
연세대학교 노천극장, 1988년 11월 13일 전태일열사정신계승 노동법개정 전국노동자대회가 열렸던 곳이다. ⓒ박준성
1970년 11월 13일 전태일 열사는 분신하면서 ‘근로자도 인간이다’고 외쳤다. 노동자의 인간선언이었다. 1970년대 민주노조운동은 생존권 확보와 함께 노동자의 자존과 존엄을 찾으려는 인간성 확보투쟁이기도 했다. 1986년 박영진 열사는 죽음을 앞두고 “노동자가 주인이 되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는 말을 유언처럼 남겼다. 이러한 노동자, 노동운동의 인식 변화와 함께 1980년대 중반부터 ‘노동해방가’가 노동자들 술자리에서 불려졌다. 간간히 구호 속에도 노동해방이 등장하였다. 1985년 민중문화연구회에서 펴낸 <<동트는 산하>>에는 ‘노동해방가’로 악보가 실려 있다. 노동해방가의 노랫말처럼 ‘강제와 감시 속에 우울하고 고통에 찬 죽음의 고역 같은 노동‘에서 해방되고, 낡은 체제를 깨부수고 새로운 세상을 이룩하려는 ’노동해방‘이라는 말이 노동자들 사이에 퍼지고 있었다. 1987년 8월 28일 이석규열사 장례행렬 때 앞에 섰던 만장이 ’고 이석규열사 노동해방투쟁의 영원한 선봉‘이었다.
이석규 열사 장례식 만장, 1987.8.28., 한길사 <한국사>20
1988년 11월 노동자대회 이전인 6월 29일 분신하여 7월 8일 운명한 광산노동자 성완희 열사의 묘비명도 ’살아오라 노동해방의 불꽃‘이라고 시작된다. 1989년 4월에는 ’노동해방문학‘이 창간되었다.
1987년 7.8.9 투쟁을 겪은 노동자들은 1988년, 1989년 투쟁의 성과를 모아 1990년 1월 22일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노협)을 만들었다. 성균관대 수원캠퍼스 대의원 대회장 벽에 “건설 전노협 쟁취 노동해방” 구호를 크게 써붙였다. ’노동자가 주인되는 노동해방’은 전노협 깃발에 쓰여진 ‘평등사회 앞당기는 전노협’과 함께 전노협을 상징하는 말로 자리를 잡았다.
대공장인데도 전노협에 가입했던 한진중공업 박창수 위원장은 끊임없는 회유와 탈퇴 공작 속에서도 “전노협이 나고 내가 전노협인데 어떻게 전노협을 탈퇴할 수 있단 말이냐”고 버텼다. 1991년 5월 6일 새벽 5시 경 경기도 안양에 있는 안양병원 뒷마당에서 의문의 주검으로 발견되었다. 60여 일 만에 장례를 치루고 7월 1일 양산 솥발산 공원묘지에 시신을 묻었다. 박창수 열사의 묘비에 새긴 묘비명이다.
“재벌의 나라에 가난한 노동자로 태어나 / 인간답게 살기를 염원하던 사람 / 폭압의 세월에 목숨바쳐 전노협을 지키고 / 죽어서도 투쟁의 깃발 놓지 않은 노동자 / 살아오라 열사여! / 천만 노동자의 가슴 속 노동해방의 불꽃으로!
1991년 7월 1일 / 전국노동조합 협의회 / 부산지역노동조합총연합 / 한진중공업 노동조합”
양산 솥발산 공원묘역, 박창수 열사 묘비 ⓒ박준성
1990년 전후해서 노동자들의 머리띠와 노래, 구호, 깃발 속에 담겨있던 ‘노동해방’은 노동운동이 나가야 할 방향이자 노동자들의 꿈이라는 공감대로 자리잡았다. 그 밑바닥에는 노동자도 인간임을 선언하고 노동자가 주인 되는 세상, 노동해방 세상을 꿈꾸었던 수 많은 노동자들의 투쟁과 죽음이 깔려 있었다.
4. 마석 모란공원 묘역 배제된 ‘노동’ 사라지는 ‘노동해방’
마석모란공원 정문을 들어가면 ‘마석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묘역’, ‘민족민주희생자묘역도’, ‘모란민주.열사음성안내시스템’ 같은 열사 묘역 안내판이 서 있다. ‘민주열사묘역’이라는 표지석도 있다. 안내판 모든 곳에 ‘노동’은 표기되지 않았다. 경기도 양주군 화도면 마석리 마석모란공원에 노동열사들이 묻히기 시작한 것은 1970년 11월 13일 전태일 열사가 분신한 뒤 11월 18일 장례식을 치르고 이곳에 묻으면서 부터였다. 그 뒤 1986년 3월 18일 경찰과 회사의 푹압에 맞서 “근로기준법 지켜라. 노동3권 보장하라”, ‘노동자가 주인이 되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고 선언하면서 분신한 박영진 열사가 묻히면서 서울 수도권 노동열사들의 묘역으로 자리잡았다.
소설가 김남일이 1989년 11월호 월간 <<말>>에 쓴 ‘노동운동의 성지 모란공원’을 보면 그때는 ‘민주, 노동열사묘역’이라고 불렀다. “입구에서 얼마 안 가 바로 목적지를 찾아냈다. ‘민주, 노동열사묘역’이라는 입간판이 초행자라도 쉽게 찾을 수 있도록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 보관된 ‘마석모란공원묘지 민주노동열사묘역에 안치된 열사’ 자료에는 천세용 열사가 묻힌 1991년에도 ‘민주노동열사묘역’이라고 불렀다.
그 뒤 언제부터 민주노동열사묘역에서 노동이 사라졌는지 정확하게 모르겠다. 묘소 안내판들을 지나 들어가면 1997년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에서 세운 ’모란공원 민주열사추모비‘가 있다. 추모비에 노동이 빠졌다. 그렇다고 그 뒤에 일반적으로 민주열사묘역이라고 표기한 것은 아니다. 1999년 3월 18일 계훈제 선생 장례식 때 장지는 ’마석 모란공원 묘역‘이라고 했다. 전노협백서 발간을 주도하고 공공연맹 교육국장을 지낸 김종배는 1999년 8월 27일 사고로 목숨을 읽고 8월 29일 장례식을 치룬 뒤 ‘모란공원 민주열사묘역‘에 묻혔다(<<노동과 세계>>1999.9.6.) 그 뒤 해마다 열린 추모식 장소는 ’마석 모란공원 묘역‘으로 표시되었다. 민주노총 조직부장을 지냈고 1998년 2월 24일 숨진 최명아 추모식도 ’마석 모란공원 묘역‘으로 표시되었다. 2002년까지 <<노동과 세계>>에 그렇게 실려 있다.
나는 2003년까지는 슬라이드 필름으로 사진을 찍고 2004년부터 디지털카메라를 썼다. 슬라이드 필름으로 찍은 사진 속에 마석모란공원이 어떻게 담겨 있는지 확인하지 못했다. 디지털카메라로 2004년 11월 11일 찍은 사진 가운데 ’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 묘역 안내도‘가 있다.
2004.11 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 묘역안내도 ⓒ박준성
모란공원 열사 묘역의 이름이 ’민주노동열사 묘역‘에서 언제부터인가 ’민족민주열사 묘역‘으로 바뀐 것이다.
마석모란공원에 1990년대부터 2000년 대에 들어 역사기행을 하면서도 ’민주노동열사 묘역‘에서 노동이 빠졌다는 것을 깊이 의식하지 못하고 다녔다. 2012년 1월 20일 갔을 때 (가) 사단법인 모란민주공원 추진위원회에서 전태일 정신 이어 모란공원을 민주역사공원으로 만듭시다’하고 내건 현수막을 보았다. 1987년 6월항쟁과 노동자대투쟁 이후 형성된 민주주의가 ‘노동이 배제된 민주주의’라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때라 눈에 크게 들어왔다. 그때 생각을 2012년 3월 22일자 금속노조 신문 <금속노동자>에 ’노동자의 눈으로 보는 모란공원‘을 썼다.
2026년 1월 31일 마석모란공원 ’민주노동열사묘역‘에 들려 노동열사 묘와 묘비를 하나하나 모두 사진을 찍었다. 역사는 죽은 사람들이 살아서 활동했던 기록이고 죽은 사람들에 대한 기억이기도 하다. 노동자들이 피 흘리고 죽어가면서 쓴 노동운동의 역사가 가슴 아프게 되살아나는 듯했다. 묘비 곳곳에서 만나는 ’노동해방‘이 현실에서는 어느 한 시대의 역사만 같아 보였다.
2006.8.26. 마석모란공원 민주노동열사묘역 김종배 추모식 ⓒ박준성
전노협의 정신이라 일컬어지던 ‘노동해방’은 100년이 넘는 노동자 투쟁의 경험과 기억이 만들어 온 역사의 산물이었다. 민주노총의 건설과정에서 노동해방은 노동운동의 사상과 지향으로 자리 잡지 못하고 밀려났다. 민주노총의 창립선언문, 선언, 강령 어디에도 ‘노동해방’은 보이지 않는다. 민주노조운동의 역사에서 ‘노동해방’이 노동운동의 지향과 목표라고 공개적으로 합의해서 천명한 적은 없다. 그렇기 때문에 공식적으로 폐기되지도 않았다. 새만금 갯벌을 다룬 다큐멘타리 영화 <수라>에서는 갯벌이라는 이름을 버리지 않으면 언젠가 갯벌로 돌아갈 가능성이 살아 있다고 하였다. 역사 속에 빛바랜 깃발로 늘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는 ‘노동해방’도 그 이름을 기억하고 버리지 않는다면 노동해방세상은 가능할까? 그보다 앞서 노동자들이 스스로 노동자라 여기지 않고 노동자라고 부르지 않으면서 노동운동이 가능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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