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와노동 연구소

만국의 우익이여 단결하라! : 계급 없는 좌파, 주권 없는 우파, 출구 없는 대안들

만국의 우익이여 단결하라!

: 계급 없는 좌파, 주권 없는 우파, 출구 없는 대안들

2025년 2월 28일 / 이슈 리포트 
글 권영숙 민주주의와노동연구소장

극우(Far Right), 유럽신우파(ENR), 대안우파(Alt-Right), 독일대안당(AfD), 좌파당(Die Left), BSW, 후기 파시즘(Late Fascism), Dark Enlightenment, 자유민주주의

1. 계몽의 역설

억만장자(추정 재산 약 200억 달러)이자 지난 2016년부터 도널드 트럼프의 주요 지지자이며 J.D. Vance 부통령의 멘토이자, Palantir Tech(방산업체)의 설립자인 피터 티엘(Peter Thiel)은 커밍아웃당한 동성애자였다(자신을 게이라고 폭로한 미디어가 제3자와 소송전을 벌이자 여기에 개입해 파산시켰다).

그는 여성에 대해서는 그다지 우호적이지 않았다. 자신을 ‘보수적 자유방임론자’(conservative libertarian)이라고 밝힌 티엘은 “여성과 복지 수혜자는 내게는 너무 터프(notoriously tough)하다”고 지난 2009년 정치 팜플렛에서 밝힌 바 있다. 여혐 탓이었는지, 사회복지로 ‘놀고 먹는 사람들’이 싫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여기서 그는 “자유와 민주주의는 양립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이끌어낸다. 민주주의는 거기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자신들에게 유리한 결과만을 추구하기 때문에 그것을 반대하는 사람들을 억압한다는 것이다. 즉, 민주주의가 (결국은 파시즘이 되기 때문에) 오히려 자유를 억압하는 결과를 만든다고 그는 주장했다.

이같은 티엘의 견해에 감동받은 몇몇 온라인 논객들은 ‘신-반동 운동’(neo-reactionary movement)이라는 사회운동을 출범시켰다(흥미롭게도 이들 대부분은 실리콘밸리의 ‘엔지니어’ 출신들이다). 이들은 넓은 의미에서는 이른바 대안우파(Alt-Right)의 한 범주로 포함된다. 일부는 ‘techno feudalism’(기술봉건주의-이상적 국가 형태로 CEO 엔지니어가 관리하는 중세적 도시 국가를 꿈꾼다)의 일부로 보기도 하고, 순수하게 정치적 개념으로만 보자면 유럽의 신우익(ENR)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들은 트럼프 정권(정치 분파로서의 트럼프 정권)의 한 축을 이루고 있기는 하지만, 이것만으로 트럼프 정권을 반동적 혹은 극우적이라고 평가하기는 곤란하다. 왜냐하면, 트럼프는 다양한 여러 세력(그 중에 주축은 대안우파이기는 하다)의 연합이며, NRx도 자신들을 트럼프와 이념이 동일하다고 보지 않고, 단지 트럼프 집권이 자신들의 이념을 실현하기 위한 기회라고 보는 정도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NRx는 이론적 기원이 유럽의 신우파(60년대 후반에 프랑스에서 파시스트 이론가들이 개념화)에 있는데 반해, 미국의 대안우파의 이론적 뿌리는 50년대 후반 전향한 트로츠키스트들이 한 축이 된 young republicanism의 영향을 강력하게 받았다.
또 트럼프에 대한 대중적 지지는 미국에서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해서 민주당의 당리당략 때문에 미국이라는 국가가 착취당하고 있다(흔히 납세자가 도둑맞고 있다는 표현으로 나타난다)는 인식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에 ‘민주주의 과잉론’은 트럼프 정권의 코어는 아니다.
트럼프가 대통령 취임 직후 행정개혁위원회를 만들고 이 기구를 통해서 미국국제개발처(USAID)에 대한 공격으로 이른바 개혁의 포문을 연 것도 ‘파당적 국가 기구가 민주주의를 저해한다’는 자신의 지지 세력의 인식을 바탕으로 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2. 과잉론자들과 과소론자들

어쨌든 이같은 신반동운동(흔히 NRx라고 불린다)의 핵심 개념 중의 하나가 “dark enlightenment(검은 계몽)’라는 것이다. 이 개념은 근대적 계몽을 역으로 미러링한 것이다(이들은 심지어는 근대 이전의 사회로 회귀하기를 꿈꾼다. 기술로 지지되는 봉건사회).

한국식으로 말하면 ‘일베’의 ‘민주화’ 용법과 비슷하다. 한국의 계엄 관련 시위와 재판에서 튀어나온 ‘계엄이 아닌 계몽’이라는 얼토당토 않은 문장에서의 ‘계몽’이 바로 dark enlightenment에 해당한다. 한국의 계몽주의자들이 어떤 네트웤을 통해 이 신문물을 받아들였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기본적으로 온라인 운동이기 때문에 접촉 통로는 다양할 수 있다).
어쨌든 이런 정치적 이념들이 한국에도 ‘통’한다는 것은 흥미롭기는 하다. 이제 이들의 세계관의 특징을 요약해 보자면 다음과 같다.

첫째, ‘계몽 계엄론’자들은 ‘너무 많은 민주주의’를 비난한다(예컨대 계엄에 이르기까지의 의회 내에서의 다수당의 횡포).
둘째, 동시에 이들은 이 ‘다수’(majority)가 ‘외부’(북한과 중국)에 의해 오염된 하등한 존재들이라고 간주한다.
셋째, NRx는 온라인 히끼꼬모리(방구석 여포)적 특성이 강해서, 종교적 색채를 띄기 쉽다. 즉 cult화된다. 한국의 탄핵 반대 시위에서 ‘종교’가 주축이 되는 것은 단지 동원 주체가 종교단체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신우파적 사고에 동조하는 비기독교인(또는 특정 교회인이 아니라고 할지라도)들도 종교 단체 행사에 손쉽게 동화될 수 있다.
넷째, 이들은 단지 민주주의를 비판할 뿐만 아니라, 평등주의도 반대한다. 그들의 이념은 ‘타고난 차이’에 기반한다. 예컨대, 남자와 여자는 생물학적으로 다르게 타고 났기 동등하게 취급되어서는 안된다고 주장한다.
이같은 사고는 기본적으로 성별 대립(남녀 갈등)을 격화시키며 여혐과 동조된다. 탄핵 반대 시위나 온라인상의 주장에 젊은 남성들이 많이 포함되는 것은 전혀 우연이 아니며, 단지 젠더 문제만을 반영하는 것도 아니다.

한국 사회에서 계엄을 둘러싸고 대립이 빚어지면서 나타난 현상들의 상당 부분은 상대방을 단지 ‘정신병자’ 또는 ‘말이 안통하는 사람들’로 치부한 결과이기도 하다. 예컨대 계엄을 내란으로 간주하는 세력에서는 계엄을 민주주의에 대한 위배로 볼 뿐만 아니라, 계엄 지지자들이 생기는 현상을 ‘민주주의의 부족’으로 간주한다. 즉, 민주주의가 충분치 않아서, 또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서 생기는 일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들은 민주주의를 수호, 유지, 확대하기 위한 ‘민주주의 대연합’을 주장한다.

따라서 당연히 양자 사이에는 대화가 불가능하다. 한편에서는 민주주의 과잉 때문에 벌어진 사태로 이해하는데, 다른 한편에서는 민주주의가 불충분해서, 또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서 벌어진 사태로 이해한다. 그리고 말이 안통하면 당연히 주먹이 가까워진다. 양자 간에 물리적 충돌은 예상 가능한 사태다.

윤석열 대통령 탄핵 반대를 외치는 ‘극우파’가 2025년 1월18일 서울 서부지방법원을 습격하는 모습. 출처: KBS

물론 한국의 사태를 단지 서구의 신반동 우파, 혹은 대안우파의 영향을 받은 ‘이식된 우익 운동’으로만 파악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예컨대 탄핵 반대 운동의 참여자들에는 전혀 이질적인 두 집단이 혼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나는 위에서 언급한 광범위한 신우익(그 자체로 민주화의 산물이다)이며, 다른 하나는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구 우익, 또는 애초부터 민주화 과정 자체를 동의하지 않았던 인구 집단들(흔히 60대 이상의 노인 세대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은 세대로 구분되지만, 이들을 이어주는 것은 ‘민주주의’(에 대한 견해)가 아니라 종교와 기존의 권력 관계 유지에 대한 이해관계라고 할 수 있다. 즉, ‘이념의 외부’가 이들을 연결시켜주는 고리다.(경제, 노동 지표로 본 한국의 자화상: 한계에 봉착한 한국형 발전 모델”, 참조.)

3. 미끄러지는 언어들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그렇다면 과연 이들을 ‘극우’ 혹은 ‘파시즘’으로 분류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왜냐하면 고전적인 규정으로서의 파시즘(국가와 독점대자본의 결탁 하에 사회계급들을 단일한 층위로 묶어 해소시키는 것. 이를 위해 독재를 필연적인 것으로 수반한다)은 지금의 탄핵 반대 운동의 ‘(느슨한) 이념’과는 정확히 일치한다고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를 ‘반민주주의적’이라는 이유로 섣불리 ‘파시즘’으로 환원시키는 것은 부정확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이같은 사태를 불러온 근본적인 원인을 은폐시키는 역할을 할 수도 있다.

이데올로기를 분석하는데 있어서 가장 어려운 점은 기준점을 잡는 일이다. 왜냐하면 현실에서는, 특히 현실 정치에서는 이른바 ‘골대를 옮기는’ 일들, 즉 대중 장악과 동원을 위해 자신들이 포지션을 은폐하거나 혹은 속이는 일들이 종종 벌어진다.
게다가 정치 세력들의 언어는 현실과 일치하지 않는다. 예컨대 루마니아의 권력 투쟁은 다 큰 어른들이 근엄한 얼굴을 하고 이 짓들을 한다는게 옥의 티이긴 하지만, 어처구니 없다는 점에서는 한국의 정치적 사태에 버금간다.

루마니아에서 친러시아 노선을 표방한 대통령 후보인 칼린 게오르제스쿠가 1차 투표에서 압승을 하자, 루마니아 헌법재판소는 지난 1월 “러시아가 틱톡을 통해 선거에 개입했다”는 이유로 선거를 무효화시켰다. 그리고 헌법재판관과 현정부 인사들이 요즘 말썽을 빚고 있는 미국국제개발처(USAID)와 EU의 자금을 지원받는 단체와 연관이 있다는 사실이 밝혀져 한층 더 시끄러워졌다.
급기야는 2월 26일에는 재개된 대통령 선거에 후보 등록을 하러 가던 게오르제스쿠가 길거리에서 경찰에 체포되는 사태가 벌어졌고, 경호원의 집에서 수십억 원의 현금과 총기가 발견되었다며 앞으로 60일 동안 사법감시 하에 놓여져 어떠한 성명이나 SNS 활동도 금지당했다. 즉 아예 선거 운동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

문제는 이같은 상황 전개에 대한 당사자들의 ‘반응’이다: 게오르제스쿠는 이 상황을 “볼셰비키의 음모”라고 비난했으며, 반면 정부와 친 EU 정치인들은 게오르제스쿠를 “파시스트”라고 불렀다. 그러니까 게오르제스쿠의 눈에는 EU와 EU의 지시를 받는 현 정권은 ‘볼셰비키’이며, “유럽과의 하나되기”를 주장하는 현 정권에게는 게오르제스쿠는 “파시스트”다.
그렇다면 지금 유럽에서는 볼셰비키(EU)와 ‘파시스트’(러시아, 푸틴)가 싸우고 있는 것인가? 이 경우 과연 억울한 건, 레닌인가 히틀러인가?

물론 레닌과 히틀러로 상징되는 좌/우는 한편으로는 언제나 상대적 문제다. 남들보다 왼쪽에 있으며 좌이고 오른쪽에 있으며 우이기 때문에 내 위치만큼이나 타자의 위치가 중요하다.
21세기의 좌/우는 역사적 연속성을 아예 갖고 있지 않다는 주장도 있다. 흔히 ‘파시즘’으로 불리는 (극우적)현상들에 대해, Alberto Toscano(Simon Fraser University) 교수는 지난 2024년 저서 <후기 파시즘>(Late Fascism)에서 “역사적 파시즘(이탈리아의 파시즘이나 독일의 나치즘)과는 유사성이 없는 것(disanalogous)”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동시에 좌/우는 역사적 문제이기도 하다. 역사 속에서 좌/우는 구별되지만 동시에 연속적인 고유한 특성을 가졌으며, 그 특성들은 자의적이고 우연적인 것이 아니라, 그 시대의 사회적 정치적 조건과 이념들을 반영한다.

이처럼 미끄러지는 언어들, 현실과 현실의 역사와 동떨어져 붕붕 날고 있는 언어들을 해석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언어’(정치적 구호) 자체가 아니라, 그 언어의 밑에 깔려 있는, 그리고 그 언어들을 가능케 하는 현실을 들여다 보아야 한다.
이 문제를 최근 총선을 치른, 그리고 그 총선의 결과로 온갖 정치와 정치적 언어들이 난무한 독일의 사례를 통해 좀 더 자세히 들여다 보자.

4. ‘극우’라는 유령을 소환하는 기술
:호수로 가는 세갈래 길 – 독일의 극좌, 극우, 계급좌파

지난 2월 25일 독일 총선은 ‘극우’ 정당의 약진과 ‘극좌’ 정당의 극적인 부활로 요약된다고 서구 언론들은 전한다.

우선 극우 정당은 독일대안당(AfD)이며, 극좌 정당은 ‘좌파당’(Die Linke)를 지칭한다. 심지어는 사회주의 웹 매거진인 <Jacobin>조차도 좌파당의 부활이라고 평가했다.
길게 논할 것 없이, 단도직입적으로 말해보자; 독일대안당은 ‘극우’ 정당이 아니다. 기껏해야 ‘하이예크 논리를 따르는 신자유주의 정당’이다. 좌파당도 ‘극좌’정당이 아니다. 유럽판 progressive liberal에 불과하다.
이번 총선에서 아슬아슬하게 의회 진출에 실패한 BSW(사라 바겐크네히트 동맹)는 기존 좌파당을 ‘무늬만 좌파’(lift style left)라고 비난한 적도 있다. 물론 20세기 기준으로 ‘좌/우’를 구분했을 때의 얘기다.
유럽에서 ‘보수주의 좌파’(left conservatives)라는 평가를 받는 BSW를 극좌라고 부르는 분석가는 거의 없다. 왜냐하면 이른바 ‘좌파’의 전유물인 ‘wokeism’에 거리를 두는 정당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당 이념상으로는 실은 이들이야말로 ‘극좌’에 가장 가깝다.

왼쪽에서부터 메르츠 기민당 대표, 알리스 바이델 독일대안당 대표, 이네스 슈베르츠 좌파당 대표, 사라 바겐크네흐트 BSW 대표.

#1. ‘극우’는 과연 진군하고 있는 것일까?

이번 독일 선거에서 쟁점들 중에 어떤 것도 ‘좌/우’ 이념과 관련된 것은 아니었다. 가장 큰 이슈는 ‘이민과 국경개방’(immigration과 open border) 이슈였으며 그 다음으로 우크라이나 전쟁, 가자 학살, EU 관련 문제들이었다. 경제 문제는 중요 쟁점이 아니었으며, 계급적 불평등도 주요 이슈가 아니었다.

소위 ‘극우’, 혹은 종종 ‘파시즘(나치즘)’으로 불리는 독일대안당을 보자. 독일대안당의 공동대표 중 한 사람인 알리스 바이델은 과거의 파시즘, 즉 국가사회주의당의 이념과는 달리, 공동체의 가치와 개인의 자유를 분리시켜 사고한다. 은행가 출신이자 중국의 연금의 미래를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은 바이델이 이민 문호 개방에 반대하는 것은 그의 직업적, 학문적 판단의 결과이기도 하다. 그는 현재와 같은 방식으로 이민자를 받아들여 연금혜택을 주면 독일 연금은 급속하게 고갈될 것이라고 주장한다(이 점에서 한국에서 바이델의 주장에 동조할 사람들이 적어도 인구의 절반은 넘을 것이다).

즉, 바이델의 반이민 주장은 사회적 가치(전통적 가치의 수호)나 노동시장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우려나 찬성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라, 산수(경제적 전망)에 기초하고 있다. 그렇다고는 해도 바이델이 이미 독일에 도착한 이민자나 난민들을 다시 쫓아내자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그런 주장을 하는 것은 미국의 트럼프 일파다).
그는 open border(국경의 자유로운 통행)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대신에 해외의 난민들이 쏟아져 들어오지 않도록 그들의 본국이 경제 성장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바이델은 그래서 시리아에 자유무역지대를 만들어 경제성장을 유도해야 한다고 제안한 적도 있다.

그러니까 언론에서 ‘극우’, ‘나치’로 포장되는 독일대안당은 실은 그 정책에 있어서 전통적 의미의 극우와도, 파시즘과도 상당히 거리가 있다. 물론 독일대안당 내에 나치즘을 신봉하는 소규모 세력이 있는 것도 사실이며, 절반 정도는 이른바 ‘전통적 가치’를 실현하려는 민족주의적 보수주의자들이 자리잡고 있는 것도 분명하다. 그러나 이들조차도 ‘국가를 정점으로 모든 사회세력이 동등하게 복속하는’ 파시즘 체제를 내세우지는 않는다.
또 경제적 이념에 있어서 국가가 룰을 정하고 그 안에서 자유로운 경쟁을 한다는 기존의 신자유주의와는 달리, 국가는 아예 그같은 룰을 정하는 역할을 해서는 안되며 시장에서의 자유로운 경쟁에서 만들어지는 룰을 국가는 보호하는 역할을 맡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 점에서 19세기의 야경국가론에 더 가까우며, 프리드리히 하이에크나 폰 미제스의 이념을 상당부분 받아들이고 있다.

그런데 왜 독일대안당은 ‘극우’로 비난받았을까? 가장 큰 원인은 ‘주권’ 문제, 즉 EU에 대한 태도 때문이다. 독일대안당은 독일이 EU라는 틀 내에 갇혀서는 현재의 문제들을 해결하지 못한다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성장한 정당이다(2011년 유로존 부채 위기 이후 급성장했다).
여기에서 독일 주권론(혹은 EU scepticism)이 나오며, 국가를 규정하기 위한 단위로서 ‘민족주의’가 후행적으로 뒤따랐다.
그리고 민족주의와 국가주권의 강조는 ‘인종주의적’ 편견을 야기하거나 수반한다. 따라서 표면적으로는 왕년의 나치와 매우 유사해 보인다(실제로 그런 이유로 신나치들도 동조했다). 그러나 고전적인 의미의 파시즘에 부합한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이같은 이민과 경제 정책은 지난 20여년 동안 독일을 규정지어 온 앙젤라 메르켈 총리의 노선과는 정반대되는 것이다. 헬무트 콜과 메르켈로 이어지는 보수 정권이 1989년 동서독 통일 이후 취한 발전정책은 전형적인 신자유주의 정책이었다.
메르켈은 이민자 문호 대폭 개방(이는 해외 미개발 국가에서의 난민 발생을 의미한다. 즉 인권의 이름으로 행해진 난민 수용은 실은 제국주의적 노동력 획득을 위한 국내용 면피이기도 하다)을 옹호했으며 미국의 신자유주의적 세계 질서 수립에 적극 동참했다.
다만 이를 추동하는데서 발생하는 내부적 갈등(기존의 조합주의적 국가 체제의 점진적 해체에 따른 계급 대립의 우려)을 은폐하기 위해 EU라는 외부적 틀이 필요했고, 게다가 EU는 독일의 역내 식민지를 보장해주기도 했다.

독일대안당은 이같은 지난 30여 년간의 독일 발전 모델을 전적으로 부정한다. 따라서 ‘극단적’으로 보인다. 동시에 ‘우파’이기 때문에 ‘극우’라고 명명된다. 그러나 정작 1930년대의 극우파, 즉 나치즘이나 파시즘과 직접적 연계를 갖는 것은 아니다  (“독일 영년 (獨逸零年), Germany, Year Zero“, 2023년 11월 23일 참조.)

이같은 독일대안당의 이념을 한국에 가져오면, ‘극우’라고 말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냥 평범한 우파이거나, 혹은 ‘중도’라고 불릴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동시에, 독일대안당의 결정적 한계는 최종적으로는 EU로부터의 이탈을 주저하고 있다는데 있다. 단지 EU의 개혁과 상대적 자율성의 확대를 주장하지 완전한 독일 주권론을 천명하지는 않는다. 그런 점에서 주권론 없는 우파이기도 하다.

독일대안당은 그동안의 성세와는 달리, 그리고 선거 직전 밴스 미국 부통령과 일론 머스크의 노골적인 지지(선거 개입)에도 불구하고 20% 득표에 그쳤다. 지난 2022년 선거에 비하면 10% 포인트 가량 늘어난 약진이지만, 그러나 오히려 선거 막판에 가서는 지지율이 약간이나마 떨어졌다.

미국의 개입이 큰 효과를 보지 못한 가장 큰 이유는 이들이 ‘극우’라서가 아니라, 역시 EU에 있다. 밴스와 머스크의 개입은 오히려 독일에서 ‘(반미)국가주의적’ 감정을 불러일으켰으며, 역설적으로 미국의 현정권이 지지하는 정당인 독일대안당은 오히려 손해만 본 셈이 됐다. 유일한 성과는 지난 1월 머스크와 바이델이 만난 자리에서 “히틀러는 공산주의자”라는데 둘 다 의견이 일치했다는 정도일 것이다.

정작 독일대안당의 ‘주권 국가’론은 기민/기사연합이 가져갔다. 이를 역설적으로 웅변해주는 시사적인 사건이 바로 그동안 주구장창 대미추종론자였으며 뼛속까지 대서양주의자(Atlanticist)였던 기민/기사연합의 프리드리히 메르츠 대표(차기 총리 내정자)의 ‘독일 독립선언’이었다.
그는 선거에서 제1당이 된 직후, “우리의 최우선 과제는 독일이 미국에서 독립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는데, 그동안의 메르츠의 행적을 보아왔던 사람이라면 기절초풍할 변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한 술 더 떠서 “open border 정책에는 전혀 변함이 없다”는 발언도 했다. 당장 총선 직전에 독일대안당과 함께 연방의회에서 이민규제법안을 제출하고 선거 기간 내내 이민 규제를 주장했던 것을 감안한다면, 트럼프도 이 정도로까지 말을 뒤집지는 않는다.

선거가 끝나자마자 말을 뒤집었기 때문에 그동안 기민/기사연합이 뭘 했는지 정강정책이 무엇이었는지는 이제는 별로 중요하지 않지만, 그가 하려고 하는 것은 분명하다; 그는 더 오랜 전쟁(우크라이나 전쟁)을 원하며, EU를 더 강화하기를 원하며(아마도 그의 치하에서 EU 공동채권이 발행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독일의 사그라져 들어가는 제조업 경쟁력을 ‘military Keynsianism’(군사적 케인즈주의 : 군수부문 투자로 유효 수요를 창출하는 것)으로 끌어올리려고 할 것이며, 독일 국가 자산을 민영화할 것이고, 이를 위해서는 정말로 전쟁이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그가 ‘미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원한 이유라고 할 수 있다. 트럼프의 국제전략은 중국을 고립시키기 위해 러시아와 손을 잡는데 있었고 이를 위해서는 유럽 안보에서 러시아의 지위를 인정해 주어야 한다. 이것이 트럼프가 독일대안당을 지지한 이유였다.
독일대안당이 지지율이 높아지면 기민/기사연합은 독일대안당과 연정이 불가피해지며, 이 때는 한편으로는 EU가 약화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우크라이나 전쟁을 끝내기 위해 러시아의 푸틴과 협상할 카드가 많아진다.

하지만 이 계획은 뜻하지 않게 좌초됐다. 하나는 독일대안당이 기대한 것보다는 부진했으며, 다른 하나는 BSW가 아슬아슬하게 연방의회 진출에 실패하여 기민/기사연합과 사민당의 의석수가 늘어나 이들만으로도 연정을 구성하는 것이 가능해졌기 때문이다(기민당의 주니어 파트너인 기사당의 반발 때문에 녹색당과의 연정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메르츠의 큰 소리는 여기에서 나온다. 그는 기민/기사연합과 사민당만으로의 연정 구성이 가능해지자 ‘미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미국으로부터의 독립이 아니라, 트럼프 정권으로부터의 독립이다. 독일은 미국으로부터 독립할 마음도 없고, 능력도 없다.

독일내 미군기지 현황 독일 내에는 약 80여 곳의 미군기지가 있다.

따라서 그가 노선을 바꾼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존의 대서양주의자 노선, EU 강화 노선을 고수하기 때문에 반트럼프적인 행보를 취한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전쟁이 필요하다.
독일 총선이 끝난 바로 다음날 유럽의 17개 국가의 정상이 우크라이나 수도 키에프에 모여 우크라이나 전쟁 지원을 선언한 것은 바로 유럽 엘리트들의 결의를 보여주는 이벤트였다.
군사적 케인즈주의는 역사적 사례에서는 ‘극우적’이며 ‘권위주의적’ 혹은 ‘독재적’ 정권 하에서 나타났다. 기민/기사연합은 그렇다면 ‘우파’인가, ‘극우파’인가?

#2. ‘케밥 극좌’

독일 총선에서 가장 ‘성공’한 것은 실은 ‘좌파당’(Die Linke)이었다. 그리고 선거 막판에 이들의 지지율이 급등했다. 한국식으로 말하자면, 선거 직전에 ‘바람’이 불었다.
이 바람은 두가지 요인에 기인했다. 하나는 선거방식이었다. 이들은 틱톡을 비롯한 SNS를 주요 캠페인 수단으로 삼았으며 meme을 적극 활용했다.
두번째 요인은 좌파당과 경쟁 관계에 있던 BSW의 헛발질이었다.
좌파당은 구 동독 공산당의 인사들이 주축이 되어 90년대 창당되었다. 처음에는 구좌파(old left)로 출발했는데 2000년 대 초반 잠시 성과를 누리다가 신자유주의가 득세하면서 하염없이 추락했고, 노선다툼과 조직분규도 극심했다.
당내에서 정통 마르크스-레닌주의 원칙과 노동계급 정당을 주장하던 사라 바겐크네흐트가 새롭게 유입된 리버럴 프로그레시브(LGBTQ, 페미니스트, 인권주의자, 무조건적인 이민문호 개방자 등 이른바 wokeism 신봉자)들과 충돌을 빚은 뒤 탈당하여 BSW를 창당하자 세력은 더 급속하게 무너졌다.
좌파당은 이번 선거는 전혀 뜻밖의 성과를 보인 것인데, 특히 젊은 세대 특히 18-24세의 여성들이 폭발적인 지지를 보였다.

독일 총선 성별/연령대별 정당 지지율 출처 : Infratest Dimap

모든 정당 가운데 18-24세 사이 여성들의 지지율이 가장 높은 당이 바로 좌파당이다. 무려 35%에 달한다. 동 연령대 남성들은 독일대안당(27%)을 가장 많이 지지했지만, 여성들은 좌파당을 가장 많이 지지했다. 남성과 여성을 합친 이 연령대 좌파당 지지율은 25%로 모든 정당들 가운데 가장 높은 지지율을 기록했다.
반면 이번 총선에서 제1당이 된 기민/기사연합은 60대 이상에서 몰표가 나왔다. 이렇게 보면, 기민/기사연합은 노인들의 당이고 좌파당은 젊은이들의 당이다. 미래가 밝다. 정말 그럴까?

젊은층, 특히 젊은 여성들 사이에서 좌파당이 선풍적 인기를 끈 것은 앞서도 말했듯이, 캠페인 전략(틱톡) 때문이기도 하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역설적으로 좌파당이 다른 당에 비해 가장 wokeism, 즉 political correctness가 강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기존 정당들에 실망한 젊은 여성들은 자신들의 이해관계와 세계관을 투영할 수 있는 좌파당을 발견했고, 몰표를 던졌다.

좌파당은 그 뿌리와는 달리, 더 이상 ‘사회주의’, 즉 계급 정당이 아니다. 오히려 미국식의 프로그레시브 리버럴에 더 가깝다. 그러나 여기에는 차이가 있다. 좌파당은 정말 생활상의 요구를 내걸었다; 예컨대 케밥 가격 상한제라든지, 월세 상한제, 부유세 등을 공약으로 내걸었다.

그리고 이는 기술적으로는 이미 2년째 침체에 돌입해 있으면서도 물가는 높고 젊은이들을 위한 일자리는 부족한 독일의 경제 상황 속에서 유효한 선거전략이 되었다. 한국식으로 말하자면 김밥 가격 상한제 공약이 선풍적 인기를 끈 것이다.

이렇게 해서 구 동독의 고리타분한 늙은 전향한 공산주의자들과 미래는 없고 아이덴티티는 넘치는 젊은 여성들의 화학적 결합이 발생했다. 팔뚝에 로자 룩셈버그의 문신을 하고 틱톡을 휩쓸었던 좌파당의 공동대표인 이네스 슈베르트너는 이 인구집단의 ‘언니’로서 등장했다.

#3. 계급좌파

BSW는 이 모든 것에 반대되는 경향을 대표한다. BSW의 핵심 인물인 사라 바겐크네흐트는 카리스마 넘치는 구 동독의 마지막 정치경제학 박사 출신의 엘리트다. 이른바 wokeism에 진저리를 내고 좌파당을 탈당하여 BSW를 창당했다.
그는 좌파당의 새로운 경향성을 ‘life-style left’(한국말로는 무늬만 좌파, 혹은 생활상의 좌파-예컨대 케밥 가격 상한제 같은-을 뜻한다)라고 비판하면서 노동계급과의 연대를 모색하는 보다 정통적인 사회주의 노선을 표방했다.

동시에 이민자 문제에 대해서도 다소 제한적이었다. 이민/난민 자체를 반대하지는 않지만, 그러나 무분별한 난민 수용은 반대했고, 독일대안당과 유사하게 국제적으로 난민이 발생하지 않도록 대외정책을 수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BSW는 지난 2024년의 유럽의회 선거과 지방선거에서 눈부신 성과를 보였다. 그런데 이게 독이 되었다. 튀링키아주 지방정권 수립에서 기민/기사연합과의 연정에 참여하고 일부 정책에서 독일대안당과도 연합했다. 게다가 일부 지방의회 의원들의 부패 스캔들 의혹도 터져나왔다. 특히 독일대안당과의 정책 연합이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BSW도 이렇게까지 독일 내에서 ‘극우’에 대한 ring fence(가림막)가 강력할지는 예상치 못한 것으로 보인다. ‘좌절한’ 청년세대는 BSW에 실망하고 좌파당으로 옮겨갔다.

위에서 언급한 3개 정당(독일대안당, 좌파당, BSW)는 모두 독일 내에서의 변화를 반영한다. 그리고 이들 3개 정당의 의석수는 상대적으로 적지만, 합산 득표율은 1/3을 처음으로 넘었다. 그러나 이들 중에 어떤 정당도 최소한 20세기 초반의 의미에서 ‘파시즘’적이지는 않다. 왜냐하면 이들은 모두 ‘국가’를 정점으로 모든 사회세력이 통일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동시에 이들은 모두 체제 내 정당이며, 반체제(anti-systematic) 정당은 아니다. 그리고 그런 점에서 ‘극’(far)라고 말할 건덕지도 없다. 사적 소유의 철폐와 무장투쟁 혁명을 주장하는 좌파 정당도 없고, 공공영역을 사영화하고 게르만의 순수 민족국가를 건설하자는 우파 정당도 없다.
다만 지난 80년대 이후의 독일의 발전 경로가 EU를 통한 지배계급의 확장, 계급투쟁의 은폐였기 때문에 EU에 대한 비판이나 독일 자체 주권에 대한 강조가 기득권자들에게 ‘위협적’인 것으로 보일 뿐이다. 이들을 여전히 ‘극우’나 ‘극좌’라고 부르는 것은 타당한가?

우파가 득세하고 좌파가 위축되었다는 주장은 과거 좌파계열로 분류되었던 녹색당이 이제는 완전히 좌파적 색채를 벗고 상층부르조아 전쟁당으로 전화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좌파가 축소된 것처럼 보이는 착시 현상일 뿐이다(녹색당의 지지기반은 이른바 PMC: professional managerial class, 즉 전문관리계급이다).

이번 총선에서 최악의 성적을 기록한 사민당은 모멘텀상으로는 무능이 큰 역할을 했다. 연정 주도 정당임에도 불구하고 사민당은 우왕좌왕하거나, 혹은 아무 것도 하지 않았으며(선거 막판에서야 피토리우스 전 국방장관을 내세워 군사적 케인즈주의 성격을 강화했다), 따라서 이념 정당이 아니라 아무 생각없는 중간 관리자 같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장기적이고 거시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사민당의 몰락은 독일의 달라진 계급적 조건을 반영한다. 

독일 산업생산 추이 (제조업 제외, 2015=100) 출처 : OECD/세인트루이스연방준비은행

제조업 강국이라는 독일의 명성은 2018년을 고비로 쇠락하고 있다. 2차 대전 이후 60여년 이상 장기적으로 성장했던 독일 제조업은 지난 2018년 정점을 찍은 뒤 계속 하락 추세를 보이고 있다. 이는 단순한 경기적 요인이라고 보기 어렵다. 근본적으로 독일 산업이 경쟁력을 상실하고 있다는 증표로 보아야 한다.

문제는 이처럼 제조업이 위축되면 제조업 고용 인구도 함께 감소한다는 사실이다. 게다가 독일 조합주의의 근간을 이루는 노조 조직율은 지난 1970년 초 30%에서 2018년에는 16.5%까지 떨어졌다. 이는 독일 조합주의의 핵심 파트너이자, 사민당의 주요 지지기반인 조직노동(organized labor)이 약화된다는 것을 뜻한다.

이런 상황 속에서 사민당은 독일 노동계급을 위해서는 거의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2015년 그리스 부채 위기 이후 위험에 빠진 독일계 은행들을 구제하기 위해 메르켈 정권이 지속적으로 추진한 긴축 재정을 그대로 유지했다(덕분에 독일의 GDP 대비 국가 부채 비율은 같은 기간 83%에서 65%로 떨어졌다).
즉, 메르켈 정권이나 사민당 숄츠 정권 모두 완만한 디플레이션 정책을 썼으며 그 결과 내수는 위축되고 기존 산업체들은 해외 시장 개척(수출)에 더 전력했다. 해외 부문 수요에도 불구하고 제조업 생산은 감소 중이라는 것은 독일 제조업이 경쟁력을 상실했다는 것을 뜻한다. 동시에 내수 경기 위축과 특히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에는 에너지 가격이 급등하면서 전반적인 인플레이션 압력이 높아져 독일 스태그플레이션 상태에 빠졌다.

조직화된 노동을 대변한다는 사민당 정권은 이를 저지할 아무 것도 하지 않았으며, 이미 조직 노동 인구가 감소하고 있었고 비조직 노동 대중들에 대한 정치적 호소력도 거의 상실해버렸다. 그 결과가 16.5%라는 낮은 득표율로 나타났다.

대신에 살기 어려워진 대중은 일부(남성)는 독일대안당으로, 그리고 일부(여성)는 좌파당으로 쏠렸다. 그러므로 사민당의 몰락, 좌파당의 부활, 독일대안당의 성장은 모두 동일한 원인에서 유래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기존 좌파 정당이 노동계급을 더 이상 대표하지 못하자, 노동시장 주변부의 대중들은 ‘좌파적’ 색채를 가진 정당으로 이동했으며, 그 유인은 경제적인 것만큼 identity politics에 기반을 두고 있었고, 늙은 구 동독 공산주의자들은 아무 것도 하지 않았는데도 갑자기 ‘새로운 좌파’가 되었다. 한국에서 남태령 시위대가 민노총에 결합하는 것과 매우 유사한 양상이 발생한 것이다.

정작 노동계급 정당을 표방한 BSW는 한편으로는 하부 조직이 부재했기 때문에(실제 노동조직과는 매우 미약한 조직적 관계만을 가지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독일대안당과 같은 극우적 정당과 제휴했다는 이유로 결정적인 순간에 의회 진출이 저지되었다.

다른 말로 해서, 독일의 총선에서 나타난 각 정당들의 행보와 득표율은 선거운동 중 거의 쟁점이 되지 못했던 독일 경제 상황을 반영하면서도 동시에, 계급을 대표한 것이 아니라, 계급의 부재, 계급정당의 부재를 반영하는 것이었다 (“유럽의 변신(metamorphosis): “중앙은 지키고 있다”(center holds)” 2024년 6월 20일 참조)

5. 노동 없는 좌파, 주권 없는 우파

극우’는 과연 진군하고 있는 것일까? 문제는 (1)과연 이들 ‘우익’ 또는 ‘극우’들이 서로 동질적인, 국경을 넘어서 동맹을 구성하는 것이 가능한 집단인가 (2) 왜 2010년대 이후 서구에서 ‘극우적(far-right)’이라고 불리는 성향의 집단들이 대거 등장하게 되었는가 (3) 그리고 ‘극우’라는 평가는 과연 타당한가?의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독일의 ‘극’좌/우가 말해주는 것은 계급도 주권도 없는 정치적 공허함의 표류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는 무엇보다도 노동계급의 실패와 노동계급 정당의 실패에 기인한다. 계급정당의 부재 혹은 기존 계급정당이라고 인정받던 정당들이 자신의 지지자들의 이해관계를 관철하는 것을 포기하고 국가적 혹은 당료들의 개인적 이해관계에 더 충실한 것, 그에 따라 정치적 공간에서 계급이 사라진 것, 이것이 독일에서 극우가 탄생한 배경이자 좌익이 부활하게 된 이유다.

반면 우파 역시, 자신들의 이해관계와 배치되는 미국의 트럼프 분파와 선을 긋는 ‘독립선언’을 했지만, 정작 EU로부터 주권을 찾아오겠다는 생각은 전혀 없었다.
이런 점에서 영국과는 전혀 다르며 주권 없는 우파로 스스로를 위치시켰다. 즉, 독일의 ‘극’좌/우가 말해주는 것은 계급도 주권도 없는 정치적 공허함의 표류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는 무엇보다도 노동계급의 실패와 노동계급 정당의 실패에 기인한다. (“폭탄 돌리기: 출구(exit) 없는 유럽의 도박“, 2024년 7월 10일 참조.) 

그리고 이는 지난 2016년의 영국의 브렉시트 투표 과정에서도 그대로 나타난 바 있다. 영국의 노동계급은 EU 안에서도, EU 밖에서도 길이 없었다.
그리고 정작 결단의 순간이 다가오자 영국 노동당은 어정쩡한 자세를 취했을 뿐이었다. 노동당의 제임스 코르빈은 개인적으로는 노동당 내에서 가장 좌파적인 인사로 평가받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본가 계급이 던져준 문제 앞에서 수동적으로 반응하는데 그쳤다(그는 제한적으로 브렉시트에 동의했다. 그리고 이는 노동당을 지지하던 젊은층과 화이트칼러계층의 이반을 불러왔다). 그리고 브렉시트가 통과되자 노동당의 기반도 같이 무너졌다. 이것이 계급을 지도하지 못하는 계급정당의 한계였다. 물론 노동당은 어떤 선택을 해도 노동자계급에게 좋은 결과를 기대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대안없는 출구이지만. 출구없이 즉 탈주없이 대안도 없다”.

브렉시트와 마찬가지로, 계급 정당의 부재 혹은 기존 계급 정당이라고 인정받던 정당들이 자신의 지지자들의 이해관계를 관철하는 것을 포기하고 국가적 혹은 당료들의 개인적 이해관계에 더 충실한 것, 그에 따라 정치적 공간에서 계급이 사라진 것, 이것이 독일에서 좌익이 부활하고, 극우가 탄생한 배경이었다.

최근 10여 년 사이의 세계적인 우파의 득세, 혹은 극우파의 등장은 과거 40여년 간의 신자유주의 세계화 체제가 약화/붕괴되는데 따른 필연적인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은 지연된 민주화에 따른 구 독재세력과 민주화 이행 이후의 노동없는 ‘자유민주주의’ 과정이 불러온 대안우파(의 맹아적 형태들)가 결합된 하이브리드 아스팔트 신우익이 결성되고 있다.
미국을 비롯한, 독일 영국과 같은 이미 자유민주주의 제도가 성숙한 서구사회에서는 1980년 대 이후의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결과로 약화된 국가와 주권의 경계를 둘러싸고 우익적 대응들이 출현했다.
동시에 서구에서도 세계화의 결과로 약화된 노동계급은 경제적 사회적 조건의 악화에도 불구하고 계급 정치의 부활이 아닌 ‘좌파적 색채’의 확산에 머물고 있다.
동구나 중남미와 같이 아직 고도의 자본주의화가 이뤄지지 않은 사회에서는 외부(서구)의 힘에 의한 주권/민주주의 과정이 왜곡되거나 여전히 저지되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이들 사회에서 공통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이미 사라져 물적토대에 얽매인 과거의 언어들(극우, 극좌)을 현재에 강압적으로 부과하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언어들은 미끄러지며, 현실을 포착하지 못한다.

계급과 계급정당이 사라지자 정치는 정체성과 주권 사이에서 진동하고 정박점 없이 과거의 이름을 간직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소환되어 유령처럼 떠돈다.
이 유령들은 서로를 무서워하며 서로가 비이성적으로 보이고 서로가 극단주의자로 보인다. 귀신은 귀신이 봐도 무섭기 마련이다.
이렇게 해서, 정치는 점술이 되었고 정치적 이성은 광기가 되었으며, 정치적 행위는 물리적 폭력이 된다. 그것에 동의하든 반대하든, 당신들이 ‘자유’와 ‘민주주의’를 중심에 두고 사고하는 한, 또는 ‘정치’가 세계를 구원할 수 있다고 믿는 한은, 이 유령놀음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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