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인정치: 바보 vs 미친 놈
벼랑 끝 전술이 유효하기 위해서는 이 전술의 수행자는 미친 척해야 한다
2025년 5월 22일 / 한마디의 세상 Word of the World
글 <전망과실천> 편집부
지난 5월 12일 미국과 중국이 잠정적으로 무역 관세를 인하하고 협상을 시작했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전세계 증권시장은 급등했다. 이를 두고 영국의 이코노미스트인 Dario Perkins는 “시장은 미국 행정부가 완전히 미친 건 아니고 단지 무능할 뿐이라는 사실에 환호하고 있다”고 조롱했다.
맞다. 지난 4월 2일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이른바 ‘해방절’을 선포한 이후에 미국 정부의 대외무역 정책 수행 과정을 보면 무능과 광기가 난무한다는 것을 발견하기 어렵지 않다. 그러나 이같은 퍼포먼스는 동시에 ‘의도’된 것이기도 하다(“2025년 국제 정세 전망 : 누구나 처음엔 창대하리라”, 2025년 02월 01일 참조).
그리고 이러한 행동방식의 근저에 있는 것은 매우 ‘이성적’인 전략이기도 한 ‘벼랑 끝 전술’(brinkmanship)과 ‘광인이론’(mad man theory)이다. 그리고 벼랑 끝 전술과 광인이론은 둘 다 냉전 시기 미 군부에서 개발된 전략이다.
벼랑 끝 전술은 냉전기에 전면전이 불가능한 상태에서 전쟁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최소투입/최대효과를 겨냥한 전술이었다. 대표적인 사례가 1962년의 쿠바 미사일 위기였다. 표면적으로는 마치 소련이 미국의 코 앞에 있는 쿠바에 미사일을 배치해 위기가 조성된 것 같지만, 실은 소련의 조치는 1957년 미국이 터키에 전략핵 미사일을 배치한 것에 대한 대응조치였다.
미소가 동시에 벼랑 끝 전술을 구사하자 전세계는 당장이라고 핵전쟁에 들어갈 것처럼 공포에 떨었지만, 그러나 케네디-흐루시쵸프 회담으로 적당히 마무리되었다. 왜냐하면 이 벼랑 끝의 배후에는 계산된 이성이 있었으며 이 이성은 단지 미친 척하는 것이 더 유리하기 때문에 벼랑끝을 추구한 것에 불과했기 때문이었다.
즉 벼랑 끝 전술이 유효하기 위해서는 이 전술의 수행자는 미친 척해야 한다. 정말로 벼랑에서 떨어질 듯이 미친 듯이 사태를 악화시켜야 한다. 이를 정식화한 것이 ‘광인이론’(mad man theory)이었다. 따라서 벼랑 끝 전술과 광인이론은 하나의 셋트로 움직인다.
벼랑 끝 전술과 광인이론은 트럼프의 관세 정책에서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처음에는 전세계에 무지막지한 관세를 때리고, 중국에 대해서는 145%라는 어처구니 없는 수치를 들이댄다. 트럼프는 마치 미친 사람처럼 보이며, 당장 내일이라고 전세계가 대공황에 들어갈 것 같은 공포가 엄습한다. 그리고 트럼프는 이 공포를 무기로 협상하자고 요구한다.
그러나 이 전술의 문제점은 실은, 누구나 이게 연기(performance)라는 것을 알고 있다는데 있다. 심지어는 이 광인 연기의 각본까지도 사전에 공개되어 있다(스테판 마이런의 관세 가이드). 이러면 이른바 ‘약발’이 줄어든다. 미친 척 해도 통하지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이 ‘통하지 않는’ 광인연기는 ‘무능’이라고 불린다.
실은 이건 광인이론의 근본적인 약점이자 한계다. 애당초 이 이론의 시작부터 그랬다.
광인이론은 1930년대 케인즈에서 시작한다. 케인즈는 대공황 시기 정부 재정 확대에도 불구하고 민간 투자가 증가하지 않자, “중앙은행은 민간 자본가들이 신뢰하고 투자할 수 있을 만큼 미친 척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중앙은행이 어떤 일이 있어도 투자자들이 손해보지 않을 것처럼 보이는, 이성적으로는 말도 안되는 정책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케인즈는 이를 ‘신뢰할 수 있게 비이성적“(reliably irrational)이어야 한다고 표현했다.
이 논리가 다시 등장한 것은 지난 2013년 버냉키 당시 연준 의장의 양적완화(QE) 때였다. 연준의 무제한 양적완화에도 불구하고 디플레이션이 해소되지 않자, 당시 오바마 행정부의 경제자문위원장이었던 아우스탄 굴스비(현 시카고 연준 의장)는 “버냉키는 하와이언 무무 셔츠를 입고 춤이라도 추어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극도로 근엄하고 보수적인 버냉키가 날라리 셔츠 입고 춤추는 모습이라도 보여주어, “아 이제 저 사람이 제 정신이 아니구나, 그러니 무슨 짓이든 하겠구나”라는 인식을 투자자에게 심어줘야 민간 투자가 이뤄진다는 주문이었다.
지난 4월 트럼프가 백악관에서 초고관세 정책을 발표하고 있다. 출처 : <The Economic Times>
물론 트럼프는 버냉키보다는 훨씬 연기를 잘한다. 왜냐하면 애당초 제정신인지 의심스럽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세상은 트럼프가 연기를 하고 있으며, 심지어는 그 연기 중에 자기 잇속은 꼭 챙긴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다.
그러니 트럼프가 춤을 추면 짐짓 그런 척 같이 맞춰주고, 트럼프가 제 정신으로 돌아오는 척하면 무능하다고 비웃는다. 바보와 미친놈은 한 끗 차이다.
시스템으로 운영되는 국가는 reliably irrational(신뢰할 수 있게 비이성적)일 수는 없다. 단지 reliably incompetent(신뢰할 수 있을만 하게 무능)할 뿐이며, 여기서는 최고의 연기자도 결국은 광대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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