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적 파국주의(capitalist catastrophism)와
생태 아파르트헤이트
:지나간 미래와 오지 않는 미래 사이의 세계의 재구성
2024년 9월 12일 / Review & Preview
글: 권영숙 (민주주의와노동연구소 소장)
자본주의적 파국주의(capitalist catastrophism), 코비드 19, 생태 변화, 기후 위기, 생태 아파르트헤이트(eco-apartheid)
자본주의는 주기적으로 위기를 겪는다. 그리고 그 위기는 자본 순환주기(이른바 경기싸이클)의 특정 국면에 금융적 방식으로 표출된다.
1960년대 동구와 일본의 맑스주의 연구자들은 이를 자본주의 일반적 위기론으로 개념화했다. 동시에 이같은 자본주의의 위기(자본 축적의 위기)는 거대한 사회적, 정치적, 나아가 국제적 변동을 불러왔다.
1808년의 영국, 1848년의 유럽의 ‘패닉’(당시만 해도 자본주의 위기는 ‘panic’-공황이라는 용어로 표현되었다)은 산업 자본주의의 축적 위기가 표출된 것이었다. 그리고 이후 이른바 제1차 세계화, 즉 1870년대 이후 제1차 세계대전까지의 제국주의 열강의 패권 다툼과 식민지 분할 시대는 자본주의의 외연을 확장함으로써 내적 위기를 최소화하는 방식으로 봉합하였다.
그러나 1880년대 이후의 주기적이고 간헐적인 자본주의 위기는 이제 산업자본 축적의 위기가 아닌 금융자본 축적위기의 형태를 띄었으며, 2차 대전 전후 자본주의 체제는 달러화의 절대적 지배력 하에 다른 모든 통화는 달러의 파생통화로서 역할에 머물도록 설계되었다. 미국은 이같은 독점적 발권력을 악용해 당시만 해도 금에 연동되어있던 달러화를 초과 발행했으며, 훗날 프랑스 대통령이 된 지스까르 데스탱은 드골 정권하에서 재무장관이던 1960년 당시 이를 “달러화의 터무니없는 특권”이라고 불렀다. 이같은 달러화 초과 발행은 미국의 베트남전쟁 전비와 존슨 행정부의 이른바 ‘위대한 사회’라는 이름의 복지비용으로 충당되었다.
1968년은 시사적인 한 해였다. 미국은 유럽 국가들의 반발로 더 이상 달러화 초과 발행이 어려워지자, 기존의 달러화 기축통화체제인 브레튼우즈 협정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1971년에는 금태환제를 폐기한다. 더 이상 국제사회의 감시를 받지 않겠다는 의사표현이었을 뿐만 아니라, 현실적으로 더 이상의 ‘자금 유출’, 즉 달러화의 신인도 하락으로 인해 금이 미국에서 유출되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였다 (금 태환제 폐기 이전 마지막 2년 동안에만 해도 다른 국가들은 달러화를 미국에 제시하고 금으로 교환해 줄 것을 요구했으며, 그 규모가 미국이 보유한 전체 금의 무려 1/6에 달했다).
달러화 초과 발행으로 인한 인플레이션 압력이 누적되던 1970년대 초반에는 미국은 이같은 잠재적 위기를 선제적으로 해소하기 위해 두 가지 정책을 수행한다. 하나는 중국을 국제노동분업 체제에 끌어들여 자본주의 외연을 확장(명목 성장)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브레튼우즈 협정에 얽매이지 않고도 달러화를 초과 발행하면서도 다른 국가들이 달러화를 쓸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달러화 강제 정책이었다.
미국은 오일달러를 매개로 엄청난 초과달러 발행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달러화 통화 강세를 누릴 수 있었다. 1970년대 내내 미국의 인플레이션률은 매우 높았지만, 달러화 대비 자국 통화 약세를 유도할 수밖에 없었던 다른 국가들의 인플레이션은 미국보다도 훨씬 높았다.
이같은 수단을 통해 1929년 이후 다시 40여년 만에 재현됐을 제국의 위기, 즉 미국의 금융 위기는 ‘회피’되었고 이후 미국은 ‘세계화’와 ‘역외달러 시장’이라는 두 가지 무기를 통해 자본 축적을 가속화시켰다. 이 위기는 1968년에서 1982년까지 지속되었다. 글로벌 자본들 사이에 새로운 체제에 대한 합의가 이뤄진 것은 1985년의 플라자합의였으며, 이후 워싱턴 컨센서스라는 이름으로 이같은 자본 축적체제에 상응하는 이른바 신자유주의적 정치체제가 구축된다.
1968-1982년의 위기가 특별히 흥미로운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하나는 이 위기는 ‘설계된’(by design) 것이었다는 점이다. 즉 미국을 중심으로 한 글로벌 정치/경제 세력은 당시의 자본주의의 취약점과 위기를 선제적으로 인지하고 있었으며, 글로벌 축적 체제 변화를 추동해 이를 적극적으로 해결하려고 시도하였다. 다른 하나는 과거의 자본주의 위기와는 달리, 1970년대의 위기는 ‘과학’을 수반한 보편성으로 자본주의의 위기를 확장/대체시켰다는 점이다. 이것이 근본적으로 달라진 새로운 지점이다.
1968년 이탈리아 사업가의 제안으로 ‘Club of Rome’(로마클럽)이라는 정치, 경제, 사회, 과학 전문가들의 조직이 만들어진다. 이들은 1970년 이른바 ‘로마선언’을 통해 전세계적인 입지를 굳혔다. 그 주요 내용은 “현재의 석유 소비 증가 추세가 유지된다면, 20년이 채 넘지 못하고 전세계의 석유는 완전 고갈된다”는 것이었다.
지난 19세기 이후의 자본주의 위기는 과거에는 단지 프롤레타리아나 그들 이론가들뿐만 아니라, 자본가들과 일반 지식인들에게까지 ‘자본의 위기’로 인식되었다. 오죽하면 1907년 공황은 그 명칭이 ‘부자들의 공황’이기까지 했다. 그러나 1968년 이후 만연체로 진행된 자본의 위기는 이제 ‘자본주의의 위기’가 아니라, 보편적 위기, 더 나아가 인류의 위기 혹은 전지구적 위기로 자신을 내세운다.
거기에는 유수한 과학자들과 비경제 전문가들이 함께 깃발을 들었으며 따라서 마치 자본의 이해관계가 아닌, ‘공공의 선’ 혹은 ‘보편적 삶의 조건’으로 미래를 제시했다. 70년대 맹렬한 위세를 떨쳤던 로마클럽은 1990년도에도 여전히 석유를 쓸 수 있었으며, 전세계 잔존 석유 매장량은 오히려 1970년대 계산했던 것보다도 더 많아졌다는 상황 속에서는 조용히 사그라들었다. 그리고 마치 지금은 아무도 이를 기억조차 하지 않는 듯 하다.
그로부터 50여 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동일한 현상을 목격하고 있다. 현재의 위기, 또는 위기들의 원본은 1970년대의 ‘만연체의 위기’에 있다. 기후, 환경, 자원의 위기는 단지 ‘과학적’일 뿐만 아니라, 생활세계에서도 확연히 느껴진다. 따라서 종으로서의 ‘인류’ 전체를 위한 행동이 촉구되고 있으며, 여기에는 자본주의 하의 ‘계급’이 아닌 보편적인 글로벌 시민(혹은 글로벌 가치)으로서 동참할 것이 요구된다.
물론, 현재의 ‘기후 위기’ 또는 ‘생태 위기’가 근거가 없다거나, 또는 자본가 계급이 주도하는 프로젝트에 불과할 뿐이며, 따라서 노동자 계급이 나설 일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자본의 위기 속에서 자본은 어떻게 자신을 재구성(reconfiguration)하고 있으며, 거기에 ‘대중’들이 어떻게 동원되는가 혹은 자발적으로 참여하도록 이끌어지는가를 먼저 명확히 하는 것은 필요하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먼저 자본주의 위기의 본성과 그 위기의 역사들, 그리고 그에 대응한 인간들의 행동과 실패들을 성찰하는 것이 필요하다.
아래의 논문은 그런 관점에서 매우 시사적이고 유익하다. 저자는 자본주의 위기 일반론이라는 형해화된 훈고학적 해석도 거부하면서, 동시에 마치 ‘자본주의의 분해’를 뛰어넘는 ‘새로운 정치/사회 과학’이 존재하는 것과 같은 환상도 거부한다. 또한 자본주의 하에서는 자본주의 이외의 것을 사고하지 못한다(마크 핏셔)는 현실적이지만 동시에 구조결정론적인 해석도 거부한다.
저자는 ‘자본주의적 파국주의’라는 개념을 새로 도입하여 현재의 상황을 분석할 것을 제시한다. 이 개념은 아직은 완성되지 않은 시론 수준에 더 가깝기는 하지만, 적어도 이 글의 분석이 전제하는 ‘대궐위의 시대’에서 세계를 다시 돌아볼 충분한 통찰력을 일깨워주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이 글은 지리정치경제학 국제학술지인 Geoforum의 2024년 7월 생태정치 특집호에 실린 카이 헤론의 자본주의적 파국주의와 생태아파르트헤이트를 서론과 결론 부분을 번역한 것이다.
이 글의 저자인 카이 헤론(Kai Heron)은 영국 랭카스터 대학에서 정치생태학, 정치경제학을 가르치는 전임강사이다.
원문 링크 : https://www.sciencedirect.com/science/article/pii/S0016718523002002
자본주의적 파국주의와 생태 아파르트헤이트(Capitalist catastrophism and eco-apartheid)
by 카이 헤론(Kai Heron)
출처: <Geoforum>, 2024년 7월호
번역 : 권영숙(민주주의와노동연구소 소장)
원문 : https://doi.org/10.1016/j.geoforum.2023.103874
Abstract (초록)
2020년 9월 도이치방크는 “무질서의 시대(The Age of Disorder)”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발표했다. 우울한 하늘을 가로지르는 화산과 번개의 이미지를 극적으로 전면에 내세운 이 보고서는 세계 경제가 신자유주의적 준안정 상태(quasi-stability)에서 극적인 사회적, 경제적, 생태학적 격변으로 특징지워지는 시대로의 급격한 국면 전환 직전에 놓인 글로벌 경제 상태라고 경고하고 있다. 도이체방크 연구원들은 이 새로운 시대를 ‘무질서의 시대’라고 불렀다.
이 논문은 도이체방크의 평가야말로, 자본주의적 파국주의(capitalist catastrophism)와 생태-아파르트헤이트(eco-apartheid; 생태-인종차별)라는 새롭게 부상하는 체제를 포함하는 더 넓은 조건의 일부라고 제시한다. 죠프 만(Geoff Mann)과 조엘 와인라이트(Joel Wainwright)가 지리학자들에게 더 뜨거운 행성을 항해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는 개념을 구성해야한다고 요청한 것을 출발점으로 삼아서, 이 논문은 자본주의 세계의 극적이고 비대칭적으로 파국적인 재구성의 효과를 명명하고 이론화하는 개념으로서 자본주의적 파국주의(capitalist catastrophism)를 소개하고자 한다.
자본주의적 파국주의는 세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 사회운동과 그 이론가들은 자본주의 이후의 미래를 상상할 수 있는 새로운 능력을 갖고 있지만, 동시에 그것을 실현할 수 없는 무능력이 결합된 상태에 있다는 점이다.
둘째, 국가와 자본의 억제 능력을 넘어서는 사회적, 생태학적 위기가 연쇄적으로 발생하고 상호 증폭된다.
셋째, 인간 및 비인간적 미래가 불균등하게 분배된 말살(cancellation; 혹은 취소)이다.
마르크스주의 정치경제학 및 니아샤 엠보티(Nyasha Mboti)의 아파르트헤이트 이론을 바탕으로 이 논문은 자본주의적 파국주의가 착취당하고 억압받는 다수를 위험에 빠뜨림으로써 일부를 위한 녹색 전환이 보장되는 생태적 아파르트헤이트의 글로벌 시스템으로 변모하고 있다고 결론지었다.
2020년 9월 독일 도이치방크가 내놓은 보고서 “무질서의 시대 (The Age of Disorder) ”의 표지.
1. Introduction
2020년에 코로나19가 전 세계적으로 처음으로 돌풍을 일으킨 이후 자본의 적시 배달 시스템(Just in time delivery system)과 사람보다 이익 우선주의의 확대와 조장 가운데, 평론가들은 위기와 전환에 대해 자주 인용되는, 그람시의 유명한 발언을 계속해서 언급하며 위기적 혹은 전환기적 상황을 포착하기 위해 애를 썼다(Fraser, 2019, Buchholz, 2020, Baroud, 2020, Lin, 2022, Lapavitsas, 2023). 그람시(Gramsci)의 진부한 격언이 말했듯이, “위기는 낡은 것이 죽어가고 새로운 것이 태어날 수 없다는 사실, 즉 그 사이에 매우 다양한 병적 증상이 나타난다는 사실에 있다”(Gramsci, 1971, 276).
유럽에서 파시즘의 부상에 대응하여 쓴 그람시의 이 말은 일반적으로 우리가 두 상태 사이의 불안정한 중간에 존재하며 현재의 불확실성, 불안, 공포는 무언가를 향한 길의 지나가는 국면에 불과하다는 것을 암시하기 위해 그리고 새롭고 더 나은 것이 있기를 기대하며 사용된다.
미래의 정치 생태학에 관한 지오포럼(Geroforum)의 특집 이슈에 게재하는 이 기고에서 나는 우리가 그람시의 격언에서 암묵적이고 너무나 위안이 되는 목적론을 잘라내고, 공백기로 해석되었던 것이 실제로는 뉴노멀(ndw normal)이라고 상상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묻고 싶다.
가까운 미래를 위해. 새로 태어난 것이 이전 시대보다 더 나은 것이 아니라 더 나쁘다면 어떻게 될까? 그리고 “매우 다양한 병적 증상”이 사라지지 않고 실제로 더 악화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우리가 세상에서 행동하는 방식이 어떻게 바뀔까? 본 논문은 현재의 국면에 대해 자본주의적 파국주의(capitalist catastrophism)라는 새로운 이름을 부여함으로써 그러한 질문을 촉발하고자 한다.
자본주의적 파국주의는 개념적 내기(conceptual wager)이다. 이는 자본주의에 뭔가 심각한 문제가 생겼다고 모두가 동의하는 시대에 이름을 붙이려는 노력이다. 자본주의가 인간적, 비인간적 번영과 양립할 수 있다는 것을 결코 확신하지 못했던 피해자와 비판자뿐만 아니라, 점점 더 자본주의의 지지자와 수혜자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그람시가 기록한 현대 자본의 “병적 증상” 목록은 장기 침체, 인플레이션, 잉여 인구 증가, 생산성 저하, 동물 감염 확산, 심화되는 행성적 불평등, 부활하는 극우, 악화 등 긴 목록이다. 지정학적 긴장은 몇 가지 예들에 불과할 뿐이다.
이러한 증상을 완화하고, 촉진하고, 악화시키는 것은 진정으로 재앙적인 비율이 역전불가능해지는 생태적 위기를 가속화시킨다. 너무 많은 위기와 혼란이 수렴되면서 뭔가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데는 모두가 동의하는 것 같다. 세계 경제의 코로나19 팬데믹 폐쇄(Tooze 2023a) 이전에도 파이낸셜타임스는 자본주의에 “재설정”을 요구하는 The New Agenda라는 플랫폼을 출시했었다(Financial Times, 2019). 그 후, 신문은 기후 재해를 방지하기 위해 중앙 계획이 필요할 수 있음을 시사하는 기사를 게재했다(Krahé, 2021).
10대 소녀가 기후변화 행동을 촉구하는 선전문구를 들고 있다. 출처 : <Fortune>
위 기사의 저자는 자본의 사전 사후 계획이 자신이 촉발한 위기를 해결할 능력이 없을 수도 있다고 걱정했다. 그러다가 세계 경제가 코로나19로 인한 잠에서 벗어나고 수백만 명의 목숨을 잃은 그늘에서 나오자 서구 정부는 “더 나은 재건”, “더 친환경적인 재건” 또는 “레벨 업”을 약속했다. 이는 주변부 토지와 노동력의 착취를 통해 형성된 노동자와 핵심 자본 사이의 사회적 타협이 압력을 받아 깨지고 있다는 암묵적인 인정이었다(Smith, 2016, Patnaik 및 Patnaik, 2021).
하지만 상황은 국제 자본조차 자신의 메시지에 대한 신뢰를 잃기 시작할 정도로 악화되었다. 신자유주의가 완벽한 경제 체제는 아닐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인류의 본질적인 개인주의적이고 경쟁적인 본성에 가장 적합하다는 생각은 이념적으로 더 이상 지지될 수 없게 되었다. 예를 들어, 2020년 9월 도이체방크는 위에 언급했던, “무질서의 시대”(Deutsche Bank, 2020)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발표했다.
화산 폭발과 우울한 하늘을 가로지르는 번개의 이미지가 극적으로 전개되는 이 보고서는 세계 경제가 금융자본의 관점에서 본다면 1980년부터 2020년까지의 상대적 번영의 신자유주의 준안정 상태에서 강렬한 사회적, 경제적, 지정학적, 그리고 생태학적 격변으로 전환되고 있다고 결론지었다.
도이치방크 분석가들은 “전 세계 대부분을 위한 윈-윈”(Deutsche Bank, 2020, 4)이라고 부르는 것들로서, 해당 기간의 낮은 인플레이션, 자산 가격 상승, 유리한 채권 및 주식 수익률, 그리고 억압된 임금을 지칭했다. 신자유주의 시대를 이렇게 상상하는 데 있어서 2008년 금융 붕괴와 아랍의 봄의 격변은 먼 기억이며(보고서에서는 이에 대해 거의 언급하지 않음), 자본주의 세계 체제의 주변부에 대한 지속적인 황폐화와 비인간 본성의 악화는 자본 축적의 특성이 아니라 버그일 뿐이다.
그러나 이제 롭 월리스(Rob Wallace)가 코로나19가 하나의 증상임을 상기시켰듯이, 코로나19와 고조되는 생태 위기로 인해 가속화된 도이치방크의 보고서는 이 번영의 시대가 “가장자리에서 닳고 있다”고 경고한다. 앞으로 몇 년 안에 그들은 “우리가 백미러를 보면 2020년을 새로운 시대의 시작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Deutsche Bank, 2020, 3)라고 썼다. 그들은 이 시대를 ‘무질서의 시대’라고 부른다. 그들의 말에 따르면, 우리 시대는 지정학적 긴장, 경제 위기, 급격한 인구통계학적 변화, 생태학적 불안으로 고통받는 예측할 수 없는 시대이다. 그들은 자본이 “단순히 과거 추세를 추정하는 것이 가장 큰 실수가 될 수 있는” 미지의 영역으로 진입하고 있다고 경고한다. Deutsche Bank, 2020, 10). 병적인 증상은 어디에나 존재한다.
무질서의 시대(The Age of Disorder)는 도이치방크가 코로나19 이후 혼란스러운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사용하는 메타 개념이다. 하지만 이 글은 현재에 대한 다른 이름, 즉 자본주의적 파국주의를 제안한다. 본 논문의 주장을 예고하자면, 자본주의적 파국은 자본주의 세계 체제의 새로운 국면이 아니라 오히려 불균등하게 분산된 신자유주의의 해체와 마크 피셔(Mark Fisher)가 자본주의 현실주의라고 불렀던 것의 해체이다(Fisher, 2009).
비판 이론가, 은행, 정부 모두 자본주의의 장기적인 내구성이나 실제로 자본주의가 이미 끝났을지 고민하고 있는 시기에(Streeck, 2017, Wark, 2019, Dean, 2020, Varoufakis, 2021, Durand, 2022) ), 자본주의적 파국주의는 자본주의가 아직 죽지 않았다는 것을 암시한다. 오히려 자본주의 세계 체제는 마르크스가 모든 사회적 부의 두 원천으로 정의한 노동과 비인간적 자연의 극적이고 비대칭적인 파국적 재구성을 겪고 있다(마르크스와 엥겔스, 2010a).
자본주의적 파국주의에는 세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 긍정적인 후기 자본주의 미래를 상상하는 진보운동의 새로운 능력은 이를 실현할 수 없는 무능력과 비극적으로 결합되어 있다. 둘째, 인간과 인간이 아닌 미래의 불균등하게 분산된 취소다. 셋째, 국가와 자본의 억제 능력을 넘어서는 사회-생태적 위기가 연쇄적으로 발생하고 상호 증폭된다.
이 논문은 억압받고 착취당하는 사람들의 동맹이 개입할 수 없다면 그 결과는 계속해서 강화되는 지구적 생태아파트헤이트 체제가 될 것이며 이를 통해 니야샤 엠보티(Nyasha Mboti)의 용어를 빌자면, 억압받고 착취당하는 사람들을 위험한 길로 몰아넣음으로써 오직 일부만을 위한 녹색 전환이 자금조달되는 방식으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결론지었다(Mboti, 2023); 2).
이 글의 주장은 두 부분으로 전개된다.
첫째 나는 마크 피셔가 자본주의적 리얼리즘이라고 불렀던 조건이 해체되어 자본주의적 파국주의로 변이되고 있음을 보여줄 것이다.
두 번째로, 나는 자본주의적 파국주의가 점점 더 강화되는 지구적 생태 차별 체제의 조건을 확립하고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을 함에 있어 이 논문은 두 가지 목표를 갖고 있다.
첫째, 생태 위기가 정치이론가와 비판 지리학자에게 새로운 개념과 용어 개발을 요구한다는 만(Mann)과 웨인라이트(Wainwright)의 관찰에 대응하여, 자본주의적 파국주의는 “우리의 국면을 개념화하고 우리가 다루는 범주 간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는 개념적 내기로써 도입되었다. 이 범주들은 우리가 더 뜨거운 행성과 그것이 가져올 불가피한 정치경제적 변화를 탐색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는 방식으로 이를 이해하는 데 사용될 수 있다”(Wainwright and Mann, 2020, XII).
둘째, 에코 아파르트헤이트(Rice et al., 2022, Táíwò, 2020, Cohen, 2019, Brisman et al., 2018)에 대한 이전 개념을 바탕으로 해서 이 개념을 세계 규모의 자본 축적 법칙에 뿌리를 두고자 한다. 이는 마르크스주의 정치경제학과 Nyasha Mboti의 아파르트헤이트 이론의 결합이다(Mboti, 2023).
5. Conclusion
미래의 정치생태학에 관한 지오포럼(Geoforum)의 특집 이슈에 대한 이러한 기여는 현재를 규정하는 새로운 이름, 즉 자본주의적 파국주의를 제안한다. 자본주의적 파국주의는 자본주의적 현실주의(capitalist realism)가 그 경계에서 쇠퇴하기 시작할 때 일어난다. 그것은 자본주의 세계체제가 인간 본성과 비인간적 본성을 조직하는 방식에 대해 극적이고 비대칭적으로 파국적인 재구성을 겪는 상황을 지칭한다.
코로나19 팬데믹에 대한 자본주의 핵심의 반응을 바탕으로 이 논문은 자본주의적 파국주의는 자본주의적 현실주의적 조건의 해체와 돌연변이로서 가장 잘 정의된다고 주장한다.
나는 자본주의적 파국주의가 세 가지 그러한 돌연변이로 정의된다고 주장한 바 있다.
첫째, 자본주의의 종말보다 세상의 종말을 상상하는 것이 더 이상 쉽지 않다는 것이다. 오늘날 진보적인 운동과 사상가들은 후기 자본주의 생활 세계를 상상하는 데 매우 능숙해졌다. 자본주의적 파국주의 하에서의 과제는 우리가 현재 존재하고 있는 곳과 점점 더 긴박하게 우리가 있어야 한다고 알고 있는 곳 사이의 언뜻 보기에는 건너갈 수 없는 격차를 횡단하는 데 있다.
둘째, 마크 피셔(Mark Fisher)는 “미래는 취소됐다”고 주장했지만 이는 문화적 의미와 고도로 지역화된(provincialized) 유럽적 관점에서만 그렇게 의미된 것이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자본주의적 파국주의 하에서 미래는 실제로 취소되었거나, 전 세계에서 죽거나 위험에 처한 수만 명의 인간 및 비인간 생명에 대해 이미 취소되었다.
셋째, 자본주의 리얼리즘은 끊임없는 이데올로기적 강화가 필요한 계급 프로젝트인 반면, 자본주의적 파국주의는 사회생태적 위기를 촉발하려는 자본의 경향이 정부의 억제 능력을 능가하는 세계를 비난하고 이와 씨름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국 핵심에 있는 국가와 자본은 억압받고 착취당하는 다수를 위험에 빠뜨림으로써 최악의 위기로부터 운이 좋은 소수를 보호할 것을 약속한다. 내가 주장한 바와 같이 그 결과는 느슨하게 구성되었지만 점점 더 강화되는 생태적 아파르트헤이트(생태 인종차별) 체제다.
자본주의적 파국주의가 아닌 것에 대해 몇 가지 간략한 설명으로 결론을 내릴 가치가 있다.
첫째, 자본주의적 파국주의는 ‘생태 파국적(eco-catastrophe)’이지 않다(Rothe, 2020). 즉, 생태학적 붕괴를 막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 성향, 즉 생태파국적 주장의 문제점은 그것이 붕괴라는 생각에 집착적으로 의존한다는 것이다. 현상유지를 즐기려면 붕괴라는 생각이 필요하다. Adorno가 쓴 것처럼, “심리학은 재난을 상상하는 사람이 어떤 방식으로든 재난을 원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Adorno, 2005; 163).
둘째, 자본주의적 파국주의는 자본주의의 최종 붕괴를 예측하는 것이 아니다. 자본주의가 종말론적으로 쇠퇴하고 있는지, 아니면 우리가 새로운 후기 자본주의 체제에 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주장도 하지 않는다(Wark, 2019). 오히려 그와는 정반대다. 프란세스코 볼디쪼니(Fancesco Boldizzoni)가 보여주듯이, 광범위한 마르크스주의 전통은 자본의 종말을 반복적으로 그리고 잘못 예언해 왔다(Boldizzoni, 2020). 오히려 자본주의적 파국주의는 자본주의 세계체제가 자본과 인간 및 비인간적 본성의 신진대사 관계를 극적이고 비대칭적으로 파국적으로 재구성하는 과정에 있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생태 아파르트헤이트의 지지를 받아 당분간은 “작동”할 수 있는 재구성이다.
셋째, 자본주의적 파국주의는 보편화하는 유럽중심주의 주장이 아니다. 이 재앙이 유일한 재앙이거나 어떤 의미에서는 이전 재앙보다 더 중요하다고 제안하지 않는다(Danowski 및 de Castro, 2016, Whyte, 2017). 엘리자베스 포비넬리(Elizabeth Povinelli)가 쓴 것처럼, “식민주의와 노예화의 재앙으로 시작하면 현대의 기후, 환경, 사회적 붕괴의 위치가 회전하고 완전히 다른 것으로 변이된다. 기원적 재앙은 과거이자 현재이기도 하다. 그들은 자유주의적 진보의 지평 너머로 등장하기보다는 식민주의와 인종차별주의의 기반에서 계속해서 도착하고 있다”(Povinelli, 2021, 3).
대신, 자본주의적 파국주의는 자본주의 세계체제가 새로운 미지의 영역으로 방향을 바꾸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전 파국과는 질적으로 다른 이 파국은 항상 “구별되지만 촘촘하게 상호 연결된 정치적 지리”를 통해 그룹별로 구분된다(Gilmore et al., 2022, 107). 이러한 집단차별을 생태 차별이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자본주의적 파국주의는 이 불확실한 궐위의 시대(interregnum)에 우리가 현재라고 부르는 진정한 디스토피아를 단지 자본주의 이후의 미래를 상상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것을 실현하는 시공간이라고 명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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