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와노동 연구소

집회의 자유, 어디까지 왔나?

집회의 자유, 어디까지 왔나?

2025년 4월 25일  / 연구자의 시선
김종서 (민주주의법학연구회, 전 배재대 교수)

1. 집회의 자유는 있는가?

집회・시위(이하 집회로 약칭함)의 자유가 헌법상 기본적 인권의 하나로 보장되는 것은 집회가 갖는 두 가지 특성 때문이다. 첫째, 국가권력과 거대 자본에 의하여 독점지배되고 있는 매스 미디어에 접근할 수 없는 일반 민중들,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들이 자신의 의견과 정치적 항의를 표명・전달하는 최적의 수단이 집회이기 때문이다. 둘째, 집회는 정부나 지배집단에 대해 항의를 집단적으로 표출 전달하기 위한 강력한 수단인데, 이러한 항의는 헌법의 보호 없이는 지배집단이나 지배권력에 의해 쉽게 유린당하기 때문이다. 여론에 입각한 민주정치의 실현을 위해 집회의 자유가 특별히 보호되어야 함은 바로 위와 같은 성격, 즉 지배권력과 지배체제에 ‘반대할 자유’라는 성격 때문이다. 집회의 자유를 보장하는 이와 같은 취지와 정신이 온전히 구현되려면, 누구나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장소에서, 원하는 방법으로 집회를 열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두 명의 대통령을 파면시켰던 2016-7년과 2024-5년의 시기에 많은 시민들은 집회의 자유가 무한히 보장되는 듯한 느낌을 가졌을 수 있다. 주말마다, 또 어떤 때는 거의 매일 광화문 일대에 수천에서 수십만의 사람이 모여 ‘경찰의 협조 아래’ 도로를 점하고 시민의 요구를 외치고 노래하고 함성을 지르고 행진하는 경험은 ‘대한민국은 집회 시위의 자유를 완벽하게 보장하는 나라’라는 환상을 안겨주었을 수 있다, 그러나 그런 대규모 집회가 열리기 직전의 시기에 여러 집회가 금지・봉쇄되었고 이를 넘어서기 위하여 법원에 집회금지통고집행정지가처분신청을 하고 법원이 이를 인용하면 가까스로 집회가 개최되는 상황들이 반복되었다. 나아가 광화문에서 그렇게 많은 시민들이 자유롭게 집회를 하고 있던 순간에도 또 다른 시민들은 남태령에서, 광화문의 또 다른 어느 공간에서 경찰에 의해 행진을 차단당한 채 고립되고, 트랙터를 탈취당하고 폭행당하고 강제연행되는 등 집회의 자유를 유린당하고 있었다.

더구나 이런 상황은 억압적 성격을 가진 보수정권하에서만 일어나는 일도 아니다. 소위 민주정부 진보정권 하에서도 결코 집회는 ‘신고만 하면 자유롭게 개최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우리는 보수정권하에서나 진보정권하에서나 원하는 장소에서,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방법으로 평화적 집회를 할 수 없었다.

꽤 오래 전에 한 지방경찰청장이 “향후 민주노총이 주최하는 모든 집회를 관내에서 전면 금지하겠다”고 공언한 적이 있다. 이 말은 직접적으로는 민주노총 주최의 집회를 겨냥한 것이었지만, 사실상 모든 집회의 허용 여부가 경찰에게 달려 있음을 공식화한 것이었다. 이는 비단 집회의 자유 부정일 뿐만 아니라 법 앞의 평등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집회 관리의 책임을 진 경찰청장이 이렇게 공언할 수 있는 것이 이 땅의 현실이다. 그리고 이런 상황은 크게 달라진 것 같지 않다. 상황이 이렇다면 과연 집회의 자유는 있는 것인가?

2017년 대통령 박근혜 탄핵소추가 국회에서 여야합의로 가결된 직후 국회앞 환호하는 대중.

2. 집회는 어떤 이유로 금지되는가?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이하 집시법)은 집회의 시간, 장소 및 방법을 이유로 옥외집회와 시위를 금지한다.

(1) 집회 장소 규제

집시법의 각종 규제 중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집회 장소 규제인데, 장소 규제는 4가치 차원에서 이루어진다.

첫째, 집시법은, 전통적인 공적 광장은 아니지만, 이와 유사한 곳으로 볼 수 있는 장소들에서 집회를 금지한다. 바로 주요 국가기관 인근 집회를 금지하는 제11조가 그것이며, 집시법상 장소 규제의 핵심이다. 금지 장소들은 대체로 입법, 집행, 사법이라는 국가권력을 행사하는 최고기구들인만큼, 이들 권력기구의 소재지는 공적 성격이 매우 큰 장소이다. 또한 이들 장소는 시민들이 가장 빈번하게 출입하고 유동인구가 많아서 집회 본연의 목적을 달성하기에 다른 어떤 장소보다도 더 유리하고 효과적인 곳들이다. 말하자면 집시법은 집회를 하기에 최적인 장소들을 모두 집회 가능장소에서 배제하고 있는 셈이다. 뿐만 아니라 이들 장소에서의 집회 금지는 집회장소를 항의의 대상으로부터 분리시킴으로써 그 효과를 반감시킨다.
이런 문제 때문인지 집시법 제11조에 대해서는 2003년부터 여러 차례에 걸쳐 위헌 또는 헌법불합치 결정이 선고되었고, 이들 결정에 따라 2004년과 2020년에 각각 법 개정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이들 개정은 금지 장소는 그대로 둔 채 각각의 금지장소에 대하여 집회를 허용할 수 있는 예외조항을 추가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처럼 집회의 장소를 원칙적으로 금지하고 예외를 허용하는 것은 자유와 규제의 관계를 뒤집어버린다. 게다가 그런 규제는 ‘권리’를 당국의 재량으로 제한할 수 있는 하나의 ‘특권’이나 ‘특혜’ 정도로 변질시키는 것이다.

둘째, 게다가 집시법은 국가기관 인근 집회를 금지하는 것을 넘어서 공공장소에서의 집회를 봉쇄한다. 집회와 시위를 위한 전통적인 장소는 광장, 도로와 공원 등의 공공장소, 미국식으로 말하자면 공적 광장(public forum)이다. 그런데 집시법은 제정 당시부터 지금까지 일관되게 이런 공적 광장에서의 집회를 봉쇄하려는 의도를 숨기지 않고 있다. 그것은 바로 교통소통을 이유로 ‘주요도시의 주요도로에서의 집회 또는 시위’의 금지와 제한을 선언한 제12조이다. 특히 도심의 광장이나 공원이 거의 없던 한국사회의 상황을 고려한다면(과거에는 중앙정부 및 지방정부 청사 주변과 기차역에서의 집회도 금지됐다) 집회를 하기에 적합한 거의 유일한 공적 광장이라 할 도로를 봉쇄해버린 것이 바로 제12조이다. 이런 집시법 규정조차도 부족했든지, 여러 지자체에서는 집회를 할 만한 공적 광장이 될 만한 장소들, 예컨대 지방정부청사 부지, 철도역 광장 등등을 대형화분이나 조형물로 가득 채우는 치졸한 짓마저 서슴지 않고 있다.

셋째, 이에 더하여 주거지역, 학교 주변 및 군사시설 주변 집회에 대한 거주자 또는 관리자 요청에 따른 금지통고의 문제도 심각하다(제8조 5항). 생각해 보면 이들 공간은 공적 광장이나 권력기관과 직접적으로 관련되는 장소는 아니다. 그러나 여러 제약 속에서 그나마 집회의 효과를 높일 수 있는 곳을 찾았지만 그 장소가 주거지역이나 학교 또는 일정한 군사시설 인근에 있다면 집회를 할 수 있는지는 매우 불투명해진다. 이처럼 이 조항은 집회 금지 장소의 범위를 엄청나게 넓힘으로써 사실상 도심에서의 집회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효과를 낳는다.

마지막으로 넷째, 동시집회 문제가 있다(제8조 2항). 동시집회는 법률에 의하여 집회가 금지되고 있지 않은 장소에서, 같은 일시에, 둘 이상의 집회가 신고된 상황에서 발생하는 문제이다. 각종 규제를 피해서 어렵게 집회장소를 찾아냈는데, 목적과 내용이 다르거나 반대인 집회가 먼저 신고되는 바람에, 꼭 필요한 순간에 바로 그 장소에서 집회를 할 수 없게 된다. 현재 경찰은 동시집회에 대해, 무조건적인 선착순 결정에 의하여 후순위 집회를 금지시키고 있다. 이는 가능한 경우 모두 개최될 수 있도록 해야 하고, 이것이 불가능하면 상호 협의하도록 장려되어야 하며, 그래도 안 되면 임의 배정을 한다는 국제인권기준에 반할 뿐 아니라 후순위 집회에 대한 어떤 대안도 제시하지 않음으로써 사실상 후순위 집회를 차별하는 결과로 이어진다. 즉 후순위집회는 외형으로는 순위가 밀려서 집회를 못한 것이지만, 실질적으로는 그 집회의 목적이나 내용(메시지) 때문에 집회를 못하게 되는 것이고, 이는 비차별의 원칙에 반한다. 특정 장소에서의 집회를 막기 위하여 항의대상이 되는 기업이나 기관들이 해당 장소에서의 집회를 사전에 신고해 두는 예는 동시집회 규제의 또 다른 폐해이다. ‘반대시위의 권리가 다른 사람들이 시위할 권리를 금지하는 것으로 확대될 수는 없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런 금지는 합리적 근거조차 갖추지 못한 것이다. 게다가 경우에 따라서는 집회신고를 받는 경찰서에서 집회장소로 예정된 장소의 거주자나 시설 관리자에게 이를 미리 알려 보호요청을 유도하는 사태가 벌어질 수도 있다.

이처럼 집시법들에서 규정하고 있는 장소 규제들은 그 하나하나가 집회 금지라는 치명적 결과를 가져오기도 하지만, 더 심각한 문제는 이들 규제가 모두 결합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기본적 인권이라는 집회의 자유가 발붙일 곳이 없다. 집시법상 장소 규제들에는 ‘집회의 자유에 대한 무조건적 적대’가 깊이 배어 있다.

(2) 집회 시간 규제: 야간집회 금지

집시법은 일몰 후 일출 전의 집회를 원칙적으로 금지한다(제10조). 이 조항 중 ‘야간집회’ 부분에 대해 헌법재판소는 2009년에 헌법불합치결정을 선고했고 2014년에는 ‘야간시위’ 부분에 대해 한정위헌결정을 선고했다. 아직 후속입법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이지만, 대법원은 야간시위 중 24시 이전의 야간시위는 금지할 수 없지만 24시 이후의 야간시위는 금지된다는 입장을 취해 왔다.

헌법재판소나 대법원이 24시 이후의 야간시위를 금지해야 한다고 보는 근거는 ‘야간에는 집회가 폭력이나 다른 범죄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는 추정이다. 그러나 이런 추정을 뒷받침하는 어떤 객관적 증거도 없다. 실제 수개월동안 주말마다 야간집회가 계속되었던 2016-7년과 2024-5년의 기간동안 야간집회 또는 시위가 범죄로 이어졌다는 자료는 단 한건도 제시된 적이 없다.
게다가 야간에 개최되는 집회 시위를 전면적으로 금지하는 것은 적어도 일정 시간 동안은 합리적인 사유도 없이 집회의 자유를 박탈하는 것이므로 과잉금지의 원칙에 위반되며, 야간의 개시시점을 오후 10시가 아니라 24시 또는 더 늦은 시간으로 바꾼다고 해도 그 위헌성은 치유되지 않는다. 집회의 자유와 관련해서 가장 핵심적인 요청은 평화적 집회인 한 그 집회의 일시, 장소, 방법 및 내용을 자유롭게 결정할 수 있다는 것이며, 특정한 시간대의 집회를 금지하는 것 역시 집회의 일시에 대한 결정권을 박탈하고 있다는 점에서 집회의 자유의 본질적 내용을 침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특정 장소에서의 집회 금지는 거리를 기준으로 한 한정적 제한에 그치는 반면에 특정 시간대의 집회 금지는 집회 참여의 가능성 자체에 심각한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훨씬 더 중대한 제한이라고 볼 수도 있다. 윤석열 탄핵을 요구하며 진행되었던 남태령과 한남동에서의 밤샘 집회 및 시위를 떠올려 보면 야간이라는 이유로 특정 시간대의 집회와 시위를 원천적으로 금지하는 것이 얼마나 심각한 억압인지를 절감하게 된다.

(3) 집회의 방법을 이유로 한 금지: 절대적 금지집회

마지막으로 언급할 것은 이른바 ‘절대적 금지집회’를 규정한 것으로 거론되는 “집단적인 폭행, 협박, 손괴, 방화 등으로 공공의 안녕 질서에 직접적인 위협을 끼칠 것이 명백한 집회 또는 시위”이다(제5조 제1항 제2호). 이는 흔히 집회의 자유의 한계에 해당하는 것이라고 설명되지만, 그렇게 보기에는 위헌성이 너무 뚜렷하다.

이 규정에 대해서는 “집단적인 폭행・협박・손괴・방화 등”의 한정적인 요건이 부가되어 있으므로 이는 헌법의 보호대상이 되는 ‘평화적 집회’가 아니니 금지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하는 의문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어지는 구절은 “공공의 안녕 질서에 직접적인 위협을 끼칠 것이 명백한”이어서, 아직 발생하지 않은 사실을 전제로 하고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집단적인 폭행・협박・손괴・방화”의 가능성을 집회신고서의 기재사항으로부터 읽어낼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집회 주최자가 그런 사항을 신고서에 기재할 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조항은 신고 단계에서 적용되는 것이면서도 ‘어떤 집단이 폭력행위를 할 것’이라는 비합리적 사전 예상을 그 요소로 포함하게 된다. 신고서 기재사항 중 그런 추정을 가능하게 하는 요소는 집회를 주최하는 개인 또는 단체가 누구인가 하는 것뿐이므로, 결국 이 법조항을 근거로 금지통고를 할 수 있다는 것은 집회 주최자에 따라 차별적으로 법을 적용하겠다는 것이나 다름없어 위헌성을 면할 수 없다(민주노총이 주최하는 집회는 허용하지 않겠다던 지방경찰청장의 발언은 바로 이 위헌적 조항을 자의적으로 적용하겠다는 선언이었다).

3. 헌법 위의 집시법, 그 기원: 군사쿠데타

헌법은 집회의 자유를 선언하고, 허가제를 금지하는 한편 이 권리의 제한은 극히 예외적인 경우에 엄격한 한도 내에서만 가능할 뿐이고, 그런 경우에조차도 집회의 자유의 본질적 내용을 침해할 수 없다고 분명하게 밝힌다. 그러나 집시법은 이런 헌법 위에 있다. 사실상 허가제처럼 보이는 사전신고제도 헌법 위반이 아니고, 웬만한 집회의 자유 제한은 공공의 질서를 내세워 쉽게 정당화되며, 집회 금지조차도 본질적 내용 침해는 아니라는 해석이 집행권력과 사법권력 모두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소음 규제를 제외하고는 집시법상의 대부분 규제는 금지라는 극단적 형태로 이루어진다). 이처럼 평화적인 집회를 금지하고 억압하고 제한하는 법률이 바로 집시법이며, 그 기원은 60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집시법이 처음 시행된 것은 1963년이었다. 많은 현행 법률들과 제도가 그렇듯이 제정 집시법도 5.16 군사쿠데타 후 헌법이 폐기되고 국회가 해산된 상태에서 입법권을 독점했던 국가재건최고회의에 의하여 입법되었다. 박정희 등 쿠데타세력은 4.19 직후 제정된 ‘집회에 관한 법률’과 군사쿠데타 직후 만들어진 ‘집회에 관한 임시조치법’을 모두 폐지하고 집시법을 제정했는데, 그 기본틀은 쿠데타 후 60년 이상이 지난 지금까지도 거의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즉 제정 집시법은 사전신고와 금지통고, 야간집회의 금지, 주요 장소 주변 집회의 금지, 집회의 해산 등 현행 집시법에 규정된 거의 모든 내용을 담고 있었다. 적어도 집회 시위의 자유와 관련되는 한, 우리는 여전히 1960년대 초의 군사독재 체제 하에 있는 셈이다. 더 참담한 것은 쿠데타 세력이 깔아놓은 기본틀에다가 더 촘촘하고 더 세밀한 억압의 그물을 짜 넣은 것은 이른바 민주정부 진보정권 집권기에서였다(1963년 집시법보다 더 과도한 규제들은 대부분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 때 도입되거나 강화된 것들이다).

4. 집시법은 반민주악법의 전형이다.

집시법은 ‘헌법 위반이면서도 가장 실효적으로 적용되는 법률’이다. 헌법의 집회 관련 규정과 기본권 제한 및 한계에 관한 규정들에 명백히 반하는 요소들을 수없이 내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집시법은 그 위헌성에 걸맞는 판단을 받은 적이 단 한번도 없다. 그만큼 이 법률은 강력하다. 이에 버금갈 만한 위력과 지속력을 가진 유일한 법률은 국가보안법이다. 어떤 측면에서는 국가보안법보다 훨씬 더 강력한 법률이 집시법이다. 국가보안법의 규율 대상은 이른바 “반국가활동”에 국한되지만 집시법의 규율대상은 훨씬 더 넓기 때문이다. 그 결과 국가보안법은 이른바 민주정부 또는 진보정권의 집권기에는 그 적용이 소극적으로 되는 반면, 집시법은 정권의 성격과 무관하게 반체제는 물론 반정권 또는 반정부 세력에 대한 강력한 대응도구로 작동한다. 보수 진보 할 것 없이 모든 정권은 정권에 반대하는 세력들을 상대로 집시법을 무기화할 수 있고 실제로도 그래왔다. 그러면 집시법의 존재이유는 무엇일까? 이 법의 본질은 무엇인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집시법은 헌법의 보호대상인 평화적 집회를 직접적 규율대상으로 삼고 있는 법이고, 특히 그 중에서도 정치적 항의의 성격을 띠는 집회를 겨냥한 법이다.

2015년 11월 14일 경찰이 민중총궐기대회를 마치고 청와대로 행진하려는 참가자들에게 물대포를 쏘고 있다. [뉴시스]2015년 11월 14일 경찰이 민중총궐기대회를 마치고 청와대로 행진하려는 참가자들에게 물대포를 쏘고 있다. [뉴시스]

집시법상의 다양한 금지와 규제에 대해서 헌법재판소나 경찰 등 정부기관들은 ‘집회가 폭력집회로 변질될 우려가 있다’는 것을 규제 정당화 논리의 핵심요소로 삼고 있다. 물론 헌법이 보호하는 집회는 ‘평화적 집회’에 한정된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히 해 두어야 할 점은 헌법이 보호하는 집회가 평화적 집회인 것과 마찬가지로 집시법이 규제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집회 역시 평화적 집회라는 것이다. 즉 평화적 집회라 하더라도 주요 국가기관 주변에서는, 야간에는, 주요도시의 주요도로에서는 집회를 할 수 없다는 것이 집시법의 핵심이다.

이 점은 “이 법은 적법한 집회 및 시위를 최대한 보장하고 위법한 시위로부터 국민을 보호함으로써…”라고 한 집시법 제1조에서 명확하게 표현되고 있다. 이 규정에서 발견할 수 있는 놀라운, 그러나 종종 간과되고 있는 점은 헌법이 보호하는 ‘평화적’ 집회를 “적법한” 집회로 둔갑시켜 놓았다는 것이다. 따라서 국가기관 주변 100미터 이내에서, 야간에, 또는 주요도시의 주요도로에서 개최되는 집회는 ‘평화적’ 집회이긴 하지만 ‘적법하지는 않은’ 즉 ‘위법한’ 집회로 격하되어 버린다. 이를 통해 집시법은 헌법이 보호하는 집회의 자유를 극적으로 축소시킨다.
이 점을 고려한다면 집시법상의 규제들이 폭력집회로 변질될 것을 우려하여 제정된 것이어서 정당하다는 논리는 설 자리가 없게 된다. 이처럼 평화적 집회의 규제야말로 집시법의 목적이라는 점이 그 위헌성을 논증하는 가장 중요한 토대가 되어야 한다.

한편 헌법이 보호하는 집회의 핵심은 정치적 항의의 성격을 띠는 집회이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집시법은 정치적 항의의 성격을 띠는 집회를 직접적인 규제 대상으로 삼고 있다. “학문, 예술, 체육, 종교, 의식, 친목, 오락, 관혼상제 및 국경행사에 관한 집회”에 대해서는 집시법상 규제의 적용을 배제한 제15조가 이 점을 분명히 보여준다. 항의적 성격이 없는 집회는 규제대상에서 제외한다는 이 조항은 가장 보호받아야 할 집회, 즉 항의적 성격의 집회를, 아니 그런 집회만을 가장 강력한 규제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집시법이 근본적으로 반헌법적 인식을 토대로 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는 집시법의 입법목적이 집회의 보호나 다른 법익의 보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정부에 비판적인 항의의 목소리를 잠재우는 데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 전형은 집시법에 포함되어 있는 장소 규제들이다. 즉 집시법은 집회의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는 장소에서의 집회를 금지대상으로 삼음으로써, 정치적 항의의 목소리의 확산을 차단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음을 숨기지 않는다.
요컨대 집시법은 ‘정치적 항의의 성격을 갖고 있는 평화적 집회’를 금지하고 제한하기 위한 법률이다. 헌법이 보호하는 대상인 집회, 민주정치 실현에 불가결한 평화적 항의 집회를 금지하고 제한하기 위한 법률이니, 반민주악법의 전형이라 할 만하다.

5. 집시법의 토대인 사전신고제 자체가 위헌이다

집시법을 지탱하는 기본틀은 ‘사전신고―금지통고―처벌 및 해산’의 3각 구조이다(이하에서는 이런 3각 구조를 ‘사전신고제’라 함). 즉 집회를 하려면 사전에 경찰에 신고를 해야 하고, 신고된 집회에 대해서도 경찰은 금지를 통고할 수 있으며, 신고를 하지 않은 집회나 금지통고된 집회는 위법한 집회로서 해산과 처벌의 대상이 된다. 따라서 우리에게 집회의 자유란 ‘사전신고된 집회로서 관계당국이 금지하지 않은 것만 할 수 있는 자유’에 불과하다. 집회의 자유는 없다. 헌법이 보장한다고 한 집회의 자유를 없애 버리는 법률이니 그 위헌성은 자명하다.

(1) 사전신고제는 일종의 검열이다.

헌법재판소는 영화나 음반에 대한 사전심의제도가 헌법이 금지하는 사전검열에 해당하여 다른 심사를 할 필요도 없이 그 자체로 위헌이라고 선언한 바 있다. 그런데 집시법상 사전신고제는 사전심의제와 놀랍도록 동일한 구조를 갖고 있다.

헌법재판소에 따르면 어떤 표현에 대한 제한이 사전검열에 해당한다고 보기 위해서는 ① 허가를 받기 위한 표현물의 제출의무, ② 행정권이 주체가 된 사전심사절차, ③ 허가를 받지 아니한 의사표현의 금지 및 ④ 심사절차를 관철할 수 있는 강제수단 등의 요건을 갖추어야 한다. 그런데 집시법상의 사전신고제는 이와 같은 네 가지 요건을 모두 갖추고 있다. 첫째, 옥외집회에 대한 사전신고는 표현물의 제출의무에 해당한다. 둘째, 신고된 내용에 대해서는 행정권에 속하는 경찰관서장의 심사를 거쳐서 집회의 허용 여부가 결정된다. 셋째, 금지통고된 집회와 미신고집회는 금지되며 바로 경찰관서장에 의한 자진해산요청 또는 해산명령의 대상이 된다. 넷째, 금지통고받은 집회나 미신고집회 주최에 대한 처벌이란 강제수단을 통해 사전신고를 관철한다.

이처럼 집시법상의 사전신고제는 언론출판에 대한 사전검열제와 동일한 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헌재의 표현에 따르면 이는 “법률로써도 불가능한 것으로서 절대적으로 금지”된다고 이해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헌법재판소가 이 점에 관하여 언급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이처럼 헌법재판소가 사전신고제의 검열적 성격을 외면한 것은 아마도 집시법이 국가권력 유지의 가장 중요한 수단 중 하나이고 그 핵심이 사전신고제라는 점을 고려했기 때문일 것이다. 마치 아무리 탄탄한 위헌논증 앞에서도 국가안보를 내세운 정권 유지 필요성때문에 국가보안법에 대한 위헌결정을 선고할 수 없었던 것처럼.

(2) 사전신고제는 헌법상 금지된 허가제다

집시법은 집회를 원칙적으로 금지하고, 예외적으로만 허용한다. 이는 허가제의 전형적 속성이며, 이를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는 요소가 금지통고이다.

집시법이 예정한 “적법한” 집회가 아닌 모든 경우에는 경찰이 집회에 대해 금지통고를 할 수 있다. 즉 앞서 본 장소, 시간 및 방법상 규제가 적용되는 경우라면 어느 경우에나 금지통고를 할 수 있다. 허가란 일반적으로 금지된 행위를 특정인에게 허용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러한 집시법상의 금지통고제도로 인하여 금지통고를 받지 않는 집회만 허용되는 결과를 초래한다. 이는 곧 헌법이 금지하는 허가제에 해당한다. 그리고 이는 기본권은 최대한 보장해야 하고, 예외적으로만 제한할 수 있다는 헌법의 대원칙에 명백히 반하는 것이다. 헌법재판소는 집회의 사전신고의무를 규정한 집시법에 대하여 헌법 위반이 아니라고 하였지만, 사전신고의무가 경찰서장의 금지통고 권한과 결합되는 순간 바로 허가제로 전환된다. 따라서 적어도 금지통고를 명문화하고 있는 현행 집시법의 구조로 보면 사전신고제는 헌법 위반이라고 했어야 한다.

나아가 집시법은 금지통고 여부에 관하여 경찰서장에게 전적인 재량권을 부여함으로써 집회의 성격이나 내용, 주체에 따라서 금지통고 여부를 결정하는 자의적・차별적 법집행의 가능성을 폭넓게 열어두고 있다. 집회를 누가 하느냐, 어떤 내용의 집회냐에 따라서 집회가 허용되기도 하고 불허되기도 하는 사태는 집시법이 허가제로 운영됨을 웅변하는 증거이다. 실제로 14개 정당 및 사회단체들이 일종의 테스트로 2009년 5월에 서울시내 주요 장소 100곳에서 집회를 하겠다고 신고서를 제출했으나 단 1건을 제외하고는 모두 금지통고되었다. 이로써 “법은 일정한 신고절차만 밟으면 일반적・원칙적으로 옥회집회 및 시위를 할 수 있도록 보장하고 있”다고 하면서 신고제가 헌법상 금지되는 사전허가제가 아니라고 했던 헌법재판소의 논리는 무너져버렸다.
집회에 대한 허가제는 언론・출판에 대한 사전검열과 마찬가지로 절대적으로 금지된다. 요컨대 허가임에 분명한 사전신고제를 기반으로 하는 집시법은 그 자체가 위헌이다.

6. 집시법 폐지인가 개정인가?

집회와 시위라는 기본권의 행사에 필수적으로 따르는 불이익은 감수해야 한다는 것이 헌법상 집회의 자유를 기본권으로 보호하는 의미이다. 그런데 현재 한국사회에서는, 시민들의 불편, 아니 정부 스스로의 불편함을 이유로 집회가 금지되고 있고, 이는 적어도 집권세력의 입장에서는 집회의 자유를 기본권으로 보고 있지 않음(또는 보고 싶지 않음)을 말해준다. 교통소통을 이유로 한 도로에서의 집회 금지, 공공기관 등 특정 장소 주변의 집회 금지와 특정 시간대의 집회 금지 등은 모두 집회의 자유의 의의와 효력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다.

정치 사회적으로 본다면 집시법의 이러한 태도는 철저한 불관용에 입각해 있는 것이다. 이러한 불관용은 집회의 자유를 포함하는 넓은 의미의 표현의 자유와, 더 나아가 다원주의에 기반을 두고 있는 민주주의 원리와 양립할 수 없다. 이와 같은 상황은 독재체제나 비상계엄 하에서나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집회의 자유는 총체적 위기에 직면해 있으며, 대한민국은 적어도 집회 시위에 관한 한 계엄선포 없는 계엄 상태하에 있다. 차이가 있다면 군대가 아닌 경찰이 동원된다는 점뿐이다. 이처럼 어느 모로 보나 평화적 집회의 금지・제한에 봉사할 뿐 집회의 자유 실현은 철저히 가로막고 있는 집시법이 유지되어야 할 이유는 없다. 집시법은 오로지 폐지됨으로써만 집회의 자유와 민주주의에 기여할 수 있다.
그러나 현실정치적으로 집시법이 폐지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 집권 가능성이 있는 어떤 정치세력도 그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 집시법의 개정을 통해서 집회의 자유를 조금이라도 더 현실화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최소한 제시는 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집시법 개정의 방향을 생각해 보자.

헌법재판소의 위헌결정에 따라 몇 차례 이루어진 집시법 개정이 큰 효과를 거두지 못한 이유를 살펴보는 것은 그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집시법의 특정 조항에 대하여 헌법재판소의 위헌결정(헌법불합치 및 한정위헌 결정 포함)이 있었던 것은 모두 다섯 차례였지만, 실제 법 개정으로 이어진 것은 모두 공공기관 인근 집회를 금지하는 제11조에 관한 것이었다(2004년과 2020년).

그런데 제11조의 두 차례 개정에서 국회가 취한 방식은 기존의 조항은 그대로 둔 채 몇 가지 예외를 추가하는 식의 미봉이었다. 그러나 개정 집시법 제11조 각호의 조항들은 이들 기관이나 장소 인근 집회의 금지를 위헌 시비로부터 벗어나게 할 수 없었다. 개정법률이 여전히, 예외사유에 해당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특정 장소 인근의 모든 집회를 금지하는 방식을 고집했기 때문이다. 즉 국회가 집시법 개정을 통하여 ‘집회 금지를 뒷받침할 일반적 추정이 부인될 수 있는 사례’들을 추가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예외에 속하지 않으면서 보호법익에 대한 위협을 제기하지도 않는 집회는 여전히 존재하고 따라서 금지될 수밖에 없다.
단 하나의 위헌성만 인정해도 위헌결정 선고로 임무를 다할 수 있는 헌법재판소와는 달리 입법(형성)기관인 국회는 ‘기본권의 최대한 보호’라는 원칙에 입각해서 판단하고 결정을 해야 한다. 제11조 개정이 있던 2004년과 2020년에 국회는 이런 판단과 결정을 하지 않았지만, 이번에는 달라야 한다. 국회는 어떤 입법을 해야 할까?

제11조와 관련하여 집회금지의 예외사유를 추가했던 개정입법들은 성공을 거두었다고 평가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개정입법은 그런 예외사유가 없는 경우와 별반 다르지 않은 결과, 즉 위헌적이고 자의적인 ‘집회 금지’라는 결과를 피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위헌성을 피하고자 입법된 예외사유들이 위헌성 치유에 전혀 도움이 되지 못했던 것이다. 그 이유는, 개정 전에도 개정 후에도 집시법은 어떤 행위가 아니라 집회 자체를 금지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즉 개정 집시법은 금지하고 규제해야 할 ‘행위’가 아니라 보호하고 장려해야 할 ‘집회’를 겨냥하는 오류를 범했다.

여기서 우리가 의지해야 할 것은 ‘평화적 집회의 자유의 최대한 보장’이라는 헌법과 국제인권법상 원칙이다. 즉 공공기관 인근에서 개최되는 집회도 평화적 집회라면 그것을 보호하는 것은 국가의 당연한 의무이고, 집회가 평화성을 포기하거나 상실한 경우가 아니면 그에 대한 금지나 규제는 정당화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제11조를 비롯한 집회 규제조항들에 대한 국회의 입법방향은 해당 집회의 금지라는 방식이 아니라 규제의 대상이 되는 구체적 ‘행위’를 엄밀하게 명시하는 방식이 되어야 한다. 예컨대 해당 기관이나 장소에서 직무를 수행하는 사람들과 해당 기관의 업무와 관련하여 그 장소를 출입해야 하는 사람들과 차량 등의 자유로운 출입을 방해하는 행위, 이들에 대한 위협 또는 폭력, 기타 시설물의 손괴 등 행위가 이에 해당할 것이다.

이런 점은 집시법상 장소 규제 조항에만 국한되지 않으며, 시간 규제나 방법 규제 등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즉 야간이든 주거지역이나 학교 주변 또는 군사시설 주변 집회든 집회에 대한 모든 규제는 집회 도중 발생할 수도 있는 구체적인 불법적 ‘행위’를 대상으로 삼아야 하지 집회 자체를 겨냥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요컨대 금지되어야 할 것은 폭력적 행위이지, 평화적 집회가 아니다.

2025년 4월 3일 밤 윤석열 파면 선고 하루 전 헌법재판소 근처 안국동.

7. 집회의 자유와 시민

2016-2017 박근혜 퇴진을 요구하는 촛불집회를 경험한 이후, 집회를 생각하면서 경찰의 적나라한 폭력진압을 떠올리기는 어렵다. 특히 과거와 같은 노골적인 경찰폭력을 시민들은 더 이상 용인하지 않는다. 오히려 현재 집회를 생각하면 맞불집회, 반대집회와 혐오표현이 먼저 떠오른다. 그리고 집회 금지 등 규제와 관련해서 보자면, ‘집회신고 → 금지통고 → 집행정지 가처분신청 → 가처분 인용 → 집회 개최’로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 즉 법적 절차를 통해 모든 것을 해결하고자 하는 과정이 연상된다.

2016년 박근혜 퇴진을 요구하면서 서울에서 매주말 개최되었던 촛불집회의 청와대 앞 행진에 대해서 경찰은 매번 금지통고를 발했으나, 법원은 집회 주최측이 제기한 집행정지 가처분 신청을 계속 인용하여 청와대 인근 900미터(11.12)→400미터(11.19)→200미터(11.26)→100미터(12.3)까지 순차적으로 집회와 행진을 허용한 바 있다. 법률을 동원하고 법원을 동원해서 시민들이 청와대에 가장 가까이 접근했던 거리가 100미터까지였다. 그것은 정확히 집시법이 규정한 바였다. 그런데 참으로 기괴하지 않은가? 집시법은 분명히 대통령 관저 경계지점으로부터 100미터 이내의 집회를 금지하고 있었는데, 정확히 그 지점까지 가는데 네 차례의 재판을 거쳐 1달 이상이 걸렸으니 말이다. 법원은 도대체 무슨 근거로 900미터니 200미터니 하는 접근 한도를 정한 것일까?

당시 시민들은 법률상 금지되어 있지도 않은 청와대 인근 행진에 대한 경찰의 금지 통고를 법원이 무력화시켰으니 당연히 이를 환영했지만, 조금만 생각해 보면 ‘법률상 금지되지 않는 공공기관 주변 100미터 바깥의 집회에 대하여 경찰이 금지통고를 한 것은 위법하다’고 선언하는 것을 넘어서서 900미터니 400미터니 하면서 집회 가능 범위를 법원이 정한 것은 법의 해석 적용이라는 법원의 권한을 명백히 넘어선 일종의 입법행위가 아니었던가? 게다가 100미터가 선언되기 전의 접근 한도들은 법률에도 반하는 법원의 월권이었다. 이런 과정은 경찰의 불법을 법원이 다시 불법적인 방법으로 바로잡는 매우 불행한 사태였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런 과정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고, 차라리 일상이 되어버린 듯하다. 이런 점에 비춰보면, ‘법률은 노동자들에 대하여 부르주아지가 마련한 채찍이란 것을 잘 알고 있는 노동자들은,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결코 법률에 호소하지 않는다’던 엥겔스의 언급은 얼마나 적확한가?

마지막으로, 이런 점들을 돌아보면서 집시법의 문제를 넘어설 수 있는 집회와 시위의 방향을 생각해 본다. 지금 현재 전국의 세 곳에서 4명의 노동자들이 고공에서 농성을 벌이고 있다. 한국옵티칼하이테크 구미 공장 옥상의 박정혜와 소현숙은 2025년 4월 18일 현재 467일째 고공농성을 이어가고 있고, 3년 넘게 농성 투쟁을 하다 명동역 지하차도 교통시설물에 오른 서비스연맹 관광레저산업노조 세종호텔지부장 고진수의 고공농성이 65일째 계속되고 있으며, 김형수 금속노조 거제통영고성조선하청지회장은 하청노동자 임금차별 개선 약속을 어기는 한화오션 본사 앞 교통감시카메라 철탑 위에서 35일째 농성 중이다. 고공농성은 사람으로서 감내하기 힘든 고통을 수반하는 것임에도 이들 노동자가 이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비정규직 차별을 비롯한 열악한 노동조건과 불법적 노조 탄압에 항의할 수 있는 최후의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윤석열의 파면을 요구하던 시민들은 주말 행진의 경로에 이들 고공농성장을 포함시킴으로써 이들 노동자에 대한 관심과 응원 등 감동적인 연대를 보여주었다. 윤석열의 체포와 파면을 요구하며 서울로 진입하던 농민들의 트랙터행렬이 경찰에 의해 남태령에서 고립되었을 때도 차디찬 겨울밤을 노상에서 지새면서 이들과 함께 기어코 용산 관저까지의 행진을 가능케했던 시민들의 연대는 또 다른 집회 시위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사회운동은 “시민들이 자신들의 숫자, 헌신, 단결, 가치를 반복해서 공개적으로 드러냄”으로써 권력자에게 던지는 도전으로 구성된다는 진단이 이 땅에서 현실화한 것이다. 더구나 이런 공개적 드러냄은 원래 집회의 참가자들 내에서만 벌어진 것이 아니라 광화문 집회 참가자들이 정해진 행진을 마친 후 늦은 밤에 멀리 남태령까지 가서 연대의 손길을 건넨 것이라는 점에서 매우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새로운 연대의 모습을 보여준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이렇게 새로운 모습의 연대는 윤석열의 비상계엄 선포라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거대한 불법과 그에 대한 분노가 있었기에 가능했으리라. 상상도 하지 못했던 불법이 헌정체제의 취약성에 대한 위기의식과 광범위한 연대를 통해서만 민주주의를 회복할 수 있다는 절박함을 불러일으켰기에 종전에는 볼 수 없었던 그런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평화적 연대가 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추동 요인이 어디에 있었든 간에 이런 과정에 직간접적으로 함께 했던 시민들이, 집시법이 드리운 그늘과 억압을 넘어서는 새로운 집회 및 시위의 비전을 만들어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2011년 5월 스페인의 인디그나도스(Indignados: 분노한 사람들) 운동, 2011년 가을 미국의 ‘월가를 점령하라’ 운동 등 세계 각국에서 일어난 매우 특별했던 사회운동들이 그랬듯이, 생동감있고 현실적인 사회운동은 결국 그 운동에 실제 참여하는 시민들만이 만들 수 있는 것이고 또 그럴 수밖에 없다. 한 사람의 연구자로서 나는 그런 사회운동에 어떻게 기여해야 할까? 새로운 고민, 새로운 도전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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