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자 봉기 1년, 광기의 전쟁과 전쟁의 이성
2024년 10월 10일 / 글로벌 리포트
글 권영숙 민주주의와노동연구소 소장
가자 봉기, 대량학살(Genocide), 전쟁과 평화, 전쟁 게임, 중동 지정학, 중동 단결
봉기 1년 뒤 세상의 풍경
“아주 소수의 예외를 제외하고는, 가자 지구의 모든 사람들은 아프거나, 부상당했거나 혹은 둘 다다. 여기에는 각국에서 모인 구호인력들과 자원봉사자들도 포함되며, 아마도 이스라엘 출신 인질들도 그럴 것이다. 가자 지구에서 활동하는 동안 우리는 환자들과 팔레스타인 보건 업무 종사자들에게서 광범위한 영양 결핍을 목격했다. 식료품에 대한 특권적 접근성을 가지고 있으며 영양보조 식품을 가지고 있던 우리들조차 전원이 체중이 감소했다. 우리는 환자들, 특히 어린아이들에게서 생명을 위협하는 영양부족 사태를 입증할 수 있는 수많은 사진 증거들을 가지고 있다.
바이든 대통령과 해리스 부통령에게 호소한다. 당신들도 이 끔찍한 사태를 목격하기를 바란다. 아이들의 꿈은 미국의 무기에 의해 절단되고 불구가 되었으며, 엄마들은 우리에게 아이들을 구해달라고 애원하고 있다. 우리는 당신들이 양심이 있다면 도저히 잊을 수 없는 이 비명과 울음을 들어보기를 원한다. 우리는 왜 당신들이 이 아이들을 고의적으로 살육하는 나라에게 무기를 제공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바이든 대통령과 해리스 부통령, 우리는 당신들에게 호소한다: 당장 이 광기를 끝내라.”
(2024년 10월 2일, 가자 지구에서 자원봉사 활동을 하고 있는 99명의 미국인 의사들과 간호사들이 미국 정부에 즉각적인 전쟁 중단을 요구한 공개 서한 중에서)
이들의 집계에 따르면 지금까지 가자 지구에서 이스라엘의 공격으로 사망한 팔레스타인인은 가자 지구 하마스 보건부 통계인 4만 2천명보다 훨씬 많은 11만 8900여명에 달한다(이미 수천명의 가자 정부 보건 공무원들이 폭격으로 사망했기 때문에 제대로 된 통계를 낼 수 없는 상황이라고 이들은 전하고 있다).* 그리고 이 정보는 언론 기사로 보도되어야한다.
또한 국제적 의학전문저널인 <Lancet>의 추계에 의하면, 가자 지구에서 이스라엘군의 공격으로 인한 직간접적인 사망자 숫자는 무려 18만 여명이 넘는다. 또한 가자 주민 235만 명 가운데 190여만 명이 난민이 되었으며, 가자 지구 건물의 30%가 파괴되었다.
가자 북부지구의 제빵소가 이스라엘군의 포격으로 불타고 있다. 이 제빵소는 가자 북부에 남은 마지막 제빵소다. 출처 : 가자 지구 독립저널리스트 Hossam Shabat의 X 계정.
작년 10월 12일 <전망과 실천> 창간호에 썼던 “가자 위기(Gaza Crisis)”에서 언급했듯이, 1942년 바르샤바 유태인 게토 지역 봉기 때와 마찬가지로, 가자 주민들은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죽어가고 있으며, 그들이 절멸의 위기에 처한다고 해도 놀랍지 않을 정도다. 그리고 1942년과 마찬가지로, 그들의 죽었다고 해서 인류의, 아니 실은 지배층의 ‘양심과 이성’이 움직이는 일도 없을 것이며, 앞으로의 죽음들을 막지도 못할 것이다.
가자 봉기 1년후, 그리고 이스라엘의 절멸을 향한 대학살극이 벌어진 1년후, 지금 여기서 차라리 질문되어야 할 것은, 왜 지난 2차 대전 이후 최소한 정치적으로는 공식적으로 ‘인권’과 ‘국제협력’, ‘전쟁방지’를 외치던 미국을 축으로 한 글로벌체제가 이제는 노골적으로 대량학살을 찬양하며 심지어는 핵전쟁의 위협까지도 ‘게임’의 한 부분으로 농단하게 되었는가, 왜 인류의 양심과 ‘천부인권’은 학살과 전쟁과 심지어는 ‘비인간화’를 막지 못하게 되었는가 하는 점이다.
최소한의 공식적 책임이라도 인정하였던 지난 90년대 이라크, 아프간 전쟁과는 달리, 이제 미국과 유럽등 서구는 전쟁 범죄나 대량학살을 아예 표면적으로라도 범죄시하거나 비난하지조차도 않는다. 다만 그들은 열심히 그같은 사건들을 은폐학고 정보 탄압하는 공안정국을 지속할 뿐이다. 하지만 이는 갑자기 서구 엘리트들의 인성이 나빠지거나 혹은 잘못 배워먹은 탓은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엉뚱하게 인류애와 인간비극과 인권의 문제로 회귀하지 말아야한다. 정확히 사태의 성격과 방향, 그리고 지형을 알아내야 한다.
우크라이나 전쟁과 가자 봉기를 통해 서구는 지난 2차 대전 이후 수립된 글로벌체제, 그리고 그 체제의 보편화된 가치들, 소위 ‘글로벌 시민사회’의 규범과 상식을 폐기하거나 혹은 일방적으로 수정하려고 하고 있다. 그리고 그 첫번째 시험대에 오른 종목들이 인권과 전쟁에 대한 국제 규약들이다. 따라서 과거의 인권적 성과들에 기초한 호소와 비난, 항의는 이제 더 이상 힘을 갖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같은 ‘인간적 가치’를 만들어낸 토대가 바뀌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전세계적으로 이른바 ‘공감능력을 가진’ 인간들이 가자 봉기 이후의 사태를 보고 충격을 받은 이유이며, 동시에 전쟁을 멈추라는 호소가 힘을 갖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아랍의 단결은 가능한가?
: 솔레이마니의 유산과 미국이 원하는 것
지난 2020년 1월 트럼프 행정부는 이라크의 바그다드 공항에서 드론 공격으로 이란계 민병대인 쿠드즈군 사령관인 솔레이마니를 암살했다.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미군의 RQ7 드론이 솔레이마니가 탄 자동차를 날려버리는 장면은 그럴듯 했지만, 정작 중요한 문제는 아무도 묻지도 답하지도 않았다. 미국은 왜 솔레이마니를 암살했는가?
솔레이마니는 군인이었지만, 동시에 외교관이었다. 이른바 전시외교관(war diplomat)이라고 할 수 있다. 그가 중동 전역을 돌아다니며 했던 활동은 ‘전쟁’이 아니라, 외교였다. 그는 이라크와 시리아, 그리고 레바논의 무장세력들을 만나 이들을 통합했고, 미국이 지원하는 IS와 알카에다를 격퇴하였으며, 이스라엘에 대항하는 중동 지역협력체제를 설득해왔다. 그리고 결국 미국이 그의 암살을 감행했어야 할만큼 성공적이었다.
이란의 이스라엘 공격 바로 다음날인 지난 2일 사우디아라비아 외무장관은 이란 외무장관을 만나 “두 나라 사이의 차이를 영구히 해소하고, 공동협력 관계를 만들어가겠다”고 선언했다. 서구 언론에는 짧게 한 줄로 보도되었지만, 이 선언이 주는 의미는 심대하다. 최근의 사태에 대해서는 사우디아라비아는 이란의 대이스라엘 미사일 발사를 “보복 행동”(retaliatory actions)이라고 불렀다는 것은 사실상 이란의 행위를 정당화시켜주는 발언이다 (보복행동의 반대말은 ‘도발되지 않은 행동’(unprovoked actions)이다). 즉 공식적으로는 사우디아라비아는 중립적 태도를 보이고 있지만, 사실상 이란의 편을 들고 있다.
게다가 사우디는 이미 지난 9월 실권자인 무하마드 빈 살만 왕세자가 “팔레스타인 독립국가 가 건설되기 전까지는 이스라엘과의 관계 정상화는 없다”고 선을 그었다. 이는 이스라엘을 교두보로 아랍을 분열시키려 했던 트럼프 정권의 ‘아브라함 어코드’(아브라함 합의)에서 정면으로 벗어나는 선언이다. 장기적으로 이란과 사우디의 관계 정상화는 지난 천 년 동안 지속되어온 이슬람 수니파와 시아파 사이의 화해를 의미한다. 이는 중동 전체의 ‘단결’을 의미하는 것이며, 따라서 이스라엘은 중동지역 내에서 고립되고 미국의 대중동 영향력은 약화될 수밖에 없다. 미국 내에서 대이란 전쟁 불사 발언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런 중동의 지정학적 지형 속에서 가자 지구 학살은 계속 수행되고 있는 것이다.
뉴욕타임즈는 미국이 이란을 도발할 필요가 있다는 칼럼을 게재했다. 출처: <New York Times> 10월 1일자 Opinion.
만약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교두보인 중동이 미국의 손아귀에서 벗어난다면, 미국의 대외전략 전체에 중대한 약점이 생긴다. 그렇다고 미국이 전쟁을 하는 것도 국내 정치 여건상 불가능하다 (미국은 누군가가 전쟁을 일으켜주면 못 이기는 척하고 2차 주역으로 나설 수는 있다). 그래서 미국의 일부 강경파들은 확전을 원한다. 그러나 여기에도 전쟁의 이성은 작동한다.
즉 이란전이 발생하면 에너지 가격은 천정부지로 뛸 것이며, 인플레이션이 폭발하고 금리도 폭등한다. 어느 정도 에너지 자급자족이 가능한 미국을 제외한 유럽과 아시아의 다른 국가들은 이를 적극 반대한다. 게다가 이는 러시아에게는 아주 유리한 조건이 될 것이다. 지난 9일 윌리엄 번즈 미 CIA 국장이 “이란이 핵을 개발하고 있다는 어떠한 증거도 없다”고 발언을 한 것은 대이란전 가능성이 사실상 사라졌다는 것을 스스로 공표한 것이나 다름없다.
친러시아계 씽크탱크인 Strategic Culture는 이같은 상황을 ‘솔레이마니의 유산’ 혹은 ‘솔레이마니의 사후 승리’라고 규정한다. 솔레이마니는 죽었지만, 그가 남긴 유산 즉 군사적 차원에서의 이슬람연합의 가능성은 현실화되고 있으며, 그 실마리를 연 것은 수니파인 하마스의 가자 봉기였고, 여기에 호응한 것은 시아파인 헤즈볼라의 개입이었다. 그는 종파의 차이를 뛰어넘는 인계철선(trip wire)을 만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인계철선은 너무나 많은 사람들의 죽음으로 만들어진 것이기도 하다.
왜 전쟁은 ‘분쟁’이란 양상으로 지속되는가?
:소모전, 장기전, 그리고 절멸의 위협
서구 언론과 한국 언론만 보면 이스라엘은 마치 무소불위의 군사력으로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따라서 하마스든 헤즈볼라든, 이란이든 이같은 압도적 군사력 앞에서는 단지 소극적인 저항에 그치는 것처럼 묘사된다. 이는 사실이 아니다. 이스라엘이 심지어는 가자 지구에조차 전격적인 지상군 진입을 못하는 이유는 그같은 작전은 이스라엘의 피해도 막심하기 때문이다.
또한 레바논의 헤즈볼라나 이란에 대해서도 맘대로 폭격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 역시 가짜 뉴스에 불과하다. 이스라엘이 세계에 자랑했던 Iron Dome(철의 보호막)은 이미 깨진지 오래다. 뿐만 아니라, 비용에 있어서도 감당이 안된다. 2만 달러짜리 헤즈볼라 로켓을 한 발을 막기 위해 이스라엘이 치뤄야 하는 비용은 수십만 달러에 달한다.
전쟁은 동시에 ‘경제’이기도 하다. 10배나 넘는 비용을 지불하는 싸움을 장기간 지속할 수는 없다. 이미 동티가 나고 있다.
지난 10월1일 국제신용평가기관인 스탠다드앤푸어스는 재빨리 이스라엘 국채의 신용등급을 A+에서 A로 하향하고 관찰등급을 ‘부정적’(negative)으로 낮추었다. 그에 앞서 지난 9월 27일 또다른 신용평가기관인 무디스도 이스라엘 국채 신용등급을 A2에서 Baa1으로 하향했다. 가자 봉기 이전인 지난 2022년과 비교했을 때, 각각 2등급씩 하향한 것이다. 가자 봉기 직후인 지난 2023년 4분기의 이스라엘 GDP는 전년 동기 대비 무려 21%나 하락했었으며, 올해 2분기까지 지난 1년 동안 GDP는 1.35% 감소(연률)했다. 뿐만 아니라 수만명 이상의 이스라엘 국적자들이 해외로 도피했으며, 이스라엘 국내에서도 약 10-20만에 달하는 북부 레바논 지역 점령주민들이 대피했다.
미국을 쥐락펴락한다는 유태인 억만장자들도 가치가 떨어진 이스라엘 국채를 사주지는 않는다. 이들은 자기 돈은 안들이고, 미국 정부가 이스라엘을 지원하도록만 압력을 넣는다. 이스라엘이 중동을 향해 쏘아대는 무기는 미국이 ‘대 준’ 것이며, 좌표도 미국이 찍어주고, 정보도 미국이 제공하며, 전투기도 미국이 대주고 이스라엘은 단지 손가락을 빌려주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손가락 위의 머리는 이미 염증으로 썩어가고 있다. 그들은 심지어는 ‘용병’조차도 못된다. 용병들 사이에도 ‘규율’ 즉 군대를 유지하기 위해 적을 인간적으로 대해야 하는 규칙들은 존재한다. 팔레스타인인들을 납치해서 강간하는 것을 일과로 삼고, 그러면서 의회는 강간 군인들을 처벌해서는 안된다는 결의안을 통과시키는 이스라엘의 군대와 국민들은 근대적 의미의 ‘군’(軍)이 아니라 다만 철거용역 조폭에 불과하다.
더 큰 문제는 ‘군사적’인데 있다. 이스라엘군의 현재 전쟁 수행 방식인 ‘폭격’은 ‘성과’는 있지만 ‘효과’는 미미하다. 하마스든 헤즈볼라든, 혹은 이란의 군부와 정치지도자들도 ‘죽을 각오’는 되어있다. 이들에게는 ‘순교’다. 반면 하마스와 헤즈볼라, 이란이 쏘아올리는 미사일들도 동일하게 이스라엘에 영향을 미친다. 지난 4월 이란이 첫 번째 보복반격을 했을 때, 미국과 이스라엘은 ‘아무 영향도 없었다’고 주장했지만, 이스라엘 내 군기지가 파괴되고 대공방위망이 뚫린 것은 분명했다. 다만 이란은 민간인 거주 구역에 미사일을 보내지 않았기 때문에 눈에 띄는 쇼 윈도우 효과가 없었을 뿐이다.
이달 초 이란의 두 번째 보복 공격(하산 나스랄라 헤즈볼라 지도자 살해에 대한 이란의 보복 공격) 때에 이란은 약 200발의 미사일을 쏜 것으로 이란 언론은 전하고 있다. 이스라엘이 대공방위망으로 모두 막아냈다고 주장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SNS에 퍼진 영상만으로도 최소한 30발 이상은 지상 목표물에 명중한 것으로 평가된다. 특히 네게브 사막의 이스라엘 공군기지 격납고가 파괴된 것은 사진 자료 상으로 명확해 보인다.
현재 이스라엘은 적의 미사일 공격에 의한 피해를 보도/전파하는 것을 엄격하게 금지하는 정보통제를 하고 있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대공방위망이 얼마나 뚫린 것인지는 알기 어렵다. 그러나 만일 이란의 미사일 공격이 효과적이었다면, 이스라엘은 최소한 이란에 대한 직접 공격이나 레바논으로의 지상군 투입은 하기 어려울 것이다. 서구 언론에는 마치 이란의 공격이 별 것 아니며, 이스라엘이 보복을 하려 하는데 미국이 말려서 마지못해 참는 것처럼 묘사된다. 그러나 전체적인 구도 하에서 보면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난 4월에도 그리고 이번에도 이란은 직접 이스라엘 영토를 공격했다. 다만 그 대상이 민간 시설이 아니라서 바깥으로 덜 티가 났을 뿐이다. 이에 반해 이스라엘은 이란 요인들에 대한 ‘암살’ 시도는 여러 차례 있었지만, 직접 이란 영토에 대한 공격을 수행한 적은 없다. 군사적인 비례의 원칙(Tic and Tac; 눈에는 눈, 이에는 이)에 비추어 본다면 이같은 공방전은 일방적, 즉 이스라엘에게 말도 안되는 손해다. 이스라엘은 레바논의 헤즈볼라와 하마스를 대규모 폭격했지만, 시쳇말로 이는 ‘개’를 패는 것에 불과하다. 반면 이란은 이스라엘을 직접 타격, 즉 주인(본체)을 팼다.
이스라엘이 군사적으로 이란을 압도하고 있다면 이같은 일은 가능하지 않다, 즉 양국 사이의 미사일 공방전이 의미하는 바는 이스라엘(그리고 미국)이 먼저 꼬리를 내렸다는 뜻이며 이미 승부는 결판이 났다. 미국과 이스라엘은 이란 내 핵시설을 공격한다느니, 원유 저장 시설을 공격한다느니, 그리고 미국이 말려서 참는다느니 하는 ‘말’로 체면을 챙겼을 뿐이다. 미국과 이스라엘은 공허한 정치적 수사로 승리를 장식하려고 하는 반면에, 이란은 힘으로 보여주고 굳이 미국의 말잔치를 뒤집어 엎지는 않았다. 개에게도 잔반은 남겨줘야 하는 법이다.
게다가 미국 내에서의 반전 압력도 만만치 않다. 미국과 이스라엘이 가자 봉기 이후 가장 크게 실패한 지점은 사실은 ‘프로파갠더’에 있을지도 모른다. 미국의 지원은 결코 무한정 보장된 것이 아니다.
이와 관련, ‘정글과 가든’에 대한 발언으로 나름 명성을 드높인 호세프 보렐 EU 외교위원장은 최근 “서구가 지원을 중단하면 우크라이나는 15일 내로 망한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서구의 대이스라엘 지원이 중단될 경우, 이스라엘은 아마 그의 예상보다는 오래 버틸 것이다. 한 달 반은 가능하다. 하지만 두 달이면 ‘가나안’은 가자를 부러워하게 될 것이다.
이란이 발사한 미사일이 이스라엘 대공방어망을 뚫고 지상목표물에 명중, 폭발하고 있다. 출처: <알 자지라>
물론 이스라엘은 핵무기를 가지고 있다. 지난 80년대부터 개발해서 최소 약 200기 이상을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따라서 전통적인 ‘전쟁’이 발발한다면, 이스라엘은 흔히 말하는 ‘국가의 실존적 위기’ 하에서 얼마든지 원자폭탄을 쓸 수 있다. 반면 핵무기를 가진 이스라엘을 상대해야 하는 핵무기가 없는 이슬람 국가들은 이스라엘이 전통적인 의미의 전쟁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상황을 조절해야만 한다. 이것이 가자 봉기 이후 지난 1년간 수많은 인명이 희생되고 앞으로도 희생되겠지만, 그러나 여전히 ‘전쟁’이 되지 못하고 ‘분쟁’으로 그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란은 전쟁을 원치 않는다거나 혹은 회피한다고 보는 것은 정확한 견해가 아니다. 이란은 자신들이 승리할 수 있는 전쟁의 방식을 원하며, 그것이 지금과 같은 장기적 소모전 혹은 하이브리드 전쟁(hybrid war)이다. 이 전쟁에는 군사적 측면만이 아니라, 경제, 정치, 사회, 동맹의 형성, 적의 해체와 같은 온갖 요소들이 결합한다. 다만 이것이 ‘전쟁’이어서는 안될 뿐이다.
반면 이스라엘로서는 ‘전쟁’을 원한다. 즉 그들은 20세기의 전쟁, 국가과 국가의 정규군이 만나 대규모 회전을 벌이는 전쟁을 원한다. 그 경우에 이스라엘은 원자폭탄을 쓸 수 있는 ‘상황적 근거’를 만들 수 있으며, 따라서 승리할 수 있다. 이스라엘이 이란은 직접 공격하지 못한 채 애꿎은 가자 지구와 웨스트 뱅크, 레바논의 민간인들만을 학살하는 것은 동양식의 고전적인 표현으로 한다면 ‘격장지계’(激將之計 적을 흥분시켜 공격을 유도하는 것)이며, 중동의 국가들은 민간인들의 희생을 무릅쓰고서라도 이 전쟁은 이스라엘이 승리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한다.
전쟁의 광기 뒤편의 이성
따라서 이 미친 전쟁의 광기, 그 수많은 민간인들의 죽음, 인간적 비극, 인권의 무력함과 같은 광기의 뒤안에는 냉정한 이성적 계산이 자리잡고 있다. 다만 그들은 서로 가진 무기가 다르며 힘에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 차이를 바탕으로 이성은 계산을 하며, 그 결과가 지금의 광기이다. 그래서 아무도 미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모두가 미친 놈으로 표상되는 세계가 출현한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있는 세계다.
톨스토이는 <전쟁과 평화>에서 “전쟁은 게임이 되어서는 안된다. 전쟁은 전쟁이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전쟁은 너무나 비참한 것이기에”라고 썼다. 톨스토이는 1850년대 크리미아 전쟁에 러시아제국 장교로 참전했었다. 러시안 룰렛은 바로 이 때 나온 도박이다. 인간의 목숨이 너무나도 값어치가 없었기 때문에, 귀족 자제 출신인 러시아제국 장교들은 아무렇치도 않게 자신들의 목숨을 내기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었다.
비슷한 맥락에서 레닌은 “전쟁은 현실적이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다면, 아예 전쟁을 하지 말아야 한다. 중간은 없다”고 썼다. 레닌의 이 명제에서 ‘절대적, 현실적 적대’라는 개념을 이끌어낸 것은 우습게도 볼세비키들이 아닌, 나치의 법이론가가 된 칼 슈미트였다.
21세기의 세계는 레닌이 경고했던 ‘중간’을 가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슈미트의 주장과는 달리, ‘결의’의 문제가 아니라, 힘의 격차와 그 힘을 반영한 이성의 광기 때문이다. 지겹게도 많이 죽이고, 아주 오래 갈 것이며, 인간적인 호소들은 위안이 되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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