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제 의료체제의 모순과 ‘의정 갈등’
2025년 8월 8일 / 연구자의 시선
글 김창엽 (서울대 보건대학원 교수, 건강정책)
길고 지루했던 ‘의정 갈등’이 마무리 국면에 들어섰다(‘의정 갈등’은 논란이 많은 말임에도 상당 부분 굳어진 상태라 그대로 쓴다). 의대생들이 곧 학교로 돌아가고 전공의 다수도 병원으로 복귀할 것으로 보인다. 정부와 협의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갈등이 나타날 소지도 있지만, 2024년 초에 시작된 이 사태가 어떤 형태로든 정리될 것이 분명하다.
물론, 의학교육과 전공의 수련이 과거로 돌아간다 해도 모든 사태가 ‘정상’을 회복하지는 못할 것이다. 벌써, 의학교육과 전공의 수련의 왜곡과 질 저하 가능성이 제기되고, 처벌을 받아야 할 당사자에게 특혜를 주는 것 아니냐는 시비까지, 도전이 만만치 않다. 정부가 이미 약속했거나 앞으로 그럴 가능성이 있는 정책적 양보(의대 입학정원을 포함해서) 또한 하나같이 시비의 대상이다. 특히, 환자와 의료 이용자를 포함한 일반 시민은 정부가 장담한 개혁은 온데간데없이 힘 있는 집단의 특권만 강화한다고 따질 태세다. 의료 ‘개혁’ 논의는 이번 사태를 불쏘시개 삼아 다시 뜨거워질 것이 틀림없다.
사회권력의 불균형 권력관계
어떤 기준을 들이대든, 정부의 이 정책은 실패했다, 결과적으로 과거보다 조금 더 의대 입학정원을 늘릴 수 있다 하더라도 성공이라 하기 힘들다. 필수의료 확충이라는 성과는 입에 올리기도 어렵고, 정치적으로는 의사 권력을 제어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해서, 이제야 정부와 타협한 의대생과 전공의가 성공한 것도 아니다. 큰 성과 없이 병원과 학교로 복귀하는 의대생과 전공의는 사회적 요구에 부응하지 않겠다는, 어떤 의미로는 집단 차원에서 반사회적 정체성을 내면화하고 있을 공산이 크다. 현존하는 정치공동체 안에서 그들이 선망하고 원하는 경제적, 사회적 지위까지 성취할 가능성은 한참 더 위축될 수밖에 없다.
역설적으로, 국가도 의사 권력도 아닌, 노동계급과 민중을 포함한 사회권력이 가장 큰 실패의 짐을 졌고 앞으로도 그래야 하는 것이 냉정한 현실이다. 사태가 진행되는 경과 내내 환자와 의료 이용자가 겪어야 했던 고통, 불편, 불안을 새삼 말할 필요가 있을까? 잠시 ‘초과 사망’을 둘러싼 시비가 있었지만(관련 기사, “의료대란 초과사망 없었다? 숫자로 드러나지 않은 피해 봐야”), 그런 사망이 더 많았다 하더라도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사실 이런 ‘고통의 표준화’는 국가권력이 개별적 고통과 문제를 인구의 통치로 전환하는 방법이다). 환자와 의료 이용자의 고통이 단지 사망이라는 극단적 결과에 한정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리고 국가의 시선과 통계로 포착할 수 없는 범위까지 아우른다는 점에서, 이는 개인적, 사회적 고통의 핵심에 미치지 못한다.
사회권력에 강요되는 고통은 무엇보다 불평등한 권력관계의 산물이라는 점이 실패의 더 중요한 측면이다. 근본 구조에서, 사회권력은 의료를 둘러싼 정치적, 정책적, 사회적 의사결정 과정에서 거의 완전하게 배제되어 있다. 필수의료가 무엇인지, 사회적으로 적정한 의사 수가 어느 정도인지, 의사 노동에 대한 경제적 보상이 어때야 하는지, 노동자와 농민은 이해 당사자이면서도 결정에 영향을 미칠 아무런 권력이 없다. 의료권력과의 관계 또한 지극히 불평등하다.
자본제적 의료체제
현실 정치와 정책에서 의사와 의정 갈등 또는 의료 대란을 다루는 원리가 주로 국가권력의 ‘통치’에 초점이 있다면, 의료를 통한 또는 의료에 대한 국가 통치의 물적 토대는 거의 전면적으로 자본제적 의료체제라 할 수 있다. 가령, 국가가 응급의료체계를 촘촘하게 갖추려는(또는 그렇게 보이려는) 이유는 사람들의 생명과 고통에 관심이 있어서라기보다, 안전에 대한 국가 책임을 묻는 통치의 원리, 그리고 이에 부응해야 하는 국가권력의 동기에 기초한다. 그렇지만, 그 응급의료체계는 국가권력이 직접 소유, 운영하지 않고 시장원리에 작동하는 자본제적 의료체제 그리고 응급의료체제이다. 필수의료에 종사하는 의사 수를 확보해야 한다는 국가권력의 정책 또한 자본제적 의료체제에 의존해야 하기는 마찬가지다. 국가권력과 경제권력(자본) 사이의 틈이요 모순이다.
보건의료와 국가 통치의 관계 역시 새롭게 분석하고 인식해야 하지만, 나는 자본제적 의료체제를 제대로 인식하는 과제가 더 시급하다고 본다. 국가 통치의 주변부 영역일수록 경제의 우선성이 관철되기 때문이다(의료가 경제적으로는 중심부라는 의미는 아니다). 더 길게 설명할 것도 없이, 먼저 경제의 양적 측면에서 의료체계가 또한 경제체계라는 것은 자명하다. 2022년 기준으로 한국의 ‘GDP 대비 경상의료비 비율’은 9.7% 수준으로, 다른 고소득 자본주의 국가와 비슷한 수준에 이르렀다. 경제 규모의 팽창 속도는 다른 어느 나라보다 빠르다. GDP의 10%를 생산하는 어떤 산업을 자본주의 체제의 중요한 ‘부분’으로 보지 않으면 도대체 어떤 다른 인식 방법이 있을 수 있을까?
의료체계와 제도를 경제체제, 즉 자본주의 체제라는 관점에서 접근하는 것은 단지 의정 갈등뿐 아니라 모든 의료 정책과 제도, 그리고 이와 관련된 사회적 실천을 이해하는 데에 중요한 방법론이다. 당장 의정 갈등의 당사자 중 하나인 의사 인력의 성격을 어떻게 보는지가 달라진다. 경제체계로서의 의료체계에서 경제 활동, 즉 생산과 소비의 주체는 국가권력의 정책이나 행정으로 규정하는 의료와 그 체계의 범위를 넘는다. 예를 들어, 의사 인력은 환자를 진료하고 의료를 제공하는 인력(의료자원)일 뿐 아니라, 또한 서비스를 생산하고 제공함으로써 이윤을 얻거나 임금을 받는 자본주의체제의 경제 주체이다. 장기요양보험은 돌봄 노동을 사회화한 핵심 제도인 동시에, 수많은 일자리와 이윤을 산출하는 (국가가 조성한) 시장이기도 하다.
이러한 자본제적 의료체제(부분)은 총체성(totality)으로서의 자본주의 사회경제체제와 공동-결정, 공동-진화한다는 것도 유의할 필요가 있다. 지금 글로벌 자본주의는 더 큰 이윤을 찾아 이동(운동)하며, 그 결과가 이른바 지식 기반 경제, 디지털 자본주의, 금융자본주의 등의 자본 축적 체제이다. 이들 자본은 의료체계 관점에서는 지식, 기술, 장비와 물품, 약품 등을 통해 가치를 생산하려 한다. AI 등을 활용한 새로운 의료 기술과 약품, 연구개발 투자와 금융, 국민건강보험의 급여와 비급여, 실손보험, 의사들의 필수 전문과목 기피와 쏠림 등은 모두 서로 연결되어 공동으로 진화, 결정한다.
이런 구조 안에서 경제 주체로서의 의료기관(의료자본)은 이윤 최대화를 위해 다른 무엇도 아닌 경제적 합리성에 맞추어 자신을 생산하고 재생산하는 것이 당연하다. 자본주의 시장을 통한 생산경쟁은 가장 기본적인 경제적 합리성이라 할 수 있는데, 이는 의료 영역에서도 마찬가지다. 한국 의료의 생산자 또한 생산 경쟁의 우위를 차지하려 노력한다. 문제는 일반적인 생산 전략, 즉 비용, 품질과 차별화, 유연성 등에서의 경쟁이 쉽지 않고 효과도 미미하다는 점이다. 이런 맥락에서도 한국 병원에서 나타나는 흔히 나타나는 노동 문제, 인력 부족과 노동 강도 강화, 낮은 임금, 비정규 노동 등은 가장 원초적인 자본 축적 기제가 빚어내는 현상이다. 전공의가 병원의 비용과 수익에 큰 영향을 미치는 노동자인 한, 병원이 노동을 갈아 넣을 동기는 차고 넘친다.
출처 : 경대뉴스(http://www.gnunews.kr) 그래픽 이호정 에디터
의료의 생산 경쟁은 수요를 창출함으로써 양을 늘리려는 경쟁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 의료 분야에서 볼 수 있는 이른바 ‘혁신’은 필요를 해결하는 새로운 기술이라기보다 잠재적 수요 또는 수요를 창출하는 방식이기 쉽다. 개별 병원의 규모를 늘리고 분원을 더 운영함으로써 환자를 늘리는 방식이 대표적이다. 건강검진과 예방 서비스를 개발하거나 의료의 대상이 아니던 서비스나 기술을 의료화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품질과 차별성 또한 같은 차원의 원리이자 상품의 특성이다. 실제적인 품질보다는 신기술과 장비를 도입하고 첨단 기술에 의존하는 생산 방식을 두고 경쟁한다. 한때 유행처럼 번졌던 암병원 설립과 증설, 분원 설치, ‘왓슨’과 같은 신기술 도입 등을 모두 이런 자본의 운동으로 설명할 수 있다.
이번 의정 갈등과 연결해서 주목할 것은, 기술과 지식을 기반으로 하는 다른 경제 주체와 비교해 주로 노동에 의존해 가치를 창출하는 의료자본이 자본 축적에 더 불리하다는 점이다. 지금까지 주로 생산량 증가에 의존한 축적체제가 향후 자체 모순에 봉착할 가능성이 크다고 보는 이유다. 예를 들어, 전체 인구 또는 특정 인구 집단이 줄면서 생기는 수요 감소는 한국 의료자본의 자본축적을 결정적으로 제약할 것이다. 앞서 주로 병원을 중심으로 자본 또는 자본 축적의 논리를 설명했지만, 개인 의사와 고용 의사, 개원한 의사, 병원과 의원 등의 기관이 자본제적 의료체제라는 축적체제에 속한다는 것은 크게 다르지 않다. 결국 의사 수를 둘러싼 의료권력의 반발은 근본적으로는 자본제적 의료체제의 모순이 격화되면서(또는 이를 예상하면서) 촉발된 경제적 이해관계의 표출로 이해해야 한다.
자본제적 의료체제라는 인식의 부재는 단지 이론적 차원의 문제에 그치지 않고, 국가권력의 통치, 정부의 정책, 사회권력의 대응, 그리고 변혁 운동에 이르기까지 영향을 미친다. 의사 권력의 경제적 이해관계 표출을 단지 개인의 탐욕이나 윤리의식 부재로 이해하면, 교육이나 전문직 직업의식 제고라는 개인적 해결 방안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이와 비교해 자본제적 의료체제라는 시각에서는, 의사 권력을 통제하기 위해서는 자본축적의 동력과 그 메커니즘에 개입하고 이를 반-자본주의적으로 재조직하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다. 환원주의적으로 습관처럼 체제를 문제 삼는 것이 아니라, 체제와 현실적 실천을 정렬(align)하기 위해서도, 즉 현실의 실천이 체제 수준에 도달하기 위해서도, 총체적 체제 인식이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 때문에, 나는 현재의 체제적 조건을 그대로 둔 채 의사 수를 더 늘리는 것 또는 공공병원을 더 만드는 것만으로는 의료의 공공성을 결정적으로 바꾸기 어렵다고 판단한다.
의료체제 속에서 격화될 자본주의적 모순
건강과 보건의료 영역에서도 자본주의 발전은 적어도 초기에는 사회적 진보에 이바지한다. 예를 들어, 1977년 의료보험이 시작한 후 보건의료 자원과 서비스 역량은 빠른 속도로 늘어났고, 보험 가입자의 경제적, 지리적 접근성이 개선되면서 의료 이용이 함께 증가했다. 과학 지식과 기술 도입이 빨라지면서 보건의료가 질적으로 향상한 점도 부인하기 어렵다. 의료보험과 보건의료 확대와 직접 연관되지는 않지만, 괄목할 만한 건강 수준 향상은 자본주의의 진보적 역할을 뚜렷하게 보이는 대표적 지표다.
의료민영화 저지와 무상의료 실현을 위한 운동본부·의료민영화 저지 범국민운동본부는 2019년 “강원도 원격의료 사업을 중단하라”고 촉구했다. (사진제공: 보건의료노조, 출처: 의협신문http://www.doctorsnews.co.kr)
문제는 자본주의 의료체제가 고도화하면서 모순이 발생하고 격화한다는 점이다. 오늘날 우리가 보는 의료의 상업화, 영리화는 말할 것도 없고, 국가권력이 관심을 기울이는 의료비 지출 급증, 그리고 자원 배치의 불균형과 불평등이 모두 자본주의체제 고도화에 따른 모순의 발현이라 할 수 있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전공의와 간호사 인력의 장시간 노동과 소진에 이르는 노동 강도는 자본주의적 노동체제의 모순이 빚어내는 필연적 현상이다.
모순이 심해지고 사회적으로 드러나겠지만, 자본과 경제권력의 운동은 당분간 더 강해져 위기로 이어질 공산이 크다. 국가권력은 경제권력의 이해를 대변할 뿐 아니라 통치 관점에서도 경제권력을 동원해야 한다. 시장적 보건의료의 부작용을 완화하기 위해 더 큰 경제적 유인 동기를 약속하는 것이 대표적 실천 방법이다. 경제권력이 강화하면서 국가와의 권력관계를 역전할 수도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경제 발전과 성장 이데올로기가 통치에 동원되는 한, 자본과 경제권력은 통제되기보다는 오히려 국가권력에 대한 지배력을 키울 가능성이 높다.
국가권력과 경제권력 사이의 모순은 일차적으로 의료비 상승을 둘러싸고 표출될 수 있다. 신자유주의적 국가권력은 총자본의 이익을 위해 상당 기간 긴축 기조를 유지 또는 강화하면서, 의료비 상승에 따른 건강보험 국고 지원과 의료급여 재정 증가를 억제하려 할 것이다. 국민건강보험 시장의 확대는 한편으로 경제성장의 동력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국가재정 지출을 늘리는 요인이다. 실손보험과 돌봄의 금융화를 중심으로 한 민간보험 자본의 이해관계도 공적 재정 지출을 줄이는 쪽에 부합한다.
민주적 권력의 강화 없이 경제적 민주주의는 어렵다
자본주의 체제의 진보성도 있다고 했지만, 사람 중심 관점에 부합하는 경제권력의 개혁 경로는 국가권력 또는 사회권력의 개입과 통제에 좌우된다. 한국의 경우, 현재의 권력관계, 그리고 국가권력과 경제권력의 관계로 볼 때, 경제권력 또는 자본의 진보성을 키우면서 모순은 해소하는 전략 자체가 매우 제한적이며 실행 가능성도 의심스럽다.
예를 들어, 에릭 올린 라이트는 『리얼 유토피아』에서 진보적 개혁의 방법으로 ‘자본주의적 국가주의 경제 규제’, ‘사회적 자본주의’, ‘협동조합적 시장경제’ ‘사회적 시장경제’ 등을 제시하는데, 그 자신이 설명하듯이 이러한 전략은 “광범위하고 튼튼한 경제 민주주의의 성취” 위에 가능하다. 이를 위해서는 “사회권력이 시민사회의 보통 사람들의 적극적인 참여와 권력 강화를 통해 조직되어, 경제에 대해 직간접적인 민주적 통제를 행사할 수 있어야” 한다.
라이트의 전략에 동의하든 그렇지 않든, 권력 사이의 관계에 주목해야 한다는 데는 이견이 없으리라. 국가권력에 대해 그리고 사회권력 자체의 민주적 권력 강화 없이 ‘경제 민주주의’를 강화하기는 어렵다. 한국 상황에서, 적어도 현재까지는 국가권력과 사회권력의 민주적 역량과 권력 강화를 통하는 경로만이 경제권력의 개혁을 보증할 수 있다. 보건의료 분야에서는 한국적 현실에서 의료사회적협동조합 운동이 그야말로 고군분투하고 있으나, 이 또한 다른 권력과의 관계에서, 그리고 경제권력 내부에서 자본주의적 보건의료의 논리와 원리를 견제하고 민주적으로 통제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한편, 보건의료에서 자본주의체제의 진보성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주장도 있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자본 축적 동기와 결합한 신약이나 신기술은 시민과 환자, 인구 집단의 건강을 향상하고 고통을 줄이는 데 이바지한다. 원격의료가 의료 접근성을 개선하고, 인공지능과 로봇이 고립 지역 거주 노인의 돌봄에 긍정적 기능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체제 내 개혁에 한정해도 그 가능성은 경제권력의 내적 논리보다는 외부적으로 국가권력과 사회권력의 개입과 통제에 따라 달라진다. 특히, 현대적 자본 축적 메커니즘의 핵심인 새로운 기술을 어떻게 관리하고 통제하는지가 중요하다. 경제적 부담이나 불평등과 같은 모순을 해소할 가능성도 마찬가지다. 국가권력과 경제권력이 자본 축적 메커니즘을 가속하는 방식으로 결합하면, 그만큼 자본주의적 경제권력의 모순은 더 빨리 격화하고 또한 현실로 드러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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