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은 어떻게 진실과 멀어지는가?
- 가짜 뉴스, 언론, Disinformation (Part3)
2024년 11월 28일 / 이슈 리포트
글 권영숙 민주주의와노동연구소장
가짜뉴스, 사실 보도, 진실,탈진실(post-truth), 객관주의, 편집권, 언론 자유, 제도언론, News Guard
언론의 이념과 지형
미국에서 가장 많은 구독자(유튜브 채널은 1750만명, 스포티파이는 1500만명)를 가지고 있는 podcast의 진행자인 조 로건(Joe Rogan)이 지난 11월 5일 미국 대선 직전 도널드 트럼프 공화당 후보를 인터뷰하자, 민주당 진영에서는 그를 우파(right), 심지어는 극우파(far-right)라고 비난다(카말라 해리스 민주당 후보는 인터뷰를 거절했다).
하지만 이는 매우 이상한 비난이기는 하다. 로건은 지난 2020년 민주당 경선 때에는 버니 샌더스 연방상원의원을 공개 지지했으며, 동성애자 결혼도 찬성하며 언론자유의 옹호자이다(이번 대선에서는 인터뷰 직후 트럼프를 공개지지했다). 로건의 정치적 색채는 ‘자유방임주의자’(libertarian)에 가깝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를 ‘우파’라고 부를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가 지지했던 샌더스는 독일 정치지형에 갖다놓고 본다면 기껏해야 기민당과 사민당 중간 어디쯤 정도에 해당하고, 보다 인색하게 본다면 아마도 앙겔라 메르켈 전 기민당 소속 총리보다 어떤 면에선 더 우파일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샌더스에 대해서 한국에서는 좌파의 정치적 모델로 꼽기도 한다. 그 역시 한국의 정치지형의 결과물이기도 하다.
단지 미국만이 아니라 전세계에 걸쳐 좌/우파 분류는 사실 오늘날 아무런 의미가 없다. 예컨대 케이어 스타머 영국 총리(노동당)는 지난 25일 세계최대의 헤지펀드인 BlackRock의 CEO인 래리 핑크와 공동 각료회의를 열고, ‘영국정부와 BlackRock의 민관 협력’을 선언했다. BlackRock의 투자 유치를 위해 정부 각 부문에 걸쳐서 BlackRock과 공동 운영(우아하게 Governance라고 불린다)을 하기로 합의한 것이다. 과거 마가렛 대처 정부 시절부터 시작된 ‘민영화’는 일부 공공영역을 민간에 위탁용역하는 방식이었지만, 이번 합의는 아예 정부의 발전계획 자체를 BlackRock과 공동 수립하고 공동 운영한다는 것이다. 이는 대처 때와는 차원이 다르다. 영국인들이 ‘국가를 팔아먹었다’고 분개하고 즉시 재선거를 요구하는 온라인 청원이 24시간만에 무려 100만명을 넘어섰다. 물론 그래봤자 소용없다. 총선을 치르지 않으면 그만이다. 템즈강에 손가락이 동동 떠다닐지는 모르겠다. 그러면 노동당은 ‘좌파’인가? 노동당 정부는 ‘좌파 정권’인가? 대자본가와 결탁한 정당을 ‘좌파’라고 부르는 것이 가능한가?
1990년대 빌 클린턴이 대통령이었을 당시, 공화당 인사들은 공공연하게 그를 ‘사회주의자’라고 불렀다. 힐러리 클린턴에 대해서는 공산주의자(commie)라고 불렀다. 그리고 심지어는 지난 2016년 대선까지도 그렇게 불렸다(요즘엔 뜸하다). 이건 단지 ‘대중이 무식’해서만은 아니다(물론 최근 조사에 따르면 미국 성인의 25%는 초등학교 6학년 수준의 문해력을 가지고 있기는 하다). 각종 TV 정치토론 프로그램이나 영향력 있는 신문의 오피니언(사설)란에 기고하는, 버젓이 아이비리그 나온 엘리트들 역시 공공연하게 쓰는 말들이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공격하기 위해서 ‘사회주의자’라고 이름 붙이는 짓 말이다. 정치인들은 그게 밥줄이기 때문에 그러려니 할 수 있다. 그러나 언론은 이를 어떻게 써야할까?
언론의 역사: 찌라시에서 정론지까지
언론의 역사는 그다지 곱지 못하다. 기원부터 그렇다. 서구의 최초의 근대적 신문들은 교황청(바티칸)의 스캔들을 폭로하는 찌라시였고(정치적 목적에 따라 스캔들을 터뜨렸다), 미국에서는 이른바 국부(founding fathers)인 토마스 제퍼슨과 존 아담스는 각기 신문사를 소유했으며 이를 이용해 상대방을 인신공격하는 무기로 썼다. ‘시간이 금’이었던 벤자민 프랭클린은 자신이 소유한 신문에 15개의 필명으로 글을 썼으며 심지어 이 필명들은 서로 논쟁하기도 했다. 즉 프랭클린의 왼손과 오른손이 서로 싸우는 척한 것이다.
또 프랑스에서는 부르조아시민혁명 당시 살롱의 유인물이 언론의 역할을 차지했으며, 1830년대 자본주의 확대에 따른 이른바 ‘대중’이라는 인구집단이 정보의 소비자로 떠오르면서 대중신문의 막을 열었다. 그러나 1848년 6월 혁명의 전말을 그린 <브뤼메르 18일>에서 맑스는 그동안 ‘익명’으로 대중들에게 도덕적 설교를 하던 ‘논설’들의 필진이 사실은 보잘 것 없는 싸구려 3류 문사들임이 폭로되었다고 비웃기도 했다.
역사적으로 본다면, 서구에서의 언론은 ‘사실’을 전하는 수단이 아니라 의견지, 기관지였고 오늘날의 기준으로 본다면 ‘황색저널리즘’에서 출발했다. 신문이 변화하기 시작한 것은 1850년대 후반 크리미아 전쟁을 겪으면서부터였다. 당시 영국 언론들은 일방적으로 영국 전황이 유리하다는 ‘애국기사’만을 내보냈는데, 일부 신문들이 이른바 ‘사실 보도’(전쟁의 비참함)을 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세기 후반에 이르면 <뉴욕타임즈>를 비롯한 미국의 언론들은 산업화 시대의 대중의 비참한 삶을 ‘고발’하는 이른바 ‘탐사 보도’를 경쟁의 무기로 내세우기 시작한다(대표적으로 여기자를 창녀로 변장시켜 매음굴에 잠입 취재토록 하여 르포기사를 쓰는 것이었다).
오늘날 ‘표준’처럼 여겨지는 언론의 객관주의는 2차 대전 이후의 산물이었다. 이 때부터 언론은 ‘의견’이 아니라, ‘사실 (fact)’을 공정하게 전달하는 수단으로 자신을 매김하며 거기에서 공적인 역할을 부여받게 되었다.
한국의 언론 역시 2차 대전 이후의 일본 언론의 ‘실증주의’를 거의 답습했다. 사실보도라는 이름의 ‘실증주의’ 말이다. 물론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에 스며들어 기자활동을 하면서 사회주의 활동가 및 지식인으로 활약한 몇명의 인물들이 있긴 하다. 당시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흥미로운 지면이었다.
1975년의 한국의 ‘언론자유운동’(동아/조선일보 기자 해직 및 백지 광고 사태)는 이같은 언론의 사실보도를 지향하는 ‘객관주의’에 대한 정치권력의 개입에 대한 저항에서 발생한 것이다. 즉, 당시 해직기자들이 자신들의 신문에 특별히 ‘다른 이념’을 제시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리고 이는 이후 이들 75년 해직기자들과 80년 해직기자들, 그리고 당시 제도언론에 몸담았던 경력기자들과 창간과 함께 신규 채용한 기자들이 합쳐서 만들었던 <한겨레신문>에서 ‘대중적 정론지’라는 탈이념적인 객관주의로 등장하였다. 한겨레신문이 민주화의 결과물이라는 사실은, 다른 한편으로 이 신문의 이념적 정치적인 진화에 장애가 되기도 했다.
미국 대선과 편집권 침해
이번 11월 미국 대선에서 가장 신기한 점 중의 하나는 대자본가들이 전면적으로 정치 일선에 나섰다는데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등장은 이제까지 ‘대리인 정치’의 외관을 걷어치우고 본색을 노골화했으며, 심지어는 대중들이 이들의 출연을 거부감없이 받아들였다. 왜냐하면 이 대리인들(agents)들이 너무나도 부실하다는 것이 더 이상 감출 수 없을 정도로 드러나버렸기 때문이었다.
선거 직전에 Washington Post의 논설위원진이 관례대로 지지후보(해리스)를 오피니언란에 공표하려 했을 때, 즉 승인 endorse하려고 했을 때, 사주인 제프 베조스(아마존 소유주)가 이를 막자 대중들의 반응은 놀라울 정도로 냉담했다. 베조스는 공개서한에서 WP 논설진이 “점차 현실에서 멀어져 자기 자신만을 보고 이야기한다”고 비판했는데, 일부 독자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은 ‘언론 자유’의 중요한 이슈가 되지 못했다. 왜냐하면 편집권 독립을 이야기하기에는 이미 기존 편집국이 지나칠만큼 어느 한쪽으로 경도되어 있다는 대중적 인식이 훨씬 강했기 때문이었다.
더 신랄한 비판은 LA Times 논설진의 지지후보 공표(endorsement) 저지 과정에서 나타났다. LA Times 사주의 딸인 Patrick Soon-Shiong은 공개서한에서 “나와 나의 아버지는 남아공 출신으로 Apratheid(인종차별)를 잘 알고 있으며, Genocide(대량학살)도 잘 알고 있다. 나는 Apartheid도 Genocide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밝혔다. 그의 말은 LA Times 논설진이 지지하려는 해리스 후보의 정책은 (팔레스타인과 관련하여)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와 대량학살(Genocide)을 야기하며, 따라서 이를 용인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언론’의 관점에서 본다면, 이는 분명히 편집권 침해에 해당한다. 그러나 보편적 인권과 국제법적 기준에 따르면 ‘전문가’들인 언론인들보다도 ‘돈을 벌려는’ 사주의 견해가 더 타당하다. 이런 역설이 미국 대선결과의 한가지 원인이라고도 여겨진다. 즉 미국 언론은 미국 유권자들의 풍향을 읽는데 실패하였고, 선거결과 예측에서도 무능하였다. 결국 이 사건은 현재의 미국(뿐만이 아니라, 서구 일반)의 언론이 어디까지 추락했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왜냐하면 자본가들에게 도덕과 인권의 훈계를 듣는 언론인이라는 상황은 좀처럼 상상하기 힘든 역사적 사건임에는 분명하기 때문이다.
WP와 LA Times ‘편집권 침해’ 사건은 담당 논설진의 사임으로 끝나기는 했지만, 그것 이상의 파문은 거의 없었다. 더 많은 사람들이 이들 언론의 사주들인 베조스나 Soon-Shiong의 평가에 보다 더 동의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베조스의 말은 미국의 언론인들에게는 매우 뼈아프다: “당신들은 현실에서 멀어져 자기 자신을 보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언론 자유’의 관점에서 본다면, 이는 동시에 중대한 편집권의 침해이기도 하다. 이 편집권이라는 개념은 과거 100 여년 동안 이어진 언론의 객관주의와 이를 뒷받침하는 자율성의 실제적 결과물이었다. 따라서 이번 미국 대선과정에서 사주의 편집권 침해에 대한 반향이 거의 없었다는 것은 동시에 기존에 언론이 스스로 부여했던 객관주의와 자율성을 대중들이 더 이상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어쩌다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이스라엘을 표현할 때와 팔레스타인을 표현할 때의 단어 선택의 차이들. 이스라엘에 대한 표현은 인도주의적 감정을 환기하는 반면에 팔레스타인에 대한 표현은 최대한 현실을 은폐하는 단어들로 선택되어 있다.
언론의 자기 검열 : 팔레스타인의 경우
미국의 온라인매체인 <The Intercept> 4월 15일자에는 언론이 대중의 불신을 받는 이유를 보여주는 흥미로운 기사가 실렸다. 이 매체에 따르면 <New York Times>의 고위 편집진들(미국은 에디터 체제로, 한국으로 치면 각 부의 부장들에 해당한다)이 기자들에게 “이스라엘 전쟁을 기사화할 때 ‘Genocide, ’Ethnic Cleansing(인종청소), 점령지(Occupied Territory)와 같은 단어를 쓰지말라는 지침을 내렸다”는 것이다. 그러면 도대체 기자들은 이들 단어들을 쓸 수 없다면 지금 현재 가자 지구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어떤 단어로 표현하여 보도해야 하는가?
그 대답을 영국의 <The Guardian>에서 찾을 수 있다(다른 서구 언론도 동일하다). 지난 11월 24일자, 가자 관련 <가디언> 기사의 제목이다; “이스라엘군이 공중 폭격을 강화하는 가운데 더 많은 소개 명령을 내리자 수백명이 가자 북부지구에서 탈출했다”. 이 문장을 인종청소(ethnic cleansing)란 단어를 넣어서 바꿔보자 ;“이스라엘의 인종청소가 자행되는 가운데, 공중폭격이 거세지면서 수백명이 가자 북부지구를 탈출했다”. 두 문장의 차이가 보이는가? 바뀐 문장에는 ‘주체’(이스라엘)이 명백해지며, 현재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 대한 개념화(ethnic cleansing)가 되어 있다. 반면 가디언의 제목에는 마치 가자 주민과는 상관없는 두 세력들 사이에 전투가 벌어져 가자 주민들이 난민이 된 것처럼 묘사된다.
한가지 예를 더 들어보자. 지난 11월 23일자 <Washington Post> 제목: “베이루트 중부에 대한 대규모 공습으로 20명이 사망하고 수십명이 부상했다”. 이 기사의 첫 문장은 “베이루트 중앙지역의 바스타 구역에 강력한 공습이 행해졌다”로 시작된다. 누가 공습을 했는지가 나오지 않는다. 즉, 이스라엘이 빠져있다. 기사, 특히 이른바 ‘스트레이트 기사’(사실 보도 기사)는 기본적으로 6하 원칙을 따른다. 주체가 확인 가능한데도, ‘누가’(who)가 없는 기사는 기사가 아니다. 심지어 80년대 말, 90년대 초의 한국 언론사에서조차 이런 식으로 기자가 기사를 쓰고 제목을 달면 당장 취재팀장의 욕이 터져나오고, 운이 나쁘면 재떨이가 날라왔을 것이다.
<Washington Post>이 보도한 이 기사의 저의는 너무 뻔하다. 이스라엘의 민간인 공격을 최대한 은폐하고 싶다는 것이다. 이런 기사를 보면, 열렬한 이스라엘 지지자가 아닌 다음에야(또는 아무 생각이 없거나), 이 기사가 ‘사실이 아니’라고 느낄 수밖에 없다. 현장에서 일어난 일들에 대한 상세한 묘사가 기사 안에 들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기사는 ‘가짜’(fake) 뉴스다. 왜냐하면, 당연히 있어야 할 ‘주어’가 빠져있기 때문이다. 이런 류의 기사들은 사실(fact)을 열거하여, 진실(truth)을 왜곡한다.
가짜뉴스: 사실이 아니라 진실을 왜곡한다
흔히 생각하는 가짜뉴스 fake news의 정의, 즉 fact(사실)에 대한 오류(또는 의도적 왜곡)는 실은 매우 기초적인, 굳이 새삼스럽게 문제가 될 수도 없는 사안이다. 언론은 필연적으로 오보를 낼 수밖에 없지만, 동시에 이 오보들은 스스로 정정 가능하며, 자체적으로 검증하는 절차를 지니고 있다(이것도 수십년이 넘은 관행이다). 따라서 사실(fact)이 문제인 경우는 손쉽게 해결될 수 있다. 그러나 진실(truth)을 왜곡하는 경우는 좀처럼 발견하거나, 인식하거나 혹은 해결하기 쉽지 않다. 가짜뉴스의 진짜 문제는 fact가 아니라, fact를 말하면서 사실을 왜곡하는 것이다. 그리고 여전히 언론들은 자신들이 사실을 전달한다고 주장하면서 진실을 왜곡한다. 그 결과, 독자들은 언론에 대한 신뢰를 상실한다. 신뢰가 없는 언론이 편집권을 독립하든 자본에 종속되든 독자들은 상관하지 않는다. 이렇게 해서, 언론의 객관주의는 스스로 언론인들의 손으로 파괴되었다.
물론 자본가들의 훈계가 보편적 정의를 추구하는 것은 아니다. 미국 대선 지지 후보 결정에는 하지 않겠다며 사주가 목소리를 높였던 WP의 24일자 사설을 보자: “국제형사재판소(ICC)는 이스라엘의 책임을 묻는 곳이 아니다”. 이 사설은 국제형사재판소의 취지는 하마스나 헤즈볼라 같은 ‘야만적’인 집단들을 처벌하기 위한 것이지, 이스라엘과 같은 문명 사회 민주주의를 처벌하는 곳은 아니다“라고 주장한다. 사주인 베조스는 이 사설에는 편집권을 침해하지 않았다. 즉 대선 직전의 베조스의 개입은 대자본가로서 트럼프를 암묵적으로 지지하는 행위였다는 것을, 그것을 단지 그럴듯한 명분으로 포장했다는 것을 보여줄 뿐이다.
WP의 국제형사재판소 취지에 관한 사설은 전통적인 4자성어로도 표현이 안된다. 곡학아세나 견강부회도 이 정도로 막 나가는 논리를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 사설은 아예 법적 언어의 보편성을 부인하는데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실은 이는 ‘논쟁’의 대상조차도 아니다. 의학적(정신과적) 소견의 영역이며, 종교 모임에서나 볼 수 있는 행태일 뿐이다. 그러나 미국의 제도권 언론들, 또는 흔히 전통적 언론(legacy media)라고 불리는 주류 제도권 언론들은 이미 이같은 ‘사고’와 ‘프레임’에 완전히 포박되어 있다. 그들의 입에서 다른 얘기를 듣기는 기대하기는 힘들다.
이게 얼마나 뿌리깊은 사고방식인가는 <New York Times>를 비판한 <The Intercept>의 기사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들은 가자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이스라엘의 전쟁’이라고 표현한다. 미안하다. 가자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전쟁’이 아니다. 전쟁(국제전)은 명백한 국제법적 규정이 존재한다. 가자 사태는 국제법적 규정(국가 사이의 대규모 무력 충돌)에 포함되지 않는다. 하마스는 국가가 아니며(행정조직이기는 하다), 비록 산하에 무장조직을 갖고 있기는 하지만 정식 군대도 아니고, 무엇보다도 가자에서는 무력 충돌이 발생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일방적인 학살이 벌어지고 있다. 기껏해야 하마스 무장조직은 산발적인 게릴라전 저항을 하고 있을 따름이다. 엄밀히 말하면 이걸 전쟁이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최근에 현직 유엔 특별인권판무관인 프란세스카 알베네즈는 이스라엘의 행위를 ‘대량학살’, ‘인종청소’라고 규정하며 유엔 회원국 자격을 정지시켜야 한다고 주장해서 논란이 됐지만 이 점을 명확히 하였다. ”이것은 전쟁이 아니다“. 덧붙이면 봉기(uprising)는 전쟁이 아니며, 따라서 지금 진행되는 것은 전쟁이 아닌, 학살이다. UN 관리의 입에서 이런 말을 듣다니, 참으로 반가운 주장이었다. 왜냐하면 필자는 이런 주장을 작년 10월 가자의 알아크샤 공습이후 이스라엘의 침공이 시작되었을 때 제기하였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는 <전망과실천> ”가자 위기 (GAZA Crisis)” (2023년 10월 12일) 참조).
가자 북부 지구는 이스라엘군의 포격으로 폐허가 되었다. 출처 : <알 자지라>
전통적 매체가 신뢰를 상실하면 새로운 대안 매체의 가능성이 생겨난다. 기술적 발전과 더불어 이제는 과거 언론이 독점하던 정보 생산을 개인이나 소규모 집단들이 수행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위에서 언급한 조 로건이 그 대표적 사례 중의 하나다. 그리고 이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문제들을 야기한다. 이는 가짜 뉴스 시리즈의 다음 회에서 다루겠다.
지난 22일 독일의 언론인인 Jasmin Kosubek이 국제관계론에서 ‘현실주의자’로 꼽히는 존 미어시마이어 교수와 인터뷰를 했다. Kosubek이 팔레스타인인들이 야만적 공격을 했다고 주장하자 미어시마이어 교수는 조목조목 반박하면서 ”만일 당신이 가자에서 태어났다면, 하마스가 되었을 것”라고 말했다. Kosubek은 매우 충격을 받은 듯, 다음과 같이 말했다 :“독일에서는 설혹 그것이 옳더라도 팔레스타인을 지지하는 것이 사회적 조건 때문에 어렵다”.
독일은 애당초 ‘자유’민주주의 국가가 아니었다고는 할지라도, 최근에는 팔레스타인 국기가 그려진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는 이유로 노천카페에서 커피 마시고 있다가 체포되어 끌려간다거나, 반이스라엘 시위에 5살짜리가 팔레스타인 국기를 흔들고 있었다는 이유로 연행되고 있다. 그렇다면 이 사회는 ‘공포’가 지배하는 사회라고 할 수 있다. 또 독일에서와 마찬가지의 일들이 영국과 프랑스에서도 벌어지고 있다. 영국은 ‘증오 발언법’(hate speech act)를 원용하여 스타머 내각 관료를 온라인 플랫폼에서 ‘머저리’(imbecile)라고 불렀다는 이유로 경찰이 소환하고 반이스라엘 기사를 썼다는 이유로 공항에서 영장없이 체포 구금된는 사태가 벌어지고 있다.
무엇이 ‘진짜 뉴스’일까?: 언론 감별사 그리고 공안버젼
그러면 ‘언론인’들에게 주어지는 또 하나의 과제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 과연 서구는 ‘자유’민주주의 국가인가? 기사에서 그런 명칭을 써도될까? 이런 사회적 조건 하에서 생산되는 기사들이 과연 ‘진짜 뉴스’일 수 있을까?
물론 진짜 뉴스 감별사도 있다. 이것이 아마도 언론 역사의 진전에서 가장 우스꽝스러운 일일지도 모른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했을 때, 아마도 세계에서 가장 각광을 받은 언론은 <Moscow Times>와 <Kiev Times>였을 것이다. 거의 모든 언론들이 이 두 곳을 소스(출처)로 삼아서 수많은 기사를 양산해냈다. 그리고 <Moscow Times> 앞에는 ‘러시아의 독립 언론’, 또는 ‘러시아의 반정부 언론’이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하지만 <Moscow Times>는 러시아 언론이 아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러시아인에 의해서 발간되는 온라인저널이 아니다. 이 매체는 원래 모스크바에 거주하는 외국인들을 상대로 한 일종의 개인 소식지(영자지)였다. 1인 소식지였으며, 발행자는 네델란드 국적의 개인사업자였다(다만 러시아인 친구 명의로 언론사업자로 등록했다). 그러다가 규모가 커지면서 러시아의 정치 경제 사회를 소개하는 ‘언론’으로 자라났다. 전쟁이 발발하자 이 매체는 네델란드로 옮겼다. 그러면서 기존 러시아 인맥을 통해 ‘전황과 러시아 사회 변동’을 기사로 발간했다. 당연히 러시아 내의 반정부 인사 혹은 이미 러시아를 떠난 사람들의 전문을 소스로 하고 있었다.
문제는 이 소스를 검증할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어느 사회에나 ‘반정부’ 인사는 존재한다. 언론이 이들을 ‘소스’로 할 때는 직간접으로 이를 확인할 통로가 있거나 혹은 극도로 개연성이 높은 경우로만 한정되어야 한다. <Moscow Times>는 그런 ‘검증절차’가 존재한다는 증거가 전혀 없다. 게다가 발행인 자체가 이미 서구인이다. 러시아에서 발행되지도 않고 발행자도 러시아인이 아닌데 이를 ‘러시아 언론’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왜곡을 넘어선 거짓말이다.
<Kiev Times>는 더욱 난감하다. 이 매체는 우크라이나의 대표적 영자지이며 ‘국적언론’이기도 하다. 그리고 “전쟁의 첫 희생자는 진실이다”라는 격언처럼 이미 죽어버린(죽여버린) 진실 위에서 춤을 춘다. (“가짜뉴스, 선동, 검열, 그리고 오도된 세상(1)” (2024. 2.22) 참조).
대표적으로 <Kiev Times> 최신 11월 24일자 칼럼을 보자. “우리는 승리할 것이다. 우크라이나는 미국 대통령 당선자 트럼프가 거절할 수 없는 흥정조건을 제시했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미국의 사업가들이 우크라이나의 자원에 투자하기를 희망한다. 우크라이나의 천연자원의 규모는 26조 달러에 달한다. 젤렌스키는 우크라이나군이 전쟁 이후 유럽과의 연대를 보호할 것을 약속했다.”
우크라이나의 천연자원(천연가스, 석탄, 철광석, 리튬)이 갑자기 주목을 받은 것은 지난해 하반기 우크라이나군의 반격이 실패로 끝난 직후였다. 당시만 해도, 매장된 천연자원의 추정치는 1-2조 달러 수준이라고 우크라이나 정부와 ‘전문가’들은 주장했다. 그리고 1년 사이에 이게 무려 26조 달러 수준으로 늘어났다. 게다가 이 칼럼이 주장하는 천연자원의 80%는 돈바스지역에 있다. 즉 러시아가 이미 합병한 지역이다.
이 칼럼은 노골적으로 재미있다 단순한. 뻥튀기뿐만 아니라, 이 칼럼이 트럼프가 거절할 수 없을 것이라고 주장하며 ‘세기의 거래’(deal of the century; 1980년대 흥행했던 무기거래를 다룬 영화 제목이기도 하다)라고 표현했기 때문이다. 이 칼럼은 트럼프를 돈으로 구워삶을 수 있을 것이라고 암암리에 전제하고 있다.
트럼프는 ‘세기의 거래’를 받아들일까? 출처 : <Unherd>
그리고 똑같은 표현을 미국 연방상원인 린지 그라함에게서 찾을 수 있다. 그라함은 지난 11월 24일 미국 Fox News에 출연해서 난데없이 “우크라이나 전쟁은 ‘돈’에 관한 것”이라고 주장했다(그전에 그는 이 전쟁의 이유로 민주주의와 미국의 안보를 내세웠었다). 그는 <Kiev Times> 칼럼보다는 약소하게 우크라이나의 천연자원 가치가 2-7조 달러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미국은 우크라이나를 지원하여 이 자원을 차기 트럼프 정권이 그 이득을 챙길 수 있다고 역설했다. 이쯤되면 우리는 우크라이나의 칼럼니스트와 그라함이 어디서 1타강사에게 공동학습을 받았다고 짐작할 수밖에 없다.
<Kiev Post>는 우크라이나 내에서는 드물게도 올리가키(억만장자) 소유의 언론사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실은 심지어는 민간 언론이라고 볼 수도 없다. 이 매체는 기사 제작을 위해 후원(donation)을 받는데, 웹사이트에 공개된 후원자들은 National Emdowment for Democracy(미국 국무부 외곽기관), Nato, 덴마크정부, 국경없는기자회 등이 포함되어 있다. 액수는 공개되지 않았지만, 현재 우크라이나 사정으로 봤을 때 사실상 광고수입은 전무하다고 봐야하기 때문에 후원금이 중요한 몫을 차지할 것이다. 그리고 이 후원자들은 미국과 유럽의 준정부기관들이다. 그런 점에서 <Kiev Post>는 사실상 반관영언론이다. 그런데 여기서 ‘관’이란 우크라이나 정부가 아니라 미국과 유럽 정부들이라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이 언론은 앞에서 말했듯이 사실은 우크라이나 언론조차 아니다.
<Kiev Times> 관련 또 하나 흥미로운 구석이 있다. 이 매체는 한국 언론들의 단골 소스이지만, 동시에 놀라울만큼 탁월한 신문이기도 하다. 전세계 언론들의 신뢰도를 평가하는 News Guard는 지난 2023년 <Kiev Times>를 “100% 투명하며 신뢰할 수 있는 언론”이라고 평가해놓았다(이 점수를 받은 곳은 NYT, WP, <Wall Street Journal> 등이다). 참고로 News Guard는 가끔 한국 언론에도 소개된다. 자랑스럽게, 혹은 불명예스럽게 한국 언론이 이런 점수를 받았노라고 보도를 하곤 한다.
News Guard는 가짜 뉴스에 대항하기 위해 관록있는 언론인들이 의기투합해 만든 언론계의 신용평가사같은 단체다(월스트리트 신용평가사와 역할이 동일하다). 그런데 이 기관의 자문위원(advisor)의 면면을 한번이라도 살펴봤는지 모르겠다; 톰 리지(전 국토안보부 장관), 리챠드 스텐겔(전 미 국무부 공무외교 담당 차관), 미카엘 헤이든(전 CIA 국장), 안데르스 라스무센(전 나토 사무총장), 지미 웨일즈(Wikipedia 설립자). 이를 한국식으로 옮기면 이렇게 된다; 방송통신심의위원회 위원에 전 국정원장, 기무사령관, 경찰청 차장, 전 안보실장등. 한국에서 5공화국 때도 이렇지는 않았다.
참고로 위의 <Kiev Times> 칼럼을 쓴 Diane Francis는 우크라이나인이 아니다. 미국에서 출생했으며 캐나다 국적도 가진 이중국적자이고 미-유럽간 동맹을 중시하는 Atlanctic Council의 고정필진이며 World Economic Forum의 미디어 회원이기도 하다.
우크라이나뿐만 아니라, 푸틴 얘기만 나오면 단골로 언론보도에 소스로 등장하는 인물이 있다. 한국 언론에도 여러 번 소개된 사람이다; 미하일 코도르코프스키. 그는 2007년까지만 해도 러시아의 3위 석유업체인 유코스 오일의 CEO였다. 그런데 꿈을 너무 크게 가졌다. 그는 2007년 유코스 오일을 서구 투자자들에게 매각하기 위해 담합 경매를 추진했다. 중요한 국가 자산이 서구로 넘어가게 될 것을 우려한 푸틴은 당장 코도르코프스키를 탈세 혐의로 감옥에 쳐넣었으며, 유코스 오일은 전격 국유화시켰다. 코도르코프스키는 출옥 후 서구로 이주해 반푸틴운동의 나팔수로 활약했다. 그의 인생 역정으로 보면 당연하다. 동시에 언론으로서는 그의 이력 때문에 그가 러시아나 푸틴에 대해서 하는 발언에 대해 당연히 2중, 3중의 확인을 해봐야 한다. 왜냐면 그는 푸틴은 악마숭배자에 아이를 산채로 죽여 피를 받아먹는데다가, 푸틴은 이미 죽을 병에 걸려 대외활동을 하는 것은 실은 그의 대역이라고 주장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 역시 의학의 영역이지, 반박하거나 논쟁할 거리는 못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코도르코프스키가 여전히 서구 언론에 등장하는 것은 그의 ‘용도’가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서구의 언론들은 기꺼이 이 ‘용도’에 활용되며, 한국의 언론들은 ‘아무 생각’없이 서구 언론에 보도되었기 때문에 번역문을 기사라고 내놓곤 한다.
그런데 러시아의 유코스 오일 국유화에 얽힌 더 중요한 인물이 등장한다. 코도르코프스키가 매각키로 한 서구의 투자자 중에는 죠지 소로스가 포함되어 있었다. 소로스는 유코스 국유화로 최소 수 억 달러의 손실을 본 것을 알려져 있다. 이 사건 이후 소로스는 필생의 목표를 푸틴 제거에 두었다. 실은 그 이전에는 푸틴과 소로스는 아주 죽이 잘 맞았다. 2003년에는 소로스가 푸틴의 개혁을 높이 평가하며 위대한 지도자라고까지 칭송한 일도 있었다.
그렇다. 맞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분명히 ‘돈’이 걸린 전쟁이다(다른 것도 걸려 있다. 전쟁 발발 2개월 전에 푸틴은 <Financial Times>에 러시아는 유럽이 되고 싶다, 우랄 산맥 동쪽까지도라고 러브레터를 썼던 것을 기억하는 이는 거의 없다. 왜 유럽이 이를 거부했는지는 여전히 수수께끼다). 거기에 개인적 원한도 걸려 있다(그런데 코도르코프스키는 언론에 등장하지만, 정작 소로스는 등장하지 않는다). 그리고 수십만이 죽어가며, 언론은 춤을 춘다.
중립성의 환상이 사라질 때: disinformation이란
흔히 disinformation은 우리 말로 ‘역정보’ 또는 ‘왜곡/조작 정보’로 번역된다. 그러나 둘 다 마뜩치 않으며 학계에서도 disinformation에 대한 합의된 정의는 찾아보기 힘들다. 무엇보다도 disinformation은 역정보와는 거리가 멀다.
비슷한 용례로 orientation과 disorientation을 들 수 있다. orientation은 어떤 사태나 사안에 대해 여러가지 정보가 제시되어 그에 대한 일정한 태도를 갖는 것을 의미한다. 흔히 정향(定向)으로 번역된다. 반면 disorientation은 마땅한 번역 용어가 없다. 이 말은 어느 한쪽의 편향을 가진 정보만을 일방적으로 주입하여 실제와는 동떨어진 사태에 대한 판단/이해를 갖도록 만드는 것을 지칭한다. disorientation은 거짓은 아니다. 다만 사실의 어느 한쪽만을 보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disinformation은 일반적인 정보(information)에서 정보들중에서 어느 한쪽 측면만을 일방적으로 부각하는 것을 지칭한다. 가자 위기를 예로 든다면, 예컨대 23년 10월 7일 하마스 봉기 당시 하마스 요원들이 이스라엘을 습격하여 수십명의 아이들의 목을 베었다든지, 혹은 여성들을 집단강간했다든지 하는 뉴스는 일반적 의미의 ‘가짜 뉴스’(fake news), 즉 사실 자체가 거짓인 뉴스를 말한다(유엔 고등인권판무관의 조사로 모두 근거 없는 것으로 판명났다). 그러나 이런 가짜 뉴스 없이도 하마스가 수십명의 이스라엘인들을 인질로 잡고 있다든지 혹은 이스라엘인들을 향해 테러를 가하고 있다든지, 또는 실은 가자 지구가 이미 수천년 전부터 이스라엘의 영토였다든지 하는 뉴스만으로 지면이 구성된다면, 그리고 이에 대한 반대 증거는 전혀 제시하지 않는다면, 그 결과로서 형성되는 특정한 심리적, 인식적 상태를 disinformation이라고 할 수 있다(가장 흔한 것이 전쟁의 전황이다. 항상 우리 편이 이기고 있으며 우리 군인들은 영웅적으로 싸우고 있고 적들은 잔악하며 비겁하다).
disinformation은 최근에 발생한 현상이 아니라, 수십년, 수백년이 넘은 아마도 춘추전국시대에도 활약하던 오래된 사안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이것이 지금에 와서 특별히 문제가 되는 것은 기존의 ‘객관주의적’인 ‘공정한’ 언론에 대한 도전이 거세지고 더 이상 대중들이 기존 언론을 신뢰하지 않게 되면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
UN의 지난 2021년 보고서를 보면 “디지탈 기술은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상업적 목적으로 과거에는 볼 수 없었던 속도와 규모로 여러 행위자들에 의해 허위의 혹은 조작된 정보를 생산하는 경로를 가능케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즉, 현대 의사소통 기술의 발전으로 과거 준공영으로 인정받던 기존 언론들이 더 이상 기존 정보 질서에 대한 도전을 막지 못해 대량으로 발생하는 정보 소통 왜곡이라는 것이다.
분명히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그랬듯이(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은 ‘우리는 프로파갠더에서는 저 친구들-서구-를 이길 수 없다’고 털어놓은 적이 있다), 가자 위기에서도 그리고 이번 미국 대선에서도 기존 언론들은 자신들이 성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최소한 가자 봉기에 관한 한은, 기존 언론들은 극히 미미한 성공밖에 거두지 못했다. 그리고 이같은 기존 인식-권위 체제의 한계가 실은 강압적인 공권력의 동원-미국 정부의 검열 제도 정비와 유럽 국가에서의 강압적 언론 통제-이 나타난 근본 이유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기존의 제도적인 사회 의사소통 방식(legacy media)에 대항하는 새로운 정보 유통 방식 및 정보 구성 방식(disinformation)이 상대적으로 기존 방식에 비해 더 옳다거나 혹은 더 장점이 많다는 뜻은 아니다. 푸들과 똥개가 서로 짖어대다가 푸들이 꼬리를 말고 도망갔다고 해서 남은 소리가 개소리가 아닌 것은 아니다. 다만 이제는 새로운 개소리에, 그리고 이 개소리를 제도적으로 재생산하고 재통제하기 위해 행해지는 수많은 비언론적 조작 방식들의 출현에 대해서는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뿐이다.
결론적으로, 만일에 언론이 과거 누려왔던 지위, 즉 ‘공정한’, ‘객관적인’ 전달자로서의 지위를 계속 유지하고 있었다면 기술 발전으로 가능해진 의사소통 통로의 다양성이 새삼스럽게 ‘객관적 진실’에 도전하는 사태가 벌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물론 이것이 단지 언론만의 책임은 아니다. 그러나 언론 스스로가 실은 자신들이 이미 disorientation을 재생산하는 인식체제의 일부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객관성의 유일한 담보자인 것처럼 행동하면서 실은 너무 뻔하게, 또는 천박하게 사태를 왜곡했기 때문에 이같은 도전에 속절없이 무너져 내리는 것도 당연하다. 그리고 언론의 객관주의라는 외관이 무너지자, 언론의 중립성이라는 환상도 같이 사라져버렸다. 이렇게 해서, NYT는 대머리(조 로건)과 싸우게 되었고, <조선일보>는 털보(김어준)와 싸우게 되었다. 그리고 미래의 전황은 밝지 않다.
언론은 보지 않으며, 보지 못한다. 언론의 객관주의는 엉터리이며, 언론의 이념지향성(프로파갠더)은 인민의 착취에 기생하며, 그 결과 fact check의 이름 하에 언론은 19세기 탄생시의 벌거벗은 모습, 즉 찌라시로 되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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