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와노동 연구소

21대 대선 분석 전쟁(戰爭)과 정쟁(政爭) 사이: 민주주의, 세대, 그리고 계급전쟁

21대 대통령선거 분석

전쟁(戰爭)과 정쟁(政爭) 사이 : 민주주의, 문제적 세대, 그리고 계급전쟁

2025년 6월 26일 / 이슈 리포트 
글 권영숙 민주주의와노동연구소 소장

민주대연합, 프레임, 동진전략, 연대회의, 5060 베이비부머, 이대남, X세대, MZ세대, 중도보수, 진보후보, 계급전쟁(class warfare)

1. 오체불만족의 선거 

승패는 갈렸지만, 누구에게도 만족스럽지는 않았다. 승자인 이재명 후보는 과반수(50%)를 넘기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김문수 후보와 이준석 후보의 합산 지지율인 49.5%에 살짝 못미치는 49.42%를 얻었다.
김문수 후보는 41.15%를 얻었다. 계엄으로 정당성을 상실한 정당 후보였을 뿐만 아니라 선거 운동의 부실함을 고려하면 엄청난 선방이었지만, 그러나 어쨌든 결론은 패배였고 지역적으로는 영남만을 사수하는데 그쳤다. 더 큰 문제는 선거 과정에서 자신들의 ‘이념’을 내세우지도 못했다는 점이다. 이재명에 반대하는 것 이외에는 정책이 없었고 따라서 이번 선거에서는 선방했지만, 다음 선거를 포함한 전체적인 정치 지형에서는 ‘반대정당’ 이외의 포지션을 기대하기 힘들게 됐다.   
이준석 후보의 8.34% 득표율은 조직 기반도 없이 오로지 개인플레이에만 의존한 결과라는 점에서는 대단한 돌풍이었지만, 그러나 선거 막판의 젓가락 성폭력 발언 파문이 보여주듯 이른바 ‘갈라치기’, ‘혐오정치’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따라서 확장성에 대한 의문은 오히려 더 커졌다. 또한 국민의힘과 마찬가지로 자신들만의 독자적인 정치 이념을 내세우지 못했다.

지난 5월23일 1차 대선 후보 토론회. 출처:BBC

권영국 후보의 1%미만이라는 득표율 이른바 ‘좌파/진보 연합’ 후보였음에도 불구하고 지난 20대 대선의 정의당 심상정 후보가 얻은 2.37%보다도 낮다는 점에서 득표율면에서는 실패였다. 플랫폼 면에서 보자면, 가장 크게 부각시킨 ‘차별 철폐’라는 슬로건이 현시점에서 보편적인 좌파의 정치 구호가 될 수 있느냐에 대한 내부적인 논의나 검증조차도 부실했고 선거 운동 과정에서 이재명 후보의 간접적인 방파제 역할이 예상보다 더 도드라졌을 뿐이다. 그 이유는 권영국 후보를 내세운 ‘연대회의’의 성격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더 먼 이유는 지난 12.3 윤석열 계엄 시도이후 광장의 ‘민주주의 수복’과 ‘내란 세력 척결’이라는 민주주의 프레임에서 좌파적인 급진적인 프레임의 허약성과도 맞물려 있다. 

결론적으로 이번 선거 과정에서의 가장 큰 특징은 ‘공약 없는 선거’라고 할 수 있으며(오직 이재명 후보만이 그나마 대한민국을 ‘진짜 대한민국’으로 만들겠다는 청사진을 제시했다. 그러나 그의 야심찬 그리고 문제적인 프로그램은 지난 21대 선거 과정에서 검증이나 논쟁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투표율 80%가 보여주듯 뜨거운 선거였지만, 승패는 사실상 이미 결정되어 있었고 다만 각자 몇%냐가 중요할 뿐이었다.

2. 프레임- 권력투쟁에서의 승리가 의미하는 것

결국 모두에게 불만족스러운 선거였다. 심지어는 여론조사 기관에게조차도 불만족스러운 선거였다. 여론조사는 춤을 추었고 대중들에게 이제는 절대로 믿어서는 안된다는 긍정적 효과를 심어주기는 했지만, 심지어는 출구조사조차도 오차범위를 벗어났다(사전투표자 포함 약 11만명을 넘는 대규모 모집단을 대상으로 한 조사이기 때문에 이런 일이 발생하는 것은 상당히 이례적이다).
실은 이 점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투표한 다음에서도 유권자들은 자신들이 의사를 숨겼기 때문이다. 이는 이재명 후보에 반대한 사람들(실제 득표율은 출구조사 결과와는 달리 반이재명 전선이 더 많았다는 것을 보여준다)이 자신들의 의사를 공개적으로 밝히기를 꺼려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것이 도덕적 이유이든(정당성의 문제), 혹은 자신들의 처지가 ‘억압’ 하에 놓여있다고 믿기 때문이든 간에, 이들은 자신들을 (현 체제에 대한) ‘저항의 주체’로 간주하고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즉 반이재명의 정당성은 정책이나 정치이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억압받고 소외되고 있다는 인식에 기초하고 있으며 따라서 이들이 손쉽게 종교화(순교자, 독립군 프레임)될 유인이 존재한다. 따라서 경제적, 정치적 이해관계만으로 이들의 정치적 지향이나 행동을 설명할 수는 없다.
반면, 이같은 인식은 종교적 친화성(cult에 가깝다) 때문에 종교단체와 행동을 같이 하거나(혹은 아예 종교단체가 그 기반이 되거나), 합리적 관점에서 설명하기 어려운 극단적 성격을 띠게 된다.
그리고 이같은 비합리성 때문에 이들은 고립될 가능성이 커지고, 동시에 역설적으로 고립되면 될수록 이들의 행동과 사고는 더 극단적으로 나아간다. 이것이 이번 선거 과정에서 나온 온갖 ‘프레임’들이 모두 실패한 이유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불만은 불만이고, 승리는 승리다. 미국의 케네디 대통령 시절 미 공군 전략핵 사령관은 핵전쟁에서의 승리란 무엇이냐는 질문에 “전쟁의 결과 미국인이 두 사람 살아남고, 소련인은 한 사람만 살아남았다면 그게 승리다”라고 답한 적이 있다. 전쟁에서는 우리 편이 얼마나 피해를 입었는지가 중요한게 아니라, 그 결과 우리 편이 적에 비해 얼마나 더 큰 우위를 갖게 되었는지가 중요하다.

정치적 권력 투쟁에서도 이 법칙은 동일하다. 오늘 선거에서 이겼고, 그 승리가 내일의 선거에서도 이길 수 있는 바탕이 된다면, 오늘의 승리가 얼마나 아슬아슬했는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그리고 선거에서 걸린 것이 단지 정권이 아니라, 국가 체제 자체였다면, 그 승리가 가져올 변화는 폭발적인 것이 된다.

민주당 이재명 후보가 내세운 프레임은 ‘민주주의 회복’(헌정 수호), ‘정상화’, ‘계엄/내란 진압’이었다. 이같은 구호들은 약간씩 다르기는 하지만 결국 동일한 것을 표현한다; 민주주의다.
따라서 이재명 후보 지지자들은 광범위한 의미에서 ‘민주주의 대연합’에 동참한 것이며 여기에는 민주주의의 내용을 채울 특정한 이념보다는 민주주의 수호 그 자체가 최우선적 과제였다.
동시에 이재명은 기존에 진보로 간주되던 자신들의 이념적 위치를 ‘실용주의 중도’(혹은 실용주의 보수)로 바꾸었다. 즉 민주대연합 하에서는 좌우에 크게 구애받지 않고 실용주의적 정책을 수행할 것이라는 예고였다. 이런 점에서 그의 정부 구상은 ‘거국정부’적 성격을 갖는다. (“이재명의 대선 슬로건 “진짜 대한민국”이 의미하는 것::21대 대선 당선 유력 후보 이재명의 공약, 정책, 이념 평가, 2025년 5월 22일, (https://dem-labor.org/?p=18659 참조) 

그러나 동시에 선거 결과는 이같은 프레임이 성공적으로 먹혀들지는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재명은 유세 과정에서 “승패가 아니라, 압도적 승리”, 즉 세력관계 자체의 근본적 전복을 목표로 하고 있음을 분명히 했는데, 50%를 넘지 못한 득표율은 그같은 세력관계의 재편에 대해 대중들이 유보적이었을 보여준다.

따라서 이재명은 유권자들로부터 정치적으로 정계 개편을 ‘위임’받았다고 자부하기 힘든 처지에 놓였다. 그러므로 이후의 경로는 순수하게 정치적 힘(대중의 지지)에 의해서가 아니라, 법을 통한 정치의 재편(특검을 비롯한 다양한 사법적 수단을 동원하여 기존 정치 카르텔을 해체시키는 것)이라는 경로를 택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즉 정권 초기에 개헌을 시도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이같은 과정에서는 반드시 ‘타협’ 또는 흥정이 뒤따른다. 그러나 이 타협에는 특검(그리고 검찰 및 경찰 장악)을 통해 얻어진 사찰 정보들이 활용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지난 70여 년간 이승만-박정희-전두환-이명박-윤석열 정권을 거치면서 독점해왔던 ‘사찰 정보’는 이제는 정반대로 민주당의 손에 들어가게 되었으며, 이것은 새로운 ‘캐비넷’의 역할을 하게될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윤석열로 대표되는 국민의힘 정권이 기괴할 정도로 무능하고 부패했기 때문에 이에 대조적으로 국가기능을 ‘정상화’하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정도의 정치적 효능감을 발생시킬 수 있다. 이재명이 ‘행정가’로서의 능력을 전면에 내세우는 것도 이 때문이며, 특히 내년 지방자치단체 선거를 염두에 두었을 때는 민주당의 ‘능력’을 과시할 기회로 작용한다. 올해 말까지는 특검으로, 그리고 내년 상반기에는 특검 재판 과정 및 경제와 행정에서의 효율화등,  민주당은 절대적으로 유리한 고지에 서있다.     

21대 대통령선거 거리 현수막

그에 반해 김문수는 대외적으로는 ‘반중반북’, 대내적으로는 ‘반이재명’이라는 프레임으로 선거에 임했다. 문제는 역설적으로, 이같은 프레임이 적어도 자신들의 지지자들을 향해서는 통했으며, 그러나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앞으로의 정치에서는 훨씬 불리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는 점이다.
선거과정에서 김문수(그리고 국민의힘)의 유일한 전략은 이른바 ‘이재명 악마화’ 하나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대외정책에 있어서 ‘반중반북’(친미)조차도 이차적인 것이었다. 그리고 이 전략은 김문수의 부실한 선거 운동 과정을 감안한다면, 분명히 성공적이었다. 최소한 자신들의 기존 지지세력을 집결시키는데는 성공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성공의 이유는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이재명에 대한 도덕적, 법적 공격이 이미 소수화되어 버린 자신들의 위치 속에서 윤석렬의 계엄/내란 구도 하에서도 여전히 국민의힘을 지지할 수 있는 도덕적 프레임을 제공해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막상 선거가 끝난 다음에는 이 프레임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이재명은 더 이상 선거에 나오지 않을 것이며 그의 대통령으로서의 활동무대는 정치적인 것이라기보다는 ‘통치’적인 것이다. 따라서 정치적으로 이재명을 공격하는 것은 더 이상 유효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지지자들을 묶어두는 역할을 하지 못한다.
게다가 향후 특검에서 쏟아져 나올 온갖 윤석열 정권의 부패와 추문들은 국민의힘 지지자들의 도덕적 정당성을 약화시킨다(특검의 위력은 대단할 것이라고 예상해야 한다. 지난 5공청문회를 상기해보라).

국민의힘의 실패의 이유, 나아가 윤석열 정권의 실패의 이유 중의 중요한 하나는 국민의힘이 서로 공존하기 어려울 정도의 이질적인 세력들(각기 이해관계를 달리하는)의 병렬적 집합이라는데 있었다(홍준표가 ‘용병’을 데려와서 당을 망쳤다고 말한 것도 이를 지적한 것이다. 국민의힘 내부 분파들 사이의 대립에서는 어떤 파벌도 권력을 장악하는 것을 서로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에 외부인 충원으로 그 대립을 완화시켜왔다).
그리고 국민의힘은 자신들 내부의 이질적 세력들을 하나로 통합할 수 있는(화학적 결합) 이데올로기나 혹은 정책 방향을 수립하는데 실패해왔다(이는 이미 이명박/박근혜 대립 때부터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대선 패배 이후에는 이같은 대립은 더 격화될 수밖에 없는데, 실은 지금 국힘의 상태는 거의 민주당의 드라이브에 의해서 그 운명이 결정될 만큼 극심한 위기에 처해있다.

지지도가 낮아지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라, 기존 윤석열 정권의 실정과 특검에 따른 정치적 공격의 빌미가 너무 크기 때문에 국민의힘 내부에서 원심력이 아주 강력하게 존재한다. 민주당은 약간의 위험은 감수해야겠지만,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국민의힘을 법적으로, 정치적으로 해체시켜버릴 수 있다.
특검은 충분히 그럴만한 정보를 확보할 수 있을 것이며 그러나 그 정보를 기초로 실제로 국민의힘을 완전 분해해 버릴 것인지, 아니면 통제 가능한 수준에서 약화시키기만 할 것인지는 전적으로 그 때 가서 민주당의 판단에 달려있다. 이것이 박은정 조국혁신당 의원이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라고 평한 조은석 전 감사위원이 윤석열 특별검사로 선발된 이유라고 할 수 있다.

조 특검이 검찰을 살려줄 여지가 있다는 민주당 일부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조 특검의 손에 달려 있지 않다. 그는 특검 내정 직후에 “사초를 쓰는 심정으로 수사하겠다”고 말했는데, 이는 조선왕조실록을 기록할 때처럼, 모든 범죄행위(심지어는 비범죄행위까지 포함해서)을 다 밝혀내겠다는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러나 동시에 이는 사관들이 사간원이나 사헌부 소속이 아니었던 것처럼, 조 특검이 자신이 밝혀낸 사실들을 모두 범죄화하여 기소하겠다는 것을 말하는 것 역시 아니다. 즉, 수사에서 드러난 내용을 범죄화하는 것은 자신의 소관은 아니라고 조 특검은 말한 것이나 다름없다.

그것은 정치적으로 결정될 것이며, 그게 가능한 이유는 내란/외환죄는 공소시효가 없을 뿐만 아니라, 실제 윤석열이 기획한 계엄/내란의 성격이 아주 느슨한 네트웍을 가지는 하이브리드적 성격을 띄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즉, 현 집권 엘리트들 중 상당수는 ‘걸면 걸리는’ 위법성의 영역에 놓여 있다. 따라서 이들이 향후 대안적 정치권력으로 전화하면서 이재명 정권에 적극적으로 저항할 것이라고 예상하기는 힘들다. 그러므로 정국 주도권은 전적으로 민주당 손에 놓여 있다.

이준석(개혁신당)은 놀라운 성공이었지만(조직적 기반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8.3%의 지지를 받았다는 것은 큰 성공이다), 동시에 완벽한 실패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이 성공은 내일이 없다는 것이 너무나도 명확하게 드러났기 때문이다.
그의 성공은 전적으로 20, 30대 남성의 지지에 기반한 것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이준석의 성공은 확장성이 전혀 없는 것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그의 출발점 자체가 세대포위론(MZ세대와 산업화 세대의 결합)이었기 때문이었다. 윤석열이 승리한 20대 대선에서는 이 전략은 주효했다. 그러나 이들이 이해관계가 너무도 달랐기에 이 결합은 유지될 수 없는 것이기도 했다(즉 일회적인 결합이었다).

선거 전과정에서 주목을 받았던 이른바 우파 후보 ‘단일화론’(김문수와 이준석의 단일화)은 서로간에 애드벌룬을 띄워 지지자들을 결집하는데는 유효한 전술이었지만, 실제 성사되었을 경우에 승패에는 전혀 영향을 미칠 수 없는 것이기도 했다. 거의 모든 여론조사가 양자가 단일화되었을 경우에 이준석 지지자들 가운데 적어도 절반 이상은 이재명에게 갈 것이라는 응답을 보였는데, 이는 이른바 세대포위론이 현실에서는 제한적인 영향밖에 갖지 못한다는 것을 시사한다.

더 큰 문제는 이준석으로 대표되는 이대남, 삼대남은 자신들의 좁은 세대적, 성적 이해관계 이외에는 포괄적인 정치이념을 갖고 있지 못하다는, 심지어는 가질 수 없다는데 있다.
이들은 종종 극단적인 자유방임주의자적 태도를 보이는데, 이는 그 자체로 이미 시효가 지나간 신자유주의의 말기적 부산물이며, 따라서 ‘젊은’ 또는 ‘40대 기수론’과 같은 새로운 기치를 내세움에도 불구하고 더 퇴행적이고 반동적으로 간주된다는 약점을 피할 수 없다.
이들은 정치적 이념의 내용 측면에서는 ‘반동적’이지만, 그러나 그것을 수행하고 표출하는 방식에서는 자유방임적이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권위주의적 접근에 익숙한 60대 후반의 산업화 세대 보수집단과는 동질적이지 않다.

따라서 ‘단일화’는 선거공학의 한 요소로는 제기될 수 있지만(심지어는 지도부의 이해관계에 따라 성사될 수도 있는),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파괴적인 정치적 힘을 가질 수 없다. 이것이 단일화가 이뤄지지 않은 이유이며, 동시에 선거가 끝난 뒤 이대남, 삼대남 이데올로기가 사면에서 공격을 받고 급속하게 위축된 이유이기도 하다.

3. 진짜 세대- 이대남이 아니라 40대, 그리고 5060 베이비부머 

선거 과정이나 선거 뒤에도 주목을 받았던 것은 이대남, 삼대남의 표심이었지만, 그러나 정작 거의 언급되지 않고 있지만 보다 중요한 인구집단은 실은 60대였다.

출구조사에 따르면 60대의 이재명:김문수 지지율은 각각 48.0% 대 48.9%로 거의 차이가 없었다. 심지어는 60대 남성에서는 이재명이 48.6%를 얻어 47.7%의 김문수를 앞지르기도 했다. 이는 노령층에서는 보수당(국민의힘)을 지지한다는 속류적 인식과는 전혀 어긋나는 결과이다. 그리고 실은 당연한 결과이며, 이미 지난 2020년 총선 때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현상이다.

60대의 ‘진보화’ 현상은 흔히 주목하는 40대, 50대의 강력한 민주당 지지와 그 근거가 동일하다. 이들은 한국에서는 특히 정치적으로는 거의 주목받지 못했던, 또는 그 인구집단에 대한 명칭부터가 은폐되어왔던, 베이비부머 세대다.

한국 인구 피라미드

미국의 베이비부머 세대는 2차 대전 직후인 1947년에서 시작되어 약 18년 동안 지속되다가 1965년 무렵 종료된다. 이 시기의 폭발적 인구 증가는 70년대 노동력 인구의 급증을 불러왔으며 이들이 축적한 부는 미국 중산층의 핵심이 되었다. 이들은 2010년 무렵부터 은퇴하기 시작하여 지금은 거의 노동시장에서는 퇴장한 상태지만 정치적으로는 여전히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뉴딜 동맹의 마지막 세대이기도 하며, 문화적으로는 rock과 히피문화를 주도한 세대이기도 하다.

한국의 베이비부머는 실은 미국보다도 더 강력하다. 6.25동란 직후인 1957년부터 1973년까지 약 17년 동안 매해 평균 90만명 이상의 신생아가 태어났으며, 오늘날까지도 세대별로 가장 많은 인구를 가진 집단이기도 하다. 한국의 베이비부머 세대의 인구학적 힘은 처음으로 신생아 숫자가 100만명을 넘은 1960년을 보면 잘 드러난다. 101만명이 태어난 1960년의 남한 전체 인구는 3000만명이었다. 한 해 인구증가율이 무려 3%가 넘는 시기였다.

현재 한국 60대는 베이비부머 첫 해인 1957년 생이 68세로 거의 대부분이 베이비부머 세대로 채워져 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그 이전의 개발독재 산업화 세대와는 구별되며 이들은 상대적으로 자유주의적이며 개량적이다. 당연히 60대의 투표 성향도 바뀔 수밖에 없다.

베이비부머 세대의 핵심은 현재는 50대다. 이들은 세대적 기준에서 보았을 때는 80년대 민주화 운동을 경험한 세대이거나 혹은 그 성과 위에서 10대, 20대를 보낸 세대이며 이후 한국 경제의 확장기에 그 과실을 향유한 세대이기도 하다. 또 가장 많은 자산을 보유한 세대이다.
따라서 그 이전의 개발 독재 산업화 세대(68세 이상)과는 정치적 성향이 다를 수밖에 없다.

이같은 인구 구조는 국민의힘에게는 굉장히 불리하게 작용한다. 이들은 지역적, 이념적으로 베이비부머 세대 이전의 과거에 기반을 두고 있는데, 이들 세대는 매년 약 30만 명씩 자연감소한다(사망). 따라서 다른 조건의 변화가 없는 한, 장기적으로 민주당이 유리한 정치구도가 형성된다. 이번 선거에서 40대의 이재명 지지율은 72.7%, 50대는 69.8%로 조사되었는데(출구조사 기준) 이는 이같은 인구 구조를 그대로 반영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베이비부머 세대는 1973-4년 무렵으로 끝난다. 그런데 현재 가장 진보적인 40대는 그 이후 출생 세대(76년-85년)다. 그런데 왜 이들은 베이비부머세대와 유사한, 심지어는 더 급진적인 정치성향을 가질까?

이들은 세대 구분상으로는 이른바 X세대에 속한다. 지금은 거의 잊혀졌지만, X세대는 1990년대 초반 이후, 정치적으로는 ‘386’에 대응하는 문화적인 세대 구분 개념이었다. 서태지로 대표되는 이들 세대는 세계화 초기의 자유주의적 성격, 즉 개방적이고 전복적이었던 성격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40대는 아마도 정치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유신 체제 이후 처음으로 세계화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그리고 가장 강력하게 받은 세대이며, 그런 점에서는 유신 직전(60년대 말-70년대 초)의 통기타세대(청년문화)에 비견될 수 있는 정치적, 문화적 성격을 갖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동시에 이들은 베이비부머 세대를 겨냥하여 수립되었던 한국의 국가발전 전략(노동력 과잉 공급에 따른 노동집약적 수출 산업화)이 수정되어 IT 및 첨단중장비 산업으로의 전화에 걸맞는 인력으로 교육된 집단들이기도 하다.
한국의 교육정책을 보면 베이비부머 세대가 대학에 진학할 시기에는 오히려 대학 정원을 동결하다가, 1992년 교육정책을 수정하여 1994년부터는 본젹적으로 대학 문호를 늘렸다. 이는 베이비부머의 노동력 공급이 축소되는 것에 대비하여 노동력의 질적 향상에 초점을 맞추는 산업인력 양성 정책으로 해석할 수 있다.

40대 한국인들은 대학 수준의 고등교육을 받으면서도 동시에 민주화 이행 이후의 성과를 경험했고, 동시에 세계화 초기의 상대적으로 건강한 자유주의 이데올로기를 문화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받아들였다. 동시에 이들은 인터넷을 비롯한 IT 관련 업종에 익숙하고 또 거기에 종사하는 노동력 인구 집단이기 때문에 90년대 이후 한국의 정권 교체 과정에서 이들 산업분야를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키워온 민주당 정권에 훨씬 친연성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이들은 민주화를 주도했다고는 하지만, 실제로는 대학진학율이 20%에도 못미쳐서 실제로는 세대 내에서 한번도 다수였던 적이 없었던 ‘민주화’ 베이비부머 세대에 비해서 오히려 더 급진적이다. 더구나 이재명은 이같은 IT 관련 산업들과 세계화 경쟁력을 강화시키겠다는 정책을 들고 나왔기 때문에  민주화 주도 세대보다도 더 적극적으로 지지할 수 있었다.

인구적인 관점에서는 이대남, 삼대남은 전혀 영향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캐스팅보드 역할은 할 수  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이들이 앞으로도 주도적인 세력이 될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정치공학적으로 말한다면 이들은 인구 구조상 차지하는 비중이 높지 않기 때문에 악다구니를 써도 굳이 정치권에서 이들의 요구를 적극적으로 수용할 유인은 그다지 크지 않다.

더욱 흥미로운 사실은 실은 이대남과 삼대남은 전혀 동일한 인구집단이 아니라는 점이다. 한국에서는 흔히 이들을 MZ세대(밀레니엄세대+Z세대)라고 묶어 말하지만, 서구에서는 아예 이같은 용어가 없다.
서구에서는 밀레니엄세대와 Z 세대를 엄격히 구분한다. 밀레니엄세대는 1982년-2000년 간에 출생한 에코베이비부머 세대(베이비부머가 출산한 자식들)로 규정된다. 이들이 성인기에 진입할 시기에는 이미 세계화의 폐해(자유무역을 위한 국지전, 빈부격차 등 양극화의 격화, 정치의 부후화)가 심각해지고 노동시장에도 그 영향이 노골화되는 때였다. 따라서 이들은 세계화에 대해서 부정적이었으며, 자유주의적 관점에서 말한다면, 반동적 성격이 매우 강하다. 이들이 실은 2016년 이후의 민족주의화 경향(MAGA)의 핵심 지지층이기도 하다.

한국에서는 밀레니엄 세대의 영향력은 그다지 크지 못했다. 일차적인 이유는 이들의 부모인 베이비부머세대의 출산율이 급격하게 낮아져서 숫자상 큰 영향력을 미치기 어렵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구학적으로 주도권이 거의 없다. 동시에 이들은 청년층 노동시장이 급격하게 축소되는 경제적 환경에서 성장했기 때문에 기존 체제(한국식 발전모델)에 대해서 부정적인 성향이 강하다.

또 한국의 밀레니엄 세대는 부모 세대인 베이비부머세대의 연령대를 감안할 때, 미국과는 달리 1987년 이후 세대(혹은 88올림픽 이후 출생)라고 보아야 한다. 이들은 Z세대(2000년 이후 출생자)에 비해서는 자유방임주의적 성향이 훨씬 강하지만, 동시에 자신들 이전 세대를 적대적으로 규정하는 경향이 농후하다. 예컨대 지하철 노인 무임승차 논란에서도 드러났듯이, 이들은 윗 세대가 자신들이 누려야 할 혜택을 앗아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서구에서는 밀레니엄세대는 반세계화, 반자유주의적인 동시에 자유방임주의적이지만(그 자체로 모순적이기는 하다), Z세대는 무정부주의적 성향이 훨씬 강하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Z세대는 아직까지는 자신들만의 고유한 문화적 정치적 특색을 가진다고 보기 힘들다(밀레니엄 세대에 비해). 이것이 한국에서 밀레니엄세대와 Z세대를 한데 묶어 MZ세대라고 부르는 근거가 되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이같은 호칭은 상업적이고 정치적인 것, 즉 베이비부머+X세대를 포위하여 개발독재 산업화 세대와의 세대 동맹을 이루려는 기존 정치 엘리트 집단의 정치공학이 작용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동시에 지난 계엄 정국, 그리고 선거결과에서 나타났듯이 20대, 30대 여성들은 베이비부머 및 X세대와 친연성을 가지고 있다. 이는 한편으로는 20,30대에서의 성갈등에 따른 반남성적 성향의 결과로서 이대남, 삼대남과 적대하고 있는 베이비부머 세대에 근접한 탓이기도 하고(세대 포위론에 맞서는 세대동맹론) 다른 한편으로는 20,30대 여성들은 여전히 세계화, 그리고 신자유주의적 프로그레시브의 길이 자신들에게 유리하다고 판단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4. 중도보수, 동진전략은 실패했는가?

이재명의 선거 전략에서 이념적으로 ‘중도 보수화’, 그리고 지역적으로 동진전략은 핵심적 지위를 갖는다. 그러나 막상 선거 결과를 놓고 보면 표면적으로는 이같은 전략은 실패한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득표율이 50%를 넘지도 못했으며 TK, PK 지역에서의 득표율도 지난 대선, 총선에 비해 크게 늘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함정이 있다.

첫째, 이준석을 제외하고 보면 민주당 대선 후보의 지지율은 50%:41%로 국민의힘 김문수 후보 지지율을 앞선다. 이는 지난 대선의 50:50보다 크게 나아진 것이며, 지난해 총선의 50%:45%보다도 높아진 것이다.
이같은 우위를 지속하기 위해서는 다만, 이준석으로 대표되는 이대남, 삼대남이 계속해서 국민의힘의 지지를 깎아먹고 나아가 국민의힘 내부에서 자체적으로 분열이 발생해야 한다. 따라서 선거 막판의 성폭행성 발언이나 온갖 분열적 시도라는 비난이 쏟아졌음에도 불구하고 민주당은 굳이 이준석의 정치 생명을 완전히 끊어놓을 유인이 크지는 않다. 즉 차라리 이준석이 상처를 입은 지금 상태로 놓아둔 채로 적당히 관리하는 것이 선거에서는 유리하다.
왜냐하면 여전히 지역선거에서는 몇% 차이로 당락이 갈리기 때문에 개혁신당이 약간이라고 국민의힘의 표를 분산시키거나 더 중요하게는 이대남 삼대남이 국민의힘으로 빨려들어가는 것을 저지하는 기제로 남겨두는 것이 유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도덕적 비난에도 불구하고 이준석이 국회에서 제명될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두 번째로는 어차피 국민의힘 내부에서의 원심력이 강하게 작용할 것이기 때문에(특히 특검 수사에 따라서는 극심해질 수도 있다), 차기 지방선거와 총선에서는 무조건 민주당에 유리한 구도가 형성된다. 따라서 민주당과 이재명 정권은 굳이 ‘타협’(협치)를 내세울 필요가 없다.
즉 선거라는 관점에서는 과반수를 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민주당은 ‘전국민적 위임’을 자부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

또 실제로는 이재명 정권이 ‘진보적’ 정책을 수행할 것이라는 기대에 부응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왜냐하면 행정적 합리화, 효율화만으로도 진보적 성격은 갖출 수 있기 때문이다. 동시에 ‘실용주의’ 구호는 등소평의 ‘흑묘백묘론’에 버금가는 것으로 이념적 대립 자체를 약화시키는 효과를 발휘한다. 그러면서도 이제 고령층으로 접어들면서 은퇴가 본격화되는 베이비부머 세대의 상대적 보수화 추세를 그대로 수용할 수 있다. 따라서 민주당의 중도보수화는 선거 득표 결과로 보았을 때는 실패한 것이라고 평가할 수는 없다.

반면 지역전략, 즉 민주당의 동진전략은 훨씬 어려운 것으로 보인다. 영동 지역에서의 이재명의 득표율은 지난 20대 대선이나 지난해 총선에 비해 거의 늘지 않았다. 그러나 울산과 부산에서는 소폭이나마 증가했으며, 향후 울산지역에 인공지능 관련 데이타센터 투자나 부산을 북극항로 기점으로 삼으려는 전략적 계획 등에 비추어 볼 때(해수부 및 HMM의 부산 이전) 내년의 지방선거는 상당히 성과를 낼 것이다.
더 중요한 것은 근소한 차이이기는 하지만, 약간이라도 이들 지역에서 민주당 쪽으로 추가 기운 것은 선거에서는 큰 차이로 드러난다는 점이다.

국회의원 선거구 별 대선 득표 현황

사진에서 파란색은 민주당 이재명 후보의 득표율이 국민의힘 김문수 후보보다 높은 지역구들이다. 만일 이 투표 성향이 그대로 유지된다면, 다음 총선에서 국민의힘의 의석수는 85석 남짓에 불과할 것이다. 개헌저지선이 무너지며 총 득표율은 여전히 40% 초반을 유지하더라도 의석수는 형편없이 쪼그라든다. 이 경우에는 장기적으로 국민의힘은 자민련의 길을 걷게 될 것이다. 즉, 민주당의 동진전략은 이제 시작이며 내년 지방선거가 시금석이 될 것으로 보인다.

5. 결론과 물음들 : 왜 투표율은 높았으며 왜 좌파는 없었는가?     

이번 대선의 투표율은 79.4%로 지난 2022년 대선보다 2.3% 포인트 높았으며, 지난 28년래 최고 수준이었다. 왜 이렇게 투표율이 높아졌을까? 선거 과정은 뜨겁기는 했지만, 캠페인 내용은 유권자들을 끌어들일만한 정도는 전혀 아니었음에도? 즉 기껏해야 마타도어와 상대 후보 비난으로 점철되었던 선거 과정에도 불구하고 유권자들은 어찌됐든 선택을 하는데 동참했다. 무엇이 걸려있었길래?

선거 과정에서 각 정당이 내세운 ‘프레임’은 거의 작동하지 않았다. 각 후보의 득표율은 프레임이 투표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시사한다. 심지어는 ‘계엄/내란’에도 불구하고 지난 2022년 대선에서 윤석열에 투표했던 유권자의 86%는 이번에도 국민의힘 김문수 후보에게 투표했다. 뿐만 아니라, 사실상 김문수 후보의 패배가 분명했음에도 불구하고, 국민의힘 지지자들은 집결했으며, 이준석 후보의 지지자들도 성폭행급 공개 발언에도 불구하고 투표에 거리낌이 없었다. 즉 유권자들은 이번 선거에서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려고 했다.

이는 이번 선거가 각 정당들이 내세운 것보다도 훨씬 많은 것을 걸고 있었다고 유권자들이 인식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유권자들에게는 이번 선거는 지지하든 반대하든 간에 민주주의나 도덕성의 문제도 아니었고, 세대간의 갈등도 아니었으며 스캔달과 심지어는 대외정책의 문제도 아니었다. 유권자들이 대거 투표장에 나왔다는 것은 그 모든 것을 뛰어넘는 무엇인가가 이번 선거에 걸려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그것은 아마도, 한국의 국가 발전 모델, 정치 체제, 그리고 거기에서 연역되는 경제적 사회적 권력들인 것으로 보인다. 어느 쪽이든 간에 승리하는 쪽은 헌법, 도덕, 민주주의와 거의 무관하게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구축될 미래가 있다고 묵시적으로 인정했다.
그런 점에서, 헌법은 수호되고 공화국은 살아남았지만, 이번 선거는 거의 개헌급 선거라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이 양쪽 세력 모두 거의 종교적 믿음에 비견될 정도의 맹목적 신념을 가지고 투표에 달려든 이유였다.

따라서 선거 이후의 정치는, 마찬가지로 종교적인 믿음에 비견될 정도로 오직 외길로만 치달아도 그것을 막을 정치적 힘은 패자에게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 선거의 승자는 점령군으로 비칠 것이며, 실제로 승자는 점령군으로 권력을 행사할 것이고 패자들은, 만일 이 선거 결과가 헌법으로 이어진다면, 고작해야 정치적 유격전을 수행하는 잔당으로 전락할 것이다.
이 선거는, 정치가 전쟁이었기 때문에 모두가 달려들었다. 따라서 근대 정치의 진정한 모습, 그 기원이 드러나는 아주 드문 순간 중의 하나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좌파, 혹은 진보들은 이 선거에서 무엇을 했던가? 계엄 이후 6개월이라는 결코 짧지 않은 준비 기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제대로된 대응을 하지 못했다. 한편으로는 민주주의 수호라는 민주대연합론에 빠지고 다른 한편으로는 신자유주의 프로그레시브의 논리에 빠져 조직적으로나 정치적 구호나 행동방식, 그리고 정책에 있어서도 대중을 설득하지 못했다.

그것은 단지 외부적 조건들 탓만이 아니라, 그 주체들 자체가 보여줄만한 무엇이 없었기 때문에, 아니, 실은 아예 그 주체들 자체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말해야 한다. 예컨대 권영국 후보의 핵심 슬로건이었던 ‘차별 철폐’는 그것이 과연 현 시기에서 노동계급의, 그리고 좌파의 정치적 슬로건이 될 수 있는가에 대한 논쟁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대중을 설득하는 득표 투쟁이 될 것인지, 아니면 대중들에게 자신들의 정치적 이념을 설파하는 선도투쟁이 될 것인지조차 방향이 잡혀 있지 않았다.

따라서 선거에서 ‘계급’을 대표하는, 또는 계급에게 다가가고 그 계급을 정치적으로 구성하려는 노력은 보이지 않았다. 그것이 이번 선거 분석이 계급에 기반하지 못하고 세대와 기존 자본주의 엘리트들의 프레임을 통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며, 그 안에서 희미하나마 각 세대의 경제적 사회적 이해관계와 그들의 생성 역사를 통해 선거를 들여다볼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1987년 대선에서 백기완 후보가 중도 사퇴한 이래, 이른바 ‘진보’, ‘좌파’의 대선 선거 전략은 오류로 점철된 것이었다. 그리고 이제는 아예 형해화할 위기에 놓여있다.
당연히 부르조아가 헤게모니를 잡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계급을 대표하거나 혹은 계급적인 정치세력이 대중에게 선택을 받을 가능성은 극히 낮으며 계급정치가 그것 자체를 목표로 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동시에 선거는 계급투쟁의 장(arena)이기도 하며, 거기에서 무엇을 상대로 무엇을 가지고 싸울지는 좌파의 숙제이기도 하다.
부르조아가 만들어주고 보듬어준 좌파 정치를 할 것이 아니라면, 이제는 질문부터 제대로 하고 시작해야 한다. 그리고 그 출발점은 금융자본가 워렌 버핏의 다음과 같은 발언이 되어야 한다:
“이건 계급전쟁(class warfare)이다. 그래, 나의 계급, 부자들의 계급은 계급전쟁을 하고 있으며, 우리가 이기고 있다”(벤 스타인, ‘계급투쟁에서 누가 승리하고 있는가?’, <뉴욕타임즈> 2006년 11월에서 재인용)

자본가들은 자신들이 계급투쟁을 하고 있다는 것을 명백하게 인식하고 있으며 자신들이 승리하고 있다고 자신한다. 좌파는, 최소한, 자신들이 계급투쟁 중이며, 그것이 전쟁이라는 것은 깨달아야 한다. 이것은 ‘정치’가 아니라, ‘전쟁’이며, 패배한다면, <성>의 마지막 페이지에서 카프카가 썼듯이, 당신들은 개처럼 죽어나갈 것이다. 또는 운이 좋다면, 주인이 던져주는 사료에 만족하여 꼬리를 흔드는 애완견으로 살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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