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와노동 연구소

지나간 미래, 오지 않을 과거, 제국의 망령: 트럼프 당선 이후 미국과 전세계 질서

지나간 미래, 오지 않을 과거, 제국의 망령

: 트럼프 당선 이후 미국과 전세계 질서

2024년 11월 14일 / 글로벌 리포트
권영숙 민주주의와노동연구소 소장

미국 대통령 선거, popular vote, 세계화, 가치동맹, 뉴딜동맹, 정체성정치 identity politics, 다원주의, 네오콘 neocon, 신자유주의, BRICS, 트럼프 경제, 무역관세, 한반도, 세계대전, 대타협(데땅트)

역사에서는 서로 다른 것들이 하나의 사건으로 나타난다. 그렇다면 2024년 11월 5일 실시된 미국 대통령 선거의 결과는 도널드 트럼프의 승리인가, 아니면 카말라 해리스의 패배인가? 이 두 가지는 각기 다른 현실과 각기 다른 의미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둘은 구분해야한다.

1. 꽃들은 모두 어디로 가버렸는가? : 민주당 유권자들의 변심

선거인단 따위는 잊자. 전체 득표수(popular vote)에서 트럼프는 약 7,515만 표(50.02%)를 얻었다. 해리스는 약 7,190만 표(48.27%)를 얻었다. 지난 2020년 대선에서 조 바이든 현 대통령은 약 8,100만 표를 얻었다. 해리스의 득표수는 바이든보다 900여만 표가 적다. 트럼프는 2020년에는 7,422만 표를 얻었다. 이번 선거에서는 약 70만 표를 더 얻었지만, 지난 4년 사이의 유권자 증가를 감안하면 득표율은 오히려 낮아진 셈이다.

즉, 트럼프의 승리는 트럼프가 지지 기반을 넓힌 결과가 아니다. 해리스의 패배는 과거의 지지자들이 트럼프로 넘어갔기 때문이 아니다. 트럼프는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었으니, 해리스(민주당)이 뒷걸음질을 친 결과다. 따라서 이번 선거 결과를 두고 ‘우경화’ 또는 ‘권위주의화’ 혹은 ‘파시스트의 승리’라는 일방적인 해석은 올바르지 않다. 기존의 확성기 소리는 여전했지만, 누군가는 침묵했으며 그것이 마치 ‘전환’처럼 보이는 것 뿐이다.

물론 정치는 많은 것을 바꾸며, 승자는 모든 것을 가져간다. 그러므로 침묵에 의한 전환은 미국 사회와 세계 전체에 깊은 흔적을 남길 것이며, 그 상흔들은 새로운 미래를 제약하겠지만, 그러나 여전히 현실을 바꾸지는 못할 것이다.

출처 : AP 통신

반면, 트럼프의 득표수가 거의 늘어나지 않았다는 것은, 그의 호소력, 그의 정책, 그의 미래가 먹혀들지 않는 고정적인 한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시사한다. 즉, 그는 ‘포풀리스트적’이었으며, 포풀리스트로서 승리했지만, 대중들은 크게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공화당원’으로서 성공했을 뿐이다.
반대로 해리스의 득표수 감소는 그의 호소력, 정책, 미래가 기존의 민주당 지지자들조차 동의할 수 없는 것들이었음을 말해준다. 그것은 대선 결과 이전에 이미 해리스의 정치적 대부인 바이든 현 대통령에 대한 반대로 표출되고 있었다(부정평가가 55%). 그리고 그들은 현재가 더 이상 미래가 되기를 원치 않았다. 대중투표 득표수의 관점에서 본다면, 트럼프의 승리보다도 해리스의 패배가 실제로 ‘변화’한 양상이라고 할 수 있으며, 따라서 그 패배가 더 중요하다.

2. 행진 또는 자리바꾸기 : 소득, 학력, 인종, 정체성 정치

<소득별, 학력별 투표 성향 추이>.* 횡축은 학력에 따른 후보 지지도 격차, 종축은 소득에 따른 후보 지지도 격차출처 : Philipp Heimberger(Vienna Institute for International Study 연구원) X(트위터) 계정. 역대 미국 대선 출구 조사에서 재구성

위의 챠트를 보면, 1996년 미국 대선 당시 빌 클린턴 후보는 공화당 후보인 밥 돌에 비해 저소득층 및 저학력자의 지지를 상대적으로 더 많이 받았다. 그러나 2000년 대선에서는 알 고어 후보가 공화당의 죠지 부시 주니어보다 고학력자들의 지지를 더 많이 받았다. 지난 2008년과 2012년 대선에서 버락 오바마 민주당 후보가 이 경향을 잠시 되돌리지만, 그러나 2016년의 힐러리 클린턴 후보에 이르면 고학력, 고소득자들의 민주당 후보 지지 경향은 매우 강력해진다. 반면 이번 대선에서 해리스는 지난 30여년만에 처음으로 고학력자만이 아니라, 고소득자들의 지지도가 공화당 후보에 비해 더 높아진 최초의 후보다. 이 모든 것은, 단지 후보 개인의 특성을 말해주는 것만이 아니라, 민주당의 지지 기반이 지난 25년간 변화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반면 공화당 후보들의 지지 기반은 점차로 고학력, 고소득자에서 저학력 저소득자로 옮겨져갔다. 트럼프는 그같은 경향을 대변한다. 이것이 바로 트럼프의 구호가 공화당 내에서 통한 이유이기도 하다. 미국의 저학력, 저소득층은 지난 50여년간의 세계화(globalization) 과정 속에서 뒤쳐진 인구집단들이다.

세계화를 주도한 세력들(금융자본 및 초국적자본)은 신자유주의자인 민주당에 편입되었고(따라서 고학력, 고소득자가 증가한다. CNN 출구조사에 따르면, 이번 선거에서 연 소득 10만 달러 이상의 고소득자들의 해리스 지지도가 트럼프 지지도 보다 더 높다; 이하 CNN 출구조사와 AP 통신 출구조사를 기초로 한 분석이다), 반대로 과거의 제조업(rust belt로 대표되는) 종사자들이나 인플레이션과 이민자 유입으로 인한 노동시장 압력으로 인해 손해를 보게 된 단순 서비스직 종사자들은 공화당으로 기울어졌다.

<미국 대선 공화/민주당 후보의 지지율 격차 추이(2020년 대비 2024년, CNN 출구조사)> 
 
*붉은 색은 공화당 후보와 민주당 후보 사이의 격차가 줄어든 폭, 파란색은 격차가 늘어난 폭을 나타낸다. 백인 대학 졸업 여성 집단과 65세 이상 인구 집단을 제외한 모든 성별, 학력별 인구 집단에서 공화당 후보가 상대적 우세를 늘리거나, 기존의 격차를 줄였다.

몰락한 제조업 노동자들은 백인들이었지만, 인플레이션과 노동시장 압력을 우려하고 있던 단순 기능 서비스직의 노동자들은 주로 유색인종(특히 히스패닉)들이다. 이들 중 다수는 여전히 해리스를 지지하기는 했지만(인종적 투표 성향), 그러나 과거에 비해서 그 지지율이 훨씬 낮아졌다(히스패닉 남성의 경우, 해리스와 트럼프의 득표율 격차는 지난 2020년 45%에서 이번 선거에서는 30%로 줄었다).

선거 직후 민주당 내에서 ‘패배 범인 찾기’ 논란이 벌어졌을 때, 히스패닉이 첫번째 이유로 꼽힌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히스패닉들은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따라서 투표한 것에 불과하다. 인종 차별도 힘들지만, 그보다는 먹고 살기가 너무 어려워진 것이다.

심지어는 흑인들에게서도 이같은 경향이 관찰된다. 흑인 남성의 지지율 격차가 좁혀진 것은 ‘문화적 이유’(페미니즘이나 LGBTQ에 대한 남성적 반발)로 해석하고 있지만, 이는 흑인 여성들의 민주당 지지율도 같이 떨어진 이유를 설명하지 못한다. 흑인 여성들은 이번 선거에서 92%가 해리스를 지지했다. 반면 2016년 대선에서는 흑인 여성의 98%가 힐러리 클린턴을 지지했었다.
이번 미국 대통령 선거 결과는 인종 카드가 전만큼 큰 영향력을 발휘하지는 못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3. 가치의 專制 (Tyranny of Values): 결국 차악(lesser evil)은 누구인가?

동시에 다른 ‘민주주의적 가치들’, 즉 페미니즘, LGBTQ, 낙태권, 인권과 같은 구호들도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현실이 정체성 정치 (identity politics) 담론을 기각한 것이다. 이는 그동안 바이든 정권이 내세웠던 ‘민주주의 가치 동맹’이 트럼프 정권 하에서는 희석될 수밖에 없을 것임을 예고한다. 동시에 이제까지의 ‘가치’에 대한 역풍도 매우 거셀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을 ‘가치’에 대한 대중들의 판단이 바뀐 것으로 해석할 수 있을까? 그렇지는 않다. 이번 선거에서 낙태권 허용을 둘러싼 주민 투표에서는 낙태권 옹호론자들이 모두 승리했다. 심지어는 트럼프조차도 낙태 그 자체를 반대한 적은 한번도 없다. 그는 단지 후기 낙태(24주 이후 낙태)에 반대했을 뿐이다.

연방대법원의 판례도 흔히 오해되고 있는 것과는 달리, 낙태권 자체를 부정한 것이 아니다. 연방대법원은 낙태권이 연방의 관할 사항이 아니라, 주 관할 사항이며, 따라서 연방이 개입할 수 없다고 판결한 것뿐이다(물론 그렇게 함으로써 낙태권을 보편적 기본권에서 탈락시켰다). 미국에서 일컬어졌던 ‘민주주의적 가치’들은 중대하기는 하지만, 선거 결과를 뒤집을 만큼 ‘중대한’ 사안이 아니라는 것이 대중들의 판단이었다.

동시에 이는 민주당 자체의 잘못이기도 하다. 민주당은 선거 과정에서 정치를 극단화시켰다. 민주당은 트럼프를 ‘나치주의자’, ‘악마’, ‘독재자’로 묘사했다. 트럼프도 해리스를 동일한 표현으로 비난하자, 민주당은 ‘차악론’(lesser evil)을 들고 나왔다 (이는 한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정치증상이다). 즉, 해리스가 그리고 민주당이 아무리 나빠도 그래도 트럼프보다는 낫다는 논리다. 그러나 피차간에 불구대천의 원수, 존재해서는 안될 악마로 서로를 위치지우고 나면, 양자의 차이가 허물어진다. 누가 덜 악마인가보다는 서로 상대의 악마적임을 폭로하는 전장이 되는 것이다.


이번 미국 대선은 덜 악마(lesser evil)을 뽑는 경연이었다. 출처 : 이란 군 트위터 계정.

이것이야말로 지난 1960년대 초에 독일의 파시스트 법학자로 알려진 칼 슈미트가 말했던, 이른바 ‘가치의 함정’(가치의 專制; Tyranny of Values)이다. 자신의 가치를 절대화하면 상대방의 가치가 무화되며, 따라서 특정한 가치의 일방적인 강요가 된다. 즉 가치가 ‘극단화’된다. 그러면 이것은 그 가치의 궤도에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전제’(압제)로 보이게 된다.

이러한 가치의 함정은 미국 대선 결과에서 다음과 같이 확인되었다. 즉 출구조사 결과 후보 지지 의사결정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것으로 나타난 ‘민주주의에 대한 우려’를 꼽은 사람들중 다수가 오히려 트럼프를 지지했다는 역설이 나타났다. 다수가 자칭 ‘자유민주주의자’인 민주당의 해리스보다는 ‘파시스트’ 트럼프를 ‘민주주의자’로 선택한 것이다.

신자유주의와 정체성의 정치 identity politics의 기초가 된(그리고 역사적 뿌리이기도 한) 다원주의(pluralism)는 이른바 가치의 상대성을 전제로 한다. 가치는 상대적일 뿐이며 가치를 절대화시키는 순간, 자유주의자는 전제주의자가 되며, 정체성 정치는 근거없는 독선이 된다. 그리고 그 조건을 만든 것은 바로 민주당과 해리스였다.

뿐만아니라, 이번 대선에서는 민주주의에 대한 호소도 먹혀들지 않았다. 왜냐하면, 해리스 자체가 ‘투표’를 거쳐서, 즉 민주당원들이 선택한 결과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해리스는 바이든의 사퇴에 따라 ‘추대’되었으며, 선거자금과 정책까지도 고스란히 물려받았다. 설사 해리스의 정책이 옳다고 해도, 해리스가 민주주의를 주장할 근거는 처음부터 없었다.

그 결과, 모든 언론사 출구조사에서 차악(lesser evil)이 지지 후보 결정에 중요한 요인이라고 답한 유권자들의 절반 이상이 트럼프를 지지하였다. 해리스가 기대했던 것과는 정반대로, 대중에게 ‘차악’은 트럼프였으며, ‘최악’이 해리스였던 것이다. 그것은 다른 말로 하면, 길게는 지난 50여년간 미국을 이끌어왔던 노선, 즉 세계화에 대한 거부였으며 그 세계화의 최종적인 이념적 버전인 민주주의 가치 동맹에 대한 기각이었으며, 가치 동맹의 절대 수호에 대한 기각이었으며, 신자유주의에 대한 기각이고 동시에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기각이었다.

대중은 현재가 지속되는 미래에 대해 동의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 현재가 보여주는 미래가 너무나도 뻔했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가 제시한 미래는 이미 소진되었으며, 그 미래의 시간은 이미 지나가버렸다.

4. 학살 (Genocide), 그리고 지지후보 없음 (Uncommitted)

미국의 대외정책이 지지 후보 결정에 중요 요인이라고 답한 유권자는 4% 남짓에 불과하였다. 어느 나라에서나 마찬가지로 미국에서도 대외정책은 유권자의 태도에 극히 작은 영향밖에 미치지 않는다. 미국민들은 자신의 나라가 전쟁을 하고 있어도 그것이 어디에 붙어있는 나라인지도 모른다. 아프가니스탄의 위치를 세계 지도에서 지목할 수 있는 미국인은 백 명 중에 한 명도 채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크라이나 전쟁에 미국이 개입하고 있으며 이스라엘이 가자 주민을 학살하고 있다는 뉴스는 제도권 언론에는 거의 나오지도 않거나, 혹은 어쩌다 소개되더라도 강 건너 불구경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예상과 달리 트럼프가 3% 포인트 차이로 승리를 차지한 미시간 주는 매우 흥미로운 사례다. 미시간 주는 두 가지 점에서 주목할 만 하다. 첫째는 그곳에는 무슬림계 주민들이 상당수 거주하고 있으며(약 50여만명), 둘째로는 세계화로 인한 제조업 공동화로 가장 큰 피해를 본 지역인 동시에 민주당이 전략적으로 신산업을 부흥시켜 과거의 지지 기반을 복구하려고 시도한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지난 예비선거에서 미시간 주에서는 ‘지지 후보 없음’(uncommitted)이 가장 많이 나타난 곳이었다. 그리고 그 가장 큰 이유는 미국의 이스라엘 지지 때문이었다. 바이든 정권(그리고 부통령으로서의 해리스 후보)은 노골적으로 이스라엘의 가자 학살을 지원했다. 사실상 당사자다. * “Uncommitted(지지후보 없음)” (2024년 4월 4일) 참조.

이같은 대외정책이 미시간 주의 투표에 얼마나 영향을 미칠지가 관심사였는데, 과거 강력한 민주당 지지 지역이었던 무슬림 집단 거주 선거구에서는 해리스 후보가 트럼프에게 큰 차이로 패배했다. 더 중요한 것은 이 선거구에서 이스라엘의 행위를 ‘genocide’라고 직접 비난한 녹색당 후보 질 스타인이 20%를 넘는 득표율을 기록했다는 점이다(트럼프는 자신이 전쟁을 끝내겠다는 말은 했지만, 이스라엘을 지지했다).
또한 대학들이 자리잡고 있는 대부분의 미시간 주 도시 선거구들에서도 해리스의 득표율이 예상보다 크게 못미쳤다. 적어도 중요한 스윙 스테이트로 간주되던 미시간 주에서는 미국의 이스라엘 지지는 큰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두 번째 요인, 즉 민주당이 전략적으로 후원한 신산업 투자와 이에 따른 노동자들의 민주당 지지 기대 역시 실망스러운 결과를 봐야했다(특히 디트로이트). 이는 민주당이 기존의 세계화 노선에서 부분적인 수정을 가하여 자국의 노동자들을 포섭하려는 노력이 현재로서는 거의 통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민주당의 대외정책(특히 대이스라엘 정책)이 암암리에 전국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추측할 수는 있다. 왜냐하면 미국의 이스라엘 지원에 따른 대량 학살은 최소한 민주당이 기획한 민주주의 가치 동맹과는 배치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민주당의 이스라엘 지원은 기존의 네오콘의 반테러리즘 슬로건과 동일하다). 게다가 선거 막바지에 해리스가 이라크전의 원흉인 딕 체니 전 부통령과 그의 딸이자 트럼프의 네메시스(Nemesis: 복수의 여신)인 리즈 체니를 포용함으로써 민주당의 ‘평화적 이미지’는 산산조각이 났다.

이는 엘리트 집단에게는 해리스후보가 구 공화당 네오콘 세력을 포섭한 것으로 보이겠지만, 전쟁을 여전히 우려하고 있는 일반 대중에게는 ‘위선적’ 행위로 비칠 수 밖에 없다. 그 결과로, 예컨대 미국 대외정책에서 현실주의자로 꼽히는 존 미어샤이머(한국의 김태효 안보실 1차장의 지도 교수이기도 하다)나 하버드대의 제프리 삭스 교수는 공개적으로 트럼프와 해리스 둘 다 반대하고 기권을 선언하기도 했다. 즉 선거 켐페인이 본격화되면서 주장된 ‘차악론’은 ‘학살자’(해리스) vs 파시스트(트럼프)의 구도로 형성되었으며, 미국은 ‘민주적으로’ 선거를 거쳐서 파시스트를 선택했다(트럼프가 실제로 파시스트인지 여부와는 별개로). 그리고 그 선택은 둘 중의 어디에도 표를 던질 수 없던 ‘침묵하는 일천만’의 선택의 결과였다 (46대 대선에서 바이든을 찍은 표와 해리스를 찍은 표의 차이).

즉, 해리스의 선거전략은 ‘기득권’을 포섭하는데 있었으며(그리고 그것이 현재의 민주당의 정체성에 부합한다), 그 기득권은 전쟁과 대외 개입을 최우선과제로 놓기 때문에 정작 민주주의 가치 동맹을 호소하기 어렵게 만든다. 이번 선거의 특징 중의 하나는 그동안 이란성 쌍동이 또는 동전의 양면으로 평가받던 네오리버럴과 네오콘이 드디어 ‘노골적으로’ 합체한 계기가 되었다는 점이기도 하다.

5. 너의 인플레, 나의 재산 증식

1996년 초 연방준비제도 이사회(FRB)의 일원이 된 재닛 옐런(현 재무장관)은 3% 인플레이션 가이드를 처음 참석한 회의에서 제시한다(당시 의장은 앨런 그린스펀이었다). 그 전에 미국에는 공식적인 인플레이션률 가이드라인이 존재하지 않았다. 지금의 2% 가이드라인은 전적으로 옐런의 공헌이다. 당시 회의에서 참석자들은 0%대 물가상승률과 0%대 임금인상률 대비 3% 물가상승률과 3% 임금인상률을 비교하며 농담을 던진다. “노동자들은 3% 물가에 3% 임금 인상을 더 좋아해”.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말해준다. 물론 여기에는 시간차가 존재한다. 바이든 정권이 출범하고 10개월이 지난 2021년 10월을 기점으로 했을 때 지난 3년 여 동안의 대선 직전까지 미국 노동자들의 시간당 임금 인상률은 마이너스 3%였다. 즉 시간당 실질임금이 감소했다. 노동자들의 명목임금인상률보다 물가상승률이 더 높았다는 뜻이다. 올해 체결된 상당수의 임금협약에서 향후 3-4년간 5%대 이상의 임금인상률이 약속되어 있고 물가상승률은 낮아질 것으로 예측되기 때문에 앞으로는 ‘좋아질’ 수도 있다. 그러나 적어도 대선 당시에는 노동자들은 임금과 생활의 측면에서는 좋아할 일이 하나도 없었다.

<미국 소득구간별 실질임금 추이(1980-2024)>


미국의 상위 10% 임금 소득자의 시간당 실질 임금은 지난 1980년 이후 46.2% 증가했다. 반면 하위 40%의 시간당 실질 임금은 같은 기간 17.4% 증가했을 뿐이다. 그나마 코로나 사태 이후에는 오히려 감소했다. 이같은 소득 불평등은 부의 불평등으로 이어진다. 출처 : Voronoi.

<미국 지니 계수 추이 (1965- 2023)>

지니 계수는 부의 분배 정도를 측정하는 지수다. 지니 계수가 높을수록 부의 불평등은 커진다. 미국은 지난 80년 이후 장기적인 지니 계수 상승 국면을 보이고 있다. 즉 부의 불평등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 코로나 직후 잠시 하락했던 지니 계수는 바이든 정권 출범 이후 다시 급등하기 시작한다. 즉, 바이든 정권 하에서 부의 불평등은 오히려 더 커졌다. 출처 : World Bank.

미국 노동자들의 중위 임금(임금 중간값)은 약 4만 4천 달러이다. 3만 달러 에서 7만 달러 구간에서는 노동자들의 임금 인상 수준은 물가상승률에 못미쳤다.

그리고 출구조사에 따르면, 정확히 이 구간에 해당하는 노동자들은 해리스보다 트럼프에게 더 많은 표를 던졌다. 지난 4년간의 인플레이션이 투표에 영향을 미친 것이다. 반면 3만 달러 이하의 극빈층과 10만 달러 이상의 고소득자 구간에서는 해리스가 더 많은 표를 얻었다. 극빈층은 민주당이 그나마 복지를 유지해 줄 것을 기대했으며, 고소득층은 물가 상승률에 덜 영향을 받거나(한계소비성향이 저소득자보다 낮다), 혹은 자신들이 소유한 자산 가격이 더 빠른 속도로 상승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경제 상태(노동자들의 임금 및 고용 조건)가 단순하게 투표와 대응하는 것은 아니다. 이를 매개하는 수많은 변수들이 존재한다. 역설적으로 저소득 노동자들은 부자들에 대해 관대하며, American Dream을 믿는 경향이 더 강하다. 이는 저소득 노동자(그리고 대부분이 저학력층이다)이 단지 ‘세뇌’되었거나 혹은 속았기(duped) 때문은 아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생활상의 어려움을 투표로 표현하고 있을 뿐이며, 현재가 지속된다면 미래가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자신들도 신분의 사다리에 올라타기를 원한다.

그들은 1990년대부터 30여 년간은 민주당이 세워준 사다리를 올라가려고 애를 썼지만, 이미 그 사다리는 막혀있다는 것이 분명해졌기 때문에 새로운 사다리(로 보이는 것)를 선택했을 따름이다. 이건 단지 해리스의 잘못이라기보다는 지난 30여 년간의 민주당 정책의 누적적 결과다.

6. 노동계급없는 자유-노동동맹 (lib- lab coalition)

민주당 내에서도 이를 인식하고 있다. 선거 직후에 후폭풍으로 가장 크게 눈길을 끈 것은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의 ‘민주당이 노동계급으로부터 멀어졌기 때문에 선거에 패배했다“는 주장이었다. “It should come as no great surprise that a Democratic Party which has abandoned working class people would find that the working class has abandoned them.“ (Bernie Sanders 페이스북, 2024. 11.7)

그는 민주당의 노동 포섭 실패의 사례 중의 하나로 ’최저 임금 인상 실패‘를 꼽는다. 하지만 샌더스의 주장은 근본적으로 오류가 있다. 이에 대한 갑론을박이 있었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지적한 발언은 보지 못했다. 그의 오류의 핵심은 그가 ’노동자‘와 ’노조‘와 ’노동계급‘을 구분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나는 이 구분선이 매우 중요하다는 논지를 강조하고 있다. 이와 함께 ‘자유-노동동맹’ 개념에 대해서는, 홈페이지 자료실 “[논문] 노동자 정치세력화’를 넘어서 좌파 계급정치” 참조). 

샌더스의 발언에 반박하여 해리스 선거운동본부장이 주장한 것처럼, 바이든 정권은 역사상 가장 ’친노조적인‘ 정권이었다. 적어도 제스쳐는 그랬다. 대통령이 노조 파업 시위 현장에 동참한 것은 심지어는 자유주의-노동 동맹(뉴딜동맹)을 주장했던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 시절에도 상상할 수 없었다. 또한 전미노동관계위원회(NLRB)의 친노조적 판결들은 노동자들의 단결권에 긍정적으로 작용했다. 뿐만 아니라 여러 쟁의에 간접적을 노조편을 들기도 했다(철도 노조 파업의 경우에는 그 반대였지만). 바이든은 미국적 기준에서는(한국적 기준에서도) ’친노조적‘이라는 평가를 들을 수 있다.
*”‘황제’가 노동자 파업을 격려할 때, 제국은 다 속셈이 있다“ (2023년 10월 4일),  ”미국 노동조합의 얄팍한 정치, 공허한 미래-미국 노동자정치세력화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대선“(2024년 07월 18일)  참조.

하지만 민주당은 친노동자적은 아니었다. 나아가 친노동계급적인 것은 더구나 아니었다.

<미국 전체 국민소득 대비 노동자의 임금 및 기타 보상 비율(Labor’s Share)>
회색 막대그래프는 경기 침체기(2017=100). 출처: 세인트루이스 연방준비은행,

위의 차트는 미국 전체 소득 가운데 노동자들의 소득이 차지하는 비중을 표시한 것이다. 지난 1970년대 이래로 노동소득 비중은 장기적인 감소 경향을 보여왔다(경기 침체기에는 상승하는데 이는 노동소득이 증가했기 때문이 아니라, 상대적으로 자본소득이 더 크게 감소했기 때문이다). 이는 미국 경제와 사회에서 산업이 상대적으로 축소되고 있으며, 노동자들이 자산을 형성할 수 있는 기반이 점점 더 작아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말하자면, 자본가(자산가)의 소득이 노동자들의 소득보다 점점 더 커지는 경향이 나타난다.

그리고 이는 정권의 성향과 무관하게 발생했다. 공화당이든 민주당이든 이 경향은 관철된다. 지난 2023년 4분기에 바닥을 찍고 다소 반등하지만 이것이 근본적인 방향 전환이라고 해석할 수는 없다. 즉, 바이든 정권은 그 이전 정권들과 마찬가지로 ‘노동’에 대해 다른 조치를 취하지 못했으며(또는 않았으며), 기존의 노동의 몰락을 오히려 가속화시켰다(취임 첫 분기인 2021년 1분기에 100.7에서 2024년 3분기에는 97.2). 이를 두고 ‘친노동’적, 혹은 친노동계급적이라고 해석할 여지는 도저히 없다.

두 번째는 보다 근본적인 제조업에 관련된 문제다.

<제조업 종사 전체 노동자 수>
회색 막대그래프는 경기 침체기(단위 : 천명). 출처 : 세인트루이스 연방준비은행

미국의 제조업 종사 노동자 숫자는 1980년대 이래 가차없는 감소 추세를 보인다. 지난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다소 반등 기미를 보이지만, 지난 3년여 동안 정체 상태다. 제조업은 상대적으로 저학력층에게는 고소득 일자리이며 미국의 특히 백인 노동자들에게는 중산층으로 도약하는 밑받침이었다. 그러나 그 바닥은 허물어졌으며, 지난 10여 년간의 반등을 근본적인 방향 전환이라고 말하기도 힘들다. ‘제조업을 국내로’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세운 트럼프 정권 때에도 큰 차이는 없었고, 반도체법과 반인플레법(IRA)을 내세워 동맹국의 자본과 산업을 미국에 강제 유치한 바이든 때도 변함은 없었다.

한 연구에 따르면 바이든 정권 출범 이후 한국 기업들은 미국에 1,000억 달러를 투자했으며, 거기에서 약 47만개의 일자리가 창출되었다. 지금의 한국의 불황은 한국에 이뤄졌어야할 투자가 미국으로 이전되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한국의 ‘동맹’인 미국은 전세계를 향한, 특히 ‘동맹국들’을 향한 카니발리즘으로 먹고 사는 중이다).

하지만 바이든 정권 이후 해외자본 유치가 큰 폭으로 증가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노동소득이나 제조업 고용이 증가하지 않는 것은(산업생산도 여전히 정체 중이다), 기존의 방법들이 효과가 매우 적었다는 것을 시사하며 미국의 노동자들에게는 체감되지 못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다만 추가적인 하락은 저지하는 효과는 있었지만, 이마저도 미국의 동맹국들의 국내 산업과 노동자들(예를 들어 남한의 노동자들)의 희생으로 이뤄진 것이다.

그런데, 왜 미국의 기업들과 자본가들은 자국에 투자하지 않을까? 왜 해외 자본과 기업의 손을 억지로 비틀어 미국에 투자하도록 만들까? 두 가지 원인이 있다. 하나는 여전히 미국의 이윤율이 해외생산의 경우보다 낮기 때문이다(미국 S&P500 상장 기업의 매출의 40%와 이윤의 50%는 해외에서 발생한다. 해외 생산, 판매의 이윤율이 미국 현지보다 더 높다).

다른 하나는 노동의 경직성 때문이다. 최근 미국에 반도체 공장을 짓고 있는 세계 최고의 반도체 기업인 대만의 TSMC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미국에서 반도체 공장 운영의 가장 큰 걸림돌은 ‘노동력’이다. 전문 노동력이 부족할 뿐만 아니라, 노동자들이 (대만이나 한국에 비해) 너무 잘 보호되고 있다. TSMC는 ”미국에서는 노동자들을 언제 어느 때라도 불러서 밤을 새워서라도 일을 시킬 수가 없다“고 불평한다.

애플의 성공도 마찬가지다. 애플은 스티브 잡스의 ‘창조적 혁신’ 때문에 성공한 것이 아니라, 하청업체인 중국의 팍스콘에서 ”애플의 설계도면이 도착하자마자 수천명의 노동자들을 동원해 24시간 밤을 새워가며 현장에서 수정하고 생산한“ 결과다. 한국의 자본가들이 삼성의 부진을 두고 ”주 52시간으로 제한해서 제대로 된 연구를 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것도 같은 맥락에 있다.

현대 산업의 최첨단을 달리는 반도체 공장조차도 ‘노동자들과 연구인력’을 갈아넣어야 경쟁력이 생기고 생산성이 향상된다. 하지만 미국에는 이것이 결여되어 있다. 그리고 미국의 노동자들도 이를 잘 알고 있다. 중국과 대만, 한국의 노동자들과 경쟁하기 위해서는 미국의 노동자들도 자신의 몸과 영혼을 갈아넣어야 한다. 그런데 미국의 노동자들은 이를 거부한다.

따라서 미국이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국가가 노동을 대신해서 경쟁 상대를 비경제적인 방식으로 억압해야 한다. 가장 가까운 사례가 러시아산 천연가스다. 유럽연합(EU)의 우르술라 폰 라이엔 위원장은 트럼프 당선 바로 다음날 ”러시아를 압박하고 미국과의 동맹을 강화하기 위해 값싼 미국산 천연가스 수입을 늘리겠다“고 선언했다. 국제시장에서 미국 천연가스 가격은 러시아산 천연가스의 두 배가 넘는다.

그러므로 매우 역설적으로 미국의 노동자들이 ‘혁명적’으로 전화하지 않는 한, 현재의 조건에서는 미국이라는 국가는 타국을 억압하거나 착취하여 자신의 국민들과 노동자들을 먹여 살리는 수밖에 없다. 그것이 미국의 노동자들이 혁명적으로 전환되는 것을 막는 길이기도 하며, 미국의 자본이 초과착취를 통해 배를 불리는 길이기도 하다. 그것은 미국 정치인들의 양심이나 양식, 혹은 지능이나 이성의 문제가 아니라, 그들의 생존 방식이며 또는 과거 용어로는 ‘제국주의’라고 불리던 것의 현재형이다.

따라서 바이든 정권(그리고 해리스의 선거 캠페인)이 ‘친노조적’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가능할지 몰라도, 보편적인 의미에서 친노동자적이거나 친노동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객관적 지표는 없으며, 나아가 친노동계급적이라고 볼 근거는 전혀 없다. 왜냐하면, 해리스는 바이든보다도 한 술 더 떠서 무력으로 세계화를 유지하려는 네오콘까지도 포괄하려 했으며, 그 세계화가 현재 미국 노동자들의 곤궁의 근본적인 원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만일 미국이 국가의 힘을 빌어 외부로부터 착취해 오지 않는다면, 그들은 국내에서 격렬한 계급투쟁의 내전을 겪게 될 것이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것은 자본가들 사이의 ‘경쟁’(전쟁을 포함하는)이지만, 동시에 그 자본을 안정화시키기 위한(자본주의적 사회 관계를 유지하고 내전을 회피하려고 하는) 애국적 사업이기도 하다. 국가는 불평등 교환을 기반으로 한 자본주의적 사회 관계를 보존하는 자동기계이며 그것은 어떤 정치이든 간에 관철되는 힘이기도 하다. 이를 두고 헤겔은 ‘국가는 사회의 대당(對當)’이라고 불렀으며, 마르크스나 레닌이 ‘국가폐기론’을 주장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적어도 19세기와 20세기 초반의 인물들은 21세기의 눈 먼 사람들보다는 더 잘 꿰뚫어 보고 있었다.

미국의 이른바 ‘좌파’ 언론인 <Jacobin> 11월 9일자에는 샌더스로부터 촉발된 ‘노동 푸대접론’에 대한 현직 노조지도자의 평가가 실려있다. 14만명의 조합원을 가진 International Union of Painters and Allied Trades(IUPAT)의 지미 윌리엄스 주니어 위원장은 ”정부의 지원이 필요한 계급의 구성원들이 아니라, 관리자들에게만 호소하는 민주당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그의 발언은 미국 ‘노조운동’의 현수준을 정확히 드러낸다. 역설적으로 그는 ‘국가’에 의존하는 노조와 노동자를 주장하는 것인데, 그런 노동자와 노조를 만들 수 있는 세계는 아마도 현재가 그 정점일 것이다.

하지만 미국의 민주당은 오바마 이래 ‘신뉴딜 자유-노동동맹’(lib-lab coalion)과 신사회동맹(페미니즘, LGBTQ, 환경)의 양 축을 선거 전략으로 삼아왔다. 신사회동맹은 그들 스스로 가치동맹화함으로써 약화되었고, 신뉴딜동맹은 그것을 지지할 수 있는 물적 기반이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해리스가 패배한 가장 확실한 이유다. 이것이 신자유주의 정치가 다다른 막다른 골목이다. 이들은 미래를 다 써버렸으며, 이제는 지나간 역사가 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인종을 뛰어넘는 투표 성향이 이번 선거에서 노골적으로 나타난 이유이기도 하다. 공화당은 지난 2012년 미트 롬니 공화당 후보 때까지는 이같은 경향을 제대로 포착하지 못했다. 오히려 기존의 신자유주의자 세력의 일정 지분을 얻어오려고 했다(롬니는 세계적 사모펀드인 Bain & Capital의 대주주이기도 하다).

트럼프가 이 도식을 깼다. 그는 세계화의 과정이 거의 정점에 이르렀으며, 이제는 하강 추세에 들어섰다는 것을 알아챘으며, 세계화에서 가장 손실을 본 집단들의 분노를 정치적으로 통합시킬 수 있었다. 이같은 분노는 기존의 정치적 과정이나 정치 제도로는 해소되지 않는다. 오히려 기존의 정치적 과정은 뒤쳐진 자들(the deplorable)을 낳았고 끊임없이 재생산하기 때문이다.

트럼프는 따라서 기존 제도나 관행을 따르지 않는 방식으로, 대중들의 불만을 완화하거나 혹은 타협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비타협적으로 직접 반영하는 방식으로 정치를 수행했다. 따라서 그는 기존의 ‘초당적’ 타협, 혹은 나눠먹기를 깨뜨릴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그가 ‘포풀리스트’로 불린 이유이며 신자유주의자들의 불구대천의 원수가 된 이유다. * ”죽은 자들의 민주주의 : 미국 정치체제의 진퇴양난” (2024년 07월 18일) 참조.

7. 트럼프의 통치 방식과 국제 정치지형 – 대타협(데땅뜨)와 세계 대전 사이에서

트럼프의 승리, 그리고 공화당의 상하원 장악에도 불구하고 전체 득표수에서 차이는 2%밖에 차이가 나지 않았다. 그것도 트럼프가 외연을 넓힌 것이 아니라 민주당의 외연이 축소된 결과라는 점은 향후 미국 정치를 점칠 때 반드시 고려해야 할 사항이다. 왜냐하면 트럼프를 비롯한 공화당은 자신들의 기반을 확대해야 할 필요를 여전히 절실하게 느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트럼프는 개인적으로는 지난 1기 때의 ‘배신의 정치’를 기억하지 않을 수 없다(비서실장부터 보좌관, 각 부 장관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1기 내각 멤버들이 나중에 트럼프를 배신했고, 트럼프가 탄핵될 뻔 하거나 2021년 1월 선거 폭동으로 감옥에 갈 뻔한 이유가 되었다).
그는 당선 직후 열흘 사이의 초기 인선에서 매우 흥미로운 선택을 내렸다. 비서실장에는 선거운동본부장인 수지 와일스를 임명했고, 주UN 대사에는 엘리스 스테파닉을 내정했다. 또 가장 중요한 국가안보보좌관에는 마이크 왈츠 하원의원, 국무장관에는 마르코 루비오 연방상원의원(플로리다주)를 내정했다.

언뜻 보기에는 외교안보라인은 모두 네오콘 매파처럼 보인다. 맞다. 그들은 모두 강경 네오콘이다. 그런데 차이가 있다. UN대사 스테파닉은 골수 이스라엘 지지론자이자 대서양주의자(Atlantist; 대유럽관계를 중시하는 외교안보라인)이며, 루비오 국무장관은 이란 타도에 목숨을 건 인물이다. 왈츠 안보보좌관은 ‘중국이 만악의 근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다.

출처 Soap Box

여기에서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첫째는 미국이 동시에 여러 개의 전쟁을 수행한다는 것이다. 미 군부도 선거 직전에 이같은 주장을 했었다(로이즈 오스틴 국방장관, 지난 4일). 물론 이는 불가능하다. 미국은 여러 개의 전쟁은 커녕 하나의 전쟁도 수행하기 어렵다. 두 번째는 트럼프 역시 바이든 정권과 마찬가지로 ‘전쟁광’(warmonger) 정권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고려할 점이 있다. 트럼프는 선거 유세시에는 자신을 ‘평화의 사도’로 내세웠으며, ‘내 임기 중에는 전쟁은 없다’고 약속했다. 트럼프가 선거운동본부장인 와일스를 비서실장으로 임명한 것은 선거 공약을 지키겠다는 추가적인 신호로 해석해야 한다.

또한 지난 11월 13일에는(이 글을 쓰고 있는 중에) 폭스뉴스 진행자 출신인 피트 헤그세스(Pete Hegseth)를 국방장관으로 내정하였다. 그는 이라크 참전군인이었지만 군사전문가가 아니며, 행정전문가도 아니다. 뉴스쇼 진행자일 뿐이다. 게다가 해외 미군기지를 축소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물론 그는 푸틴을 ‘권위주의자’, ‘전쟁범죄자’로 부르면서 미국이 우크라이나에 충분한 무기를 지원하지 않았다고 비판한 바도 있다.

하지만 실은 신임 국방장관의 ‘철학’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어차피 민간인이 미국 국방부에서 무언가를 개혁할 것이라고 기대할 수는 없다(이는 군인 출신도 못한다. 미 군부는 자신들도 어쩌지 못하는 괴물이 되어 가고 있다. 단적으로 미국 정부는 6년째 국방부 회계감사를 못하고 있는 중이다). 그러므로 헤그세스는 ‘군사 쇼’를 중계하는 역할을 맡은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국방장관 자리에 그다지 명망도 없으며 영향력도 없는 인사를 임명했다는 것은 국방부의 역할 자체가 크지 않을 것이라고 트럼프가 판단했을 가능성이 높다.

여기서 오히려 안보라인 3자 사이의 차이를 주목해야 한다. 주UN 대사 내정자 엘리스 스테파닉, 국가안보보좌관 내정자 마이크 왈츠 하원의원, 국무장관 내정자 마르코 루비오 연방상원의원(플로리다주), 이들 각자는 중국, 이란(중동), 우크라이나(러시아)를 겨냥한다. 그리고 이는 단지 ‘개인적 성향’의 문제가 아니다. 이들의 뒤에는 공화당, 나아가 글로벌 차원에서 이 지역들에 이해관계를 갖는 자본 및 정치 세력이 존재한다. 미국이 동시에 여러 개의 전쟁을 수행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이들 3개 세력들은 자신들의 세력을 넓히고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관철하기 위해서는 같은 행정부내의 다른 세력들과 경쟁(말이 경쟁이지 저격)해야 한다.

이렇게 되면 대통령인 트럼프에게는 두 가지 이점이 생긴다; 하나는 내부 경쟁으로 충성을 유지시키기 용이하며(왕조 시절에도 종종 쓰이던 정치기술이기도 하다. 조선시대의 사색당쟁은 실은 왕권 유지를 위한 교체 기용 및 각 파벌 사이의 경쟁 유도이기도 했다), 동시에 이들이 서로 경쟁하는 가운데 힘이 소진된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외교안보 라인이 트럼프가 척결하겠다고 공언하고 있는 이른바 ‘deep state’ 출신이거나 혹은 충실한 대리인들이기 때문에, 이들을 자신의 휘하에 두면 관찰 가능해진다는 이점이 있다. 즉 햇빛에 널어 말리는 정치 기술이다. 트럼프는 1기 집권 시절 ‘숨어있는 적들’로 인해 큰 곤란을 겪었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자신에게 충성하는 인물들을 기용했지만, 실제 업무처리 과정에서 은근히 배제되거나 심지어는 노골적으로 사보타지당하기도 했다.

트럼프 정권은 기본적으로는 internationalist(국제주의, 제국주의적 개입)와 대비되는 nationalist(국내주의자, 불개입, 고립주의)의 포지션을 내세우고 있다. 그러나 지금 미국은 과거의 고립주의 시절과는 달리, 헤게머니 국가(제국)이지만 동시에 이 지위에서 내려갈 위기에 처해있다.

그런 점에서 올해부터 갑자기 ‘중국 전문가’로 변신한 마르코 루비오 국무장관 내정자의 세계 정세관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Asia Times>는 지난 12일자 ”루비오는 국무부에 중국에 대한 현실적 인식을 가져올 것“이라는 제하의 기사에서 루비오가 ‘현실주의적’ 접근을 하고 있다고 평가한다. 루비오는 지난 9월 60쪽에 달하는 ‘중국이 만든 세계’라는 보고서에서 중국의 경제적 성공을 다루고 있다. 루비오는 중국이 이미 로봇 분야에서는 미국을 추월했으며, 내생적 기업들이 미국의 제재에도 불구하고 수입 대체 생산을 하고 있고 제3국을 통한 우회무역을 하기에 충분한 기술적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평가한다.루비오의 결론은 미국이 중국에 앞서기 위해서는 특별한 노력이 필요하며 단지 제재 서류에 사인 몇 번 한다고 해서 중국의 발전을 막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 보고서는 지난 10여 년 동안의 미국의 대중국 봉쇄전략이 사실상 실패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보고서에 직접 언급되어 있지는 않지만, 당연한 논리적 귀결은 미국은 중국과 이제까지와는 다른 ‘특별한’ 관계를 수립하여야 한다는 것이 된다. 그래서 이 신문은 ”1972년 닉슨의 전격적인 중국 방문과 같은 대타협(great bargaining)을 루비오가 준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추측하는 평론가들도 있다“고 전한다. 즉 신데땅뜨의 도래를 점치고 있는 것이다.

지난 70년대 초 닉슨-모택동 사이에 비밀회담에 이은 미-중간 데땅뜨는 중국을 국제분업질서에 편입시키는 전환점이 되었다. 그리고 이제 중국은 미국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커버렸으며, 미국은 그동안 대중국 봉쇄(pivot to Asia) 전략으로 맞서왔다. 이에 대한 중국의 대응은 왕이 외교장관의 ”세계는 두 마리 호랑이가 살 수 있을 정도로 넓다“는 것이었다. 즉 미중이 세계를 분할하는 두 축으로 양립하자는 것이다.

루비오의 ‘현실주의적 인식’은 미국의 기존 정책이 실패했음을 자인하는 것이다(동시에 미국이 추구해온 봉쇄를 통한 중국 내부 변화 유도 전략의 실패도 인정하는 것이다). 현재의 트럼프 내각 인선을 보면 분명히 극단적인 대립보다는 타협의 가능성이 더 높기는 하다. 물론 그것이 대타협일지, 일시적인 잠정휴전(modus vivendi)일지 속단하기는 아직 이르다.

일론 머스크는 이름뿐인 정부효율성위원장직을 맡은 것을 기화로 중국과의 비밀협상을 밀실에서 연계할 가능성이 가장 큰 인물이다. 중국에 생산기지를 두고 있는 테슬라의 대주주인 머스크가 왜 ‘반중국’주의자인 트럼프 진영에 합세했을까? 트럼프도 머스크도 다 속셈이 있으며, 양자의 속셈이 맞아떨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반면 데땅뜨가 도래했던 70년대 한반도의 정세는 그다지 유쾌하지 않았다. 미중 데땅뜨로 동북아 지역의 권력 공백 상태가 생기자 남북한의 지배층은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각기 유신과 주체사상으로 대응했다. 역사는 되풀이될까?

아시아 정세는 안보보좌관으로 내정된 마이크 월즈의 저서 <Hard Truth>에서 그 운명을 찾을 수 있다. 그는 대만을 ‘수호’해야 하는 이유를 ”대만의 민주주의 존속은 일본 한국 태국과 같은 주변국가들이 중국의 위협에 굴복하는 것을 막아준다”는데서 찾는다. 즉 한국의 민주주의를 질식시킬 생각은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것이 지난 50여년간의 남한의 발전 노선(수출 주도 경제성장)을 유지시켜 준다는 뜻은 아니다. 남한이 처한 국제적 조건은 새로운 발전 노선, 새로운 정치, 새로운 제도로의 전환을 강요하고 있으며, 여기서부터는 미지수의 영역이다.

트럼프가 불개입 노선을 택하면서 해외 주둔 미군과 군사기지를 축소할 것임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해외 주둔 미군으로 인한 이득보다 미국이 감당해야할 위험이 더 크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외 주둔 미군 축소로 인한 지역적 권력 공백 사태를 무조건 방치한다는 뜻은 아니다.

대략적으로 트럼프의 대외정책은 각 지역의 사안들은 지역의 다양한 세력들에게 맡겨두되(그런 점에서 불개입주의적이다), 대신에 지역 갈등이 발생하는 경우에는 미국은 조정자 혹은 해결자 역할을 자임한다. 그리고 그 수단은 여전히 ‘힘’이다. 트럼프의 구호가 ‘힘을 통한 평화’(peace through force)인 것이 이를 웅변해준다.

그러나 어쨌든 간에, 지역 국가들은 과거와는 달리, 자신들의 목소리를 낼 기회를 발견하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비록 그것이 더 많은 국방비와 더 큰 안보 위협을 동반하는 것이라고 할지라도(실제로는 기존 집권세력에게 위협적일 뿐이기는 하지만), 미국의 후퇴로 인한 상대적 자율성의 공간이 생긴다는 것은 중요한 대목이다.

이와 관련, 알렉산드로 스투브 핀란드 대통령이 지난 11일 트럼프 당선인과의 통화 직후 ”트럼프의 우크라이나 전쟁 종전 의지를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밝힌 것이나, EU의 전 역내시장 및 서비스 담당 집행위원이었던 띠에리 브레통이 트럼프 당선 직후 언론 인터뷰에서 ”이제는 맘 놓고 말할 수 있게 됐다. 그동안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고 말했던 것은 미국이 기존 개입적 정책을 수정한다는 명확한 신호라고 할 수 있다. 반면 유럽으로서는 이제까지는 미국(군부)의 억압으로 눈치만 보고 있었는데, 이제는 어느 정도 독자적인 자율성이 생겼다. 일본 정치권에서도 ”종전 이후 처음으로 독립국가가 될 기회가 생길 수도 있다“는 말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가장 극적인 표현은 푸틴에게서 나왔다 ;”새로운 세계 질서(new world order)가 드디어 시작되었다“.
이 세계 질서는 미국의 방관, 더 정확하게는 ”군림하나 통치하지는 않는다“는 대외 노선 하에서 생겨나는 공간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곳은 기존의 유럽 국가들과 더불어 중국 러시아 인도 브라질과 같은 신흥 중진국가들로 채워질 것이다. 이들은 기존의 서구 국가들에게 동등한 지위를 요구하며 목소리를 낼 것이다. 그 목소리는 필연적으로 갈등을 불러오지만, 그러나 전쟁으로 비화할 가능성이 더 높아지는 것은 아니다.
러시아는 유럽이 자율적으로 제어하며, 중국은 일본에게 그 역할이 주어진다. 일본의 ‘독립국가의 기회’라는 것은 미국의 대외 정책에 종속되지 않고 일본이 자율적으로 중국을 견제할 수 있다는 자유를 의미한다. 중국과 동조할 자유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트럼프가 국제관계에서 이같은 방식을 취하는 것은 세계 질서에 대한 이념이 고상하거나 상대방을 독립적인 파트너로 인정해서가 아니다. 1기 때와 달리 그는 단지 중국만을 겨냥하지 않는다. 그가 상대해야 하는 것은 이제는 훌쩍 성장한 글로벌사우스(BRICS)다. 이미 실질 구매력 차원에서는 서구(collective west)를 뛰어넘은 BRICS는 지난 10월 22-24일 카잔 정상회담을 계기로 13개국으로 참가국 수가 늘어났다. BRICS는 노골적으로 미국에 대항하는 것은 아니지만, 미국에서 벗어나도 생존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한다(대표적으로 회원국 상호간 제재 금지와 달러 대체 국제통화 모색). 무엇보다도 ‘정치’와 ‘안보’와 경제를 분리하며, 타국의 안보를 침해하지 않는 것을 기본 원칙으로 한다. * “신흥시장(emerging market)의 선진시장(developed market) 추월” (2023년 12월 21일) 참조.

즉, 트럼프가 이제 상대해야 하는 것은 다른 헤게머니 국가가 아니라, 세계 전체다. 게다가 자신들이 이미 스스로 세계화 과정이 더 이상 이득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과거와 같이 동맹국을 동원해서 어느 특정 국가를 포박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트럼프의 대외정책(지역 맹주의 자율적 선택 허용 및 이들의 이해관계에 미국이 얽매이지 않도록 방지하는 것, 즉 미국의 인계철선 역할의 축소)은 이같은 국제적 조건을 배경으로 수립된 것이며, 따라서 아무리 큰 소리를 치더라도 그것은 근본적으로 수세적이며 방어적인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서 지켜야 할 가장 중요한 미국의 핵심 이익은 ‘달러화’의 지위 유지에 있다. 트럼프가 달러화를 사용하지 않는 국가에 대해서는 200% 관세를 매기겠다고 선거 과정에서 으름장을 놓은 것은 그 때문이다. 반면 이 발언은 설사 달러화를 폐기하더라도 전쟁을 일으키지는 않을 것이라는 판단도 가능케해준다. 그런 점에서는 트럼프는 ‘평화의 사도’다. 푸틴이 트럼프 당선을 보고 ‘달러화 폐기 의도는 없다’고 슬쩍 고개를 숙인 것은 트럼프의 속셈을 보았기 때문이며 따라서 트럼프는 당연히도 우크라이나 종전 압력으로 거기에 보답할 것이다.

유럽(EU)은 미-러 간 데땅뜨로 그동안 전쟁을 핑계로 긴축과 경기 부진에 대한 반발을 억압해왔던 기존 국내 정치 세력들은 타격을 입겠지만(따라서 이른바 극우세력의 힘이 더 커질 것이다), 동시에 이를 상대적 자율성의 확보라며 목소리를 높힐 것으로 보인다. 마크롱이 미국에서 벗어나야 한다면 난데없이 목소리를 높이는 것도, 주인이 목줄을 풀어주었기 때문이지, 개가 늑대가 되었기 때문은 아니다. 독일의 경우에는 내년 2월 총선을 거쳐 기민/기사 연합이 다시 정권을 잡겠지만, 독일대안당(AfD)의 약진이 주목거리다. 미국 민주당에 올인했던 영국의 케이어 스타머 노동당 정권은 풍전등화에 처하게 될 것이며, 영국 국채시장이 언제든 노동당 정권을 날려 버릴 기회만 엿보고 있을 것이다. 트럼프는 뒤끝이 과한 사람이다. 그냥 보고 넘어갈 리가 없다.

따라서 그는 과거의 일원론적(unilateral) 미국 제국과는 다른, 지역 맹주들의 자율성을 인정하는 세계 전략을 구축하고 그 중의 약한 고리는 매우 강하게 압박하려 할 것이다. 거기가 우크라이나가 될지, 이란이 될지, 혹은 대만(또는 한반도)가 될지는 각 지역의 세력들의 대응 여부에 달렸다. 그들이 자신들의 이해를 위하여 전쟁을 원한다면, 트럼프는 ‘평화의 사도’임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전쟁에 동참할 것이다. 왜냐하면 세계화는 기각하더라도 세계화의 결과로서 축적된 미국의 힘을 유지하는 것만이 미국 내에서도 자신들이 세력을 확대하고 유지하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그는 세계화 이전의 미국으로의 귀환을 꿈꾼다. 그것은 단지 1970년대로의 회귀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2차 대전 직후에서 1960년대까지의 미국의 좋았던 시절, 혹은 1880-1914년까지의 ‘good times’로 돌아가기를 원한다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트럼프가 수행하려는 미국 번영 프로젝트의 핵심인 ‘무역관세’는 세계 경제뿐만이 아니라, 미국 경제까지도 도탄에 빠뜨릴 것이라는 충실한 연구논문들은 이미 차고 넘친다(대표적으로 글로벌리스트의 대표적 경제 씽크탱크 중 하나인 Peterson Institute for International Economics 홈페이지에 가면 트럼프 관세에 따른 경제적 충격이 상세하게 분석되어 있다. 이들 연구에 따르면 만일 트럼프가 자신이 공약한대로 무역 관세 장벽을 세운다면, 글로벌 경제는 1930년대 대공황 시절에 못지않은 충격에 빠질 것이다). * 오늘의 차트 ”썩은 동앗줄 – 트럼프 관세가 한국경제에 미칠 영향” (2024년 11월 14일) 참조

죽은 자들이 과거를 꿈꾸면, 세계는 함께 죽어간다. 미래는 이미 소진되었으며, 과거는 오지 않을 것이다. 훗날의 역사는 지금 현재를 미래와 과거가 중첩된 그림자의 모사품이라고 평가할 것이다. 또는 미국식 표현대로 하자면, ‘shadows of one’s former self’, 죽은 자의 그림자라고 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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