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 중립의 환상과 독립의 신화

: ‘계급 사법’과 사법권력의 민주적 통제

2026년 9월 16일 / 권영숙의 테제11
권영숙 민주주의와노동연구소 소장

1.

초대 헌법재판관을 지낸 변정수 판사는 퇴임 1년 전인 1993년 공개적인 발언을 통해서, 8;1로 자신이 유일하게 소수 위헌을 주장했던 지난 1990년 국가보안법 7조 5항(고무 찬양죄)에 대한 헌재 합헌 결정에 대해 “법리의 문제가 아니라, 국어의 문제”라고 비판한 적이 있다. 그래도 최소한 이 심판 다수 의견은 헌법상에 존재하는 문구를 억지로 비틀어 쓰여지기라도 했다.

2005년의 행정수도 이전 위헌 심판은 근거를 댈 수 있는 어떠한 헌법 구절도 없었기 때문에 아예 ‘관습헌법’이라는 새로운 헌법을 창조해냈다. 이를 국순옥 교수가 ‘사법 쿠데타’라고 비판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 쿠데타는 거의 어ᄄᅠᆫ 도전도 처벌도 받지 않았으며, 지금까지도 유효하게 작동한다.

그러므로 이른바 제6공화국의 헌법은 87년의 국회(5공화국에서부터 넘어온 국회: 제정의회가 아님)에서 성급하게 ‘문자’로 쓰여진 조항들만을 지칭하는 것일 수는 없다. 거기에 덧붙여, 그보다 더 높은 곳에 위치하는, 보이지 않는 헌법이 존재한다. 그것을 관습헌법이라고 부르든, ‘정치적 고려’라고 부르든, 또는 ‘헌법의 수호’라고 부르든 그저 표현의 차이일 뿐이다.
즉 87년 헌법은 87년의 헌법 조문 속에 고정되어 있는 어떤 것이 아니라, 지난 수십년간 ‘변용’과 ‘창조적 날조’ 속에, 그 안에서 이뤄진 수많은 정치적, 계급적 갈등 속에서 나날이 개정되고 있는 어떤 것이다.

15세기 후반 네델란드 화가 다비드 게라르드의 <캄비세스의 심판>. 페르시아의 캄비세스 왕은 부정한 판결을 내린 판사 시삼네스에 대해 산 채로 가죽을 벗기는 형벌을 내렸다는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투스의 기록을 그림으로 옮긴 것이다. 이 그림은 브루헤시 시장실에 걸렸다. 출처 : Web Gallery of Art

2.

한국에서 ‘사법권력’의 문제점을 논할 때, 가장 흔히 말해지는 것은 사법권의 독립과 중립성이다. 이는 사법권의 오남용을 지적하는 쪽에서나, 사법권력을 행사하고 향유하면서 사법권력을 옹호하는 쪽에서 모두 주장하는 논리이기도 하다.

이는 역설적으로 법원, 검찰권력의 비대화는 이들 기관의 중립성과 ‘독립’을 이유로 건국 이래 사실상 어떠한 정치적 영향에서도 벗어나 자신들만의 독자적인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는 독자적 네트웍을 형성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법권 독립’이 오히려 정치공동체에 해가 되었고 이제는 정반대로 사법권력에 대한 ‘민주적 통제’의 필요성을 거론한다. 그러나 이는 어쩌면 동일한 오류의 방향만 뒤바뀐 반복에 불과하다.

기존의 사법권력의 독립성과 중립성 논리는 사법이 외부의 정치적 영향에서 자유로와야 한다는 것을 주장한다. 따라서 외부의 정치적 사회적 영향으로부터 ‘독립’적이며, 그 독립성은 ‘중립성’을 담보한다고 주장한다. 즉, 독립은 중립의 전제다.

그러나 이는 현실에서 두 가지 문제를 야기한다. 하나는 위에서 언급했듯이, 외부로부터 독립된 결과, 누적적으로 법률가 집단은 자신들만의 고유한 이해관계를 키워왔으며, 심지어는 외부로부터의 감시에서도 자유로운 채, 자신들의 이해를 위하여 ‘흥정’이 가능한 단계까지 발전했다는 점이다. 이는 제도주의적 관점에서 충분히 해석 가능한 역사적 전개라고 할 수 있다.

다른 하나는 ‘중립성’에 대한 신화라고 할 수 있다. 설사 사법권력이 자신들이 이해관계를 추구하지 않는 ‘순수한 양심적’ 권력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이 ‘중립성’을 담보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현실은 이미 기울어진 운동장이기 때문에, 경사로에서 중립이란 늘 어느 한쪽 방향을 선택할 것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이다. 즉 독립은 되어도 중립은 보장할 수 없는게 ‘사법권력’이다.

물론 이에 대한 대안에 대한 고민과 문제의식이 있다. 흔히 사법권의 중립에 대한 대안으로 ‘공정성’(fairness)를 제안한다. 즉 사회적 불균형(에 대한 해소)을 적극적으로 법원이 반영하라는 새로운 잣대를 제시하고 있다. 과연?

당연히 법 권력은 공정성을 목표로 해야 한다. 그것은 요청도 주문도 아닌 전제여야 한다. 하지만 왜 전제를 다시 요청하게 됐을까? 공정성이라는 것, 그리고 사법적 관점에서 공정성을 실현하는 것은 매우 난해한 일이기 때문이다.

우선 여기에는 기술적인 문제가 있다. 무엇보다도 공정성을 기술적으로 담보할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매우 어렵다. 이를 위한 구체적인 제도적 법적 방책들로 대법원장의 권한 축소(대법관 임명제청권 축소), ‘공정한 재판’ 권리의 헌법 명시, 시민참여형 재판(배심원제)과 시민기소권, 헌법재판소 권한 축소 등 사법 주체의 민주화와 사법과정의 민주화 및 사법 책임성 강화, 사법 접근권 강화 등이 제안될 수 있다.

물론 위에 언급한 것들은 기술적으로나 원칙적으로 매우 중요한 논의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나 동시에 이같은 개혁과 기술적 장치의 보완은 ‘공정성’을 위한 보완적 장치가 될 수는 있을지언정, ‘민주적 통제’를 충족하기에는 거리가 멀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개혁안들은 기존의 사법권력을 해체하고 사법에 대한 접근권과 주체 구성, 사법 과정을 다원화하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지만 이같은 다원화는 실은 자유주의적 틀에서 벗어나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형식적인 절차적 정당성으로는 현실에서 공정성을 만들어내기 어렵다.

또한 다원화는 사법 참여의 폭을 넓힐 수는 있지만, 그것이 공정성과 어떻게 연관되는지는 설명하기 쉽지 않다. 또한 이같은 다원화가 곧 ‘민주적’이라고 반드시 연결시킬 수도 없다. 왜냐하면, 아담 셰보르스키가 지적했듯이, “무엇이 민주적인지 누가 결정하는가?”라는 질문은 법이라는 제도의 바깥에서 결정되며 여전히 논쟁 중인 사안이기 때문이다.

결국 ‘민주적 통제’는 ‘공정성’과 일치하는 개념이 아니며, 민주적 통제에서 연역적으로 공정성이 도출되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공정성이라는 프레임, 그리고 그 공정성의 내용은 ‘정치적’으로 결정되며 그것들은 당대의 사회적 관계를 반영한 특수한 이해관계 및 도덕, 정의감 등을 표현하고 구체화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표면적 공정성은 실은 각 시기별 정치적 합의의 결과물이며 합의로 귀결된다. 즉 정치적 공정성은 보편적이지 않고 ‘특수한‘specific 어떤 것이다.

더 엄격하게 말하자면, 사법권력에 대한 ’민주적 통제‘는 실은 ’정치적 통제‘이며 현실에서의 정치를 반영하는 것을 넘어설 수 없다. 따라서 정치적 통제는 사법권력의 중립성과 독립성 논리에 대한 대척점에 서있는 해법이기는 하지만, 그것을 완전히 무화시키거나 분쇄하지는 못한다.

 

지난 2025년 5월, 대법원 전원합의부에서 이재명 공직선거법 위반 상고심 판결을 내리고 있다. 출처 : 한겨레신문

한국의 경우, 21대 대선결과에서 대략 드러났듯이, 적어도 유권자의 41%는 현 시점에서 사법권력에 대한 ’민주적 통제‘를 특정 정당의 ’정략적 이해‘라고 간주할 것이며, 정치화된 사법권력 하에서는 아무도 ’공정성‘을 믿지 않는다. 따라서 사법권력의 원천으로서 측정되는
’법원에 대한 신뢰‘도 마찬가지로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신뢰 자체가 사법의 공정성을 보증하는 것도 아니다.

그보다도, ’법원에 대한 신뢰‘가 사법적 힘의 원천이라는 사고 자체가 실은 허구일지도 모른다. 예컨대 대체로 ’참여적‘ 개혁안을 가지고 있는 미국 법원에 대한 대중의 신뢰도(confidence in the court)는 불과 35%에 그치고 있다(2024년 말 기준, 갤럽조사. 한국의 행정연구원 조사에 따르면 한국의 법원에 대한 신뢰도는 24년 기준 49%다). 왜일까?

물론 미국에서 대통령직과 언론에 대한 신뢰도는 30%를 밑돌고, 의회에 대한 신뢰도는 고작해야 15%도 안되지만, 그러나 이들 기관들이 자신의 권력을 행사하는데는 아무런 지장도 없다. 즉 권력의 행사에 있어서 신뢰도는 효율성의 문제일 뿐이지, 결정적인 장애가 되지 못한다. 심지어는 공정성 논란이나 조직 이해관계조차도 신뢰도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지는 못한다. 사법권력의 ’권력‘은 사실 기존 엘리트 기득권층의 담합 혹은 합의에 근거하는 것이지, 대중에 근거하지 않는다. 대중이 스스로 판결을 하는 ’인민 재판‘이 아니라면 말이다.

3.

이 점에서 ’계급 사법‘의 문제는 매우 흥미롭고 중요한, 그러나 거의 논의되지 않고 있는 주제다. 필자의 기억으로는 한국에서의 연구는 80년대 말, 90년대 초에 몇 편의 논문(번역 논문을 포함해서)이 전부였던 것 같다.

기본적으로 계급 사법은 포괄적 의미에서 법 자체의 계급적 성격을 말한다. 마르크스는 단지 법을 자본주의 상부구조로 보았을 뿐만 아니라, 법이 구성되고 작동되는 방식까지도 계급적이라고 보았다.

그는 자본주의 하에서 노동력이 판매/구매되는 시장에서 판매자(프롤레타리아)와 구매자(부르조아) 사이에는 불균등한 조건이 선재하며, 노동력의 교환은 부등가 교환이라고 지적한다. 그러나 법은 이들 개인들의 구체적 조건을 사상(추상)하고 이들을 동등한 법적 주체(legal individual)로 상정함으로써(그 대표적인 표현이 ’만인은 법 앞에 평등하다‘는 것이다), 부등가 교환을 등가교환으로 이데올로기적으로 치환시키는 역할을 한다.

따라서 법은 자본주의 사회의 임노동 관계에서 필연적인 것이며, 동시에 실제적인 계급 관계를 은폐하고 정당화하는 기능을 한다. 즉,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이런 저런 법이 계급적인 것이 아니라 법, 그리고 법 체계 전체가 계급적이다.

동시에 이렇게 개인은 추상화되는 반면에, 법은 구체화되며 그 총체는 국가로 표현된다(마르크스는 이를 ’전도‘라고 부른다). 총체로서의 국가는 분열된 사회(계급 사회)를 보존하고 유지시키며 그 내부에서 이 충돌이 폭발하지 않도록 억압하는 역할을 한다. 따라서 국가와 법(사법권력은 근본적으로 그리고 원칙적으로 (계급)’차별‘을 해소할 수 없으며, ’공정‘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법제도는 아예 처음부터 그같은 차별과 불공정을 유지할 목표로, 그리고 그 기반 하에서 탄생한 제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르크스는 이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주권을 가진)인민이 ’제헌권력‘을 일상적으로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헤겔 법철학 비판). 그래서 그는 아예 ’헌법의 운동이 진보‘라고 주장했으며, 자본론에서는 ‘사회주의 하에서는 여론이 곧 법’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결론은 이것이다: ‘공정’을 말하기 위해서는 법정에서 공정이 실현되는 방도를 찾기보다는, 사회에서 불공정을 제거하는 방안을 먼저 말해야 하며, 아마도 그것이말로 법에게도 그리고 공정한 법을 원하는 이들에게도 매우 위험하지만 근본적인 운동이 될 것이다. 법은 인민주권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인민주권이 법을 만든다.

“법을 만들기 위해서는 먼저 법을 만드는 사람들간에 ‘서로’에 대한 합의가 필요하다 – 홉스
”법률의 해석은 법원이 아닌 법률의 주인에 의해 결정된다 – 프랑코 베라르디 비포

* 이 글은 2025년 6월14일 열린 민주주의와노동연구소 창립 2주년 심포지엄 “법과 정치, 그리고 공화국의 미래”에서 발표한 필자의 토론문을 보완하여 게시한 글이다. 최근 몇 년간 보수양당정치와 사회적으로 가장 큰 이슈인 검찰개혁과 사법개혁을 둘러싼 논의에서 정작 질문되지 않고 있는 근본적인 물음은 법이란 무엇인가?이다. 사법권 독립과 중립의 신화화를 넘어서 사법권력의 민주적 통제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계급사법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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