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실은 자유를 구속한다 거짓이 그대를 자유케 하리라
- 가짜 뉴스, SNS, 지식과 권력 (part4)
2025년 3월 31일 / 이슈 리포트
글 권영숙 민주주의와노동연구소장
가짜뉴스, 우-러 광물협정, 이라크전쟁, 2008년 금융위기, 거짓말, 언론, SNS, 페이스북, 트위터, 정치변동, 신자유주의담론, 극우 포퓰리즘, 지식권력, 이데올로기
1. 바보와 미친 놈 사이에서
총선 패배로 곧 물러날 예정인 안날레나 베어보크 독일 외무장관(녹색당 소속)은 미국 트럼프 정권의 고관세 정책에 대한 대응책으로 “애플이 (아이폰) 업데이트 한 번 할 때마다 10센트씩 부과하자”고 말했다. 웃자고 한 얘기가 아니라, 진지했다.
블라디미르 일리치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지난 달에 발다이클럽 좌담회에서 대유럽 정책의 어려움을 토로하며 이렇게 말했다; “도저히 유럽을 이해할 수가 없어서 측근들에게 물었다. 도대체 유럽에는 무엇이 결여되어 있는가? 측근들의 대답은 ‘뇌’가 없다는 것이었다(lack of brains)”.
푸틴은 웃자고 한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매우 정확하게 유럽의 사태와 동시에 자신의 난처한 처지를 표현했다; 그러니까 터무니 없는 말을 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상대해야 하는가?
실은 이 점이 ‘가짜 뉴스’(fake news)를 판단할 때 생기는 어려움 중의 하나다.
배어보크 장관의 발언은 ‘가짜’는 아니다. 그러나 지난 수천년 동안의 인류의 관행(모든 보복은 비례적이며 대칭적이다. 특히 공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질 때는)에서 벗어나는 발언은 그 자체 실현 가능성도 없으며 일반적인 상식에도 어긋난다(물론 필자도 스마트폰이나 PC에서 제조사 마음대로 업데이트를 할 때 분노를 느끼기는 하지만).
그러나 이같은 주장이 단지 ‘고위 공직자’의 입에서 나왔다는 이유로 중요하게 보도되고 확산된다면, 그래서 심지어는 놀랍게도 그런 주장들이 실제로 관철되는 경우가 생긴다면(트럼프 정권 하에서는 종종 벌어지는 일들이다), 대중들은 두 가지 감정을 동시에 느끼게 된다;
하나는 전달자(이 발언을 보도한 매체)에 대한 불신이며, 다른 하나는 이 세계가 이성적으로 돌아가지 않으며, 따라서 무슨 일이든 벌어질 수 있거나 혹은 무슨 짓이든 해도 된다는 ‘무제한적인 폭주’의 감정이다.
후자의 경우, 한국에서 아주 정확하게 요약된 적이 있다. 지난해 12월 3일 계엄 직후 한 장르소설가(이른바 양판소 작가)가 “앞으로 소설 속의 내용이 개연성이 없다고 비판하는 사람들과는 겸상하지 않겠다”고 SNS에 썼다.
왜냐하면, 온갖 ‘이세계’와 ‘장풍이 난무하는 무협의 세계’, 혹은 온갖 외계인이 등장하는 공상과학소설에서조차 독자들을 설득하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소설 내적인 ‘개연성’(그럴듯함)이 요구되는데, 그 날의 계엄은 바로 그 ‘개연성’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현실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한 정보에서 개연성이 사라지면 그 정보는 ‘가짜 뉴스’와 구별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있을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진 것이며, 따라서 참/거짓의 구분이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
2. 누가 거짓말을 하는가? – 평화의 사도
언론 기사들, 나아가 이 세계의 수많은 ‘정보들’을 평가하는데 있어서 늘 곤란을 겪게 만드는 것 중의 하나는 ‘이성을 가진 인간으로서’ 어떻게 이런 발언이 가능한가?라는 난처함이다.
예컨대, 성사됐다는 주장과 안됐다는 주장이 아침 저녁으로 교대로 지면을 장식하는 미국-우크라이나 사이의 ‘광물협정’은 여전히 된 건지 안된 것인지 알쏭달쏭하다. 3월 26일자 뉴스에는 타결이었는데, 가장 최근(28일) 소식으로는 볼로도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고 발언했다. 이나마도 당장 하루 이틀 사이에 얼마든지 바뀔 수도 있다. 실은 중요한 건, 타결 여부가 아니다. 도대체 이 협상은 ‘무엇’을 대상으로 한 협상이었는가 하는 것이다.
전세계 거의 모든 언론들이 매우 진지하게 미국과 우크라이나 사이의 광물협정 여부를 타전할 때에 실은 그 뉴스들 모두는 가장 중요한 한 가지를 ‘결여’하고 있었다; 우크라이나에는 희귀원소(rare earth)가 없다는 사실이다. 리튬이건 티타늄이건 코발트건 그런 거 없다. 최소한 존재가 확인된 적이 한번도 없다.
오죽하면 한창 협정 타결 여부로 온 세계가 왈가왈부할 때, 블룸버그통신이 짐짓 ‘우크라이나에는 희귀원소가 없다’는 기사를 내보냈을 정도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 수십조 달러에 달한다는 ‘희귀광물’의 정체는 무엇이며, 미국과 우크라이나는 도대체 무엇을 놓고 줄다리기를 하고 있었던 것일까?
우크라이나의 ‘희귀원소’의 근거는 오직 우크라이나 정부(자원부)의 문서뿐이다. 시추한 적도 없으며, 전문가들이 지질조사를 한 적도 없다. 어느 날 갑자기 ‘뿅’하고 우크라이나 자원부 문서에 나타났다. 그리고 그 추정 가치는 날이 갈수록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우크라이나 정부는 약 15조 달러에 달하는 희귀원소를 포함한 광물이 자국내에 매장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출처 : Visual Capitalist
가장 최근의 ‘가치’는 15조 달러였다. 심지어는 우크라이나 각 주(오블라스트)별로 부존 희귀원소가 얼마나 매장되어 있는지 광물지도까지 돌았다.
트럼프가 등극하면서 하룻밤이면 우크라이나 사태를 수습(휴전)할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미국이 그 댓가로 얻을 수 있다고 들고 나온 것이 바로 이 ‘희귀원소’였다.
젤렌스키가 백악관에서 JD 밴스 미 부통령과 삿대질하면서 판이 깨지기 전까지 ‘합의된’ 미-우간 협정은 ‘1조 달러’에 달하는 광물 이권의 미국 귀속이었다.
대충 지질학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도 이쯤되면 왜 정작 점령지에 희귀원소가 몰려 있다는 러시아는 이 협상에 대해 아무 말도 하고 있지 않은지 한 번쯤은 의문을 가져볼 법도 한데, 유감스럽게도 땅 속 사정에 대해서는 아무도 관심이 없었던 모양이다. 아무도 묻지 않았다.
당연히 러시아는 이 협상에 관심이 있을 리가 없다. 있지도 않은 광물을 두고 내가 얼마, 니가 얼마 흥정하는데 상관할 이유가 없다.
지난 3월 26일자 <Oil Price>의 “우크라이나 희귀원소 협상은 광물 전문가들에게는 난센스다“라는 제목의 기사에는 광물자원 개발연구소인 Critical Minerals Institute의 의장인 Jack Lifton의 다음과 같은 평가가 실려있다;
“핵심 광물을 원한다면, 우크라이나에는 그런 것 없다. 이건 순전히 공상이다. (미-우간 광물협상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 분명 다른 협상이 뒤에 숨어 있을 것이다. 나는 워싱턴의 그 누구도 우크라이나에서 희귀원소를 채굴할 수 있다고 진지하게 믿을 것이라고 보지 않는다. .트럼프 대통령이 (우크라이나의) 희귀원소에 관심을 둘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희귀원소가 중요하다는 (참모들의) 말을 들었으며, 순전히 기업가처럼 움직이고 있을 뿐이다”.
트럼프 정권 인사들이 아무리 어처구니가 없더라도 정말로 우크라이나 정부가 주장하고 있는 것처럼 희귀원소가 잔뜩 매장되어 있다고 믿을만큼 바보는 아니다. 그 정도 바보라면 아예 정권을 잡는 것이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트럼프는 있지도 않은 ‘희귀원소’ 쇼를 했을까?
아마도 메드베데프 전 러시아 대통령의 평가를 참조할 필요가 있다. 그는 미국-우크라이나 사이의 광물협정이 타결되었다는 뉴스에 대해, “이건 함정이다. 젤렌스키가 이 협정을 받아들이면 아조프 나치가 그를 처단할 것이며, 젤렌스키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미국은 직접 아조프 나치들을 리셋해버릴 것이다”라고 트위터에 썼다.
즉, 미국의 목표는 평화도 종전도 아닌 유럽에 대해 우위를 가지고 우크라 내정을 좌지우지할 근거를 만드는데 있을 따름이다. 그리고 이틀 뒤 젤렌스키는 자신은 미국과의 광물협정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발표했다. 이제 그의 목숨은 파리목숨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까지 이 우스꽝스러운 논란을 보도한 언론들은 누구일까? 그들은 마징가제트와 그랜다이저 사이에 싸움, 또는 여포와 마초가 싸우면 누가 이기느냐는 논란을 생중개하고 있던 셈이었다. 그것도 근엄하고 진지하게. 정말 그들은 단지 뇌가 없는 것일까?
3. 누가 거짓말을 하는가? – 전쟁
2001년 ‘9.11사건’이 일어난 몇 달 뒤에, 당시 퇴역한지 얼마되지 않은 웨슬리 클락 미군 3성 장군이 펜타곤에 들렀다. 그는 후배 장성의 테이블 위에 놓여있던 작전 명령서를 보았다.
거기에는 이라크, 리비아, 시리아, 수단, 소말리아, 이란, 예멘 등 7개 중동 국가에 대한 공격 계획안이 들어있었다(5년 내에 6개 국가를 점령하고 마지막으로 이란을 공격하는 계획이었다).
그는 후배 장성에게 물었다. “이 국가들이 9.11과 무슨 상관이 있지?” 후배 장성은 이렇게 대답했다. “아무 상관도 없습니다. 그들은(집권자들) 다른 도리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이는 웨슬리 클락이 2007년 2월 어느 대담에서 난데없이 공개한 내용이다.
2003년 이라크전 초기 미군이 바그다드를 폭격하고 있다. 출처 NBC TV
이라크전(2차 이라크전)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다른 수가 없어서 벌인 전쟁이었다. 명분은 대량살상무기였지만, 실제로는 이라크 후세인 정권이 대량살상무기(생화학무기)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은 다 알고 있었다. 다만 명분이 필요했을 따름이다(후세인 정권은 1998년 생화학무기를 모두 폐기했다).
거짓말로 시작된 전쟁은 30만명이 넘는 사상자를 냈다. 영국의 토니 블레어 정권과의 공동작전이었던 이 허위의 전쟁은 그러나 전례가 있었다.
1996년 미국의 빌 클린턴 대통령은 이라크가 대량살상무기를 가지고 있다는 거짓말과 완전히 동일한 거짓말, 즉 수단의 한 화학공장에서 화학무기를 생산한다는 거짓말로 이 공장을 폭격했고 아이들을 포함한 수십명이 죽거나 다쳤다.
그러나 실상은 이 공장은 치약 등 생필품을 생산하는 평범한 화공약품 공장이었을뿐이며, 미국 정부가 화학무기 생산 증거라고 제시했던 토양샘플 등은 모두 엉터리라는 것이 얼마되지 않아 드러났다. 이 사건은 아랍세계에 공분을 불러 일으켰으며, 알카에다는 바로 이 사건이 자신들이 911 테러를 감행한 이유라고 밝히기도 했다.
그렇다면 이라크 전쟁에 대해 언론들은 어떻게 했을까? 이라크의 대량살상무기설에 의문을 표시한 서구 언론은 거의 없었다. 물론 한편으로는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국가가 대놓고 거짓말을 하면, 그것을 검증할 도리도 없고, 국가에 대한 철썩같은 믿음 때문에 검증할 동기도 없는 언론에게 다른 것을 기대하기는 힘들다.
그러나 이미 수단의 사례가 있었기 때문에 이라크의 대량살상무기 보유설은 충분히 의심해 볼 수 있는 사안이었다. 게다가 이미 유엔 화학무기감시단이 이라크 내에서 검증 조사를 하고 있는 와중이었다(미국의 침공 직전까지 약 85% 조사를 마쳤다).
이라크 전쟁에 수십 개국이 동원되었으며(한국도 포함된다), 2006년에 이르러서야 미국 정부는 대량살상무기가 없다는 것을 인정했지만, 그러나 정보 부서의 ‘기술적 착오’였을 뿐이라고 둘러댔다. 그리고 이 변명은 또 그대로 통했다.
가짜뉴스가 쟁점이 된 것은 고작해야 지난 10년 내의 일이지만, 정작 21세기의 가장 큰 가짜 뉴스는 이 세기가 시작되자마자 벌어진 미국 정부의 작품이었으며, 심지어는 그것이 가짜임이 밝혀진 뒤에도 책임자 처벌도 재발방지책도 이뤄지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은 아예 그것이 가짜 전쟁이었다는 인식조차 희박해져 가고 있다.
하지만 이라크전을 못본 채 하고 가짜 뉴스를 논하는 것은 따라서 우스꽝스럽거나, 양심이 없는 짓이다. 또한 갑자기 가짜 뉴스가 범람하는 것처럼 호들갑 떠는 것도 우스꽝스럽거나 양심이 없는 짓이다.
뿐만 아니라, 국가를 ‘가짜 뉴스’ 생산의 주범이라고 의심하지 않는 것도 우스꽝스럽거나 양심이 없는 일이다. 미국 격언을 예로 들자면, “처음 속임수는 네 탓, 두번째는 내 탓”(first time shame on you, second time shame on me)이다. 수십번씩 속는다면 누구 탓인가? 뇌가 없는 것인가, 양심이 없는 것인가?
국가의 거짓말에는 또 다른 흥미로운 예가 있다. 요즘 핫 토픽인 계엄의 원조국가인 미국을 보자. 미국 건국 이래 단 한 차례 계엄이 선포되었다. 링컨 대통령이 남북전쟁 당시 계엄을 선포했다(요즘 언론들은 계엄과 비상사태-미국에서는 대통령의 긴급조치권도 제대로 구별하지 않고 쓰고 있다).
그런데 지난 150년 동안 잠잠했던 이 계엄법에 갑자기 손을 댄 적이 있었다. 미국 의회는 지난 2007년 말 계엄법을 개정했다. 이전에는 대통령의 계엄령에 따른 군병력 배치는 해당 주의 주지사의 동의가 있었야만 가능했다.
그런데 2007년 법률 개정으로 주지사의 동의 조항이 사라졌다. 즉 대통령의 계엄 권한이 강화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고작 1년 만인 2008년 12월 미국 의회는 다시 이 조항을 재개정하여 슬그머니 복원시켰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2008년 9월 금융 위기 당시 행크 폴슨 당시 미 재무장관은 의회에게 금융구제법안 통과를 요구하며 “금융구제법안이 통과되지 않으면 길거리에 탱크가 돌아다니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당시 미국 정부는 금융 위기의 여파로 미국 사회가 완전히 붕괴되어 군부가 직접 통치에 나서게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이미 2007년 말에 계엄법이 개정되었다는 것은 미 의회도, 최소한 미 의회 지도부는, 이같은 위험을 사전에 알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즉 2007년 말이면 이미 미국의 엘리트들은 금융 위기가 불가피하며 그 정도가 막대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것을 시사한다.
계엄으로 군부가 등장하면 이는 친위쿠데타 성격을 띠며 미국의 민주주의는 잠정적으로 중단된다. 2008년 말에 계엄법의 재개정은 이제는 그같은 위험이 해소되었다는 판단을 뜻할 뿐이다.
그러니까 미국은 최소한 2007년 말에는 금융 위기의 도래를 알고 있었다. BIS(국제결제은행)의 보고서를 보면 2006년 여름에는 이미 금융 위기가 불가피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으며, 금융시장에서 이같은 상황이 표출된 것은 2007년 초(미국의 베어스턴스와 영국 민간은행 파산 사건)였다.
그러나 정치권이나 관료들 중 누구도 금융 위기를 경고하지 않았으며, 즉 알고도 속였으며, 언론들도 위험을 인지하지도 경고하지도 않았다.
여기서 ‘알고도 속였다’는 점이 중요하다. 미국 금융당국은 금융 위기를 완화시키고자 채권공급을 확대하기 위해서 서브프라임 모기지를 활성화시켰으며 나중에는 마치 서브프라임 모기지(주택담보 대출)가 금융 위기의 주범인 것처럼 포장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서브프라임 모기지는 기껏해야 2006년 말부터 발행되기 시작한 채권이었다. 2007년 말까지 고작 13개월 동안(총액 1.3조 달러) 발행되었을 따름이다. 서브프라임 모기지(그리고 이를 유동화한 채권)는 원인이 아니라, 궁여지책으로 만들었지만 오히려 사태를 더 악화시킨 결과였을 따름이었다.
그런데도 여전히 2008년의 글로벌 금융 위기를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표현하는 것은 사실 왜곡이며, 적극적인 ‘거짓말’이며, 그럴듯한 ‘용의자’(usual suspect)를 내세웠을 뿐이다.
4. 전범 재판정의 언론
이라크전과 관련해서는, 언론 중에서는 그나마 드물게 뉴욕타임즈가 자신들의 보도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인정한 정도였다.
한국 언론들은 여전히 강 건너 불구경하듯 보도했고, 이라크전의 종군기자로 영웅 취급을 받은 KBS의 기자는 나중에는 방송통신위원장으로 출세했다.
그러나 역시 훗날 밝혀졌듯이 한국뿐만이 아니라, 전세계 거의 모든 메이저 언론사의 종군기자들은 당시 미군이 안내하는대로 따라다닌 ‘tourist’였으며, 미국이 원하는 바를 충실히 쓰는 앵무새들일 뿐이었다.
20여년이 지난 지금은 달라졌을까? 가자 학살 문제를 담당하고 있는 유엔 특별인권고등판무관인 프란체스카 알베네세는 트위터에 이렇게 썼다; “언론들은 단지 이스라엘의 가자 주민 학살을 정당화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학살을 가능케해주는 공범이기도 하다. 그들은 전범 재판에 회부되어야 한다“.
그리고 지난 3월 28일 네델란드 정부는 알베네세 판무관이 트위터에 쓴 글들이 자신들의 가치와 부합하지 않기 때문에 그의 임기 연장에 반대한다고 발표했다.
언론(인)을 ‘공범으로 처벌’하는 것은 선례가 있다. 2차 대전 이후 뉘른베르그 전범 재판이나, 프랑스가 기쉬 정권하의 언론인들을 ‘부역자’로 처벌한 것은 역사에 남아있다.
그리고 그 논거는 한나 아렌트의 ‘법정의 아이히만’에 정확하게 표현되어 있다. 아렌트는 그것을 ‘악의 일상성’(악의 평범함)이라고 불렀다. 단순한 수동적 동조자가 아니라 공범이며 그 체제의 일부라는 것이다.
한나 아렌트는 수동적 부역자라는 이유가 반인도주의적 행위에 대한 면죄부가 될 수 없다고 말했다. 출처 PBS
오늘날의 세계는 과거보다 훨씬 더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손가락 몇 번만 까닥이면 수많은 자료들을 찾을 수 있으며, 그 참과 거짓, 옳고 그름을 판단할 근거들은, 최소한 정부의 발표들을 의심해볼 근거는 충분하다. 언론이 이를 하지 않거나, 혹은 했는데도 보지 못한다면 그것은 뇌가 없거나, 혹은 양심이 없거나, 혹은 가장된 정신병일 뿐이다.
가자 학살과 관련해서는 너무 많은 자료들이 차고도 넘친다. 지난 25일 유엔 조사위원회의 청문회에서는 이스라엘군의 잔혹행위에 대한 증언이 있었다. 팔레스타인인들을 강제구금하고 여성들을 강간했다.
여기까지는 하루 이틀 일도 아니라서 단지 그 ‘규모’만이 문제가 될 뿐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다음 증언은 최소한 서구 언론은 몰라도 선정적이고 엽기적인 것이라면 사죽을 못쓰는 한국 언론에는 꼭 실릴 줄 알았는데 놀랍게도 거의 언급이 안됐다; ”주로 이스라엘 여군들이 강제 구금된 팔레스타인 여성들을 강간했다. 성기나 항문에 막대기를 집어넣었다. 그리고 이를 녹화했다“(심지어 이 녹화영상을 SNS에 올리기도 했다).
범죄를 고발하지 않고 은폐한다면, 그것은 공범에 속한다. 억울하거든 아렌트를 다시 읽어보라.
알베네세는 그 역사를 다시 불러온 것이다. 서구의 언론(인)들과 마찬가지로 한국의 언론(인)들도 그 공범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리고 반인도주의적 범죄에는 공소 시효가 없다. 만일 언론(인)들이 이를 너무 과한 요구라고 생각한다면, 다른 직업을 찾아보라.
5. 지식 생산 공정으로서의 SNS
단지 한국의 캡틴 아메리카 케이스 뿐만 아니라 역사적으로 허무맹랑한 주장이 순식간에 사회적 정치적 각광을 받는 사례는 드물지 않다. 예컨대 한국에서 지난 90년대 후반 유행했던 ‘종말론’이나, 각종 신흥종교(JMS, 영생교, 신천지 등), 그리고 정치적으로 등장했다가 ‘종교화’의 경지까지 올라선 허경영의 사례를 본다면 이같은 문제들은 전혀 새삼스럽지 않은 것들이다.
문제는 어떤 조건이 이를 가능하게 하는지, 그리고 그 경로가 어떻게 되는가 하는 것이다.
인터넷은 분명 이같은 주장들이 확산되기 용이한 조건을 만들고 또 그 확산 속도를 빠르게 만드는 배경으로 작용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인터넷, 특히 SNS 기업들이 아예 특정한 목적을 가지고 이같은 주장들을 확산시키는 숨은 주범으로 역할했다는 점이다.
Meta(페이스북 본사)의 고위간부 출신으로 최근 <Careless People : A Cautionary Tale of Power, Greed, and Lost Idealism>(부주의한 사람들; 권력 탐욕 그리고 잃어버린 이상주의에 대한 조심스런 일화들)이라는 책을 출간한 사라 윈-윌리엄즈는 페이스북이 “최악의 인간들이 최악의 일을 하도록 도우는 사람들을 서로 적대하게 만드는 놀라울 정도로 효과적인 기계”라고 평했다.
페이스북은 단지 자신들이 “자본주의를 옹호할 뿐만 아니라…‘사회 정의’를 실현하고 있다”고 자부한다. 그리고 이 ‘사회 정의’는 자신들의 정치적 이익 뿐만이 아니라, 상업적 이익도 포함된다. 예컨대 메타는 인스타그램에서 알고리듬을 이용해 우울하고 힘든 상황에 처해 있는 10대 소녀들을 찾아내서 이들이 손쉽게 ‘화장품 등 미용회사’의 광고에 노출되도록 유도한다.
메타의 ‘정치적 사회정의’는 이미 상당히 알려져 있다. 윈-윌리엄즈에 따르면 페이스북의 간부들은 지난 2016년 미국 대선에서 트럼프 지지자들의 주장들을 키우고 확산시키면서 이들의 ‘갈라치기’를 증폭시켰다. 이를 통해 페이스북의 영향력도 동시에 확대시켰다. 내부적으로는 이들은 2016년 대선을 ‘페이스북 선거’라고 부르기까지 했다.
물론 페이스북, 나아가 SNS가 정치적 변동의 주요 수단으로 떠오른 것은 미국이 처음이 아니다. 지난 2011년 튀니지아에서 촉발된 ‘아랍의 봄’은 페이스북의 봄이기도 했다.
이후 이집트, 이란으로 확산된 이른바 ‘중동 민주화’의 핵심 전파 수단이자 이념 제공자이며, 운동 네트워킹의 근간이 된 것은 페이스북이었다.
이에 반해 동유럽에서는 텔레그램과 틱톡이 훨씬 큰 영향을 미친다. 루마니아 대선 1차 투표에서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은 틱톡이었다. 미국에서는 2016년 이후에는 페이스북보다는 X(구 트위터)와 틱톡이 더 큰 영향을 미친다.
한국에서는 특이하게도 유튜브가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이들은 각기 다른 정치적 성향을 가지고 있지만, 혐오/증오 표현물을 규제한다는 명분 하에 각기 독자적인 그러나 언제든지 미국 내 다양한 엘리트 세력들의 이해관계를 반영하는 통제장치(알고리즘)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는 ‘민간’의 영역이기 때문에 국가가 표현과 사상의 자유를 통제 억압한다는 비난에서도 벗어날 수 있다. 말하자면 국가 업무의 민간 위탁인 셈이며 국제적으로는 미국의 소프트파워의 중요 통로이기도 했다.
지난 3월 27일 터키 이스탄불에서 반정부 시위자가 진압경찰 앞에서 루소의 사회계약론을 읽고 있다. 출처 : AP 통신
말하자면 SNS는 미국 내에서 정당들 사이에, 그리고 사회 세력들 사이에 서로 싸우는 통로이자 정보를 왜곡 통제하는 수단이기도 하지만, 국제적으로는 미국의 ‘이해관계’를 전파하는 효과적인 소프트파워이기도 하다.
애당초 페이스북 자체가 지난 2000년대 초 미국 국방부 산하 DAPRA(선진무기개발 프로그램)의 선전전 수단의 일환으로 개발된 프로그램이 원형이라는 주장이나, 현재 미국의 애국법안, 해외정보법안에 미국 기업들이 의무적으로 미국 대외정보조직에 협조하도록 되어 있는 점들을 고려한다면 SNS의 정치적 역할은 매우 진지하게 재검토되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한국에서 계엄 직전에 유희림 방송심위위원장이 미국 구글 본사를 방문해 유튜브 담당자를 만났던 것은 의심해 볼 필요가 있다. 방송심위위원장이 미국까지 가서 유튜브 담당자를 만날 이유가 없는데다가, 계엄 이후 정국에서 이른바 탄핵 반대파의 주요 네트워킹 통로가 유튜브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게다가 유튜브의 평소 정책으로 본다면 이른바 극우 유튜브의 상당수는 진작에 폐쇄 조치를 당했어야 하는데도 여전히 ‘정상영업’중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는 매우 이상한 일이기는 하다.
역설적으로 이같은 ‘편향된 SNS’의 성격이 노골적으로 폭로된 것은 일론 머스크가 X를 인수할 때였다. 머스크는 ‘표현의 자유’를 모토로 트위터를 인수했고, 인수 직후 전체 직원의 1/3에 달하는 ‘검열 관련 직원’들을 해고했다. 이를 정당화하기 위해 머스크는 그동안 트위터가 어떻게 왜곡된 정보 전달과 통제를 시행했는지를 부분적으로 폭로했다.
그러나 트위터와 페이스북의 차이는 단지 스타일이나 정파적 지향에 있는 것은 아니다. 페이스북은 전통적인 담론 통제론, 즉 억압과 배제를 기본으로 한다. 이를 통해 특정한 의견은 배제하거나 키우며 직접적인 통제를 가한다.
이에 반해 트위터는 ‘허용과 증폭’을 베이스로 한다. 이들은 ‘자유’를 모토로 모든 주장을 수용한다. 페이스북은 참/거짓을 스스로 결정하며, 이를 사회정의라고 부른다. 트위터는 극단을 수용하며 서로 대립시키고 이를 자유라고 부른다. 그렇게 해서 영구적인 전쟁상태를 유도한다.
즉, 페이스북은 변동성 억압 체제의 담론 모델이며, 트위터는 변동성 증폭시대의 담론 모델이다. 트럼프가 자신의 선거에 유리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페이스북에 대해 부정적인(독점해체 소송 중이다) 견해를 가지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페이스북은 트럼프에게 유리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민주당의 신자유주의 노선 하에 있으며, 트위터는 새로운 노선(아마도 great reactionary라고 불러야 할)을 지향한다. 그리고 둘 다 민주주의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이미 2015년에 노스웨스턴 대학의 보고서는 미국에서 어느 정당이 승리하든, 그 정책은 대중들이 원하는 것과는 무관하다고 1,000여 개의 의회 입법 정책을 분석하여 밝힌 바 있다.
즉 이 SNS하의 소란스러움들은 민주주의가 아니라, 단지 당신의 입 모양을 어떻게 만들 것인지에 대한 분규들이며, 결국 승리하는 것은 립스틱 회사들일 뿐이다.
이 두 가지 담론 모델은 서로 ‘시장 점유율’을 놓고 경쟁한다. 누가 승리하든 자유와도 거리가 멀며, 평화와도 상관이 없다. 대중에게는 다만 조용히 죽을 것인지, 떠든 결과 죽을 것인지의 선택만이 남는다.
미국(을 포함한 전세계)은 21세기의 가장 큰 두 가지 사건(이라크 전쟁과 금융위기)를 거짓말로 탄생시켰으며, 결국 이와 관련된 ‘뉴스’들은 모두 ‘가짜 뉴스’들이다.
그러나 이 거짓말은 지난 10여년 사이 유행이 된 ‘가짜 뉴스’들과는 근본적으로 성격이 다르다. 이라크전쟁과 금융 위기 거짓말은 체제(세계화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거짓말이었다. 그러나 2016년 이후의 정부들의 거짓말들은 체제를 전환하기 위한 거짓말들이다. 그렇게 해서, 세계는 이 거짓말의 세상에서 저 거짓말의 세상으로 넘어가고 있으며 꿈결인데도 불구하고 매우 시끄러울 뿐이다.
이 거짓말들은 효용의 측면에서는, 페이스북의 담론 모델 하에서는 거짓말은 억압을 은폐하고 자신들이 원하는 특정한 가치를 퍼뜨리기 위한 계기다. 그러나 트위터의 담론 모델 하에서는 거짓말은 더 많은 ‘자유’를 행하기 위한, 즉 무슨 짓이든 할 수 있기 위한 모멘텀으로 작용한다.
두 모델 모두에서 진실은 행동을 지배층이 하려는 바를 제약한다. 따라서 더 많은 거짓은 더 많은 지배층의 자유를 의미하며, 더 큰 대립의 원천이 된다.
이렇게 해서 거짓은 자유의 원천이 되고, 진리가 그대를 자유케 하리라는 라틴어의 경구는 ‘거짓이 그대를 자유케 하리라’로 대체된다.
이렇게 해서, 이른바 (반전평화) ‘좌파’는 무기를 사기를 원하고, (기후 위기를 비웃던) ‘우파’는 전기차를 원하며, (복지국가의 발상지인) 영국 노동당은 재정 긴축을 원하고, (전통적 금융통화정책의 수호자인) 호주는 양적 완화를 원하며, (과잉생산의) 중국은 소비를 진작시키려 하며, (긴축이 헌법이던) 독일은 케인즈주의적 재정 확대책을 쓰려고 하고 있다. 완전히 전도된 세상인 것이다.
만일 누군가가 지난해 이맘때 쯤 위에서 언급한 일들이 벌어질 것이라고 말했다면, 그는 미친 놈 취급을 받았을 것이다. 겸상 불가 상대라고 손가락질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이전의 체제가 거짓으로 유지되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 모든 전환들은 거짓으로 시작되었다. 독일의 재정확대는 존재하지도 않는 러시아의 안보 위협을 핑계로, 좌파는 체제 수호를 위해, 우파는 체제 개혁의 선봉장인 머스크를 방어하기 위해, GDP 대비 국가부채가 미국보다도 훨씬 낮은 수준(80%)인 영국은 국가 부채를 우려해서 전환이 불가피하다고 주장한다.
언론이 다루는 ‘가짜 뉴스’는 고작해야 사소한 ‘당쟁’이거나 온라인 상의 야만에 불과하지만, 정작 거대한 가짜 뉴스들은 저항의 교두보조차 없는 채로 국가와 대자본가들, 그리고 테크노크라트들에 의해 수행되고 정당화되며 언론들은 ‘중립적’으로 되뇌이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언론에 책임을 물을 수는 있지만, 가짜 뉴스의 주범이 언론인 것은 아니다. 언론(인)은 그저 옷을 잘 차려입은 수많은 아이히만들에 불과하며, 또는 영롱한 깃털을 가진 앵무새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언론을 ‘정화’해서 가짜 뉴스가 사라지지는 않는다. 가짜 뉴스는 그보다 훨씬 거대한 담론 체제의 일부분일 뿐이며, 그나마도 온라인 플랫폼이 그 역할을 점차 대체해 나가고 있는 사양산업일 뿐이다. 그들이 무죄라는 것이 아니라, 피래미라는 것일 뿐이다.
국가가 생성하고 퍼뜨리는 가짜 뉴스들, 그리고 사적인 영역에서 생산되고 서로 대립되는 가짜 뉴스들은 단지 은폐하거나 억압하는 역할만을 하는 것은 아니다.
가짜 뉴스들은 그 가짜 뉴스들을 생산하는 각 주체의 위치에 따라 공적인 지식으로 혹은 사적이고 사회적인 지식으로 등장하며 이 과정에는 ‘권력효과’가 작동한다.
SNS 플랫폼들이 하는 역할은 날 것의 거짓에 ‘권력을 부과하는’ 일련의 생산과정들을 통제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생겨난 정보들, 혹은 더 광범위한 의미에서 과거 ‘이데올로기’라고 불렸던 것들은 지식이면서 동시에 권력의 성격을 가진다.
6. 변동성과 지식의 권력의 이중주
흔한 오해 중의 하나는 트럼프 정권은 ‘민족주의적’ 또는 ‘미국 우선주의’라는 것이다. 따라서 전쟁도 평화도, 무역과 경제도 모두 그 같은 관점에서 해석한다. 물론 그렇게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 트럼프 정권이 의도하는 것은 바깥으로 보이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그들은 ‘변동성’을 겨냥한다.
지난 40여년 간의 세계화의 시기, 그리고 이를 대변하는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의 시대는 금융시장 용어로 말하자면 ‘변동성 억압’의 시기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세계화가 순조롭게 이어지기 위해서는 글로벌 공급망(global supply chain)이 구성되어야 하며 이 공급망이 국가적 이해관계의 대립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공급망 배치에 있어서 일종의 상호인질극이라는 조건이 구성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이같은 상호의존은 자본가의 관점에서 안정적 투자를 가능케 한다. 즉 경제적 요인 이외에는 다른 요인들을 거의 변수에 넣을 필요가 없기 때문에 오로지 ‘시장 조건’, 즉 이윤의 관점에서만 사업을 평가하는 것이 가능하다(1990년대 이후 경제학계에서 신고전파가 득세한 것도 그 때문이다).
따라서 국제적 자본 흐름은 이같은 추세를 따라간다. 이 과정에서 금융 시장의 변동성은 극단적으로 제한된다.
여기서 이른바 ‘변동성 억압 체제’라고 불리는 금융 시장 메카니즘이 발생하는데, 이는 동시에 미국에게 재정 적자를 안심하고 늘릴 수 있는 조건을 부여한다.
트럼프 정권의 ‘관세 무기화’의 근본적 동기, 나아가 미국 확장론(그린란드 병합, 파나마 운하 귀속)은 바로 이같은 변동성을 일깨우는데 있다.
그린란드 병합과 같은 터무니 없는 주장은 배후에는 단지 미국의 ‘경제적 이익’(광물자원과 극지방 해상 운송로 확보)만이 아니라 이를 통해 지난 19세기 이후 안정적이었던 ‘영토’의 고정적 성격을 아예 바탕에서부터 뒤흔드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같은 변동성 증폭은 언어(담론)의 영역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신자유주의의 담론적 특징은 ‘주체들은 다른 이해관계와 정향을 가지고 있지만, 이같은 차이의 해소는 공통의 플랫폼(자유민주주의) 내에서 해소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정치 플랫폼(민주주의)이 차이를 해소하지 못한다면 이 플랫폼의 효율성에 대한 의구심이 자라난다. 그리고 차이를 노골적으로, 그리고 직접적으로 즉 담론 이외의 수단을 통해 해결하려고 하는 성향들이 생겨난다.
다른 말로 해서, 트럼프 정권이 기도하는 또는 미국이 USAID를 재편하면서 기존의 소프트파워를 상실해가면서까지 얻으려고 하는 목표는 ’공존할 수 없는 영구적인 담론의 대립‘, 즉 전쟁의 상태 혹은 홉스의 표현을 빌자면, ’만인이 만인에 대한 늑대의 상태‘인 것이다.
따라서 이들은 ’자유‘를 표방한다. 왜냐하면 대립이 극단적이기 위해서는 극단적인 주장이 용인되어야 하기 때문에, 이를 근대 용어로 옮기면, ’더 많은 자유가 주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이같은 트위터의 보이지 않는 의도는 집합적 분석에서야 비로소 드러난다. <The International Journal of Press/Politics> 2025년 3월 호에 실린 ’When Do Parties Lie? Misinformatiion and Radical-Right Populism Across 26 Countries’(Petter Tornberg and Juliana Chueri 공저)라는 논문에서는 26개국에서 지난 6년 동안의 3200만 개의 트위터를 분석하여 ”극우파 포풀리즘이 misinformation을 퍼뜨리는 가장 강력한 결정요인“이라고 결론짓고 있다.
반면 일반적인 포풀리즘, 좌파 포풀리즘, 우파 정치 구호 등은 misinformation의 전파와 연관성이 없다. 즉 트위터의 ‘자유’ 정책은 현실에서는 극우 포풀리즘의 확산에만 기여한다.
따라서 머스크의 ‘자유’는 표면적으로는 자유민주주의를 옹호하는 슬로건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가짜 뉴스를 생산, 전파하고 이를 토대로 다시 극우 포풀리즘을 유도하는 통로일 따름이다.
동시에 극우포풀리즘의 가짜 뉴스는 극우의 대안적 현실을 구성하는 재료이자 수단이 되며, 다시 이를 기초로 극우의 정치적 구호를 현실화하는 힘으로 작용한다. 즉, 여기서 자유는 중립적이지 않으며, 심지어는 자유롭지조차도 않다(왜냐하면 극우포풀리즘의 최종적인 현실 적용 형태는 극우 권위주의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언뜻 보기에는 매우 자유로운, 또는 사적인 견해의 표명과 논쟁 혹은 유희처럼 보이는 SNS 상의 수많은 언명들은 실은 중첩된 통제 장치의 컨베이어 벨트 안으로 들어가는 소재에 불과하며 일련의 ‘자유로운’ 과정을 거쳐 다양한 층위의 정치적 견해로 생산된다.
동시에 이같은 사적인, 자발적인 견해들의 총합이 정치적 힘을 얻기 위해서는 기존의 권력에 의존하고 있는 지식들, 특히 공적인 지식들이 약화되어야만 한다.
트럼프 정권, 나아가 유럽의 ‘민주적 정부’들이 행하고 있는 이른바 ‘권위주의적 자유주의’는 이같은 측면들을 지시한다.
트럼프 정권이 존 F. 케네디 파일을 공개한다거나, USAID를 해체하는 작업을 하거나, 심지어는 보다 급진적으로 미국의 보건의료체제(백신 무용론)를 해체하는 작업을 하는 것은 단순히 ‘극우적 무식함’ 때문만은 아니다.
이들은 기존의 공적 지식의 신뢰성을 약화시켜 그 지식과 연관된 ‘권력’을 약화시키려고 한다. 이것이 21세기의 두 거짓말(이라크전과 금융 위기)을 둘러싼 국가의 태도(억압, 은폐, 기술적 회피)와는 전혀 다른 트럼프 정권의 새로운 노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노선은 단지 새로운 ‘정치적 구호’를 뜻할 뿐만이 아니라, 새로운 인간형 나아가 인식을 구성하는 인식의 틀을 새롭게 정초하려는 시도를 의미한다. 말하자면 트럼프 정권으로 대표되는 새로운 자본가 지배층들은 단지 세계 질서나 정권을 교체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 구호에 적합한 인간과 사회를 구성하기를 원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 과정들이 보여주는 것은 푸코가 지적했듯이, “지식은 하나의 하위적 이데올로기가 아니며”, “지식 자체가 하나의 권력이고 또 권력을 전제하는 것”이라는 점이다(권영숙, 1996, 미셀 푸코에서의 ‘사회적인 것(the social)’에 대한 연구; 신체, 권력, 그리고 사회방위 개념을 중심으로).
SNS는 이같은 지식을 생산하는 의식적인 ‘공정’(production process)이자 동시에 ‘공장’(factory)이다. SNS가 유일한 지식 생산 공장은 아닐지라도 이제는 거의 대부분의 공적인 정보들은 이 과정을 거쳐서 하나의 ‘지식’으로 제시되며 지식과 더불어 인간, 그리고 대안적 사회(alternative society) 자체를 재생산하는 것이 목표로 된다.
그러므로 이 정보 생산체제 하에서는 ‘진실’이 불가능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어떤 것을 진실로 정박시키는 것이 불가능해진다.
언어가 진실을 말하는 것이 불가능해지면, 그 언어로 세상을 바꾸는 것도 불가능해진다. 그래서 ‘비판의 무기’가 통하지 않는다면, 결국 세상은 ‘무기에 의한 비판’으로 바뀌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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