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글로리아 스타이넘(Gloria Steinem)이 죽었다
- 미국과 전세계 반공 자유주의적 ‘2차 페미니즘 물결’의 상징
2026년 9월 4일 / 글로벌 사회운동
글 권영숙 민주주의와노동연구소 소장
1차 페미니즘, 2차 페미니즘, CIA 역공작, 낙태 폐지, 정체성 정치, 반공 자유주의
지금은 거의 잊혀졌지만, 1960-80년대 페미니즘을 기억하는 사람들에게는 전설과 같은 이름이다. 그리고 정말, 여러가지 의미에서의 ‘전설’이었다. 향년 92세(1934년 3월 25일 – 2026년 9월 2일).
스타이넘은 1920-30년대의 세계적인 제1차 페미니즘 물결에 이어, 60년대부터 시작된 2차 페미니즘 물결을 이끈 핵심인물이다. 그러나 여기서 미리 밝혀야할 것은 1차와 2차 페미니즘은 그 성격이 현저하게 달랐다. 1차 페미니즘은 소련을 중심으로 한 공산주의 운동과 긴밀하게 결합되거나 그 일부였다. 2차 페미니즘은 2차대전후 미국을 중심으로 한 자유주의적 반공주의 운동의 첨병이었고, 심지어 CIA 역공작(Cointel)의 일환이었다. 그 중심에 글로리아 스타이넘이 있었다.
글로리아 스타이넘은 1934년 미국 오하이오 주에서 태어났다. 가난한 가정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등록금이 비싼 1956년 사립여자대학인 스미스대학을 졸업한 뒤, 체스터 볼스 장학금을 받고 2년간 인도에서 생활하면서 간디주의 조직의 영향을 받았다고도 전해진다.
스타이넘은 50년대 후반부터 여성의 지위와 낙태 문제를 이슈로 여성운동을 시작했다(스타이넘 스스로가 1957년 영국 런던에서 낙태 수술을 받았다. 당시에는 불법이었다). 그러나 나중에 밝혀졌듯이 그의 사회활동은 첫 출발부터 CIA의 프락치로 시작되었다. 이는 그 스스로도 인정한 사실이다. 고로 이 말인즉 미국을 중심으로 한 여성운동은 CIA 공작으로 시작된 것이기도 하다. 스타이넘은 1958년 CIA에 프락치로 채용된 뒤, Independent Research Service(독립조사기관)라는 단체를 설립한다. 이 단체는 훗날 임수경의 방북으로 유명해진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참석하는 미국 학생들을 감시하고 반공주의를 선전하는 역할을 맡고 있었으며, CIA가 자금을 조달한 단체였다. 이와 동시에 그는 독립저널리스트로서 명성을 떨치기 시작했다.
활동 초기 스타이넘은 자신을 ‘사회주의자’이며, ‘반전론자’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는 1961년 미국 대통령 선거 민주당 예비경선에서 베트남 전쟁을 반대한 유진 매카시 연방 상원의원(흔히 매카시즘으로 알려진 죠셉 매카시와 다른 인물이다)를 지지했다가 곧바로 철회했으며, 이후에는 매카시 의원이 케네디 후보를 공격한다고 오히려 비난하기도 했다(근데 대통령 후보 케네디는 베트남전에 공식 참전하기도 했으며,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죠셉 매카시에 대해서 그의 몰락 이후에도 끝까지 비난하지 않은 거의 유일한 중요 정치인이다). 또한 스타이넘은 낙태 이슈에서 열정적인 운동가였지만, 인종 문제에 대해서는 동일한 자세를 보이지 않았다. 잘 알려졌다시피 스타이넘은 흑인 민권 운동을 지지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가 “흑인 남자들은 백인 여성들보다 50년이나 일찍 참정권을 얻었기 때문”이었다.

1967년 <뉴욕타임즈>가 스타이넘이 CIA 프락치라는 사실을 폭로했다. 스타이넘은 이를 순순히 인정하면서 “CIA는 대중적 이미지와는 달리, 비폭력적이고 리버럴하며 명예로운 기관”이라고 주장했다. 그 이후로는 그는 CIA와 공식적인 연계 관계를 중단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스타이넘이 ‘리버럴하며, 비폭력적이고, 명예롭다’고 찬양한 CIA는 바로 그 기간 동안에 전세계적으로 수백만을 학살하는 공작을 벌였다.
1970년대 스타이넘은 닉스-포드 대통령 정권 하에서 법무부 차관을 지낸 스탠리 포팅거와 7년간 동거했다. 포팅거는 닉슨-포드 정권 하에서 시민권 담당 차관이었으며, 마틴 루터 킹 목사 암살 사건 조사를 방해한 인물로도 알려져 있다. 스타이넘을 포섭한 CIA의 코드 메이어는 비밀 공작 담당자로 스타이넘 뿐만 아니라, 소련을 약화시키기 위해 트로츠키주의자들도 포섭했으며 나중에는 글로벌 자본가/정치가 회의체인 와버그 재단의 제임스 와버그와 함께 United Federalist World라는 단체를 결성하여, ‘시민권’(citizenship)이라는 개념을 확산시키는데 지대한 공헌을 하기도 했다.
스타이넘은 1972년 CIA와 포드 재단, 록펠러 재단의 자금 지원을 받아서 <Ms (미즈)>라는 페미니즘 잡지를 창간했다. 그는 여성을 결혼 여부에 따라 ‘미시즈’(Mrs)와 ‘미스’(Miss)로 나눠 부르지 말고 ‘미즈’로 통일하자는 주장을 하였다. 이 잡지를 통해서 스타이넘과 그를 지지하는 페미니스트들은 자신들을 ‘급진적 페미니스트’라고 규정했다. 이로 인해, 과거의 ‘혁명적’ 사회주의적 페미니스트 전통은 그 이름마저 빼앗기고 밀려났다 (그러나 동시에 스타이넘은 페미니스트도 미니스커트와 가죽 부츠를 입는 “아름다운 페미니스트”일 수 있다는 페셔니스타의 이미지로 대중문화의 아이콘으로 자신의 영역을 구축하기도 했다)
이후 스타이넘은 한동안 활동이 주춤하면서 대중의 눈에서 사라진 듯하다가, 1990년대 빌 클린턴과 모니카 르윈스키의 스캔들 사건 당시에 클린턴의 행동이 ‘성추행’(sexual harrassment)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주쟁했다가 페미니즘 진영 일부로부터 격렬한 비난을 받았다. 그리고 스타이넘의 가시적인 몰락은 이 때부터 본격화되었다.

스타이넘이 미국과 전세계 페미니즘에 미친 영향은 ‘여성’이라는 ‘위치’를 모든 것을 판단하는데 있어서 절대적 기준으로 내세웠다는 점이다. 여성이라는 본질을 상정한 일종의 환원론이다. 과거 1950년대 후반 매카시즘이 해체되면서 다원주의(pluralism)로 시작되었던 미국의 자유주의는 1970년대 후반의 스타이넘 페미니즘에 이르면 ‘정체성 정치’(identity politics)로 전화한다. 인종 문제 역시 거의 유사한 궤적을 밟았다.
70년대 후반 이때부터 사회적 보편성 투쟁은 ‘시민권’과 같은 법적이고 추상적인 영역으로 전화되며 혁명적 운동은 그 혁명의 주체가 될 집단 사이의 가치와 정치적 올바름을 향한 개싸움으로 변질되고 만다. 이렇게 해서 혁명은 다양한 ‘복수의 아이덴티티들’ 사이의 영역 다툼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 점에서 스타이넘을 포섭하기도 했던 CIA의 코드 메이어는 아마도, 케네디와 닉슨, 레이건을 합친 것보다도 더 업적을 남겼으며 그 어떤 20세기 후반의 사상가보다도 더 통찰력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출처 : <The Guardian>
그러나 스타이넘은 자신이 ‘행동’과 ‘정치적 기준’에 있어서는 정체성 정치의 선구자였지만, 정작 이를 이론화하는 작업에 대해서는 굉장히 비판적이었다. 스타이넘의 쥬디스 버틀러에 대한 맹비난은 유명하다. 이것 역시 그의 자유주의적 페미니즘의 보수성의 일단일 것이다. 스타이넘에게 절대적 준거점은 여성이었지만, 여성을 뛰어넘는 더 절대적인 지상과제가 있다면 그것은 ‘반공’이었을 것이다.
2008년과 2016년 미국 대선에서 스타이넘은 대통령 후보로 힐러리 클린턴을 지지했다. 심지어 2016년 민주당 예비경선에서는 자신이 명예의장으로 있는 미국민주사회주의자(DSA)가 버니 샌더스 후보를 지지했음에도 불구하고 힐러리를 지지했다. 기자들이 이에 대해 질문하자, “남자들은 모두 어디에 있는가? 샌더스 밑에”라고 대답했다.
스타이넘은 한국에서도 ‘정치적 족적’을 남겼다. 지난 2015년 스타이넘은 각국의 여성 평화운동가들과 함께 평양에서 비무장지대를 넘어 서울에 이르는 평화행진을 거행했다. 의외로 한국에서 거의 반응이 없었는데, 그 때는 이미 박근혜 정권의 몰락이 가시화될 무렵이었기 때문이었던 듯하다. 그리고 3년 뒤에 트럼프가 그 뒤를 이어 비록 평양까지는 가지 못했지만, 군사분계선을 넘었다. 스타이넘은 노구를 이끌고 생의 거의 마지막까지도, 반공주의 자유주의라는 자신의 미션에 충실했던 것이다; 즉 미국의 대외정책의 사회적 디딤돌을 놓는 일. 1950년대 CIA의 지시로 미국 학생들을 이끌고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참석한 인생 경력의 첫 출발이 거의 60여년 뒤에 한국에서 재현되었던 것이다.
스타이넘의 이력과 활동이 보여주는 것은 단지, 페미니즘이 어떻게 변질되었는가에 관한 것이 아니다. 더 넓게는 한 공동체 내에서 사회를 가르는 다양한 횡단 지점들이 어떻게 형성되며, 이를 ‘권력’은 어떻게 유도하고 조절하며 확산시키며 서로를 대립하고 이를 다시 권력의 원천으로 삼을 수 있는가에 대한 생생한 역사이기도 하다.
스타이넘은 죽었지만, 그의 후예들은 한국에서 그리고 전세계 곳곳에서 뿌리를 내리고 번성하고 있다. 스타이넘은 그나마 이름이라도 기억하지만, 시몬느 보봐르는 이제 영영 잊혀진 이름이 되고 말았다. 인생은 짧고 공작은 길다. 아니, 인생은 짧고 아이덴티티는 주인없는 유령이 되어 오래 떠돌아다닌다.
주요 저서
Outrageous Acts and Everyday Rebellions(1983) (<글로리아 스타이넘의 일상의 반란>, 2002)
Revolution from Within(1993) (<셀프 혁명>, 2016)
As if Women Matter: The Essential Gloria Steinem Reader(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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