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 시스템은 작동하고, 위기는 봉합되고
: 윤석열 탄핵과 “촛불의 운동정치와 87년 체제의 이중전환”(2018)의 현재성
2025년 1월 31일 / Review & Preview
글 <전망과실천> 편집부
87년체제, 이중 위기, 박근헤퇴진 촛불시위, 탄핵, 윤석열 탄핵, 형식적 민주주의, 이중전환, 민주주의 위기, 재민주화(re-democratization), 시민적 타협(civic compromise), 선제적 예방혁명,
어딘가 낯익은 풍경인 듯 싶으면, 그건 이미 한 번 봤던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무대는 낯설다. 이미 경험했던 일인데도 불구하고. 2016년 겨울에서 2017년 초의 박근혜 탄핵 사태를 한국 사회는 겪었다. ‘탄핵’이라는 점만 놓고 본다면 우리는 이 정착역을 이미 지나간 적이 있다. 그러나 ‘친위 쿠데타’라는 사건으로 본다면, 우리는 매우 멀리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1972년의 10월 유신까지 가야 한다.
지금의 사건들이 낯설다면, 그것은 익숙한 풍경과 이미 기억 속에서 사라진 사건들이 동일한 시간대에 중첩되어 나타났을 뿐만 아니라, 행위자들이 자리를 바꾸어(mirroring) 나타났기 때문이다. 2016-17년의 박근혜 탄핵 사건이 의미하는 바는 ‘공화국은 수호되었다’, 또는 ‘87년 체제는 유지되었다’는 것이다. 윤석열의 계엄 이후 일련의 정치적 사건들 역시, 동일한 관점에서 평가될 수 있다. 한편에서는 탄핵반대와 ‘좌파 척결’을 외치고 다른 한편에서는 공화국과 87년 체제의 수호로 맞선다.
현재의 사태를 보다 냉철하게 보기 위해서는, 먼저 익숙한 사건인 지난 2016-17년 박근혜 탄핵 사건 당시의 정치와 ‘운동’을 들여다 보아야 한다. 그 토대 위에서 무엇이 달라졌으며, 왜 달라졌는지를 파악해야만 이 ‘낯설음’을 답할 수 있을 것이다.
아래 글은 2018년 <경제와사회> 3월호에 실린 권영숙 민주주의와노동연구소장의 논문 “촛불의 운동정치와 87년 체제의 이중전환” (117권, 2018 봄호) 전체를 5장, 6장, 7장을 중심으로 요약 발췌한 것이다. 이 논문을 다시 꺼내든 것은 단지 이 논문이 다루고 있는 사건들의 유사성(탄핵) 때문만은 아니다. 2017년 박근혜 탄핵과 2024년 윤석열 계엄 및 탄핵, 이 두 가지 사건은 연속성 상에 있으면서도 동시에 그 다음 단계로 ‘진전’된 것이며, 그 과정 속에서 질적 변화의 조짐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즉, 2016-17년의 박근혜 탄핵 촛불 시위는 지금 벌어지고 있는 사태들의 ‘전편’이었으며, 그 이후의 민주주의 낙관론에도 불구하고, 심지어 충분히 예견될 수 있는 후편을 간직하고 있었다. 문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2016-17년 촛불시위는 제대로 이해되거나 분석되거나 공유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 논문이 가지는 의미는, 가장 낙관론이 팽배한 시기에 심지어 촛불 시위를 ‘촛불혁명’으로까지 격상시키려는 ‘자유민주주의자들’의 주도권이 가장 강력하던 시기에 이미 그 허상과 그에 따른 위험을 지적하고 환기시켰다는데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1987년 민주화 이행 이후 형성된 이른바 ‘87년 체제’ 가운데 박근혜 탄핵 촛불 시위를 위치시키고 그 지형과 동학을 고찰하는 한편, 87년 체제의 위기와 종언에 대해서 개념적으로 분석적으로 밝혔다는데 있다.
논문은 박근혜 탄핵 시기의 촛불 시위를 사회운동론의 개념틀을 통해 분석한 후에,
(1) 박근혜 탄핵 사건이 갖는 한국 정치의 위기의 성격으로서 87년 체제의 붕괴 조짐
(2) 왜 촛불 시위는 ‘혁명’이 아니라 ‘운동’에 머물렀던가? – ‘시민적 타협’으로서의 촛불시위
(3) 87년 체제는 재공고화의 길을 걸을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전환이 나타날 수 있을 것인가라는 문제
(4) 이를 전지구적인 민주주의의 위기와 연계하여 제기하고 살펴본다.
전체적으로 논문은 2016-17년 촛불시위라는 단일한 ‘사건’을 대상으로 다루면서 꼼꼼하게 그 동햑을 고찰하면서도, 이를 넓게는 87년 체제라는 체제론의 관점에서 정위치시키고, 나아가 거기에서부터 87년 체제 자체의 성격, 87년 체제의 이중의 위기를 규정하고 분석하는 것으로 나아가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다루는 범위가 넓고 여러 가지 중요한 문제들을 동시에 건드리고 있다. 또한 박근혜 퇴진 촛불에 대한 분석을 목표로 하면서 ‘민주화’ 및 민주주의라는 관점에 더 중심을 두었기 때문에 87년 체제와 관련한 헌법적 성격에 대해서는 중요한 점을 지적하면서도 아쉽게도 부분적으로 언급했다. 마찬가지로 ‘정치적 사건’의 연쇄와 동학, 행위자의 관계망을 주로 다루었기 때문에 그 기반이 되는 정치경제학적 조건들에 대해 강렬하지만 간략하게 서술하는데 그쳤다..
그러나 2017년 박근혜 탄핵이후 1년뒤인 2018년에 출간된 이 논문에서 예견했던대로, 혹은 예상보다도 더 빠른 속도로 사회운동 지형은 더 위축되거나 제도적으로 포섭되거나 우경화된 채로, 2025년의 계엄-탄핵 사태를 맞이하였고, 계엄이후 국면은 전개되고 있다. 현재 윤석열 계엄과 탄핵국면은 ‘민주주의’의 참여자들 사이의 ‘도덕’이나, ‘지성’, ‘논리’ 혹은 ‘양심’의 문제가 아니라, 그같은 상태들을 필연적으로 야기한 특수한 정치적 사회적 구조에서 비롯된 것이며, 따라서 이 막간의 ‘희망’ 또는 ‘민주주의 수호’에도 불구하고 박근혜 탄핵 사건 때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숙제들을 남길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이 논문이 제시한 전체적인 개념틀과 논지 역시 2024년-25년 윤석열 계엄이후 탄핵국면에서 여전히 유효한 설명력을 가지고 있다..
내용을 좀더 살펴보면, 논문은 박근혜 탄핵에 대해서 보는 시각을 다르게 설정하면서 출발한다. 즉 논문은 “박근혜 정권의 국정농단을 87년 체제의 위기의 극단적인 현상태(現狀態)로 파악하고 있으며, 그것을 87년 체제의 위기를 초래한 근본 원인이라고 보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87년 체제의 위기의 원인이라기보다는 87년 체제의 위기의 징후 혹은 산물”이다.
왜냐하면, “민주화 이행 이후 자유주의적 민주주의는 수출주도 발전국가전략을 수정하지 않은 채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로 경제적인 전환을 감행”했고, “그 결과 발생했던 자본주의적 불평등과 빈부격차, 계급적인 양극화 등에 대해서 교정이나 억제하기는커녕, 신자유주의적 경제정책을 펼치는 정치적 외피나 통치의 정당성 장치로 기능”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치적 민주주의로 모든 것을 환원하고 민주 대 반민주의 구도로 고착되면서 민주주의의 심화로 나아가는 문제의식과 대안을 봉쇄하였다. 그 점에서 이는 ‘87년 체제’의 위기로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87년 체제’란 무엇인가? 한국의 민주화이후 민주주의, 즉 87년 체제는 한편으로는 “자유민주주의의 확립”이자, 다른 한편으로는 “경제 민주화”(신자유주의적 경제질서의 확립)라는 두가지 축이 동시적으로 진행된 정치적 과정이었으며, 이런 의미에서 저자는 이를 ‘이중전환’(dual transformation)이라고 개념화하고 있다.
이러한 문제의식 하에서 논문은 2016-17년의 촛불시위를 행위자, 집합행위 레퍼투아르, 그리고 프레임 3가지 측면에서 분석한다. 여기서 이 논문의 진가가 제대로 발휘되고 있기도 하다. 즉 촛불시위는 혁명이 아님을 밝히면면서, 동시에 박근혜퇴진 촛불시위는 87년 체제와 헌법질서의 수호라는 보수주의적 운동이라는 지적이다. 촛불시위는 박근혜의 ‘국정농단’에 대한 대중적 항의 운동이며 이를 통해 제도정치 프로세스에 개입하는 정치운동이었다. 동시에 “박근혜 퇴진 운동과 촛불시위는 ‘87년 헌정질서의 회복’이라는 기치를 내세웠고, 나아가 박근혜 대통령의 조기 퇴진을 87년 헌법을 통해서 쟁취함으로써 87년 체제로 회귀”하였다. 저자는 혁명에 대한 정의에 따라 촛불 시위는 혁명의 조건 자체를 충족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혁명과정에서 나타나는 ‘광기의 순간’(the moment of madness)이 부재했으며, 최종 목표 역시 ‘정상국가 회복’ 혹은 ‘국가의 정상화’에 머물렸다고 지적한다. 즉 촛불 시위는 ‘촛불 혁명’이라는 낭만적 수사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으로 ‘체제 수호 운동’, 즉 호헌 운동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논문은 촛불 시위 대중은 단순히 야당에 의해 동원된 존재는 아니었음을 지적한다. “87년 민주화 운동과 그 직후의 6공화국 헌법 개정 과정과 마찬가지로, 촛불 시위도 대중동원의 힘에 기초하여 제도정당들 간에 대통령 탄핵이라는 제도적 절차를 밟기를 합의하는 거래가 성사되었으며, 그런 의미에서 단지 엘리트들 사이의 ‘밀실 타협’이 아닌, 시민적 타협(civic compromise)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촛불시민’이라고 불리는 다중 주체의 암묵적인 혹은 공공연한 승인을 통해서, 즉 시민적 타협을 통해 정치적인 결과, 즉 박근혜 퇴진을 통해서 헌정질서를 회복하는 결과, 즉 필자에 따르면 ‘재민주화’를 이뤘다. 이러한 ‘시민적 타협’이야말로 퇴진 운동과 촛불시위의 전체적인 모습을 특징짓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박근혜 탄핵 퇴진 운동(촛불시위)를 불러온 근본적인 동인은 무엇이었을까? 저자는 이를 이중적 의미의 ‘87년 체제의 위기론’으로 요약한다. 하나는 대의제의 위기, 이른바 ‘민주주의의 위기’다. 그러나 이들의 논의는 단지 대의체제(정치적 과정)에만 초점을 맞출 뿐이다. 하지만 저자에 따르면 민주주의는 단지 ‘대중의 일반의지’ 뿐만이 아니라, 그 의지의 내용 즉 대의할 것이 무엇인가를 함께 묻는 과정이다. 87년 체제는 이 ‘무엇’을 말할 수 있는 대중들을 처음부터 배제한 채 확립된 체제였다. 무엇보다도 사회집단 가운데 가장 주요한 ‘계급들’이 헌법 개정에 참여하지 못한, 그리고 대의되지 못한, ‘노동없는 민주화’였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이중전환의 다른 한 축, 즉 ‘경제(민주화)’와 관련된 것이다. 한국 자본주의는 경제개발계획 수립 이후 두 가지 방식으로 발전해왔다(이를 묶어서 ‘한국형 발전모델’이라고 부를 수 있다). 하나는 ‘국가가 지도하는 수출주도전략’이며 다른 하나는 이를 위해 ‘내수를 억압하고 노동착취를 최대화하는(즉 준강제노동) 축적 전략’이었다. 그러나 이 두 축 가운데 87년 체제에서 ‘해소’된 것은 전자, 즉 ‘국가가 지도하는 수출주도전략’뿐이었다. 이것조차도 97년 IMF 구제금융 사태를 거치면서 수출주도전략은 오히려 확대강화되었고 오직 해체된 것은 ‘국가 주도’(국가계획위원회의 해체) 뿐이었다. 그 결과 노동계급의 내적 상태는 양극화가 심화되었고, 이는 노동계급(또는 계급 의식)의 형성을 저해했다.
결론적으로 87년 체제는 단지 정치적 의미에서 불완전했을 뿐만 아니라, 경제적 측면에서는 더욱 불완전했다. 이것이 87년 체제의 근본적 한계이자 내재된 모순이었다.
현 시점에서, 87년 체제 속에서 박근혜, 윤석열 탄핵 사태의 연속성과 차이를 제대로 이해하는 것은 중요하다. 이 논문의 핵심 논지와 개념틀은 현재 윤석열 계엄이후 국면을 설명하기 위해서도 적절하고 유용한 이론적 시각을 제시하고 있다고 본다. 논문의 논지를 더욱 확장하면, 두 사태를 다음과 같이 비교할 수 있겠다. 박근혜 탄핵 촛불시위 때는 ‘민주 vs 독재’라는 방식으로 시위를 이해하지 않았다. ‘민주 vs 밀실(농단)’이라는 구도였기 때문에 ‘정상국가’론이 득세했던 것이다. 즉 촛불 시위는 87년 체제에 대한 강한 긍정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윤석열 정권의 계엄 이후 사태에서는 이같은 구도가 달라진다. 윤석열의 계엄시도로 인해 탄핵 국면이 열리면서, 구도는 ‘민주 vs 반민주(독재)’로 재정식화되는 것이다.
이는 어떤 면에서 영화 <서울의 봄>을 떠올렸다는 다중의 반응처럼, 1987년의 소환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중의 열기는 미적지근하다. 이는 계엄이후 국면에서 일어난 촛불시위(응원봉 시위)는 87년 체제에 대한 ‘신뢰’ 또는 ‘의지’가 박근혜 탄핵 촛불시위 때보다 훨씬 약화되었음을 시사한다. 이것이 바로 대중들의 사회적, 경제적 지위는 촛불시위 때보다도 훨씬 악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심지어는 오히려 악화되었기 때문에, 대중들이 대규모로 동원되지도 않고 운동의 내용이 급진화되지도 않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한마디로, 87년 체제는 대중들에게도 불만족스럽다. 단지 대통령 윤석열의 계엄 선포를 ‘독재’라는 관점에서 이해하기 때문에 민주주의 ‘수호’에 나섰지만, 87년 체제 자체에 대한 신뢰는 높지 않으며, 이 체제가 가져올 미래에 대해서도 불안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음을 반증한다.
그렇다면 왜 박근혜 탄핵 당시와 달리, ‘우파’(혹은 극우파)는 강력하게 등장했는가? 거리의 태극기 시위의 주요 세력은 유신, 5공 시기의 인구집단이다. 이들은 87년 체제가 자신들의 기득권을 파괴해가는 과정을 경험하고 있는 집단이다. 그리고 87년 체제가 이들에게 ‘거리에서 말할 권리’를 보장해 주었기 때문에 이들은 그 기회공간을 활용하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이들에게 ‘수구적’ 또는 ‘반동적’이라고 부를 수는 있지만, 이들을 ‘파시즘적’이라고 부르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또 다른 인구집단인 20-30대 남성의 경우에는 87년 체제가 이들 집단에게 가져온, 그리고 예견되는 미래에 대한 불만을 근거로 저항한다. 그런 점에서 이들은 보다 ‘극우’에 가깝다. 즉 서구에서 등장하고 있는 대안우파(alt-right)가 될 가능성도 높다. 그러므로 거리의 탄핵 반대 시위대는 반동적+신우익적 세력의 결합물이다. 그리고 이들을 ‘독점 자본주의의 결과물’이라고 말하는 것 역시 단순한 논리적인 비약이며, 자본주의 축적 싸이클의 차이를 몰각할 뿐만 아니라, 구체적으로 현실에서 이 ‘차이’들이 어떻게 정치적으로 표현되는가를 풍부하게 이해하지 못하게 만든다.
결론적으로 박근혜 탄핵 시위는 87년 체제의 ‘정당성’을 둘러싸고 벌어진 것인데 반해, 윤석렬 탄핵 찬반 시위는 87년 체제가 악화되었기 때문에, 즉 87체제의 모순이 격화되어 일반적 정치적 과정으로는 해소되기 어려운 상태로까지 진전되었기 때문에 나타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윤석열이 대통령에서 탄핵되고 체제(혹은 헌정질서, 혹은국가)의 재정상화가 예견되는 지금의 한국 정치 상황은 87년 체제의 완결이자 동시에 그 최종적인 해체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
전문 링크(자료실): “촛불의_운동정치와_87년체제의_이중_전환, <경제와사회>117호 (2018)”
원문 출처(한국연구재단): 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2324443
.
촛불의 운동정치와 87년 체제의 이중전환
(Candlelight Movement Politics and the Dual Transformation of Korean Democracy)
저자 권영숙
출처 : <경제와사회> (2018), Vol. 117, pp. 62-103
(본문중 각주는 삭제함)
1. 정의를 둘러싼 문제: 역사적인 상징투쟁으로서의 사회운동
이 글은 박근혜 퇴진운동 속에서 촛불시위의 운동정치(movement politics)를 규명하는 것을 일차적인 목표로 한다. 이와 관련하여 규범적이고 당위론적인 언명은 가능한 한 배제하려고 한다. 촛불의 자기 신성화와 촛불에 대한 낭만화를 배척하고 촛불시위를 분석할 것이다. 관련하여 이 글은 두 가지 전제를 제시한다.
첫째, 박근혜 퇴진운동과 촛불시위는 구분되어야 한다. 박근혜 퇴진운동의 주축은 분명히 주말의 대규모 촛불집회 및 행진이었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박근혜 퇴진운동은 다양한 양상을 보였고 주말 촛불집회로만 환원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어느덧 촛불집회를 중심으로 규정되고 퇴진운동 자체와 촛불시위는 동격화되었다. 퇴진운동과 촛불시위를 구분함으로써 우리는 퇴진촛불의 운동정치에 대한 복합적인 진면목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우리는 촛불시위와 박근혜 퇴진운동에 등장하는 복수의 이질적인 행위자들의 구성에 주목해야 한다. 이런 전제하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이 제기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다양한 복수의 이질적 행위자들과 주체들이 등장하는 박근혜 퇴진운동 과정에서 어떻게 촛불이 지배적인 경향으로 전체 정조를 압도하게 됐을까? 둘째, 촛불시위 전 과정을 통틀어 제도적인 중단은 없었고 오히려 제도적인 질서(the establishment) 안에서 끝까지 이뤄졌다. 그런데 왜 그것은 굳이 혁명이 ‘되어야’ 했을까? 셋째, 마지막으로 체제의 제도적인 중단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어떻게 정권의 조기 퇴진이라는 정치적으로 유의미한 결과를 만들어냈을까?
촛불시위의 동원 궤적. 출처: 해당 논문, 79쪽.
11월 20일 여야의 ‘탄핵에 의한 퇴진’ 합의와 이어서 11월 26일 법원의 청와대 100미터 앞 행진 허가로 190만 명이 집결하면서 주말 촛불은 최고조의 정점에 도달했고, 이후는 줄곧 하강곡선을 그린다. 주말 촛불집회 동원 규모 그래프를 보면, 단 하나의 정점(봉)을 찍고, 이후는 단순한 주말 동원을 반복하는 추이를 그리고 있다.
2. 2016년 촛불과 87년 체제의 이중적 관계성
우리는 2016년 촛불시위를 통해서 대사건의 상황적 동학과 체제론적 시각의 관계성에 대해 질문할 수 있다. 이는 역사와 정치가 연결되는 순간이다. 즉 어떻게 대사건은 정치체제를 흔들고 나아가 그것의 전환을 이끌어낼 수 있는가?
연인원 1600만 명이 집결하며 거대한 대중동원의 파노라마를 펼쳤던 촛불이라는 ‘대사건’은 역사적 분수령이 되었는가? 구체적으로 질문하면 박근혜 퇴진운동 및 촛불시위는 87년 체제의 체제론적인 문제와 어떻게 관련되는가?
그것은 이른바 87년 체제의 위기를 해소하였는가, 아니면 미봉하였는가? 박근혜 정권의 ‘국정 농단’으로 국가의 실체가 낱낱이 드러났다. 민주주의는 작동 불능의 상태로 보였다. 이런 가운데 역설적으로 ‘민주공화국’의 상은 환기되었고, 민주화 이행의 주역이었던 시민은 재동원되었다. 국가도 시민도 아닌 ‘촛불시민’이 국정 농단을 막고 민주주의를 회복시킬 주체로 부상하였다. 그러나 과연 그것은 87년 체제의 한계를 극복했는가? 다른 말로 해서 박근혜 적폐의 청산이 민주주의를 구원할 것인가?
이 글은 박근혜 정권의 국정농단을 87년 체제의 위기의 극단적인 현상태(現狀態)로 파악하며, 그것을 87년 체제의 위기를 초래한 근본 원인이라고 보지 않는다. 그것은 87년 체제의 위기의 원인이라기보다는 87년 체제의 위기의 징후 혹은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박근혜 정권의 국정농단이나 권력 사유화 및 절대화, 나아가 애초에 이명박과 박근혜 우파 정치세력의 연속집권을 가능하게 만든 것은 이미 도래했던 ‘87년 체제’의 위기였다.
87년 민주주의 체제의 위기는 한편으로 민주화 이행 이후 30년 동안 있었던 정치적 민주화의 불철저함, 배제적 민주주의와 대의되지 못하는 대의제 민주주의로 나타났다. 하지만 그것은 또한 한국의 민주화 이행 이후 민주주의, 즉 배제적이고 협소한 자유주의적 민주주의 안에 내장된 한계의 폭발이기도 했다.
한국은 민주화 이행 이후 자유주의적 민주주의는 수출주도 발전국가전략을 수정하지 않은 채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로 경제적인 전환을 감행했다. 그 결과 발생했던 자본주의적 불평등과 빈부격차, 계급적인 양극화 등에 대해서 교정이나 억제하기는커녕, 신자유주의적 경제정책을 펼치는 정치적 외피나 통치의 정당성 장치로 기능했다. 정치적 민주주의로 모든 것을 환원하고 민주 대 반민주의 구도로 고착되면서 민주주의의 심화로 나아가는 문제의식과 대안을 봉쇄하였다. 그 점에서 이는 ‘87년 체제’의 위기로 말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박근혜 퇴진 운동과 촛불시위는 ‘87년 헌정질서의 회복’이라는 기치를 내세웠고, 나아가 박근혜 대통령의 조기 퇴진을 87년 헌법을 통해서 쟁취함으로써 87년 체제로 회귀하였다. 그렇다면 이제 그다음의 기획은 87년 체제의 이름으로 87년 체제를 해소하고 포스트 87년 체제로 나아가는 것일 것이다. 어떻게 보면, 1980년대 민주화운동과 1987년 6월항쟁, 그리고 이후의 민주 대 반민주 구도 속에서 낭만화되고 신성화되다시피 한 1987년 헌법을 ‘개헌’하거나 ‘제헌’하는 방법은 사실은 그 헌법의 이름으로 단행하는 것만이 유일한 길이기도하다. 과연 그것은 성공할 것인가? 그리고 나아가 그것은 87년 체제의 한계를 딛고 민주주의를 심화시킬 것인가? 이것이 2016년 퇴진 운동과 87년 체제의 연관성 이후에 제기되어야 할, 두 번째 체제적인 질문이다.
3. 혁명 혹은 사회운동?
박근혜 퇴진 운동, 그리고 촛불시위는 과연 ‘혁명’인가 아니면 그것은 하나의 대규모 대중동원을 특징으로 하는 사회운동인가?
이 글은 가장 먼저 현재 한국사회뿐 아니라 학계에서도 당연시되는 ‘촛불혁명’ 혹은 ‘촛불시민혁명’이라는 호칭에 대한 정의적·개념적 해체부터 시도하려고 한다. 규범적이고 주관적이며 상식화된 견해가 아니라, 역사사회학과 사회운동론의 이론적 자원들에 대한 면밀한 검토를 통해 2016~2017년 퇴진 운동과 촛불시위를 사회운동 현상으로써 분석하고, 나아가 사회운동적인 유형을 정의하고자 한다.
(중략)
당연히 이에 대한 사회과학적인 답은 ‘ 혁명 아님’이다. 우선, 2016년 박근혜 퇴진운동의 주축이었던 촛불시위는 헌정질서를 중단시킨 것이 아니라 복원시켰다. 그 점에서 촛불시위는 현존 정치체제를 변혁하는 것이 아니라 ‘보수’하기 위한 시위였다. 그것은 민주주의를 망친 원인으로 ‘국정농단’을 지목하고, 이에 따라 박근혜-최순실로 표현되는 국정농단 세력에 맞서 “민주주의 회복”을 외쳤던, 말하자면 체제 수호 운동이었다.
다음으로, 그것은 국가 혹은 사회체제의 변혁을 가져오지 않았다. 촛불시위는 국가를 변혁하거나 전복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국가의 비정상 상태를 해소하고 ‘정상국가’화하려는 시도였다. 그것은 ‘실패한 국가(the failed state)’의 원인을 박근혜의 ‘권력 사유화’에서 찾았고, 권력을 사유화한 통치자를 제거함으로써 국가를 정상국가로 되돌리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촛불시위는 일상이 있는 시위였다. 일상성을 파괴하지 않고, 주중의 일상생활을 영위하고 토요일마다 빠짐없이 22차례 개최된 집회에 지속적으로 대규모 인원이 참가하여 대중적인 힘으로 압박한 후 제도적인 절차를 거쳐서, 혹은 제도화된 방식으로 헌정질서를 회복시켰다. 광장의 ‘축제’로 명명되긴 했지만 ‘광기의 순간’, 혹은 혁명적인 순간은 도래하지 않았다. 이는 찰스 틸리의 혁명운동 대 사회운동의 대비로 봤을 때 분명히 혁명운동이 아니라 사회운동이다.
4. 박근혜 퇴진 촛불의 운동정치
2) ‘시민적 타협’에 의한 재민주화
박근혜 퇴진 운동이 기본적으로 ‘ 87년 체제’를 태동시킨 1987년 6월항쟁의 제도정치-사회운동정치의 동일선상에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1987년 민주화 이행은 6월항쟁이란 대중동원을 배경으로 야당 세력이 권위주의 집권 세력과 밀실거래를 통해서 ‘6·29 선언’의 8개 민주화 이행 조항에 합의하면서 수습 국면으로 돌입하였다. 이를 이행론에선 ‘거래(deal)에 의한 민주화’라고 규정한다. 하지만 거래에 의한 민주화 유형도 사회적 제 계급세력 간의 힘에 기초한 타협에 의한 이행 방식인 ‘사회적 협약(pact)에 의한 민주화’와 ‘엘리트 협약에 의한 이행’의 두 유형으로 나뉘어진다. 이 가운데 엘리트협약에 의한 이행은 구정치세력을 일소하지 않고 선거민주주의의 게임에 상호합의하여 최소 민주주의를 시작한다는 점에서, ‘변형주의 전략(transformism)’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1987년은 6월항쟁이라는 대규모 대중동원 혹은 ‘항쟁’에도 불구하고, 사회 제 세력 간의 ‘사회적 협약’을 맺지 못하고 제도정당 엘리트 간의 협약으로 귀결되었다. 그리고 2016년 박근혜 퇴진 시위 역시 대중동원의 힘에 기초하여 제도정당들 간에 대통령 탄핵이라는 방식의 제도적인 절차를 밟기로 합의하는 거래로 귀결되었다. 하지만 이번의 여야 합의가 1987년과 다른 점은 광화문 광장을 메운 촛불시민들과 광장집회를 주최한 ‘퇴진행동’이 암묵적으로 이러한 제도적인 엘리트 간 협약을 묵인 혹은 인정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이를 엘리트 간 밀실타협이 아니라, 일종의 ‘시민적 타협(civic compromise)’이라고 명명하고자 한다. 2016년 박근혜 퇴진 운동은 시민사회 및 사회운동세력과 제도정당들 간의 사회적 협약은 아니지만, ‘촛불시민’이라고 불리는 다중 주체의 암묵적인 혹은 공공연한 승인을 통해서, 즉 시민적 타협을 통해 정치적인 결과, 즉 박근혜 퇴진을 통해서 헌정질서를 회복하는 결과를 만들었다. 이러한 ‘시민적 타협’이야말로 퇴진 운동과 촛불시위의 전체적인 모습을 특징짓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드디어 헌법재판소가 국회의 탄핵소추를 가결하고 박근혜와 그 일당 등이 차례대로 법적인 절차를 거쳐 구속되었다. 이리하여 한국의 헌정질서는, 아니 87년 체제는 국정농단세력을 제거하고 다시 정상태로 복원되었다. 2016년 촛불시위는 87년 체제 헌정질서 사수를 기치로 내걸었다는 점에서 체제 보수적인 운동이었고, 87년 체제를 규정하는 1987년 헌법으로서 대통령 탄핵을 진행함으로써 87년 체제를 지켜냈다고 말할 수도 있다는 점에서 재민주화라고 규정할 수 있다…
한마디로 2016년 촛불은 반제도적이지도 반운동적이지도 않았다. 이것이 바로 모든 행위자가 ‘윈-윈’하는 전략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검찰, 법원 등의 적폐를 눈감은 채 모든 적폐청산은 박근혜 적폐로 제한되거나 이후로 미뤄졌다. 한마디로 적폐의 기본 핵심 구조 안에서, 그 구조의 조력을 받아 진행된 탄핵의 완성이었다.
5. 사회운동론적 분석: 행위자, 프레임, 집합행위
1) 행위자 구성: 촛불은 누구였는가
박근혜 퇴진이라는 공통분모를 통해 다양한 이질적인 행위자들이 ‘복수의 조직적인 장(multiorganizational field)’을 구성했음에도 불구하고 박근혜 퇴진 촛불운동은 질적으로 의미 있는 대립항, 혹은 촛불 이후 운동 주체의 근거가 될 사회적인 동맹을 구성해내지 못했다. 촛불집회에 이질적이고 다양한 복수의 행위자들이 참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촛불운동은 ‘박근혜 퇴진’이라는 공통구호로 한정됐고, 페미니즘, 노동, 성소수자 등의 행위자들의 목소리를 제한했다. 퇴진행동 역시 이들 소수자에 대한 박해나 혐오행위로부터 이들의 존재와 목소리를 단지 ‘보호’하는 수준을 넘어서, 박근혜의 국정농단에 대한 분노 이상의 다양한 쟁점들을 끌어안고, 87년 체제에 대한 비판적인 문제의식을 확대하고 급진화하지 못하였다.
결과를 놓고 보면, “박근혜 퇴진”이라는 단 하나의 공동의 프레임으로 운동의 구호를 좁힘으로써 촛불시위의 폭발적인 확대와 박근혜 퇴진(사실은 탄핵에 대한 시민적 합의)이 가능하게 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런 좁혀진 프레임은, 촛불을 구성하고 있던 다양하고 이질적인 사회행위자들과 사회집단들 간에 퇴진 운동을 넘어서 사회적 대안을 추구할 사회적 동맹의 구성 가능성도 차단했다. 박근혜 퇴진 이후 촛불은 뿔뿔이 흩어지는 모래알 같은, ‘성긴’ 주체였던 것이다.
2) 집합행위 레퍼투아르: 어떻게 탄핵은 가능했는가?
기본적인 동원구조는 토요일 주말의 집중 대규모 동원 전략이고, 집합행위 형태는 ‘촛불’을 손에 드는 비폭력 평화시위였다. 즉 폭력적인(violent), 혹은 적대적인(confrontational) 집합행위가 아니라 제도적인 집합행위였다. 대부분의 시위대는 법치와 공안질서의 ‘선을 넘을 의사’가 없음을 분명히 표현했고, 집회 주최자인 퇴진행동 역시 그 선을 넘도록 독려하지않았다.
이는 단지 제도정당뿐 아니라 검찰, 경찰 등의 공안기구와 법원 등 사법기구도 중요한 행위자로 자리 잡도록 만들었다. 혹은 법원 등 사법기구가 ‘반행위자가 아니라 적극적인 행위자로 등장했기 때문에 제도적인 집합행위가 유지되었다. 2016년 촛불시위는 의문의 여지없이 사법권력에 의존한 촛불시위의 동원이었다. 그리고 이번만큼 운동의 제도화 및 정치의 사법화가 가시화된 예가 없었다…
이것은 2016년 퇴진 운동 내에 먼저 촛불시위가 지배적인 정조 및 집합행위 레퍼투아르가 되고, 이어 ‘촛불시민’이 퇴진 운동 내에서 누구도 거역하지 못하는 일원적이고 통일적인 주체, 특권적인 주체로 탄생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한마디로 스스로를 주체화하면서 또 스스로의 행위를 제도적으로 순화하면서 이를 ‘시민 됨’으로 간주하는 이중적인 모습이 바로 ‘촛불 시민’이었다. 즉 통제하면서 통제되는, 통치하면서 스스로 통치되는, 지배하면서 지배되는 시민. 사실은 이것이 바로 민주공화국의 ‘국민 주권’의 실체이기도 하리라.
한마디로 2016년 촛불은 반제도적이지도 반운동적이지도 않았다. 이것이 바로 모든 행위자가 ‘윈-윈’하는 전략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검찰, 법원 등의 적폐를 눈감은 채 모든 적폐청산은 박근혜 적폐로 제한되거나 이후로 미뤄졌다. 한마디로 적폐의 기본 핵심 구조 안에서, 그 구조의 조력을 받아 진행된 탄핵의 완성이었다.
3) 구호와 프레임: 민주공화국과 국가의 정상화
촛불시위를 지배한 구호는 “민주주의 회복”, “박근혜 퇴진”이었다. 한마디로 박근혜 정권의 국정농단으로 망가진 헌정질서를 바로잡고 수호하자는 것이었다. 이 점에서 촛불은 체제를 수호 혹은 보수하자는 운동이었다는 것을 구호 그 자체가 드러내고 있다. 하지만 이것 외에는 모두 주변화되었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문제의 진단에 있어서 가장 큰 위력을 떨친 구호는 “이게 나라냐”였고, 세월호 참사 때로부터 외치기 시작한 “국가는 없었다”라는 구호가 다시 등장하였다. 한마디로 비정상적인 국가의 정상성의 회복을 통해서 정상국가를 지향하는것이다. 국가의 변혁과 전복을 꾀하자는 것이 아니라 실종된 국가 기능을 회복해달라는 시민적 요청이고, 적극적으로는 시민의 부름에 국가답게 답하라는 계시이다. 국가와 시민 사이의 사회계약적인 관계를 근대 국가의 모습이라고 보는 것이다. 이것이 ‘민주공화국’을 건설하자는 담론으로 응집되었다. 그런 점에서 2016년 퇴진 촛불의 구호들은 국가 전복이나 국가 해체적인 담론이 아니라 오히려 강한 국가주의적 담론이라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사회적 적대 관리의 실패는 단지 박근혜 정부만의 문제가 아니라 김대중-노무현 정부에서도 이미 드러나 있었다는 것이다. 신자유주의적 세계화 속에서 부의 양극화가 심화되면서, 이른바 ‘2개의 국민’ 담론이 등장했던 때가 김대중 정권 시절이었던 것을 상기해보라. 그때나 지금이나 사회적 적대가 정치적·사회적인 계급투쟁이나 이익 투쟁으로 전화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단지 박근혜 정부가 전임 정부와 다른 점은 도전 세력의 약체화 속에서 절대권력이 절대 부패하는 전철을 밟은 점이다. 지나친 권력 과신과 보수의 혁신 레토릭에 스스로 도취한 나머지, 그들의 권력이 초법적인 정당성을 지녔다고 간주하면서, 즉 정치적 권력을 분배하는 데 실패하면서 정치적인 곤경에 처하게 되었다.
그만큼 이명박과 박근혜 정부의 국정농단과 사유화는 “국가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만들었고, 국가 기능의 마비가 가져오는 사회적 불안정의 공포를 느끼게 하였다. 특히 중산층을 중심으로 한 보수파까지 우파 헤게모니로부터 탈주하게 한 것은 바로 이 국가 부재와 사회 해체에 대한 불안과 공포였다. 결국 누가 무너지는 사회를 방어할 국가를 맡을 것인가의 문제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는 동시에 과거의 발전 모델로는 한국 사회가 더 이상 유지될 수 없는 한계에 부닥쳤다는 것을 반증한다. 그렇다면 사회계약적인 국가, 정상국가, 실패하지 않는 국가는 어떻게 가능할까?
2017년 1월 박근혜 탄핵 촛불시위가 광화문에서 열리고 있다. 출처 <시사저널>
6. 전 지구적 민주주의의 위기와 한국의 87년 체제
2) 한국의 87년 체제와 전 지구적인 민주주의의 위기
한국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의 위기는 단지 박근혜 정권으로 한정되는 위기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87년 체제의 전 과정 속에서 축적된 위기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박근혜 정부가 등장한 후 거의 붕괴 직전에 이른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의 위기는 사실 두 가지가 혼재된 위기였다. 하나는 국정농단과 권력 사유화로 대의제 민주주의가 더 이상 기능하지 못하다는 형식민주주의의 위기, 또 하나는 이왕 쟁취한 민주주의의 실패와 한계가 중첩된 위기다.
전자는 선거민주주의(plebiscitary democracy)가 위임민주주의로만 작동하면서 ‘대의민주주의(representative democracy)’로서의 성격이 실종되거나 권력이 사유화되면서 일반의지를 대변하는 ‘대의제’의 실패로 나타났다.
이에 대해 ‘87년 체제 위기론’의 첫 번째 입장은 전자의 ‘정치적 위기’에 초점을 둔다. 예컨대 착근된 민주주의가 되지 못한 ‘결손 민주주의’의 한계가 대의제의 위기와 87년 체제의 위기를 가져오고 있다고 말한다. 혹은 사회 제 세력의 이해를 대표하는 데 실패한 대의제로 인해 거리의 정치가 제도정당정치를 압도하면서 ‘정치 대표성의 위기’가 더욱 심화된다고 일찍이 진단을 내린 바 있다. 이들은 그러므로 87년 체제의 정치 위기 극복은 대의제 민주주의의 작동 방식과 제도를 개혁하고, 명실상부한 대의제 민주주의를 운용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과연 대의제의 제도적인 개혁, 즉 인민의 일반의지를 원활하게 대의할 수 있는 체제를 갖추면 87년 체제의 민주주의 위기는 극복될 수 있을까? 과연 일반의지는 무엇인가?
대의제의 실패라고 말하는 것은 사실은 ‘대의’할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건너뛰는 것이다. 정치사회와 형식적 민주주의의 시스템만 잘 구비한다고 해서 위임민주주의가 대의민주주의 수준으로 격상되지는 않는다. 민주주의가 뿌리내리고 있는 정치사회, 나아가 ‘시민사회’의 모습이 결국 정치의 장소이기 때문이다.
87년 체제 위기론의 두 번째 시각은 신자유주의 이행의 결과에 주목한다. 즉 1997년 신자유주의 세계화 이후의 경제적인 ‘이행’이 가져온 결과에 주목하고, 이것을 위기의 진원지로 보는 시각이다. 정치적 민주화 이행 이후 신자유주의적인 경제적 이행 속에서 민주주의가 평등을 가져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불평등을 강화시킨 체제로 전락했다는 것이다.
이 견해는 체제론적인 측면에서 한국 사회는 87년 체제에서 ‘97년 체제’로 이미 전환하였고, 경제적 신자유주의와 정치적 민주주의의 괴리를 내적인 모순으로 바라본다. 이 견해에대해서 필자는 내용적으로 동의하지만, 정치적 민주주의와 경제적 신자유주의의 관계를 상호 모순, 부조응, 괴리가 아니라 오히려 ‘이중 전환’의 과정이라고 보는 입장을 견지한다.
정치적 자유화가 불가피하게 경제적 자유화를 조우한 것이 아니라, 정치적 이행과 경제적 이행을 단일한 ‘이중 전환’으로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결국 1997년 이후 한국의 정치적 민주주의는 자기 한계를 노정하기 시작했는데, 사실 이중전환의 관점에서 보자면, 이는 87년 체제 자체의 문제로부터 배태된 것이다. 정치적 민주화가 결국 시장의 자유와 국가개입의 최소화 등 자유방임적 경제자유화를 가져온 것이다. 그러므로 필자는 두 개의 체제 담론 자체를 기각하는 입장에 서 있다. 그 결과는 바로 ‘노동 배제적인 자유주의적 민주화’라는 민주화 경로였다.
노동배제적 민주주의하에서 노동계급의 시민권 확보는 지연됐고, 노동시장은 비정규직 중심으로 재편됐다. 그리고 이렇게 재편된 비정규직과 정규직의 이중 노동시장은 외환위기 이후, 나아가 2000년 비정규직이 본격화한 후 악화된 분배 불평등과 양극화, 노동 빈곤화의 주범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민주주의는 무엇에 실패하였는가’라는 질문을 던져봐야 한다. 과연 민주주의가 실패한 것은 대의제였을까? 민주주의는 왜 불평등을 감소시키지 못했을까? 민주주의 위기의 근원에는 민주주의가 실패할 수 밖에 없었던, 혹은 실패를 예정했던 정치적 과정이 있는 것이다.
민주주의 제도정치가 대의제에 실패하는 이유는, 그리고 대의제가 민주주의를 배신하는 이유는, 국가의 무능이나 제도적인 미비 탓도 있지만 그 이전에 ‘대의되지 못하는 대의’의 문제가 크다. ‘대의제’의 실패가 아니라, 무엇을 대의할 것인가의 문제가 공백으로 남아 있는 것이 문제다. 무엇이 대표되지 못했는가가 문제인 것이다.
민주주의의 실패는 바로 여기서 출발한다. 서유럽의 양상 역시 비슷한데, 민주주의를 배반한, 혹은 민주주의가 통제할 수 없는 자본주의하에서, 결국 자크 랑시에르의 표현을 빌자면, “민주주의에 반하는 대의제”를 목도하는 현실에 이르렀고, 민주주의는 역으로 “증오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랑시에르 인터뷰, 2017.3.31; 랑시에르, 2011). 그런 점에서 정치적 위기와 정치경제적 위기, 이 두 가지 위기는 중첩돼 있고 긴밀하게 연결돼 있다.
한편으로 불평등구조를 온존하고 더욱 강화하기만 하는 민주주의에 대해 가중되는 환멸, 다른 한편으로 대의제 민주주의가 형식화·사유화되고 금권정치로 전락하면서 민주주의(권위주의적 자유주의)에 대해 점증하는 증오는 한 궤를 이루는 것이다.
그리고 불평등한 자본주의하에서 부와 권력 독점이 갈수록 심화되면서 대의제 민주주의는 더욱 형식적으로 가동되고 일부 권력집단과 모리배들이 제도적 민주주의를 더욱 농단하며, 대의제로 표상되는 일반의지는 실종하고 마는 악무환적인 순환의 종착지에 지금 다다른 셈이다. 한국의 박근혜 정권은 전 지구적인 현상의 한가지 예일 뿐이다.
7. 87년 체제의 ‘이중 전환’: 2016년 촛불은 87년 체제의 완성인가? 87년 체제 극복의 시작인가?
2016년 촛불은 87년 체제의 자기 한계로부터 야기된, 한국 민주주의의 중첩된 이중 위기를 해소, 아니 미봉하였다. 우선 2016년 촛불시위는 민주주의의 회복 운동이고 87년 헌정질서의 복원이라는 의미에서 ‘재민주화’에 성공하였다.
박근혜 정권하에서 후퇴한 민주주의를 87년 헌법의 적극적인 해석을 통해서 재민주화함으로써 87년 체제로 다시 회귀하였다. 87년 체제는 스스로의 존재 이유를 드러냈고, 더욱 공고화되었고, 자기완성에 이르렀다. 나아가 2016년 촛불시위는 박근혜 정권의 문제로 환원될 수 없는 한국 민주화 이행 이후 30년의 온갖 ‘구조적 적폐’의 문제를 정권의 적폐 청산으로 한정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그 점에서 이는 차라리 혁명이라기보다는 혁명을 예방하는 반혁명, 선제적인 혁명, 헌정질서를 중단하지 않고 질서 있게 이뤄진 재민주화라는 점에서 ‘피를 흘리지 않는’ 명예혁명이라고 할 수 있다. 나아가 이는 민주주의 회복과 국가 정상화를 위한 엘리트 간의 거래와 시민적 타협을 통한 재민주화이기도 하다. 하지만 2016년 ‘촛불혁명’으로 재민주화에 성공한 한국의 민주주의 앞에는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로 노정된 불평등구조 위에 점차 저성장의 단계에 돌입한‘일자리 없는 성장’ 국가가 놓여 있다. 그렇다면 과연 2016년 촛불로 다시 회생한 한국의 민주주의는 자신에 내재된 ‘민주적 자본주의’의 위기를 넘을 수 있을까? 아니, 한국의 민주주의는 과연 민주적 자본주의를 실현할 수 있을까? 그래서 사회를 방어하는 사회방위국가이자 사회계약적 국가로 환골탈태할 수 있을까?
서구에서도 실패한 근대성 프로젝트를 대신할 ‘포스트 민주주의’ 논의가 대두되고 있는 지금, 1987년 이행 이후 정치적 자유주의가 스스로를 좁게 제한할 수밖에 없었던 물질적 한계, 즉 노동을 포섭할 물질적인 분배구조와 이익 분점을 할 수 없는 제 사회세력관계라는 문제는 여전히 촛불 이후 정치 앞에 놓여 있다. 민주주의의 환멸과 보수화가 우파의 집권을 용인했던 지난 9년을 지난 지금, 촛불의 힘은 단지 87년 체제를 회복시킨 것뿐 아니라 87년 체제의 한계를 극복하는 것으로까지 나아갈 수 있는가 말이다. 노동 배제적 자유민주주의하에서 새롭게 복원된 87년 체제는 또한 과연 민주주의의 환멸과 실패를 넘어설 수 있을까? 87년 체제하의 자유주의 정치를 복원하고 개혁정치를 가동하겠지만, 과연 민주주의 그 자체는 구원할 수 있을까 말이다.
무엇보다도 87년 체제로서 87년 체제의 위기를 봉합하는 제1단계의 기획은 성공했으나, 87년 체제 자체를 넘어서는 제2단계의 기획은 성공할 수 있을까 말이다. 혹은 과연 87년 체제의 정치적 자유화와 경제적 자유화를 넘어서는 새로운 전환은 무엇일까?
이에 답하기 위해서는 먼저 국가의 정상화를 주장하기보다 국가의 존재를 더욱 근원적으로 질문하고, 둘째 대의제의 실패에만 초점을 두고 그것의 절차적 보완을 통해 대의제와 일반의지 사이의 부조응과 괴리의 문제를 해소하려 하지 말고, 사회적 배제와 통합의 정치 동학에서 배제되는 것들과 차별의 문제를 질문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촛불 이후 문재인 정부하에서도 여전히 배제와 통합의 정치동학은 작동하고 있고, 신자유주의와 한국 자유주의의 친연성은 잠복하고 있는 가장 큰 문제가 될 것이며, 안보와 자본의 두 축은 ‘실패한 국가’가 아니라 사실은 ‘강한 국가’를 계속 작동해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질문에 대한 답 역시 실천적으로, 즉 사회적인 힘의 분기와 이해들의 동맹에 의해서 가능할 것이다. ‘촛불’이라는 공통분모하에 가려졌던 소문자시민들, 다양한 사회적 범주들과 집단들의 목소리가 촛불 이후에 어떻게 터져 나올지 사회운동정치와 이에 대한 정치사회의 움직임이 주목된다.
demlabor1848@gmail.com 저작권자 © 민주주의와노동연구소: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