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와노동 연구소

한국의 도구적 민족주의와 전지구적 동맹정치

한국의 도구적 민족주의와 전지구적 동맹정치

: 북한의 우크라이나 파병설과 한반도 위험의 정체

2024년 10월 24일 / 권영숙의 낯선 새로움
권영숙 민주주의와노동연구소 소장

한반도, 핵우산, 한미일동맹, 북러동맹, 대서양동맹, 우크라이나전쟁, 북한 파병설, 미국 헤게모니 

한국인들(the South Korean)과 한국 사회가 최근 북한이 우크라이나에 파병했을지도 모른다는 문제를 둘러싸고 보이는 모습은 국가주의와 도구적 민족주의의 결합이다. 현재 한국에서 보이는 민족주의는 전통적인 민족주의가 아니라, 도구주의적이고 편의적인 국가주의의 외피로서 민족주의에 가깝게 보인다. 과연 남한이 북한의 우크라이나 ‘파병’ 여부에 대해서 이런 방식으로 뜨거운 관심을 가지는 것은 어떻게 봐야할까?

북한 우크라이나 파병설의 진원지: 삼인성호 (三人成虎)

이 문제를 살펴보기 전에 먼저, 북한군의 우크라이나 전쟁 파병‘설’의 기원과 출처에 대해 알아보자.
첫 시작은 남한발이었다. 남한의 김용현 국방장관은 지난 10월 5일 국회에 출석하여 “북한군이 러시아를 지원하기 위해 우크라이나에 파병될지도 모른다”고 발언했다. 아직 어디에서도 북한이 우크라이나에 파병되었다는 뉴스가 나오기 전이다. 그리고 그 시기를 전후하여 우크라이나의 텔레그램 채널(언론 역할을 한다)에서 러시아군을 지원하고 있던 북한군 주둔지에 미사일이 떨어져 6명의 북한군 장교가 사망했다“는 루머가 퍼진다.

그리고 지난 10월 11일 미국 우익 이데올로기의 총본산 격인 랜드연구소는 중-러-북한의 3자 협력협정 체결에 대한 논평에서 매우 흥미로운 분석과 제안을 내놓는다.
“미국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러시아, 중국, 북한의 목표가 각기 다르다는 점을 감안하여, 미국은 이 3개국에 대하여 각기의 이해관계가 다르다는 것을 강조하고 그들 사이에 불신을 초래할 수 있는 주요한 정보 공작을 수행해야만 한다…잠재적 정보 공작의 사례들은 명백해 보인다…미국은 북한 군사자문단이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지역에서 북한산 무기를 사용하는데 지원하고 있다는 것을 인지해야만 한다…”(2024년 10월 11일자, 랜드연구소 연구원 브루스 베넷의 논평)

그리고 그 사흘 뒤인 10월 14일 우크라이나의 키에프타임즈에 밑도 끝도 없는 텔레그램 채널을 인용하여 북한군이 우크라이나에 파병될 것이라는 뉴스가 실리며, 한국 언론들도 이를 보도하기 시작한다. 10월 18일에는 드디어 숫자까지 나타난다. 우크라이나의 부다노프 군 정보국장은 북한이 1만 1천여명의 병력을 파견할 준비가 될 것이라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증거는 없다. 발언이 전부다. 한국의 연합뉴스는 여기서 1천명을 깎았다. “북한은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러시아를 지원하기 위해 1만 명의 병력을 파견키로 했다”(18일자 연합통신).

드디어 뉴욕타임즈 10월 16일자는 여기에 살을 붙인다 ; “실전 경험을 염원하며 우크라이나 파병 염두”. 이 기사를 읽는 독자들은 증거가 어디에 있는지 어리둥절하며, 심지어 나토의 마르크 루테 사무총장조차도 “북한이 전투에 가담하고 있다는 증거는 없다”고 말한다. 다만 “우리는 북한이 무기 지원, 기술 지원, 혁신 등 여러가지 방식으로 러시아를 지원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숟가락을 얹을 뿐이다. 이어 미국 의회는 19일 아예 북한의 우크라이나 파병설을 기정사실화하고 바이든 행정부에 대책을 요구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현재 10월 23일에는 미국의 오스틴 국방장관이 “북한군이 러시아에서 훈련을 받고 있다는 증거가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이 병력들이 우크라이나 전쟁에 참전했다고 말하지는 않았다.  단지 “북한군이 우크라이나전쟁 참전을 준비하고 있다면 매우 심각한 문제”라고 말했으며 그 규모도 말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증거를 제시하지도 않았다. 그는 “북한군이 거기(러시아)에서 무슨 일을 할지는 지켜보아야 한다”고 말했을 뿐이다. 

이렇게 해서 3인이 외치니 호랑이가 생겼다(삼인성호 三人成虎). 
현재 북한이 정말로 우크라이나 전쟁에 병력을 파견했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 했다는 증거는 없다. 했다는 주장은 난무한다. 언론은 증거가 없으면 쓰지 않거나, 혹은 아주 제한적으로만 ‘증거가 없다는 것을 강조하여’ 보도해야 한다. 이건 언론의 기본 원칙이다. 물론 그걸 믿고 기대하는 건 아니다.

이후 10월 19일부터는 우크라이나발 선무당이 출연한다. 아조프 연대는 “이 기회에 한국이 남북통일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트윗을 날렸다. 북한이 우크라이나에 파병하면 남한이 북한을 침공해야 한다는 얘기다. 아조프 연대의 정신적 뿌리이자, 2차 대전 당시 나치에 부역하여 10만이 넘는 민간인을 학살한 스테판 반데라의 후계자다운 얘기다. 아조프연대는 신나치가 아니다. 구나치다. 인종청소까지 완전히 답습한다. 다만 그 대상이 유태인이 아니라, 같은 슬라브인일 뿐이다. 우크라이나전쟁 초기 마리우폴 전투를 보도하면서 아조프 연대를 ‘침략에 맞선 구국의 영웅’으로 물고 빨던 한국의 언론들을 생각해 보면, 요즘 유행하는 온라인 밈을 빌자면, “조선 팔도에 기레기를 고치는 약은 없다”.

앞에 언급했던 미국 우익의 이데올로기적 본산인 랜드연구소의 논평에는 흥미로운 점이 하나 있다. 랜드연구소는 미국의 정보공작이 북한의 ‘내부’를 흔드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북한의 파병부터가 내부적 동요를 막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참전한 북한군의 참상을 북한에 알려 민심 이반을 유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논리는 매우 기괴하지만, 남한 내부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존재 확인이 불가능한 파병설로 ‘우크라이나에 공격 무기 지원’설과 나아가 주한러시아 대사 초치라는 외교적 장식까지 동원한 남한 정부의 ‘타이밍’은 현 정권이 궁지에 몰리는 순간에 절묘하게 작동했다. 물론 약효가 있는 것은 아니다.

김건희와 젤렌스키. 지난 2023년 7월 우크라이나를 방문한 김건희 여사가 젤렌스키 대통령과 악수를 나누고 있다. 출처:<경향신문>” width=”500″ height=”352″><br><span style=김건희와 젤렌스키. 지난 2023년 7월 우크라이나를 방문한 대통령 부인 김건희가 젤렌스키 대통령과 악수를 나누고 있다. 출처:<경향신문>

한미동맹- 신성불가침의 동맹 혹은 불가피한 현실

그러나 진짜로 주목해야할 것은 ‘설’의 기원과 신빙성보다는 이 ‘설’이 작동하는 방식, 그리고 그것을 배후에서 추동하는 지난 수십년간 남한 사회를 지배해 온 ‘논리’들이다.
극소수를 제외하고 한국인들은, 심지어 종북을 비판하는 소위 신좌파들까지 한미동맹이나 미국이 제공하는 ‘핵우산’에 대해서 모른 척, 아니 사실상 움직일 수 없는 현실이라고 인정한다. 그리고 남한 땅 도처에 미군 부대의 주둔과 미국 핵항모의 입항에 대해서도 소수의 문제제기 세력이 있을뿐 사회 전체적으로는 중요한 의제나 논쟁거리가 되지 않은지 오래다. 80년대 초반 잠깐 “반전반핵 양키 고 홈!”이 대학생운동에 의해서 외쳐졌을 뿐이다.

또한 미국 주도로 동아시아를 유럽의 NATO처럼 만들거나 심지어 NATO의 일부로 만들려는 노력이 서서히 가시화되고 있고, 이것이야말로 이 나라 ‘국익’과 ‘안보’에 엄청난 파장을 가져올 일인데도 이에 대해서도 거의 관심이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미국이 ‘알아서’ 할 일이고, 대한민국은 그에 개입하거나 주도할 ‘힘이 없어서’, 그리고 은연중 지금은 ‘미국 군사 그늘’ 아래 있는 것이 ‘유리’하니까. 이런 입장을 대놓고 야당은 물론이고 일부 진보진영에서도 말한다. 하지만 그 유리함이라는 게 알고 보면 한미동맹의 본질이며, 그 불가피한 현실이라는 배후에 자리잡고 있는 것은 이 나라 ‘국민’의 이해관계이다. 그리고 그것이 한국 자본주의 체제의 필수조건이다.

그러면서도 한국과 한국인들은 최근 북한이 러시아와 더욱 긴밀한 관계를 맺고 ‘포괄적 전략적 동맹’ 관계로 상호 관계를 격상한 데 이어 그 협약에 근거한 러시아의 요청으로 우크라이나에 파병할 가능성에 대해선 이렇게나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 지난 며칠 사이에 이 문제는 전사회적 ‘뜨거운 감자’로 부상했고, 이 사회와 언론은 북한이 우크라이나에 파병을 했는가 안했는가의 문제에 온통 관심을 쏟아내고 있다. 하루가 멀다하고, ‘출처’도 확인되지 않은 정보들이 나오고 있다.

한국의 보수 양대 정당: 친미와 친일 사이

지금까지 한국, 즉 남한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미국의 제국주의까지 불가피하다고, 혹은 자발적으로 선택한 한미동맹을 굳건히 구축하고 있다. 이는 비단 리버럴들이 비판하는 현 윤석열정권에서만 벌어지는 일이 아니고 87년 이행 이후 한결같았다. 그리고 한미일 동맹에 대해서도 기본적으로는 인정한다. 이것 역시 현정권만의 일이 아니다. 민주당 정권에서도 그랬다. 단지 양당이 국제관계 및 외교정책에서 보이는 차이는, 민주당 자유주의 정권은 ‘마지못해’ 하는 듯이 하거나 ‘노골적’으로 표현하지 않았거나 ‘점차적’으로 진행했다면, 현 집권 우파 정권은 노골적이고 주체적이고 급진적으로 진행하려고 한다는 점이다. 다르게 말하면, 현정권과 우익세력은 친미적일뿐 아니라 친일적이다. 반면 리버럴 민주당 지지 세력은 철저하게 더 친미적이고, 때로는 반일적이다.

하지만 그 차이가 얼마나 될까? 그리고 그 차이가 과연 그동안 그렇게 컸을까? 그리고 미국 앞에서 한국의 반일은 정말 반일일 수 있을까? 대표적인 사례가 문재인 민주당 정권이다. 국내법원의 강제동원 판결에 정부가 개입하였고, 이에 일본 정부가 한국 수출품목 특혜 권리를 박탈하면서 급기야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지소미아)이 폐기되었다. 국내에서 민주당 정부 주도하에 반일 아닌 극일 광풍이 적당히 불어주면서 일본을 더 정확히는 일본 자본주의를 이기자라는 속도전이 전사회적으로 일면서 삼성등 당시 재판중이었던 재벌들의 죄를 사회적으로 이미 사면해주고, 복권도 진행되었다. 재벌 대기업들의 신기술 개발을 위한 공적 자금을 천문학적인 숫자로 투입하고 이를 그린딜이니 뉴딜이니 하는 말들로 포장하고. 그러더니 슬그머니 지소미아도 살리고. 하지만 정작 한일 무역분쟁의 동기가 되었던 강제동원과 일본군 위안소 피해자들들을 위한 해법 문제는 더욱 혼란에 빠지고 법원 판결의 이행은 미뤄지다가, 여전히 ‘미해결 과거사’로 남게 되고. 그 시간을 인내하다가 결국 끝을 보지 못하고 죽은 이들도 있고.

그렇다면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와 이 사회는 이들 일제 식민지 피해자들에게 무슨 짓을 한 것일까? 누구 좋은 짓을 해준 것일까? 그리고 국가는 민간인 피해자들의 문제에 대해서 어떤 권리를 행사해도 좋은 것일까? 이는 1962년 박정희 정권하에서 당시 중앙정보부장 김종필과 오히라 마사요시 일본 외상간의 ‘김종필- 오히라 메모를 다시금 떠올리게 한다. 일본이 독립축하금 혹은 경제성장 자립 원조금 명목으로 무상 3억 달러, 유상 2억 달러, 그리고 수출입은행 차관 1억 달러등 도합 6억 달러 식민지 청구권을 해소하면서 강제동원과 위안소 피해자 문제를 국가 일방적으로 봉합했던 것과 무엇이 다르랴. 민간인 피해는 국가간 논리 속에서 다시 희석되었다.

’북한 리스크‘ 혹은 민족문제: 유동성의 변화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지점이 있다. 만약 국내에서 ‘북한문제’(결국은 ‘미국문제’)에 대한 인식과 해법의 차이가 컸다면 북한이 저렇게 나오게 됐을까? 북한 스스로 ‘동족’ 개념을 버리고, ‘통일 지향’도 버리는 지경까지 됐을까? 이 점이 지금 또다른 문제로 제기해야할 논점이다.

그동안 남한은 북한이 70년대 말부터 남한과의 체제 경쟁에서 추월당한 이후 생존권 차원에서 도모한 모든 노력에 대해서 부정하거나(현 우익정권), 친미적으로 미국의 눈치만 보면서 허송세월(민주당 자유주의정권)을 했다. 남한 안에선 간혹 자주와 주권을 말했거나 말하는 척이라도 했던 김대중, 노무현, 문재인 등도 대통령이 당선된 후 미국에 가서는 ‘No’ 한마디 못하는 정권이었다. 미국의 국제전략을 벗어나지 않았다. 심지어 미국이 일본을 동아시아 군사동맹에 끌어들인다고 해도 한국과 제도정치권은 결국 받아들일 것이다. 이미 그리하고 있다. 결국 대한민국은 미국의 군사안보 그늘과 핵우산을 유지하고, 자신(그게 국가이든, 자본주의이든)의 국익을 위해서, 이라크에도 파병하고, 일본과도 가까워지기도 하고 멀어지기도 하고, 모든 외교를 미국의 헤게모니를 저촉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다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단이후 남북한 관계는 ’의도적으로 결정되지 않은‘ 유동성을 지녀왔었다. 60년대까지는 휴전선을 사이에 둔채 사실상 소규모 무력충돌을 지속했고(이른바 ’공비‘), 70년대 초반 미-중 수교로 냉전 체제가 약화되고 데땅트가 이뤄지자, 남북한은 이후락 당시 중앙정보부장의 평양 극비 방문과 이후의 ’평화통일 3대 원칙‘으로 귀결되는 관계 개선을 도모했다. ’민족적, 자주적, 평화적 통일‘이라는 합의 하에서 남북한은 각기 내부 정비를 시작했고 그것이 북한에서는 주체사상과 3대 혁명 소조운동, 남한에서는 유신과 새마을운동이었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과 김일성 정권이 국제정세의 변화 속에서 생존책으로 모색했던 평화통일 3대원칙은 80년을 기점으로 사실상 파기되었다. 북한은 고려연방제를 천명하여 3대원칙을 헌법적으로 보장했지만 남한의 전두환 정권의 5공 헌법은 오히려 구 냉전 체제의 대외정책을 강화한 것이었다.

90년대 들어 남북한 관계는 노태우의 북방정책(세계화에 발맞춘 남한의 대외전략)으로 다시 한번 요동을 친다. 그 결과가 남북한 동시 유엔 가입이었고, 이는 사실상 남북한이 별개의 두 나라로서 국제적으로 인정된다는 것을 국제적으로, 그리고 국내적으로도 인정한 사건이었다. 비록 남한은 남북한기본법을 통과시키기는 했지만, 이 때부터 남북한의 국제적 지위는 사실상 두 개의 국가라고 할 수 있다. 단지 공식적으로 그것을 인정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하지만 국제관계론적으로 그렇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남한의 지배층은 여전히 북한을 자신들의 존재를 정당화하고 대외정책의 레버리지로서 활용했다. 이같은 이중적 스탠스가 동시 유엔 가입 이후의 남한의 기본 정책이었다고 할 수 있다 : 즉, 자본주의 한국에 유리한 ‘체제 통합’ 혹은 ‘흡수통일’에만 관심이 있었다. 그러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사실상 북한을 ‘또 하나의 국가’로 간주하는 태도를 보였다. 특히 2008년 이후의 글로벌 변동 속에서 남한의 기본적인 인식은, 남북이 국가적으로 분리되는 것이 남한 사회(그게 지배 엘리트이든 이른바 ‘국민’이든)에 더 낫다고 보는 흐름으로 변했다. 혹은 결국 마지막에는 흡수통일일 것이라고들 생각한다. 이는 국내의 이른바 좌파도 큰 차이없이 마찬가지다. 민족문제와 국가문제에 대해 남한 좌파의 입장은 옹색하거나 지배 이데올로기를 답습하고 있다.

한국의 도구적 민족주의

결국 한국이 북한문제를 대하는 태도는 도구적인 민족주의다. 자신은 하나의 독자적인 국가로, 혹은 미국 헤게모니에 주권을 저당잡힌, 즉 ‘비주권적인 국가’로 국제관계를 풀어가고, 필요한대로- 물론 미국의 요구까지 반영하여- 국가간 동맹 관계를 체결하거나 강화하면서, 그리고 심지어 해외 파병까지 하면서. UN 평화유지군으로 침략 전쟁 이후의 질서화에도 개입하면서.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것이 가장 비열한데, 전쟁도 끝나지 않았는데, 타국의 전쟁 속에서 ‘전쟁 특수’ 손익계산까지 마쳤으면서, 우크라이나 전쟁이후의 ‘이해득실’을 미리 따지면서 우크라이나에게 전쟁무기를 대주면서, 지금은 북한이 우크라이나에 파병을 했는가 아닌가를 가려내는데 초점을 두고, 마치 이 나라가 그 나라의 파병에 대해서 준엄한 판단을 할 수 있는 판결권자인 것처럼 행동하고 사고한다.

한국은 북한을 동족은 커녕 ’주적‘으로 규정한 국가이면서, 북한이 ’동족‘ 개념을 최근 급기야 폐기하고 스스로 생존 도모에 나선 것을 두고 ‘폭주’라고 표현하며 길길이 날뛴다. 이같은 태도의 근저에는 여전히 북한에 대한 이중적 스탠스와 동시에 북한과의 체제 경쟁(이 경우 남한으로 대표되는 ‘collective west’와 북한으로 대표되는 중-러 동맹의 proxy-괴뢰-로서 각기 자발적으로 동원된다)이라는 힘이 작동하고 있다.

러시아국기와 북한 국기가 함께 우크라이나 전선에 휘날리고 있다
러시아국기와 북한 국기가 함께 우크라이나 전선에 휘날리고 있다. 한국 언론들은 이 사진을 북한의 우크라이나 파병설을 뒷받침하는 예시로 보도했다. 한국 기자들은 ‘러시아식 블랙 유머’에 대해 전혀 무지하다. 하다 못해 톨스토이의 <바보 이반>조차 읽어본 기자가 아무도 없는 듯하다. 이런 종류의 사진들(흔히 trolling-골지르기-라고 불린다)은 러시아군의 텔레그램 채널이나 트윗(X)에 보면 수십개가 돌아다닌다.

북한이 러시아를 지원하여 우크라이나에 참전하든 말든(아직 사실로 확인된 것조차 아니다), 실은 한국의 ‘안보’와는 직접적 연관이 있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미 한국은 수십년째 미국과 합동군사훈련을 해오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북한이 우크라이나에 파병했는가 여부가 남한이 우크라이나에 공격 무기를 지원할 이유가 되지 못한다.

북한의 우크라이나파병설에 곧바로 우크라이나 공격무기 제공설을 흘리는 남한의 행동은 북한을 겨냥한 것이 아니라, 러시아를 겨냥한 것이며, 그런 점에서 러시아를 포위 압박하는 collective west의 군사정책에 동원되고 있을 뿐이다. 이는 동시에 러시아의 직접적인 일차적 공격 대상에 포함될 위험이 높아지기 때문에 오히려 남한의 안보에도 부정적이라고도 할 수 있다.

북한 체제와 정권에 대한 평가와 상관없이 지금 한국과 한국인들의 태도는 자가당착이다. 도착적이며 도구주의적인 민족주의다. 자신은 필요하다는 이유로 한미동맹의 재공고화는 물론, 한일군사협력도 강화하고, 심지어 NATO 주최 회의까지 들어가는 등 모든 동맹을 구축하며 자신을 보호할 권리가 있다고 하면서, 그리고 북한을 ‘주적’으로 규정하고 있는 한국이 무슨 자격으로 북한의 파병이나 친러 동맹을 자기네 안마당 문제처럼 이렇게 비판할 수 있을까라는 내재적인 비판은커녕, 어떤 의문을 제기하거나 논쟁이 시작되지도 않는다.

또 그런 이해관계만 고려하면서 미국이 전새계를 어떻게 휘두르고 분탕질치는지 그에 대해선 눈감고 모른체 한다. 일례로, 지난해 5월 임기가 끝났는데도 선거도 없이 연임하며 대통령 행세를 하고 있는 젤린스키(선거를 치르지 않았기 때문에 우크라이나 헌법상으로는 젤렌스키는 아무런 권한이 없다. 의회가 모든 권력을 가지고 있다)의 폭탄 발언으로 시작하고, 한국 국정원이 확대하는 파병설이 있다면, 미국과 유럽의 대서양동맹은 이미 우크라이나 전쟁에 군사적으로 개입을 넘어 군사적인 파병을 하고 있다.

정보공작의 실패 사례; 우크라이나 텔레그램 채널에 올라온 북한군의 우크라이나 파병에 대한 한국어로 쓴 경고 포스터정보공작의 실패 사례; 우크라이나 텔레그램 채널에 올라온 북한군의 우크라이나 파병에 대한 한국어로 쓴 경고 포스터. 그런데 북한과 남한을 혼동했다.“한국 군인이여, 우리가 당신을 참수하겠습니다”라고.

미국과 유럽의 대리전장 우크라이나: 한반도의 지정학적 리스크

미국과 유럽의 대리전장 같은 곳이 우크라이나다. 영국은 얼마전에도 군인들을 모병해 우크라이나에 파병했다. 미국과 독일 등에서 보낸 군인과 군사전문가들은 전쟁 초기부터 등장했다. 젤렌스키가 얼마전 러시아 후방을 타격할 수 있는 미사일의 지원을 서구에 요청한 것은 실은 그 목표는 단지 ‘러시아’뿐만이 아니라, 러시아의 카잔에서 열리는 BRICS 정상회담(이번 회담에서 약 10여개국이 회원국으로 추가될 것으로 보인다)을 겨냥한, Global South를 겨냥한 무력 시위라고 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한국의 우크라이나 공격 무기 제공 운운도 단지 북한과 러시아를 겨냥한 것이 아니다. Global South 전체를 압박하는 주구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은 아무도 묻지 않고 있지만, 만일 사태가 위의 방향으로 악화되어 한국이 우크라이나에 중거리 미사일을 제공한다면 어떻게 될까? 강남의 땅 값이 평당 만원이 되어도 사려는 사람이 없게 될 것이다. 남한의 지배층이 자신들이 손해 위험에도 불구하고 모험적 행동을 감행하지 않을 것이라는 이성적 판단은 왜 ‘주구’를 ‘주구’(달리는 개)라고 부르는지 먼저 고려해야만 할 것이다.

하지만 한국내에서 북한의 우크라이나 파병설을 대하는 태도는 상황을 쫒아가기에 급급하다. 아니 상황을 쫒아가기는커녕, 우크라이나 발 카더라 통신과 ‘국내정치용 정보 조작’의 전력이 화려한 한국 국정원이 증폭시키는 그 소위 ‘군사정보’를 그대로 믿거나, 믿을 수도 있다는 안이한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언론은 이를 취재를 통해서 정확히 알리려는 노력을 제대로 하고 있지 않다.

문제는 과연 한반도는 우크라이나와 어ᄄᅠᇂ게 연결되고 있는가이다. 북한이 러시아 요청으로 우크라이나에 파병하였다는 ‘설’이 나오자마자, 한국 정부는 우크라이나에 대놓고 공격무기를 제공할 수 있다고 말한다. 무엇인가 이상하지 않은가. 미국이 유럽과 대서양 동맹을 핵심으로 전지구적 정치군사적 전략하에서 자신의 국익을 어떻게 재편하고 있는지, 서구 중심의 자본주의 체제를 유지하려고 하는지 한국 사회는 얼마나 의문을 던지고 있는가? 그것이 남한 민중의 관점에서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그래서 이 나라 안에서 어떤 입장을 세우고 바꿀 힘을 만들어야하는지 우리는 얼마나 충분히 고민하고 있을까?

물론 우크라이나 북한군 파병에 대한 이런 관심도 사실은 남한내 지배엘리트와 가진자들과, 이 체제 안에서 살고자 하는 이들의 ‘이해’관계 속에서 나오는 속보이는 관심이긴 하다. 하지만 좀 뻔뻔하다. 나는 자유롭고 너는 ‘민족’이라는 틀안에 매여 있어라 라는 것은. 그것이 바로 도구적 민족주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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