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정치의 새로운 실험
- 세르비아 ‘학생 명부(Student List)’운동
2026년 10월 30일 / 글로벌 사회운동
글 권영숙 민주주의와노동연구소 소장
민주화, 상아탑 정권, 학생주의, 지식인주의, 정치플랫폼, Student List(학생명부), 친러 민족주의, 친EU 자유주의, 컬러 레볼루션
‘비정치적인’ 상아탑 정권
구 유고연방 해체 뒤 형성된 세르비아에서 지난 2년 여 동안 반정부 투쟁을 벌여온 학생운동 세력이 지난 10월 26일 진행된 총선에서 다수 의석을 차지해 14년 동안 장기 집권해온 부치크 정권을 몰아냈다. 세르비아에서의 이같은 정치적 변동은 지난 80년대 이후의 ‘글로벌 민주화’ 흐름에서 새로운 현상은 아니다. 이 시기 민주화운동의 핵심집단 중의 하나는 학생운동 세력이었으며(한국도 대표적인 예), 종종 기존 집권세력을 타도하거나 혹은 타협하여 이른바 ‘민주화/탈권위주의화’를 이루었다.

세르비아의 ‘새로움’은 이 사건이 ‘민주화’라는 관점에서 분석될 수는 없지만(왜냐하면 기존 부치크 정권은 권위주의적이기는 했지만 반민주/독재 정권이라고 볼 수는 없기 때문이다), 동시에 단지 정권 교체가 아니라, 아예 기존 체제 전체를 청산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세력이 선거에서 승리했다는 점에 있다. 또한 그 집권세력이 ‘비정치적’ 집단임을 처음부터 천명하고 나섰고 바로 그 이유 덕분에 선거에서 승리했다는 아이러니에 있다.
이번 선거에서 승리한 학생운동세력의 정치 플랫폼인 Student List (학생 명부)는 정당이 아니며, 지도자도 없으며, 프로그램은 있으나 이념은 없으며, 조직도 없다. 즉 비정치적 정당이다. 또 현재 집권당인 세르비아진보당은 유럽에서 이른바 ‘우파’ 정당으로 간주되고 있지만, 이를 대체하고 나선 Student List가 좌파 정당인 것도 아니다.
즉 Student List는 처음부터 자신들은 ‘비정치적’이라고 주장하고 나선 세력이며, 실제로도 기성 정치인들은 거의 포함되어 있지 않고 ‘전문가, 지식인, 학생’ 집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 점에서 이른바 ‘포퓰리스트적’이라고 평가받는 부치크 정권과는 대척점인 ‘intellectualism’ (지식인주의)에 기반한 지식인 정치, 사실은 실무경험은 거의 없는 학계 전문가들의 모임이라고 할 수 있다.
Student List가 후보로 낸 250명의 명단 중에서 여성은 111명(43%)이며 박사 학위 소지자는 무려 134명이고, 박사학위 소지자들의 전공중 IT 섹터가 가장 높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다(35명). 또 교육 전공자가 31명, 보건의료 전공자가 25명이다. 그리고 이들 세 분야는 현재 세르비아에서 가장 큰 위기를 맞고 있는 분야들이기도 하다. 한마디로 이번에 정권을 차지한 Student List는 ‘상아탑 정권’이라고 부를 수 있다.
Student List의 탄생과 정치화 배경
지난 2024년 11월 세르비아 노비-사드 철도역 발코니가 무너지면서 16명이 사망하고 수십명의 부상하는 대규모 참사가 벌어졌다. 대학생 시위는 이 때를 기점으로 폭발하기 시작했다.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가 발생했다. 당시 알렉산라르 부치크 정부는 이 사건을 축소하고 불가피한 재해로 규정하고 넘어가려고 했으며 이 과정에서 대학생 시위는 본격적인 반정부 투쟁으로 전화했다.
이 사건은 한국에서의 세월호 참사나 이태원 참사와 매우 유사하다. 정부는 사건을 축소하고 책임자 처벌에 미온적이었으며 대학생 시위대는 이를 정면으로 비판했다. 여기에 10년 넘게 집권해온 부치크 정권의 온갖 부정부패가 드러나면서 시위 양상은 격화되었다. 그리고 2015년 4월 이들 시위대는 정치 플랫폼으로의 전환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이 점이 한국의 세월호 참사등과 다른 점이기도 하다(한국은 국가와 정부에 의한 진상조사와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며 입법에 주력하였다).
여기에는 세르비아만의 특수한 정치적 조건이 존재한다. 부치크 정권의 장기 집권이 가능했던 것은 과거 구 유고 연방이 나토의 공격으로 해체되면서 남은 세르비아에서는 반EU 정서가 강력한데다 코소보 독립을 둘러싼 영토분쟁이 존재하기 때문이었다. 즉 부치크 정권은 국내의 민족주의 정서를 바탕으로 EU와 러시아 사이에서 양다리 외교 정책을 펼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이 양다리 외교로 인한 이득을 자신들의 정당(세르비아진보당: SPS)이 독점하는 구조를 갖추었다. 따라서 동구의 다른 국가들이나 아시아, 중남미의 민주화 과정과는 달리, 세르비아에서는 민주화의 강력한 동력인 자유주의자들이 가진 친EU적 성격 때문에 민족주의를 표방하는 세르비아진보당의 대항마가 되지 못했다.
즉 부치크 정권이 권력 독점 체제를 구축할 수 있었던 것은 자유주의 세력이 성장할 수 있는 국내적 국제적 조건이 결여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것이 바로 지난 2년 여 동안 세르비아에서 대규모 대학생 시위가 지속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학생/지식인을 넘어서는 대중들의 지지는 미온적인 이유이기도 했다. 따라서 자유주의적 대학생/지식인 집단들이 극히 소수의 인재풀에서 정치적 대표를 선출하고 다른 정치 세력과의 연대없이 자신들의 ‘순수함’을 명분으로 하여 전체 대중에게서 지지를 호소한 것은 이같은 자신들의 불리한 정치적 사회적 위치를 역으로 무기로 삼는데 성공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즉 비자유주의적 illberal 민주주의 안에서 비정치적인 자유주의의 승리라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승리와 승리의 주역을 하나로 단정젓기는 아직 이른 편이다.
이번 총선은 친러 민족주의적 성격의 부치크 정권이 변화하는 국제 정세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끊임없이 재조정해야 하는 도전에 직면하고 있는 때에 치러졌다.. 게다가 부치크 정권은 이같은 국제적 줄다리기 속에서 유럽(금융), 러시아(에너지), 중국(공장 합작투자) 모두로부터 지원을 받아 상대적으로 높은 성장률을 기록하고 있었다.
따라서 세르비아에서 학생시위가 대규모로 진행될 초기에는 이들이 정권 도전 세력이 될 것이라고 예상하기는 힘들었다. 왜냐하면 이들은 기층 대중들(노동자, 농민)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기존 야당 정치 세력들과의 연계도 취약했기 때문이었다.
2025년 4월 학생시위 집단은 정치 플랫폼을 처음 구성하기 시작했다. 세르비아에서는 정당이 아니더라도 일정 수 이상의 연서명을 받으면 정치 플랫폼으로 선거 참여가 가능하다는 조건 하에서 이것은 가능한 일이었다(2022년 선거에서도 야당들은 플랫폼 연합으로 선거에 참여했다. 한국식으로 말하면 선거연합정당: 한국이 왜 이런 운동적 플랫폼 정당이 아니라 보수 양당의 ‘위성정당’으로만 나타나는지에 대해서 생각해볼 일이다)..

선거에 참여하기 위한 정치 플랫폼 구성 과정은 흥미로움 그 자체다. 이들은 대학별 학생회에서 토론을 거쳐 후보자를 선정했으며 최종 후보 확정 과정에서 학생 총회를 열어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했다. 당초 리스트에 올랐던 약 10여명의 후보가 이 과정에서 탈락했다. Student List에 올라간 후보들의 자격 조건은 (1) 세르비아진보당에 당적을 가진 적이 없을 것 (2) 범죄 경력이 없을 것 (3) 집권 세르비아진보당의 부정부패 일소에 찬성하는 전문가들일 것 등이었다. 한마디로 기존 제도정치권에 몸 담은 자들은 탈락이고 배제되었다. 후보군 선정에서 시위 대학생들이 주동이 되었고 그 시위에 동참하거나 지지를 표명한 대학 교수, 연구자, 전공자들이 선택되었다. 여기에 시위를 지지한 일부 언론인, 예술인, 운동선수 등이 포함되었다.
세르비아의 학생 지식인운동이 정치화하는 과정은 제한된 집단만을 포함하는 운동이 전계층, 계급을 대변하는 정당으로 전화한 것이 아니라, 운동집단이 자신들이 정치 전체를 대표하는 세력이라고 스스로 주장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후보 선출 과정이 개방적이지도 않았고, 그동안 운동에 참여하지 않았던 세력들이 새롭게 들어올 여지도 없었다. 동시에 이들 후보군은 기성 정치인 또는 정치운동을 하던 인물들조차도 아니었다. 극도로 제한된 풀에서 선출된 그들만의 후보였다. 따라서 이들이 ‘정치화’하고 정권을 장악하는 데까지 이르렀지만, 여전히 과연 이들을 ‘(동질적) 정치집단’ 또는 ‘정치인’들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이 있다.
동시에 이들이 선거 과정에서 ‘연대’를 이루는 방식도 독특했다. 이들은 기존 야당들과 ‘연대’하지 않았다. 오히려 Student List는 다른 군소 야당들에게 선거에 참여하지 말라고 압력을 넣었다. 즉 출마 포기를 강요한 것이다. 거의 대부분의 군소 야당들이 이들의 요구를 따랐으며 따라서 선거과정에서 시작부터 Student List는 매우 ‘신선’해 보였다. 즉 기존의 때 묻은 야당들과는 차별성을 가진 것으로 보였던 것이다(동시에 그 실력이 검증된 것도 아니라는 의미다)..
동시에 Student List는 ‘중립성’ 혹은 ‘무이념’을 무기로 들고 나왔다. 그렇다고 해서 어줍잖은 실용주의자라고 자신들을 포장하지도 않았지만, 분명 이들은 통일적 이념을 가진 집단이라고 하기 어렵다. 실은 처음 정치화의 기획단계부터 이른바 ‘이념성’을 아예 배제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던 흔적들이 보인다. 이 역시 세르비아가 놓인 독특한 역사적/지리적 지위에서 비롯된 것이다.
세르비아는 구 유고 연방의 영화를 되살리기 위해서는 민족주의적 공산주의의 향수를 불러일으켜야 하지만, 이미 그같은 포지션은 세르비아진보당이 이미 굳건하게 차지하고 있었다. 따라서 친서구적 리버럴 성향의 대학생 시위대들은 세르비아의 국제적 지위를 건드리지 않으면서 내부적으로 세르비아진보당의 구조적 독점 체제를 해체시키려고 시도했다. 그리고 이는 정확히 EU의 이해와도 일치하는 것이었다. 바로 이점에서 Student List가 이른바 ‘컬러 레볼류션’과 궤를 같이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논란이 발생한다. 즉 서구의 직간접적 지원을 받는 정치 변동인가, 아니면 순수하게 내부적인 정치적 힘의 분출인가 하는 것이다.
이같은 선거 전략은 분명 효과가 있었다. Student List는 전체 250석 가운데 143석을 얻어 집권 세르비아진보당의 103석을 압도했다. 선거 직후 여론조사를 보면, Student List가 받은 표의 40%는 과거에 투표하지 않았던 대중들로부터 나왔다. 이번 선거는 지난 선거에 비해 약 10% 포인트 이상 투표율이 증가했는데 선거 연구자들은 이들은 무당파/무투표자들이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 이 역시 새로움이다(브라질 노동자당의 룰라 다 실바의 4선 연임에도 새로운 투표층의 참가가 결정적이었다. 왜 이런 동시성이 발생하는가? 이에 대한 분석은 별도의 글 참조)
반면 이들이 갖는 성격, 혹은 대중으로부터 어떻게 인식되는가도 분명해진다; 나머지 40%는 기존의 친EU 성향의 야당 지지자들로부터 나왔다. 즉, 이들은 정치적 중립을 말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실은 대중들로부터는 EU에 편향된 정치 집단으로 인식되고 있다.
고로 Student List는 정치적으로 동질적이지 않은 다양한 지식인 집단이라는 한계 때문에 ‘Anti-세르비아진보당’ 혹은 세르비아진보당 권력 독점 체제 해체라는 단일한 정치적 목표 이상의 것을 달성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이들은 전문가이기는 하지만, 실무 경험은 일천하다. 따라서 현실 정치에서 이들의 ‘전문성’이 얼마나 통할 수 있는지도 의문이며, 정치적으로도 각기 다른 견해들을 가지고 있지만 그 견해들을 통일시킬 수 있는 조직도 이념도 없기 때문에 이견이 발생할 경우 대처가 어려울 수 있다.
또 비록 세르비아진보당이 선거에서 패배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막강한 기층 조직을 유지하고 있으며 또 선거에서 이탈표는 매우 적었다. 따라서 만일 Student List가 균열을 보인다면 세르비아진보당은 언제라도 다시 무대 전면에 등장할 힘을 지니고 있다.
무엇보다도 Student List가 가지고 있는 잠재적인 친유럽 성향이 현실화된다면, 특히 코소보 문제와 관련하여 EU 가입을 목표로 코소보의 독립을 인정하는 스탠스를 취한다면 대중들의 거센 반발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결론적으로 세르비아에서의 학생 운동의 정치적 성공은 그 운동 주체들이 자신들을 비정치적이라고 선언함으로써 얻어졌다. 왜냐하면 이같은 ‘비정치성’은 사회에 굳건히 뿌리내리고 있으며, 세르비아의 사회경제적 존립 근거가 지지하는 기존 정치 권력을 선거라는 제도적 방식을 통해서 무너뜨릴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인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비정치’가 현실 정치 속에서 각기 다른 방향으로 자신들의 이해를 찾아 나설 때, 즉 불가피한 정치화가 시작되면 그때는 비로소 list 리스트(명부)는 ‘청구서’가 되어 그들과 세르비아 대중에게 날아올 것이다. 이 ‘운동’은 흥미롭지만, 이 ‘정치’는 시작부터 파열이 예고되어 있으며 오래 가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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