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영숙의 테제11

권영숙의 테제11

계급적 노동운동의 가능성을 향하여​- 한국 노조운동의 진단과 미래 전망​

과연 노동계급운동은 민주화의 경로를 바꾸는데 얼마나 기여하였습니까? 자유주의적 정치민주화를 사회적인 민주화로, 급진적이고 좀더 평등지향적인 민주화로, 나아가 자본주의 철폐를 향한 민주화로 만들었습니까? 노동계급의 단계로 노동계급의 경제적인 차이들을 얼마나 해소했습니까? 조직화된 노동계급은 얼마나 민중의 호민관으로, 사회적 동맹을 구축하면서 이 사회의 변혁을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까?…
노동조합에 대한 ‘계급적’ 관점, 노조운동이란 이름 앞에 ‘계급적’이란 수식어를 붙이는 것, 그래서 끊임없이 노동을 계급형성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고민하는 것, 계급적 노조운동을 지향하는 노조의 활동과 투쟁과 운동을 여하히 시도하고 실천하는 것이 기본 시각과 자세로 정립되어야할 것입니다. 그것이 민주노조운동의 미래와 전망을 지금과 다른 방향으로 틀어내는 ‘자기 혁신’과 전환의 열쇠일 것입니다. 민주노조운동의 ‘민주’를 급진화할 수 있는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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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제냐 반독점이냐 – 한국자본의 대약진, 글로벌 자본가동맹의 구축, 그리고 ‘10.29 한미 관세합의’

제국주의를 말하는데 있어서, 무엇을 제국주의라고 말하고, 어떻게 제국주의를 이해하는가의 문제부터 정리하여야한다. 첫째 제국주의는 한 국가의 문제가 아닌 자본주의 세계발전과정이며, 둘째, “국내에서부터도 국제적인 현상“이며 따라서 국내-국제의 모든 상호관계를 이해해야하고, 마지막으로 제국주의는 어떤 한 국가의 문제가 아니고 어떤 한 국가도 벗어날 수 없는 ‘전체’라는 것이다…
자본주의와 분리된 제국주의는 국가간의 문제로 이해되고, 민족주의 혹은 국가주의의 개념과 연결된다. 따라서 제국주의에 맞선 ‘반제라고 할 때, 그것은 ’반 독점‘과 다른 무엇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반독점이야말로 반제담론의 본령이다…
미국이 더 망하기 전에 과거에 투자해 놓았던 것을 회수하려고 하는, 즉 헤게모니를 돈으로 바꾸기 (moneytizing hegemony) 하려는 것이 관세전쟁의 본질이다. 동시에 그것은 미국 중심으로 자본-기술-공급망 체제를 재구성하는 것이기도 한데, 이는 경제와 안보라는 양대 ‘축’을 하나로 한 동맹체제의 재편으로 나타난다…
한국은 기존의 수출주도발전전략을 포기하지 않는 한, 새로운 공급망체제와 동맹체제 재편에 함께 하여야한다. 하지만 이는 동시에 한국 대자본가들이 국내 산업화를 넘어서 글로벌 자본으로 약진하고자하는 ‘야심’과 자신감의 발로이기도 하다. 이를 이재명 정부는 정확히 이해하여 ‘자본의 대약진’을 위하여 미국과의 관세협상을 무사히, 대자본가들의 이익에 부합하게 잘 짜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발전전략의 채택은 결국 국내 자본의 더 심화된 독점화와 금융화로 귀결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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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 정권의 사회경제정책과 사회경제적 이해관계 – 누가 이재명의 당선을 가장 반겼을까

이재명 대통령은 스스로 ‘국민주권정부’라고 하는데. 이 말이야말로 민주정부, 참여정부 보다 더 모호한 말이다. 국민도 모호한 개념이고, 주권도 사실은 모호하긴 매한가지 개념이다.
결국 이재명정부의 경제 부양책은 모든 ‘국민’에게 이롭지 않을 것이다. 계급사회에서 모두에게 좋은 경제란 없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점들을 ‘민주’ 레토릭을 넘어서 보는 것, 그리고 지적하고 비판하는 것, 그리고 다른 대안을 내는 것. 그것이 지금 정세에서 이른바 진보주의자, 좌파정치, 좌파가 할 일이다.
근데 온통 흔들리는 갈대같은 글들뿐이다.
비판의 무기는 녹슬었고, 무기의 비판은 뭉툭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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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정치세력화의 파국적 현주소

결론적으로 이 두 가지 문제에 대한 대답은 노동자정치세력화라는 모호한 개념을 버리고 계급정치라는 정확한 개념으로 계급적 민중적 정치를 설계하는 것이다. 노동자정치세력화로 이뤄졌던 기존의 전략, 기획을 모두 기각하고 새로운 계급적인 정당- 운동의 상을 정립하는 것이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노동자가 아니라 좌파정당, 계급정당을 만들어야한다. 노동자들중 선진노동자들, 계급적인 노동자들이 좌파정당 계급정당의 주촉으로 서야한다. 그리고 좌파계급정당은 계속 노동계급 대중과 민중을 설득하면서, 노동을 중심으로 한 사회정치적 계급간 동맹을 만들기 위해서 노력해야한다. 노동자중심의 사회정치적 동맹정치를 통해서, 다음 정치를 기획해야한다. 그것은 의회에 의원들을 ‘파견’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입법’과정에 개입하는 것, 반민중적 정치인들에 대한 ‘소환’운동을 통해서 징치하는 것, 그리고 정치권력을 장악하는 것까지 포함하는 정치기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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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도구적 민족주의와 전지구적 동맹정치

북한 체제와 정권에 대한 평가와 상관없이 지금 한국과 한국인들의 태도는 자가당착이다. 도구주의적인 민족주의다. 자신은 필요하다는 이유로 한미동맹의 재공고화는 물론, 한일군사협력도 강화하고, 심지어 NATO 주최 회의까지 들어가는 등 모든 동맹을 구축하며 자신을 보호할 권리가 있다고 하면서, 그리고 북한을 ‘주적’으로 규정하고 있는 한국이 무슨 자격으로 북한의 파병이나 친러 동맹을 자기네 안마당 문제처럼 이렇게 비판할 수 있을까라는 내재적인 비판은커녕, 어떤 의문을 제기하거나 논쟁이 시작되지도 않는다…
문제는 과연 한반도는 우크라이나와 어떻게 연결되고 있는가이다. 북한이 러시아 요청으로 우크라이나에 파병하였다는 ‘설’이 나오자마자, 한국 정부는 우크라이나에 대놓고 공격무기를 제공할 수 있다고 말한다. 무엇인가 이상하지 않은가. 미국이 유럽과 대서양 동맹을 핵심으로 전지구적 정치군사전략하에서 자신의 국익을 어떻게 재편하고 있는지, 서구 중심의 자본주의 체제를 유지하려고 하는지 한국 사회는 얼마나 의문을 던지고 있는가? 그것이 남한 민중의 관점에서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우리는 얼마나 충분히 고민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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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建國)과 광복(光復)과 국가보안법- 대한민국 국가의 기원은 계속 질문해야한다

저들의 얼굴에 환희는 과연 무엇에 대한 기쁨이자 무엇을 향한 설레임이었을까? 그리고 그것을 송두리째 부수고, 현재의 대한민국이라는 공화국을 만드는데 합의를 한 이들은 누구일까? 그들이 합의한 대한민국의 모습은 1948년 헌법과 1948년 국가보안법에 걸쳐있다.
그러므로 건국도 광복도 다 담아내지 못하는 해방정국의 국가건설 혹은 정부수립에 대한 문제제기는 여전히 필요하다. 대한민국의 ’국가‘적 성격에 대한 질문도 여전히 필요하다. 대한민국은 1919년과 1948년의 한 사건과 시간으로 한정할 수 없는 국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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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어의 자긍심과 미국의 하이브리드 외교

미 국무부가 ‘공공외교프로그램’이라는 이름으로 각국의 퀴어 퍼레이드를 지원하고 있다면, 한국 퀴어 퍼레이드에 대한 미국 대사관의 입장은 특별히 다를 수 있을까 의문이다. 한국 퀴어 운동이어떤 기준으로 미대사관등에게 자리를 허여했든간에, 단지 부스 비용 100만원만 받았든간에, 주한 미 대사관은 미 국무부의 ‘공공외교 프로그램’과 그 목적을 잊지 않고 있을 것이고, 올해 서울 퀴어 퍼레이드 참여도 그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바로 ”상대 국가 시민들과 관계를 넓히고, 대중에 영향을 미치고 정보를 제공하여 미국의 국가 안보를 고양“하려는 목적으로 참여했을 것이다.
서울 퀴어퍼레이드 조직위원회는 핑크 워싱을 명시적으로 거부하고, 나아가 퀴어의 자긍성을 가장 적절하게 표현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를 놓쳤다. 이는 참으로 유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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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급적 단결과 사회적 연대

내 조건을 내 조건만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 비정규 노동자들의 정규직화를 비정규직 철폐로 호도하거나 핑계대지 않는 것, 그 주장으로 머물지 않고 그 주장을 실현한다는 뻔한 정규직이 되지 않는 것, 내 조건을 나와 함께 일하는 동료 노동자들의 조건이라고 생각하고 함께 보조를 맞추고 어깨를 걸고 함께 투쟁에 나서는 것, 무임 승차하지 않는 것, 그리고 나아가 이를 한국의 모든 비정규 노동의 현실 속에서 바라보고 비정규 노동운동의 단결을 지향하는 것, 비정규 노동 철폐를 꿈이 아니라 희망만이 아니라 실천할 목표로 삼는 것, 그리고 한국의 정규직 노조 운동에 대해서 현재의 상황을 각성하고 비정규 노동운동과 계급적 단결로 나아가게 만드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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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급없는 진보정치, 그리고 좌파없는 노조정치

1987년 민주화이행이후 민주, 진보, 그리고 좌파
노동없는 진보정치와 진보없는 노동정치의 표면을 걷고 보면, 정작 시야에서 영영 사라지는 것은 조합주의와 조직노동을 넘어서는 ‘계급’의 문제의식, 그리고 진보와 노동자주의 양자를 뛰어넘는 좌파의 이념적인 지도력(헤게모니)이다. 결국 정치적으로 ‘계급정치 없는 진보정치, 그리고 좌파없는 노조정치’라는 두 가지 정치세력화의 방식만이 쌍생아처럼 나란히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 어느 것도 좌파 중심의 계급정당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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